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 냉정과 열정 사이 - 2 >
저 인맥 괴물이 또 무슨 짓을 저질렀는가 싶어 살짝 불안감이 생겼다.
“어렸을 때 제가 한열이를 오빠처럼 따라다니기는 했죠.”
“진짜? 그렇게 안 보이는데.”
“나이 차면 다 그래요. 남매끼리 데면데면해지는 거야 뭐. 저희도 요새는 남만 못하다니까요. 언니는 외동이시죠?”
“응. 그래서 잘 모르겠네-. 남매 같은 사이란 거.”
“자매 같은 사이는 알려드릴 수 있는데.”
“응? 얘 봐라. 나한테 끼부리니?”
“앗. 들켰다.”
하하호호 깔깔낄낄.
여자여자한 대화에서 풍기는 아우라가 지나치게 강력해서 난 학생회실 모서리까지 밀려나고 말았다.
저항할 의지조차 생기지 않았다. 저기 남자가 끼면 테스토스테론이 50% 감퇴한다는 연구결과가 있으므로 얌전히 닥치는 게 현명했다.
“그럼 언니, 그렇게 알고 가볼게요.”
“그래, 조심해서 가고. 잘 부탁할게.”
“걱정 마세요.”
얘기가 마무리될 타이밍에 배윤하를 불러 세웠다.
“야, 오늘도 부활 가냐?”
“어? 응. 문예부실 잠깐 들렀다가 야구부 갈 거야. 왜?”
“아니, 이따 같이 가자고. 나 길 잘 몰라.”
“내가 널 기다려야 돼? 왜? 나 바빠.”
“자꾸 그러면 사진 안 찍어준다.”
미안하지만 전상진하고 둘만 맞닥뜨렸다가 걔가 또 어리바리하게 굴면 곤란하거든.
나름 연애 컨설턴트로서 남성의 이미지를 보호할 의무가 있었다.
배윤하는 뚱한 표정으로 날 한참 보다가 툭 말했다.
“···오 분만 기다릴 거야.”
그러고는 휑하니 방을 나섰다.
다루기 쉬운 건지 까다로운 건지 원. 한숨을 푹 쉬고 정면을 보니 윤정희가 무척 기분 나쁜 미소로 날 보고 있었다.
다른 표현일 수 없다.
그건 그냥 기분 나쁜 미소였다.
“···왜 그렇게 웃으세요?”
“아니, 네가 그런 복잡한 표정 짓는 건 처음 본다 싶어서.”
“제 표정이 어때서요.”
“흐응. 글쎄? 하여간 재밌는 표정이었어.”
“뭔가 약점 잡힌 기분인데···. 근데 배윤하는 왜 여기에?”
윤정희는 딱 그 타이밍에 찻잔을 들었다.
여우같은 여자 같으니. 내가 궁금해 하는 걸 눈치 채고 일부러 애태우는 거다.
재촉하면 지는 것이므로 난 내색 않고 기다렸다.
그러나 윤정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찻잔을 내려놓은 뒤에도 못 들은 척 입매를 여미었다.
“···됐어요. 왜 부르신 건데요?”
“후후. 미안미안. 반응이 재밌어서 좀 놀려봤어. 가르쳐줄까?”
“아 안 궁금해! 안 궁금해!”
“걱정 마. 안 궁금해도 말해줄 거야. 사실 너한테 할 얘기랑 윤하한테 한 얘기랑 같거든.”
“······?”
“이번 수학여행, 경산 축제에 맞춰 기획된 거야. 근데 이게 의외로 큰 행사란 말이지. 학생 외에 다른 주민들도 잔뜩 모일 거고. 그럼 어떻게 되겠니?”
“안전 문제가 생길 수도 있겠군요.”
“그래. 안전요원이 필요해서 뽑아야 되는데, 학부에서 우리 학생회에 위임을 했어. 어쩌면 우리가 통제 책임을 맡을지도 모르고.”
“···뭐야 학생부가 뭐 이리 무책임해···.”
“후후. 저번에도 말했잖니. 우리 학교가 보통은 아니라고. 교사들 머리 꼭대기에 올라있는 학생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래서 대원고교 학생부는 나서지 않고 뒤로 빼기로 유명해. 틈만 나면 책임을 우리한테 돌리려고 하지.”
