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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이 자꾸 늘어-50화 (50/164)

< 10. 냉정과 열정 사이 - 1 >

10. 냉정과 열정 사이.

얼마 전부터 도서관 사서가 나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냥 쳐다보기만 했다.

어떤 제재도 없던 건 내 행위가 아주 온당했기 때문이다. 도서관에서 책을 규정에 맞게 빌렸다. 그뿐이었다. 문제가 없으니 문제삼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의심의 시선은 명징했고, 지나치게 명징해서 내게 없는 죄책감도 불러일으킬 지경이었다.

결국 난 스스로를 돌이켜 본 끝에 그녀의 의심을 이해했다. 상식적으로 볼 때 내 행동은 괴이쩍은 면이 없잖아 있었다. 왜냐면 상식이란 범인凡人을 이해시키는 논리이므로.

딱 다섯 권이었다.

왜 하필 다섯 권이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무게가 딱 적당했나? 가방에 넣었을 때 들어가는 한계치였나? 어쨌든 첫날 우연히 집힌 게 다섯 권이었고, 그날부터 내가 도서관을 드나들 때는 다섯 권을 손에 들고 있는 게 규칙이 됐다.

그렇게 '하루에 한 번씩' 도서관을 들렀다.

사흘 째부터 사서는 내 지적수준을 의심하기보다는 내 정신상태를 의심했다.

그러니까 내가 하루에 다섯 권씩 읽었다고는 애초에 상정조차 않고 질 나쁜 장난을 좀 끈질기게 하고 있다고만 여겼다.

그러나 진실을 안다면 그녀는 이제 본인의 정신상태를 의심하겠지.

그녀는 내가 십 분 동안 책을 고른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고르는 건 일 분이면 됐고 나머지 구 분은 서서 ‘한 권을 다 읽는데’ 할애한 시간이었다.

그러니까 요새 나는 하루에 여섯 권씩은 읽어재끼고 있었다.

그리고 책을 반납할 때마다 사서가 엄격한 눈으로 안에 낙서는 안 했는지 삽화를 찢지는 않았는지 검사하는 걸 조금은 즐기게 되었다.

여섯 권은 분야를 나눠 정치, 사회, 문화, 경제, 문학 두 편으로 정해두었다.

그리고 서서 읽는 한 권은 그날 고른 것 중에 가장 무거운 책. 나머지 다섯 권은 쉬는 시간이나 자기 직전에 후딱 읽어서 치웠다.

거짓말처럼 들리겠지만, 나도 말하면서 그렇게 느껴지지만, 사실인 걸 어쩌겠나. 세상에는 이런 부조리한 재능의 소유자도 있는 법이었다.

“···음. 오늘은 이건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 오늘의 책이었다.

사실 이 책은 전생에서도 도전한 바 있었다.

그리고 처참히 패퇴 당했었지.

내용도 지루하지만 더 문제는 게슈탈트 붕괴를 일으키는 글자들이었다.

‘표도르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와 ‘드미트리 표도로비치 카라마조프’와 ‘이반 표도로비치 카라마조프’끼리 얘기하는 걸 보고 있자면 대략 정신이 혼미해지며 나중엔 ‘포도버섯조까’같은 이상한 문구만이 뇌리에 남는다.

러시아 사람들은 지들끼리 얘기하면서 헷갈리지도 않는 걸까?

걔들도 그냥 눈치로 때려 맞추는 거 아냐?

보는 내내 글자에 얻어맞는 기분이었기에 반도 못 넘기고 집어 던진 기억이 있었다. 이번엔 다를까?

다르겠지 당연히.

나는 책장을 넘겨 첫줄을 망막에 접수시켰다.

<알렉세이 표도로비치 카라마조프는 우리 군의 지주 표도르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의 셋째 아들이었는데···>

문득 든 생각, ‘읽는다’는 건 대체 뭘까.

[언어능력]을 얻기 전의 내게 읽는다는 건 단어를 보고, 단어를 조합한 문장을 해독하고, 나열된 문장들의 총합으로서 글을 이해하는 단계적 과정이었다.

근데 이제는 뭐랄까, 비유하자면 서핑에 가까운 느낌이다.

책을 펴면 망망대해가 펼쳐졌다. 낱말이란 단지 한 방울의 바닷물이었으며, 파도를 타는데 있어선 극히 사소한 배경에 불과했다. 물결의 앙탈과 바람의 새침을 받아가며 흐름을 읽다보면 어느새 바다는 발 아래 있었다.

