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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이 자꾸 늘어-49화 (49/164)

< 9. 금빛 -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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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무명 중의사의 침술] : 퀘스트 달성!

- 수고했다. 나쁘진 않았어, 비실이.

- 자색 탤런트 1,000p 획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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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래.

누구보고 비실이라는 거야.

나는 알림창과 벙찐 아저씨를 옆으로 치워두고 샤오메이에게 돌아갔다. 난 그녀의 목을 받쳐 숨길을 틔워주었다.

숨길을 탄 기침은 힘이 넘쳤다. 태아가 임산부의 산고를 괘념치 않듯, 기침 역시 샤오메이의 기관지 사정을 그다지 고려해주지 않았다. 부딪히고, 날뛰고, 쥐어짜며 젖은 숨이 토해져 나왔다.

괜찮다.

아프고 헐떡이는 것도 죽어서는 못하는 일이다. 그녀는 살아난 것이었다.

어쨌든 그 뒤 한참동안, 삼도천 유람선 코스를 타다가 돌아온 대가를 뒤늦게 치르듯 그녀는 이승에 재적응하는 기간을 가졌다. 그 즈음 그녀가 나를 보았다.

“···샤오진?”

“······.”

샤오메이의 눈은 온전하지 못해 어딘가 반쯤 걸쳐져 있는 듯했다.

그녀가 힘없이 손을 뻗었다. 내가 그것을 잡아주고서야 나머지 절반의 실감이 전해졌음인가. 동공의 상이 그제야 또렷해졌다.

“···아. 죄송해요. 한열 씨였네요.”

“예.”

“저, 엄청 민폐네요. 어제부터 계속.”

“그러네요. 이런 민폐는 살다살다 저도 처음입니다.”

“후후. 죄송해요.”

“죄송하면 빨리 건강해지세요. 이게 뭡니까? 대체. 완전 식겁했네.”

“한열 씨.”

“네?”

“민폐 끼치는 김에 부탁 하나만 더 해도 될까요?”

“저 지금 엄청 힘든데요.”

“그래도요.”

“이 여자 완전 염치없네.”

“원래 재벌들은 다 그런 거라던데요. 한국에는 그런 말도 있다면서요? 갑질?”

다 죽어가던 사람이 조잘조잘 잘도 떠드네.

난 어이가 없어서 그냥 웃고 말았다.

“···일단 들어보고요.”

“어제 부탁한 거랑 같은 내용인데요. 표현이 애매한 거 같아서 정정할게요.”

“······.”

그리고 그녀는 대체 어떤 사고과정을 거쳐야 지금 상황에 그런 주제를 이끌어낼 수 있는지 짐작도 가지 않는 말을, 내게 툭 던지는 것이었다.

“음악, 포기하지 말아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숨이 고른 것을 확인하고서야 안심한 나는 침을 다 수거하고 그녀의 몸에 담요를 덮어주었다. 응급요원이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몇 분 뒤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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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밖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오전에 비를 다 쏟아버린 탓일까. 하늘이 제 안의 구름을 싹 지우고 미세먼지도 추방시켜서 눈앞은 말끔히 높았다. 비들은 세상을 긁어내리며 도시의 가장 낮은 곳까지 흘러들었을 것이었다.

눈앞의 창창함을 보며, 나는 더러운 것들을 품어내고 사라진 빗물을 생각했다.

사라져서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 보이지 않지만 거기에 눙쳐 있는 것에 대해서, 우릴 높게 만드는 가장 낮은 것에 대해서,

나는···.

음.

문득 든 생각인데.

입장을 바꿔보면, 정작 하늘은 높고 낮음으로 자신을 재지 않을 것 같다. 그냥 얕고 깊음만 있지 않을까. 어쩌면 우리는 깊은 하늘 아래에 철없이 유영하는 심천어深天漁일지도 모른다.