그러고 보니 교문 앞에서 하는 선도활동 외에 학생부의 존재감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뭔가 아련하네···. 아내한테 맞는 남편도 아니고···.
“어쨌든 그런 이유로 믿을만한 사람을 고르고 있는데. 넌 어때?”
“음.”
나는 고개를 자신 있게 끄덕였다.
“제가 좀 믿을만하긴 하죠.”
“능력 면에서는.”
“앗.”
“상황 판단과 결단력에서 널 따라올 만한 사람을 못 찾겠더라고. 윤하는 학교 대내외적 행사로 잔뼈가 굵은 아이고.”
“이야. 저 출세했네요. 좀 뻐드겨도 됩니까?”
“그러든가. 너네 말고도 몇 명 더 있으니까 너무 많이 하진 말고.”
“근데 하면 뭐 줘요? 시급 나오나? 아님 봉사활동인가?”
“넌 저번부터 뭘 그렇게 돈에 집착하니? 보육원에서 굶겨?”
“동기부여가 있어야 더 열심히 하죠.”
“학교에 기여한다는 자부심? 그리고 내 총애를 받을 수 있지.”
“에에-.”
야유를 했지만 사실 그것만으로도 참가할 이유는 차고 넘쳤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젠린이 고아면서 엘리트인 인재를 찾을 때, 비슷한 또래를 가장 깊고 넓게 접촉하고 있을 학생회장의 조언을 진지하게 참고하리란 건 자명하다.
전생에서도 윤정희의 ‘추천’이 결정적이었다고 듣기도 했고.
“그래도 뭐, 제가 그렇게 필요하시다면야 도와드리지 못할 것도 없죠!”
“뭔가 말투가 건방진데. 확 빼버릴까.”
“맡겨만 주십쇼.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썬뱃님.”
내가 바로 고개를 숙이자 윤정희가 쿡쿡 웃었다. 어, 이건 진짜 웃음이네.
“일단 그렇게 알고 있어. 교육이 필요할 때 부를 테니까. 이만 가봐.”
“넵.”
난 자리를 일어서려다, 문득 든 생각이 있어 물었다.
“근데 배윤하를 예전부터 아셨나요?”
“아니. 근데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지. 반짝반짝 빛나는 아이니까. 그런 애들 있잖니. 어디에서든 주목 받는 스타일. 언뜻 나랑 비슷한 거 같기도 하고.”
“···엥?”
“뭔가 불순한 리액션인데.”
“여신 윤정희와 인간여캐 따위를 비교할 수는 없죠. 음. 정확히 그런 뜻이었어요.”
“어쨌든. 만나보니까 나랑은 딱 정반대의 부류던데. 귀엽고. 얘기 하다보니 애완동물처럼 옆에 차고 다니고 싶더라.”
“뭐, 인기가 많은 녀석이긴 하죠. 저 그럼 진짜로 가볼게요.”
여기서 배윤하를 험담하는 건 하책이겠지.
대충 얼버무리면서 나가려는데 윤정희가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렸다.
“질투심에 너무 휘둘리지 마. 자신도 모르는 사이 괴물이 될 테니까.”
“···네?”
“아냐. 아무 것도. 그러고 보니 경시대회 대상 축하해.”
“아, 예. 감사합니다.”
밖에선 태양이 나태하게 늘어지고 있었다. 윤정희는 창밖에 시선을 둔 완고한 옆모습으로 더 이상의 접근을 차단했다.
안으로 침범한 석양빛이 녹아내리고, 그녀의 모습도 거기 섞여, 저곳의 윤곽은 어렴풋하게 불타고 있었다.
두드리면 공연히 내 손만 데일 것 같아, 나는 그녀가 불타게 놔둔 채 학생회실을 빠져나왔다. 탁. 이번에도 문은 내 앞에서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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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윤하가 해바라기를 빼앗긴 햄스터 같은 얼굴로 날 기다리고 있었다.
“늦어.”
“거 좀 기다린 거 가지고 되게 그러네. 어차피 문예부 다녀왔을 거 아냐?”
동아리실이 모여 있는 제3별관과 학생회실은 꽤 거리가 있다. 다녀온 시간하고 얼추 맞았을 테니 괜한 엄살이었다.
