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이 자꾸 늘어 52화>
10. 냉정과 열정 사이 - 3
“그럼 상진이 실력 좀 확인해 볼까? 동명아. 마운드에 좀 올라가라.”
“넵.”
“상진이도 지금 괜찮지? 뭐 입단 테스트 그런 건 아니고. 간단하게 몸 좀 풀자는 의미니까 긴장할 건 없고.”
“예. 저도 괜찮습니다. 근데 오래 안 해 봐서 몸이 좀 굳었을지도 몰라요.”
“괜찮아, 괜찮아. 우리도 뭐 없다니깐.”
이한승 코치가 너스레를 떨었다.
키가 큰 투수가 마운드에 오르고, 상진이는 오랜만의 타석이 어색했는지 계면쩍게 웃으며 헬멧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나 막상 자세를 잡는 걸 보니 태가 제법 나왔다. 자세란 버릇 같은 것이어서 그 윤곽에는 들인 시간이 정직하게 녹아 있었다. 왕년에 배트 좀 잡았다는 게 허세는 아니었나 보다. 게다가-.
‘배윤하한테 잘 보이려고 집에서 연습하고 왔나 본데.’
불순한 의도로 만들어진 베팅 포즈.
그렇다면 이 타이밍에는 지원 사격을 해 줘야겠지. 나는 짐짓 감탄한 듯 말했다.
“오. 자세 나오는데? 쟤는 뭘 해도 그림이네. 그렇지 않냐? 자세만 보면 그냥 홈런감이야.”
그러자 배윤하는 오히려 뚱해졌다.
“홈런이 그렇게 쉬운 줄 알아? 중학교 때 잠깐 하던 애가 어떻게 홈런을 쳐. 우리 야구부 선발 클라스가 있는데.”
“뭐 말이 그렇다는 거고. 그리고 상진이 운동 신경 좋아. 혹시 모르는 일 아니냐?”
“운동 신경 좋은 거랑 운동 잘하는 거랑은 다르지. 야구부 애들이 평소에 얼마나 연습하는 줄 알면 넌 입도 못…….”
그때 투수가 와인드업 동작을 취했다. 그리고 꼬인 몸을 단숨에 풀어내듯 투구. 공이 허공에 등장했다 싶더니 어느 순간 홈플레이트에 빨려 들어가고 있다. 역시 선수는 달-.
깡-!!
맞았다.
크게 맞았다.
공은 거창한 궤적을 그리며 펜스를 훌쩍 넘어 사라져 버렸다. 홈런. 나는 공을 따라 움직이던 시선을 그대로 돌려 해설자 배윤하를 보았다. 왜인지 관자놀이에 땀 한 송이가 돋아나 있었다.
“……우연이지. 초심자의 운이랄까. 초구는 영점 조절하는 건데 그걸 쳐 버리네. 음.”
그런 것인가. 나는 납득해 주기로 하였다.
그냥 연습이므로 출루는 없었고, 바로 투수는 멋들어진 투구 폼과 함께 두 번째 공을 뿌렸다. 그리고…….
깡-!
강강앙아아…….
이번에는 좌익수 옆으로 빠지는 안타였으며 유독 메아리가 길게 울렸다. 잘 맞았다고 홍보라도 하는 듯한 메아리였다. 난 다시 배윤하를 보았다. 땀이 한 방울 더 늘어나 있었다.
“……운이란 건 가끔 연타로 터지기도 하지.”
그 뒤로 몇 번의 볼과 몇 번의 안타가 더 있었으며 스트라이크는 손에 꼽힐 만큼 드물게 등장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배윤하의 시선은 점점 하강했으며 고개는 땅을 파고 들어갈 기세로 숙여졌다. 식은땀은 이제 방울 개수가 아니라 면적으로 재어야 할 것이었다. 그녀가 중얼거렸다.
“……다.”
“응?”
“그래 우리 야구부 약체다! 뭐 불만 있냐?!”
“……난 아무 말도 안 했다만.”
“대회만 나가면 광탈이라서 맨날 빛의 사도라고 놀림 받지만 다들 착한 애들이란 말이야! 놀리지 마!”
“아무 말도 안 했다니까.”
정말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다. 그보다 난 방방 뛰고 있는 배윤하가 신기했다. 뭘 이렇게 진심으로 속상해하고 있는 거지?
“……친선 경기에서 중학생들한테도 져서 가뜩이나 영혼까지 탈곡된 애들인데…… 씨이.”
“윤하야, 고맙긴 한데 지금 네 팩트 폭행이 더 아픈 거 같아…….”
“다음 경기는 초등학생들이랑 잡아야 되나……. 힝.”
“그만 좀……. 우리 라이프는 이미 제로라고…….”
“그래도……!”
배윤하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또 묻지도 궁금하지도 않은 변명을 시작했다.