얕은 곳에서만 놀던 하늘이 언젠가 좀 더 깊게 내려와 우리를 발견하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지.

“으악 못 생겼어.”

지나가던 아이가 강민재에게 손가락질하며 외쳤다.

아이 엄마가 “그럼 못써!”하면서 아이와 함께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내 앞을 후다닥 지나치면서 “남 얘기는 뒤에서나 하는 거야!”라고 주의를 주는 것이다. 아주머니, 뭔가 지적의 핀트가 이상한 것 같습니다만···.

그리고 강민재가 겸연쩍게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그가 따뜻한 캔커피를 건네며 내 옆에 앉았다.

“···감사합니다. 잘 마실 게요.”

“그래, 조금 선선하지?”

“그러네요. 이제 진짜 가을인가.”

“이야. 아무 것도 안 한 거 같은데 시간 잘도 간다. 이러다 겨울 되고, 또 봄 되고, 내년에도 난···.”

강민재가 캔커피 뚜껑을 엄지손가락으로 툭툭 튕겼다.

“···난 네가 부럽다. 한열아.”

“예?”

“하하. 좀 이상하지? 다 커서 학생한테 이런 말이나 하고. 하지만 진심이야. 넌 정말··· 대단해. 아까도 정말 대단했어. 난 실수만 하는데 너는···.”

“···그런가요.”

열이 빠진 머리에 밤공기까지 들이닥쳤다. 내 이성은 더없이 차갑게 그의 찬사를 받아들였다.

예전에는 강부장에게 저런 소리 한 번 듣는 게 지상과제였는데. 그렇게나 날 인정하게 만들고 싶었는데.

막상 유능해지고 보니, 뭐랄까, 인생 단위로 현타가 온 것만 같았다. 그냥 그렇구나,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래, 그에 비하면 나는 정말··· 무능하고. 한없이 쓸모없고. 이렇게 살아서 미래는 있나 싶고··· 그렇다. 정말. 잘 하려고 하는데··· 그게, 그게 잘 안 되네.”

두서도 없고 떠듬떠듬 널뛰는 말이었지만 어조 자체는 담담했다.

내게 말한다기보다 독백에 가까웠고, 따라서 나도 연극의 배경처럼 우두커니 그의 말을 들었다.

“부양해야 되는 가족만 셋인데···. 내가 아니면 우리 동생들 대학도 못 보내니까. 그러니까 내가 바뀌어야겠지. 독하게 마음먹고, 아니 그런 마음까지도 갈아서 연료로 태워버려야겠지. 나 같은 놈이 앞으로 나아가려면 그렇게라도 해야···.”

마지막 말은 캔커피의 마지막 한 모금과 함께 삼켜졌다.

비워진 캔이 그의 손아귀 안에서 우그러졌다.

“하하. 내가 너한테 무슨 얘기를 하나 싶네. 음. 그냥, 수고했고, 고마웠다고, 그리고 도움 못 돼서 미안하다고···, 뭐 그런 걸 말하고 싶었어. 또 볼 일이 있을까 싶어서.”

“······.”

“그럼 갈게. 잘 있어. 뭐, 너는 뭘 해도 잘 될 아이니까 내 격려 같은 건 필요 없겠지만···.”

“이 대리는 별로 좋은 상사는 아닙니다.”

“···응?”

뭐가 내 안에서 울컥 한 것일까. 나는 밑에서 올라오는 걸 하나 거르지 않고 말을 뱉어내었다.

“닮지 마세요, 그런 사람. 롤모델로는 더더욱 삼지 마시구요. 부하의 무능은 곧 상사의 무능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문제가 생기면 밑으로 떠넘기죠. 밑에서 문제가 생기면 잘라내기 바쁩니다. 자신을 돌아보지 않아 뻔뻔하고, 남에게만 무거운 잣대를 들이대니 불합리합니다. 뻔뻔하고 불합리한 사람이, 그 쥐꼬리만한 유능도 유능이랍시고 떨뜨리는 게···.”