“갔다가 괜히 또 왔잖아. 동선이 낭비 됐다고.”
“넌 좀 더 걸어도 돼. 뚱띠야.”
“하. 난 뚱뚱한 게 아니고 특정 부위에 축복을 받은 거거든? 하여간 이한열, 누가 아싸 아니랄까봐 트렌드를 모르네. 요새 빼빼 마른 몸매는 수요가 없어요. 내가 이 훌륭한 굴곡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나 지금 누구랑 말하니.”
놔두면 또 자기자랑으로 논문을 쓸 기세라 무시하고 걸었다.
그러나 배윤하는 초절정 인싸답게 타인의 고막에 자기 말을 꽂아 넣는 일에는 대단한 기량을 자랑했다.
종종걸음으로 내 뒤를 쫓으며 잘도 떠들어댄다.
“그리고 나처럼 날씬한데 콜라병 몸매인 케이스가 얼마나 희귀한지 모르지? 에이 참. 내가 어린애 데리고 무슨 얘길 하는 건지 모르겠네. 미안. 이 누나가 네 정신연령을 너무 고평가했다. 네 나이 대에는 아무래도 펭수 몸매가 최고지?”
“배윤하.”
“응?”
“긴장했냐?”
“···어, 완전.”
배윤하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오늘부터 상진이 오는 거야? 진짜? 아 나 어제 라면 먹고 자서 얼굴 다 부었는데···. 나 살 쪄 보여? 오늘 다 지났는데도? 진짜로?”
“나트륨이 존재감을 어필하는 면상이긴 하네.”
“아, 안 돼···! 미스트···. 미스트로 빨리 가라앉혀야···.”
그러더니 뭔가를 얼굴에 막 뿌려대기 시작했다.
물론 내 눈에나 영원영겁 아기돼지이지 객관적으로는 그 부은 얼굴조차 귀여움의 범주에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호들갑떠는 꼴이 꽤 재밌었기에 그냥 놔두었다.
“뭘 그렇게 난리야. 너 상진이 좋아하냐?”
“어. 완전 좋아하는데?”
“사귀자면 사귈 정도로?”
“으헤헤헹. 무슨 소리야. 상진이가 나한테 왜 사귀자고 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
이건 글렀네.
누군가 나서지 않으면 평생 겉돌 운명을 타고난 커플이었다. 지금이 큐피트가 나설 타이밍인가.
“그럼 너···.”
“와아! 배윤하 아니야? 오랜만이야아-!”
“끼에에엑! 미혜랑 수정이잖아?! 뭐야뭐야? 너네 요즘 왜 이렇게 안 보여?”
“안 보이는 건 너겠지. 이 기집애야. 근데 진짜 반갑다아-.”
그러나 그때 정체불명의 학생 무리가 툭 튀어나오더니 순식간에 거기에 만남의 광장을 차려버리는 것이었다.
그걸 보며 나는 핵인싸라는 단어의 어원을 깨닫고야 말았다.
이 우주의 물리법칙에는 <인싸 + 인싸 = 핵폭발>이라는 공식이 존재했다. 그들은 제로그라운드에 피어난 버섯구름마냥 옹기종기 모여 반경 내 모든 것을 날려버리는 초강력 음파를 발산했다.
나는 폭심지 근처 13번 가로수 정도의 느낌으로 핵인싸들의 화학반응을 견뎌내었다.
“안녀엉!”
“그래! 나중에 또 봐!!”
그러나 끔찍하게도 그 뒤로 같은 일이 반복됐다.
배윤하는 걸어다니는 인간 소용돌이였다.
지나가면서 꼭 누군가를 빨아들였다. 얘만 보이면 동기 선배 가릴 것 없이 죄다 한 마디씩 하고 지나가는 것이다.
난 옆에 있는 것만으로 녹초가 됐는데 배윤하는 점점 더 쌩쌩해졌다.
“······.”
“···이제 가자. 응? 왜 그래? 아하. 인싸 에너지가 너무 강력해서 녹아버렸니?”
과히 틀린 말이 아니라는 점에서 나는 침음했다.
이 자식 대체 뭐지. 인싸력을 측정하면 스카우터가 터지는 거 아닐까.