“그래도 우린 조금씩 나아가고 있어. 가족처럼 서로를 보듬어 주면서. 한 사람의 열 발이 아니라, 다 같이 디디는 한 발을 소중히 하면서……. 그게 중요한 게 아닐까? 한 명의 엘리트를 위해 모두를 희생하는 건 스포츠 정신이 아니지 않을까? 우리 코치님의 가르침도 그런 견지에서…….”
그때 파울볼로 높게 뜬 공이 펜스를 치고는 우리 앞으로 쪼르르 굴러왔다.
정확히는 내 앞에.
심판을 보던 이한승 코치가 이쪽으로 털레털레 오면서 외쳤다.
“이쪽으로 좀 던져 줘!”
난 야구공을 집어 들었다. 너무 오랜만에 만져 봐서인지 생경했다. 야구공은 내 기억보다 크고 묵직했다.
그러나 투석꾼 김개똥이 돌을 집을 때, 같은 돌이 집힌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떤 것이든 쥐기만 하면 최적화를 시키는 [투석]의 경험이 손아귀에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 느낌 그대로 던졌다.
쩍-!
이 코치의 글러브에 공이 꽂혔다.
“……어?”
그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글러브와 나를 번갈아 보더니, 내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기껏 받은 공을 다시 내게 건네는 게 아닌가.
“다시 던져 볼래?”
“예에?”
“방금 던져 본 그대로 말이야.”
묻지도 않고 다시 멀어진다. 난 뭔가 떨떠름했지만 왠지 모를 박력에 떠밀려서 다시 공을 던지고 말았다.
그리고
쩍-!
볼품없는 폼에 구종 같은 건 고려치도 않은 야만적인 투구. 그러나 투석꾼이 알기로 가장 빠르고 강력한 공이 글러브를 때렸다.
이번에 이 코치는 명백히 흥분한 표정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글러브 낀 손으로 내 손을 덥석 쥐었다. 지나치게 얼굴이 가까워서 더운 콧김으로 따귀 맞는 기분이었다. 부담스러워…….
“너 투수 해라.”
“……예에?”
“배운 적도 없는데 이 정도면 타고난 거다. 투구 폼을 교정하고 괜찮은 구위만 익히면 탑급의 투수가 될 수 있어. 투수, 해라.”
“전 매니저인데요.”
“매니저이지만 해라!”
“아니, 선발 투수 이미 있잖아요.”
“바꾸지 뭐!”
이 코치의 지나치게 해맑은 표정에서 시선을 돌려 배윤하를 바라보았다.
가족이라며. 다 같이 한 걸음이라며! 뭘 바꾼단 소리가 이렇게 쉽게 나오는 건데!
그러나 거의 울기 직전인 배윤하 앞에서 뭐랄 수도 없었다.
난 한숨을 쉬었다.
“싫습니다.”
난 딱 잘라 거절했지만 이한승 코치는 끈질기게 달라붙었고, 결국 배윤하가 폭발해서 야구부 전원이 그녀를 달래는 일이 그 뒤로 있었으나 생략하도록 하자.
어쨌든 간에,
그날 전상진은 완전히 뒷전이 되었고, 내 로맨스 대작전은 대찬 실패로 기록되었다.
* * *
-수상자 분들은 표시된 전열에 착석해 주십시오. 가족 및 학교 관계자 분들께는 뒤쪽에 자리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수학경시대회 시상식 날이었다.
김민영와 방민종을 비롯한 우리 세미나 모임 구성원들도 대거 입상하여 참석했다. 그러나 금상 이상을 받는 사람은 나뿐이어서 우린 자리가 꽤 떨어져 있었다.
단적으로 말해 혼자라 심심했다.
하품이 계속 나왔다. 내 몸 어딘가에 하품 생산 공장이 새로이 세워져 연중무휴로 노동자들을 쥐어 짜내고 있었다. 그렇다. 이 하품은 미토콘드리아의 처절한 절규다. 언젠가 총파업을 일으켜 내 내장을 뒤집어 버리고 말 테지.
그때가 되기 전에 식이 끝나길 간곡히 빌면서 나는 사회자의 지루한 말을 참아 냈다.
그러나 내 졸음이 달아나는 때는 더 빨리 찾아왔다.
단상에 올라 있는 누군가,
그의 얼굴을 스치듯 본 순간 신경 세포 일동이 한순간 점멸하여 내 정신을 일깨웠다.
‘……그랬나. 그런 이유에서…….’
나는 평소엔 요지부동인 [수리적 통찰력]이 왜 하필 경시대회에 반응해서 날 참석시켰는지 이제야 감이 왔다.
수학경시대회 안내문.
거기에 적혀 있던 ‘출제 위원’의 이름에 반응한 것이었다.