그렇게 한바탕 노닐다보면 파도가 잠잠해지고 내 손은 시나브로 마지막 장을 넘기고 있는 것이었다.

“···재밌다.”

실제로 그랬다.

전개가 흥미롭다는 말과는 좀 다르다. 좋은 글이기에 생기는 어떤 ‘읽는 맛’ 같은 게 있었다. 씹을수록 육즙이 터지고 은은함이 길게 퍼지는 글들.

‘또 읽고 싶네.’

말하자면 기가 막힌 서핑 스폿 같은 것이다.

예전에는 책을 ‘정복한다’고 생각하며 도전했다. 그 방법론이란 글자를 씹어먹을 듯이 읽고 또 읽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게 부질없거니와 불가능하다는 것도 안다.

좋은 책이란 바다였고, 바다는 그저 갈 때마다 다른 풍경과 색다른 파도를 선물해줄 뿐이었다. 그것을 즐기면 독자로서는 족하다. 바닷물을 한 바가지 퍼내고 그만큼 바다를 정복해냈다 말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새삼, 이 재능이 독서를 보는 관점과 취향마저도 바꿔버렸음을 깨달으면서,

나는 책을 덮었다.

그때 문이 열리면서 교사가 두터운 시험지를 들고 들어왔다.

“자, 책들 다 집어넣고. 사인펜 안 가져온 븅신 있냐? 어 그래. 이 반은 그래도 한 명밖에 없네. 넌 그냥 빵점 맞고. 다들 머리 위에 손.”

오늘은 평가원 모의고사 날이었다.

그냥 모의에 불과하지만 지금의 성적이 3년을 간다는 속설이 있어 아이들은 긴장하는 눈치였다.

예전이었다면 나도 좀 긴장했을지 모르겠다. 고윤숙이 시험 못 보면 사기꾼으로 몰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상황이라 더더욱. 하지만 글쎄···.

‘아무래도 전혀 긴장이 안 되는데.’

그래서 시험지가 넘어 오는 걸 보면서도 엉뚱한 생각만 떠올랐다.

이렇게 시험지로 소비되는 나무들만 아껴도 지구 온난화는 막을 수 있겠다고.

첫 시간은 언어였고, 난 10분 만에 문제를 다 풀고 검토도 두 번쯤 해버린 뒤, 남은 시간동안 아직도 헷갈리는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등장인물 이름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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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날 쉬는 시간에 가장 많이 발언될 말들을 통계 내어 보면 아마 1, 2위는 이럴 것이다.

2위 : 바꿨는데 틀렸어!

1위 : 이거 답 뭐야?

그리고 난 1위와 2위의 발언들에 둘러싸여 취조를 받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한열아, 그래서 이건 답이 뭔데?”

“이건? 진짜 1번이라고?! 왜? 왜 그런데?”

“이거 3번 아니야? 악!! 바꿨다 틀렸어!! 왜 3번이 아닌데! 빨리 아니라고 말해 이 자식아!!”

“4번! 4번이어야 해!!”

질문보다는 협박이나 애원이 많았고, 나는 친절하게 잔인한 진실을 일깨워주며 내 책상 주변을 통곡의 절벽쯤으로 만드는 중이었다.

솔직히 좀 진이 빠졌다.

공부 잘 하는 자의 애환이 이런 건가. 원래 우리 반 1등은 항상 이런 기분이었나. 걔는 지금 어디에 있기에 이번엔 나한테 다 몰려왔나. 잘 보니 그놈이 내 주변에서 가장 높은 데시벨로 곡소리를 내고 있었다.

세상에 희망은 없는 듯하여 나도 저들의 희망을 없애주었다.

“미안하지만 1번이야.”

“으아아아···.”

싱거운 시험시간과 매운맛 쉬는 시간이 그렇게 다 지나가고, 실제 채점 시간이 되어서야 나는 자유를 되찾았다.

느긋하게 가채점을 했다.

“음.”

“한열아 채점 다 했어? 몇 점 나왔어?”

요새 부쩍 친해진 같은 반 김선기(a.k.a 데오도란트 성애자)가 목을 길게 빼어 내 시험지를 엿봤다.

“몇 개 틀린 거 같은데.”

“···점수가 아니라 개수로 세는 이 패기 뭐지. 듣기만 해도 화가 나는데.”

“음, 두 개 틀렸다.”

“과목 당 두 개라고 말해줘. 거짓말이라도 좋으니까 그냥 그렇게 해줘.”

“아니 전체에서 두 개.”