멍울 진 결석이 내 말에 섞여 툭툭 토해졌다.

어디 그렇게 많은 것들이 숨어있나 싶을 정도로 쉼 없이 쏟아졌다.

“저한테는 그다지 아름다워 보이지 않더군요.”

“···그래?”

“예. 적어도 저한테는요.”

“그래. 그렇구나.”

난 강 부장이 지긋지긋하게 싫었다.

무능한 강민재도 썩 좋진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후자의 강민재는 자신을 알았고, 소외된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 줄 알고, 모두가 당황해서 손 놓고 있을 때 가장 먼저 환자를 보듬는 용기와 결단이 있었다.

무능했지만, 그래서 아무 쓸모는 없었지만,

적어도 나는 그게 죄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고마··· 음? 어어. 이 대리 또 전화 왔네. 여, 여보세요? 예! 예 금방 가겠습니다! 아, 아뇨. 그냥 잠깐···.”

그렇게 강민재는 어둠에 섞여 사라졌다.

나는 조금은 많이 개성적인 그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많이 봐두었다. 이렇게 보니 그도 썩 나쁘지만은 않다.

그가 앞으로 어떤 질곡을 거쳐 어떻게 변하게 될지 나는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그래도, 지금의 모습으로 그를 기억하고 싶었다.

그렇게 창백한 밤 풍경에 혼자 남겨지기 무섭게,

또 누군가가 어둠속에서 다가왔다.

오늘은 누가 계속 오는 날인가.

“아까는, 미안했네.”

젠린의 본부장, 그러니까 아까 내 멱살을 잡던 그 노인이 말을 걸어왔다. 아마도 이름이···.

“샤오첸···이셨나요?”

“그래, 자네는 이한열 군이지?”

“제 이름을 아시는군요.”

“그럼 알지. 우리 아가씨를 꼬여서 허파에 펌프질을 해댄 놈을 내가 모를 리 있겠나.”

“제가 펌프질 솜씨는 또 기가 막히죠.”

“흠. 너스레도 잘 떨고. 요즘 젊은이라 그런가.”

그도 커피를 건네려 했지만, 내 손에 이미 캔이 하나 쥐여 있어서 상황이 애매했다.

난 조금 남은 것을 비워버리고 캔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아까 심심해서 찍어둔 [투석]은 돌이 아닌 것도 정확하게 던져냈다. 덜그렁, 하고 캔이 통 안에 낙착됐다.

그가 건넨 커피를 받으며 말했다.

“오늘 먹고 죽으려고요. 불금이니까.”

“···한국인은 뭔가 이상해. 뭘 해도 극단적이란 말이지.”

“중국인만 하겠습니까.”

“어쨌든···. 우선은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하겠지.”

그러면서 그는 허리를 숙였다.

체면치레로 까딱 숙였다 편 게 아니라, 제대로 각 잡고 반듯이 몸을 굽히는 것이었다. 무릎만 꿇었으면 그냥 도게자다.

도리어 송구해져서 나는 애꿎은 커피만 들이켜 댔다.

“아가씨가 잘못 됐다면 나도 책임을 피할 수 없었겠지. 자네는 내 생명도 살린 걸세. 그리고 젠린의 미래도.”

“···너무 거창한데요.”

“거창하지 않네. 실제로 그런 일을 해주었어. 아까까지만 해도 자네에 대한 내 감정은 고마움 반 괘씸함 반이었네만, 지금은 그런 건 무의미하지. 자네는 은인일세. 그리고 우린 은원을 분명히 하는 중화인이지.”

그가 품에서 뭔가를 꺼내 내게 건넸다.

기시감이 들었다. 빳빳하고 견고한 금속성의 명함을 받는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이건.”

“내 명함일세. 이래봬도 젠린에서는 물론이고 본토에서도 꽤 입김이 있는 사람이라서 말이지.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게. 내 은인의 예로 보답하도록 하지.”