“쯧쯧. 맨날 혼자만 다니니까 내성이 없어지는 거 아니겠니. 너 사회성도 근육 같은 거다? 안 쓰면 배린다고. 쓰면 쓸수록 두꺼워지고.”
“네가 과한 거야···. 사회성이 근육이라면 넌 이미 근육돼지라고."
"자꾸 돼지돼지 할래?!"
그러나 배윤하는 사람들 만나서 뭔가가 충전됐는지 아까보다 활기가 돌았다. 콧노래도 흥얼거린다.
이것도 일종의 재능일까. 아니, 일일 만남의 총량을 정해두고 다 쓰면 쉬어야만 하는 나에겐 재능을 넘어 초능력이었다.
그러나···.
‘윤정희가 왜 자신과 닮았다고 했는지 알겠네.’
그녀는 신기할 정도로 얼굴을 휙휙 바꿔댔다. 웃어야 할 사람에겐 웃어주고, 권위적인 사람에겐 숙여주고, 한없이 가벼운 사람에겐 똑같이 가벼워졌다.
무슨 안면에 포토샵 효과 필터 씌운 수준이다.
그러나 사람이 그렇게 단시간 내에 바뀌겠는가. 단지 상황에 맞게 적절한 마스크로 바꿔 쓴 것일 뿐.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마스크는 감정과 무관하게 부착될 수 있는 물건이다.
옛날이라면 그냥 지나쳤겠지만 [눈치]를 얻은 지금은 알겠다.
그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도,
그녀는 단 한 번도 진심으로 웃은 적이 없었다.
“어, 상진이다!”
“한열아! 윤하야! 오랜만이야!”
마침내 야구장 입구에 도착해 전상진과 조우했다.
난 맑게 울리는 웃음의 결을 거슬러 오르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살갗에 스치는 공기가 잔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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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고교 야구부 코치 이한승은 쿨하게 우리의 입부를 받아들였다.
“상진이라면 당연히 받아야지. 우리가 뭐 대단한 팀도 아닌데.”
“아유. 감사합니다. 근데 제가 학생회 때문에 매일같이 오지는···.”
“그럼그럼. 너 바쁜 거 다 아는데. 다른 데 제치고 여기 와준 것만 해도 고맙지. 편하게 있어. 편하게.”
이한승은 시원시원하게 웃었다.
그게 전상진 앞이라서인지 아니면 원래 성격인지는 모르겠지만.
근데 원래라면 입부 시험도 치르나? 수준 미달이면 안 받는 경우도 있을까? 어쨌든 전상진 덕분에 나도 프리패스로 입부에 성공했다.
그 와중에 야구부 애들이 신입회원 들어온다니까 잔뜩 모여서 떠들어댔다. 유쾌하고 떠들썩했다.
“상진이 있으면 전속 치어리더부도 만들어지는 거 아니야?”
“오, 그럴 듯 한데요 코치님.”
“그럼 우리도 드디어 남탕에서 해방인가!”
“난 안 보이니? 기하야?”
“윤하는 엄마니까 제외지.”
“그치. 윤하는 여자로 치면 반칙이지. 엇! 어어! 배, 배윤하가 배트로 사람 친다!”
그때 이 코치가 사람 좋은 얼굴을 내게 들이밀었다.
“넌 한열이라 그랬나? 야구 경력은 있어? 포지션 같은 거 생각해둔 건 있고?”
“아뇨 경력은 없습니다. 근데···.”
“응?”
“저도 매니저 한다면 시켜 주시나요.”
“···어어? 매니저? 글쎄···. 윤하만으로 충분해서 더 뽑을 생각은 없었는데. 근데 굳이 매니저를 하고 싶었어? 보통 남자애들은 치고 던지는 게 좋아서 오는 곳인데.”
“사실 야구에 별 관심은 없어서요. 그냥 상진이가 혼자 오기 뭐하다고 해서 따라온 거거든요.”
“아··· 그래?”
이한승 코치 얼굴이 묘해졌다.
단순한 말이었지만 단순하게 듣지는 못했겠지. 내가 없으면 전상진도 없으리라는 뉘앙스를 은근히 깔았으니. 어지간하면 내 요구를 들어주겠지.