“···내 자존심을 그렇게 뭉개서 좋냐! 어!?”

터무니없는 오해였다. 난 그의 자존심을 충분히 지켜주고 있었다. 그 증거로 둘 다 몰라서가 아니라 문제를 잘못 봐서 실수로 틀렸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난 배려란 걸 아는 남자였다.

그나저나.

난이도가 꽤 어려웠으니, 이 정도면 전국 단위에서도 순위에 들지 않을까.

특히 틀린 두 문제가 배점이 낮아서 기대해 봐도 되겠다.

그때 교실 문이 열리며 담탱이 고 씨가 들어왔다. 종례 시간이었다.

“모의고사는 모의고사일 뿐이니까 잘 보든 못 보든 일희일비하지 말고. 그리고 전달사항은···. 일단 수학여행 장소 변경된 거 알지?”

“또 경산이야···. 거기 완전 지겨워요. 재미 하나도 없는데.”

“으아악! 완전 싫어! 거기 구렁이만 엄청 나와!”

“어디 놀러가니? 수학여행도 엄연히 학습활동의 일환이거든? 어쨌든 변경되어서 수학여행비 일부 환불되니까 그렇게 알고. 돈은 서류작업이 덜 끝나서 며칠 뒤에 현금으로 줄 거야. 그전에 부모님한테 안내문 다 나갈 거니까 삥땅칠 생각 마라.”

“예에~.”

“그리고··· 우리 반에서 수학경시대회 입상자가 나왔다. 최민지. 이한열. 두 명 일어나.”

오올-하고 학생들이 기성을 질렀다.

“최민지는 동상. 축하한다. 다들 박수.”

박수가 잔잔하게 울렁였다.

최민지는 내가 등장하기 전까진 일반반의 미래라고 불리던 아이였고, 당연히 우리 반 1등이었다.

물론 지금은 내 통곡의 절벽 주민 1호였다. 아깐 목청이 대단했지. 성적 순위 상승을 꾀하고 날 고막관통사로 암살하려는 건지 살짝 의심까지 했다.

그리고 다음 대사를 읊는 고윤숙은 무척 고달파 보였다.

“그리고 이한열은 대상···이다.”

박수를 치라는 소리를 안 해서 박수소리는 안 나왔다.

대신 난리법석이 터졌다.

“우왓 미친! 대상이면 1등 아니냐? 그럼 전국 1등이야?”

“클라스 지린다···. 0반도 아닌데···.”

“아놔. 주모! 이거 뽕이 너무 심한 거 아니요?!”

“부왁! 부왁을 울려라!!”

“대박이네 진짜. 미친.”

그리고 김선기는 말만 하지 않고 내 등을 막 두드렸다. 자기 일도 아닌데 왜들 이렇게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이약! 이 미친 새퀴!! 돌은 새퀴!! 공부만 하다 죽은 귀신이 씌었나!! 축하한다!”

뭐, 그래도 썩 나쁜 기분은 아니네.

등은 좀 아프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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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리법석인 놈이 한 명 더 있었다. 이쪽은 좀 다른 이유에서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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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상진 : 나 야구부 앞에 와 있어!

-나 : 벌써 갔냐···. 대체 얼마나 의욕적인 거야···.

-전상진 : 으으 뭔가 떨린다. 어쨌든 기다리고 있을게!

-나 : 오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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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참에 아주 청춘 드라마를 찍을 생각인가. 의욕 넘치면 나야 좋지만. 나는 픽 웃으며 학생회실에 들어섰다.

“실례합니···.”

학생회실에 선객이 있었다. 아는 사람이라 살짝 놀라고 있는데 윤정희가 손짓을 하며 날 맞이했다.

“어, 한열이 왔니? 잠깐 기다리고 있을래? 이쪽이랑 아직 얘기가 덜 끝나서.”

“···예 상관없어요. 근데 배윤하는 여기 웬일?”

“음? 둘이 아나? 아. 같은 보육원 출신이었지?”

“예, 언니.”

배윤하는 대외활동용 미소를 거의 분장수준으로 덕지덕지 바르고 있었다.

저 정도는 사기 아닌가. 국회는 사기꾼 억제 방안으로 미소 상한제 같은 거 만들어야 된다. 진짜로.

근데 언니?

언제 또 친해진 거야?

저 인맥 괴물이 또 무슨 짓을 저질렀는가 싶어 살짝 불안감이 생겼다.

< 10. 냉정과 열정 사이 - 1 > 끝

ⓒ 달의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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