-대상, 대원고등학교 1학년, 이한열. 수상자께선 단상에 올라 주십시오. 시상은 출제 위원이신 한국대 이용하 교수님께서 수고해 주시겠습니다.
나는 단상에 오르면서 시상대에 서 있는 나이 든 남자를 보았다.
이용하 교수. 평생 세상에 외면당하기만 하던 최석현이 그나마 은사로 삼을 만한 사람. 그의 스승. 동료 수학자.
그리고,
최석현의 마지막을 함께한 남자.
1퍼센트 미만인 동조율로는 인상만 어렴풋할 뿐이었지만, 가까워질수록 내 안의 카르마가 반응하듯이 기억이 뚜렷해졌다. 나이가 좀 더 들었지만, 그가 맞았다.
그리고 교수도 묘한 눈으로 날 보고 있었다.
어째서?
내 안의 최석현을 알아보기라도 한 것일까?
그가 상패를 들고 다가와 내가 그것을 받아 든 순간 은근한 손길로 내 팔목을 쥐었다. 그와 내 시선이 마주쳤다. 우린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혹시…….”
“……저.”
“…….”
“…….”
서로의 말이 부딪혀 넘어졌다.
결국 나는 사회자의 말에 떠밀려 단상에 올랐고, 스스로도 뭐라는지 모를 수상 소감을 늘어놓았다.
대충 끝내고 내려오면서 그가 입을 열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
“최석현이라고…… 혹시 아십니까.”
“…….”
두터운 안경 저편, 왜곡된 동공으로 날 빤히 바라보던 이용하 교수가, 내 하품 양산 공장과는 질이 다른, 아주 오랫동안 수제로 빚어 왔을 공예품과 같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우린 서로에게 할 말이 있는 것 같군.”
난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친구들과 지도 교사를 먼저 돌려보냈다. 교수와의 친분을 어필하니 놀라면서도 어쩐지 납득하는 분위기였다.
모두 보내고 식장으로 돌아오니 이용하 교수는 말없이 나를 주차장으로 이끌었다.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그제야 우린 통성명을 나누었다. 어쩐지 순서가 뒤죽박죽인 만남이었다.
“난 이용하……라고 하네. 지금은 한국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고. 원래는…….”
“……스탠포드 교수이셨죠. 항상 미국 생활이 지겨워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셨고. 소원 성취하셨네요.”
“……그랬지. 혹시 석현이한테 들었는가?”
“들었다고나 할까요……. 뭐 비슷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보았지. 직접.
장면은 꿈처럼 아스라해서 그의 너스레는 에코처럼 뿌옇게 기억됐다. 하지만 그가 웃음이 많고 한국을 그리워했다는 건 알았다.
“저는…… 음, 최석현 씨의 제자 같은 겁니다. 아는 동생이라고 생각하셔도 좋구요.”
“석현이 인간관계라면 꿰고 있다고 생각했네만. 그것도 아니었군.”
“자기 얘길 남한테 가볍게 말하고 다니던 사람은 아니니까요.”
“그랬지. 확실히 그랬어…….”
우린 서로가 모르는 최석현에 대해 말해 주었다.
기억이 흐릿해서 잊은 에피소드들이 이용하 교수의 재구再構로 채워졌다. 나는 최석현이 교수를 만나기 전의 이야기들을 건네주었다.
서로에게 없는 조각들을 공유하며 우리 안의 최석현이 점점 더 분명해졌다. 상상 속의 그는 어눌하게 웃고 있었다.
도착한 곳은 한국대에 있는 이용하 교수의 교수실이었다.
그는 날 앉히고 커피믹스를 대접하더니, 방 안쪽에서 종이 박스 하나를 들고 와 탁상에 올려놓았다.
“……이게 뭔지 알겠는가?”
“석현 씨의, 유품이네요.”
난 이 박스가 의미하는 것을 깨닫고 살짝 침음했다.
“그래, 유품이네. 보통은 태우거나 같이 묻었겠네만 아직도 내게 있지. 그저 동료에 불과했던 나한테 말일세. 그건…….”
“가족에게 유품이 전달되지 않은 겁니까?”
“그래. 그렇다네.”
이용하 교수는 오랫동안 침묵했다.
그것이 몇 초든 몇 분이든, 그 안에는 지난 몇 년간의 밀도가 담겨 있었다. 진하고 무겁다. 그러나 그는 그 무게를 기어코 혓바닥으로 감당해 내었다. 말소리가 두텁게 떨어졌다.
“그들은, 석현이의 장례식장에 결국 오지 않았네.”
그때 퀘스트 창이 내 앞에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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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수학 신동의 수리적 통찰력] : 퀘스트 발생!
- 최석현의 유품을 가족에게 전달해 주세요.
- 보상 : 청색 카르마, 전달의 신속성과 정확성에 따라 차등 지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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