“그래, 뭐. 나야 힘 쓸 남자애 하나 생겨서 좋지 뭘. 안 그래도 윤하한테 그런 일 시키긴 뭐했거든.”
“네, 감사합니다.”
“그래그래. 너도 편하게 있고. 앞으로 잘 부탁한다.”
잘 풀려서 다행이다.
사실 상진이에게 야구부를 권했을 때는 [투석]으로 투수 자리를 꿰차고 황색 카르마를 좀 벌어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곰곰이 따져보고는 생각이 바뀌었다.
우선 포인트로 경험을 사서 그 이상의 황색 카르마를 벌어내는 꼼수를 쓰려면, 조건이 하나 있다.
반드시 원주인이 능력을 개화시켰던 상황과 유사한 조건을 만들 것.
그 이외의 상황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업적 임계치’를 넘지 못했다. 마치 꼼수를 쓰려했던 대가를 치르라는 듯이.
그래서 [무명 사진가의 촬영 능력] 때는 배윤하가 모델이어야 했다.
[무명 중의사의 침술] 때도 샤오메이가 환자라는 ‘조건’이 충족됨으로써 황색 카르마를 얻어낼 수 있었다.
그럼 [무명 투석꾼의 투석]의 상황은 어땠을까.
투석꾼 김개똥이 자신의 능력을 개화한 계기는,
무려,
돌팔매로 식인 호랑이의 뚝배기를 깨버린다는 무지막지한 업적을 달성하면서였다!
그러니까 이걸로 황색 카르마를 얻으려면 야구부가 아니라 동물원에 가야한다.
당연히 호랑이랑 영혼의 맞다이를 붙었다가는 이기든 지든 문제가 되겠지. 질 경우엔 특히나 문제다. 일단 내 모가지가 남아있을지를 따져보아야 한다.
거기다 두 번째 개화 조건은 더 가관이었다.
임진왜란을 겪은 그는 왜구에 여동생을 납치당하고, 그때부터는 무대를 저쪽 섬나라로 옮겨 이젠 일본 놈들 뚝배기를 깨기 시작한다.
그리고 끊임없는 투쟁 끝에 김개똥은 마침내 여동생을 납치한 다이묘의 병사들을 숲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
돌팔매로 부대 하나를 통째로 궤멸시켜버린다.
그때의 사투가 두 번째 개화의 계기였던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달은 나는 야구로 뭘 어쩌려는 걸 깔끔히 단념했다. 일본 선수 만나서 그놈 머리통의 내구성을 시험해볼 생각이 아닌 다음에야.
==
황색 카르마 : 900
==
[서초패왕 항우의 역발산기개세]에 필요한 수치가 1,000.
그동안 부단히 모아서 이제 백 정도만 더 채우면 된다. 얼마 안 남았지만 나는 마음이 좀 급했다. 어제 확인한 바로는 아직 그 자리에 있었지만 언제 상황이 변할지 알 수 없으니까.
그래서 내 결론은 이렇다.
야구부는 배윤하와 전상진의 로맨스를 돕는 정도로만 참가. 매니저는 그런 내 어중간한 동기에 얼추 어울리는 직책이었다.
새벽 훈련 나와서 뛰고 배트 휘두르고··· 어휴. 생각만 해도 시간 낭비네.
차라리 그 시간에 다른 자색 탤런트를 찾아다니는 게 현명하다. 어쩌면 쉽게 황색 카르마를 얻게 해줄 탤런트가 있을지 모르니까.
“그럼 상진이 실력 좀 확인해볼까? 동명아. 마운드에 좀 올라가라.”
“넵.”
“상진이도 지금 괜찮지? 뭐 입단 테스트 그런 건 아니고. 간단하게 몸 좀 풀자는 의미니까 긴장할 건 없고.”
“예. 저도 괜찮습니다. 근데 오래 안 해봐서 몸이 좀 굳었을지도 몰라요.”
“괜찮아괜찮아. 우리도 뭐 없다니깐.”
이한승 코치가 너스레를 떨었다.
키가 큰 투수가 마운드에 오르고, 상진이는 오랜만의 타석이 어색했는지 계면쩍게 웃으며 헬멧을 만지작거렸다.
< 10. 냉정과 열정 사이 -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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