“그럼 사양 않고 받겠습니다.”

“흠. 한국에선 두 번은 사양하는 게 예의 아니었었나?”

“예의 같은 거 따질 만큼 사정이 좋지 못해서 말이죠.”

“아니, 탓하는 건 아니야. 주는 걸 가볍게 받는 것도 그 사람의 그릇이라고 생각하거든. 담대한 사람만이 호의를 호의로 받아들이지. 근데 여기 사람들은 뭘 자꾸 빼. 호연지기浩然之氣가 없어.”

“뭐, 그런 거 보다 싸가지를 먼저 생각하는 게 우리 종특이니까요.”

“그런가. 문화의 차이인가.”

“어쨌든, 이건 감사히 받겠습니다. 호연지기로다가.”

“음.”

샤오첸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뒤에 눈짓을 보내며 손을 까닥였다.

그러자 뒤에 대기하고 있던 경호원이 뭔가 큼직한 것을 들고 다가왔다. 기다랗고 각진 케이스.

“아가씨께서 자네에게 주라고 준비해놓은 거였네. 원래는 직접 드릴 생각이었던 것 같네만···. 이젠 그럴 수 없겠지.”

“그러고 보니 메이는 지금···?”

“지금은 상태가 안정되었다고 하네. 나도 방금까지 병원에 있다 오는 길이야. 내일까지 차도를 보고, 괜찮으면 바로 본토로 보낼 생각이네. 이쪽 의료진을 믿을 수 없어서 말이지.”

“···그렇군요. 인사도 제대로 못 했는데.”

“인연이 또 있으리라고 장담은 못하겠군. 하지만 사람 일이란 게 모를 일이니.”

경호원이 내게 케이스를 건넸다. 팔을 활짝 펴야 겨우 양끝이 닿을 만큼 긴 물건이었다.

이 안에 뭐가 있는지는 케이스 모양만 보고도 알 수 있었다.

“······.”

“그럼 인연이 있으면 또 보도록 하지.”

“저기, 잠깐만요. 저도 드릴 것이.”

“···음?”

난 가지고 있던 알루미늄 침통을 그에게 건넸다. 침통을 전달받은 그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그렇군. 작은 아가씨의 침통을···.”

“중요한 부적이니까, 그녀에게 꼭 돌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좋아. 잘 받아들었네.”

그가 침통을 품에 잘 여미더니 날 다시 직시했다. 저런 뜨거운 눈빛에 내성이 없던 나는 잽싸게 시선을 피했다.

“고맙네.”

말은 짧고 담백했다.

그러나 그것이 거창하고 설명도 구구절절했던 앞선 감사인사보다 어쩐지 더 진하게 들렸다.

샤오첸마저 떠나고 난 뒤, 나는 그녀가 남기고 간 케이스를 열었다.

아마도 낙원상가에서 나 몰래 구입했을, 펜더 스트라토캐스터 일렉기타가 하드케이스 안에 다소곳이 누워 있었다.

보증서를 보니 멕시코제도 일제도 아니고 미국 본토에서 만들어진 아메리칸 스탠다드였다.

재벌 입장에선 ‘그럭저럭 괜찮은 악기’였겠지. 부담 없이 받으라는 의미에서 선택한 선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내게는 지나치게 훌륭하고,

치명적일 정도로 과분한 물건이었다.

선버스트Sunburst 도장면을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매끈하고 차가운 기타 바디는 샤오메이의 밀납 같은 살갗을 닮아 있었다.

나는 그것을 꺼내서 잠깐 쥐었다가,

단 한 번의 스트로크도 긁지 못한 채 다시 집어넣었다.

하늘은 트여서 별과 달을 맑게 받아내었지만, 거긴 내게는 좀 먼 듯 했다.

< 9. 금빛 - 10 > 끝

ⓒ 달의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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