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능이 자꾸 늘어-55화 (55/164)

<재능이 자꾸 늘어 55화>

10. 냉정과 열정 사이 - 6

*   *   *

스스로 평하길 장건철 회장은 돌덩이 같은 심장의 소유자였다.

사람들은 그걸 강한 의지, 대쪽 같은 성격, 단호한 추진력 따위로 해석했지만, 이재익 실장은 조금 다르다고 생각했다.

돌덩이는 강철보다 느리게 달아오르지만 오랫동안 온기를 머금었다. 쇠붙이가 한없이 차갑고 한없이 뜨거울 때에도 돌덩이는 적당히 따듯해질 수 있었다.

그에겐 커다란 열정은 없었다. 자본주의적 냉정함으로 무장한 것도 아니다. 다만 과거에 그를 결정지은 열기와 냉기가 관성처럼 남아 지금도 엇비슷한 비율로 심장을 달구었다.

단지 그뿐인 남자.

잘 살펴보면 LS그룹의 성장도 장건철 회장의 성향과 닮아 있었다.

극적인 도약은 없지만 반대로 이렇다 할 위기도 없었다. IMF는 왔나 싶을 정도로 휙 지나갔고, 유가파동이 경제를 뒤흔들어도 단단히 버텼다. 그는 그렇게 대한민국에서 손에 꼽히는 대기업을 일궈 냈다.

누군가는 우유부단한 심장이라 하겠지. 또 누군가는 꾸준한 뚝심이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재익 실장은 그냥 둘 다라고 결론내린 지 오래였다.

“올해 카이로스 예술 축제 규모가 왜 이렇게 쪼그라들었나?”

보고 문건을 쓱 읽던 장건철 회장이 역시나 놓치지 않고 지적했다.

언짢은 말투였지만 이 실장은 당황하지 않았다.

“부회장님 지시였습니다.”

“난 그렇게 지시하지 않았는데?”

“부회장님이 대신 지시하셨나 보죠?”

“그러니까 왜 그놈이 날 대신하느냔 말이야.”

“부회장이니까요.”

“날 설득하지 마, 이 실장. 자네가 자꾸 그러면 진짜 설득되어 버린다고.”

“제 일이 이런 거니까요. 애당초 부회장에게 예산 책정 권한을 주신 건 회장님이셨습니다.”

“나도 알아. 아니까 하는 말이지. 괘씸한 놈 같으니.”

장건철 회장이 콧방귀를 뀌며 문서 위에 숫자와 글자를 덧붙였다.

주로 예산과 규모에 첨삭이 가해졌다. 가책정된 기존 예산안에서 두 배 이상 뻥튀기된 숫자들은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이걸 부회장에게 가져가면 그 아비랑 얄미울 정도로 흡사한 콧방귀를 뀌어 가며 다시 예산을 깎아 낼 테지.

그게 몇 번 반복될 테고, 가운데 낀 이재익 실장만 녹초로 만든 끝에 작년과 비슷한 수치로 조정될 것이었다.

그건 개짓거리였다.

이 실장은 장건철을 개인적으로 존경했지만, 그 존경은 이걸 개짓거리로 규정하는 일에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부자 사이의 자존심 싸움은 집에 가서 좀 하시지. 회사 일로 이러느니 차라리 테트리스로 자웅을 가리는 게 몇 배는 어른다울 듯했다.

“자, 다 됐네. 고생 좀 해, 이 실장.”

“예. 고생하겠습니다.”

“음? 말에 뼈가 있구만.”

“뼈 있어도 잘만 씹어 드실 거 아닙니까?”

“요새 임플란트가 좋아. 자네도 해 봐.”

“그러고 싶어도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누구 때문에 바빠서.”

이 실장의 소심한 불평에 장건철 회장은 껄껄 웃었다.

그러나 깊지도 높지도 않은 웃음소리는 금세 갈피를 잃었다. 소리가 머물던 곳마다 잔향이 씁쓸했다.

부자끼리 얼굴 붉히고 싸우기 싫어 애꿎은 부하 직원이나 고생시킨 게 벌써 몇 년째.

이걸로 시원스레 웃자니 본인도 걸리는 거겠지. 그의 웃음은 솔직함과 부끄러움 사이에 걸쳐 있어서 모호했다.

그러나 이재익은 우수한 비서였다. 고용주의 감정이 자조로 넘어가기 전에 빠르게 주제를 전환하는 노련함을 발휘했다.

“그럼 오늘은 공원에 들르십니까?”

“그래. 요새 통 못 갔으니, 이번 기회에 한번 들러야겠지. 최근엔 별일 없지?”

“제가 알기로는 그렇습니다. 매번 그렇게 확인하실 바에야 그냥 관리인을 두시는 게?”

“거 무서워서 어디 하겠나.”

“예?”

“진욱이 놈이 그것도 아깝다고 할 거 아닌가.”

“설마 그러겠습니까.”

진욱은 장건철 회장의 아들, 그러니까 장진욱 부회장을 뜻했다.

이 실장은 이렇게 말하면서도, 이 일에 한해서는 설마가 자주 사람을 잡아 왔으므로 확신하지 못했다.

“강 기사. 민욱공원으로.”

검은색 벤츠 대형 세단이 그들을 실어 날랐다. 색이 점차 진해지는 오후의 햇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아, 그래도 바깥세상은 평화롭구나…….

……하고 생각했던 이재익의 감상은 민욱공원에 도착한 순간 산산조각이 났다.

“…….”

“…….”

말을 잃은 두 남자의 뒤편으로 젊은 연인이 지나가며 재잘거렸다.

“어라? 저 석상 왠지 아까랑 모습이 달라진 거 같은데? 오빠, 맞지? 저거 원래 저런 거야? 막 오전이랑 오후랑 바뀌어? 응?”

“어? 어어? 어? 어어어?”

“뭐야. 이 사람 갑자기 고장 났네.”

“저런 건 인터넷에 없었는데!”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깜짝 놀라며 사진을 찍으니 아마 이쪽 눈이 잘못된 건 아닐 것이다.

“도, 도련님 작품이……. 갑자기……. 이게 왜……. 누가 이걸 이렇게…….”

[문명인 오디세우스]는 장민욱의 유작이었다.

본래 장건철 회장은 파손을 염려해 저걸 미술관에 두려고 했었다.

그러나 장민욱이 강력히 반대했다. ‘미술은 되도록 미술관 밖에 있어야 한다.’라며 아비를 설득하고, 심지어 유언장에까지 써서 못을 박아 뒀다. 그래서 결국 공원에 전시된 것이었다.

그런데 우려했던 일이 결국 일어났다.

그냥 망가뜨린 것도 아니고, 작품의 방향성을 뒤트는 재창작이었다. 모나리자가 심심하다고 그 위에 눈썹을 덧칠한 격이었다. 그건 단순한 훼손이 아니라 작가에 대한 모독이었다.

“제, 제가 반드시 범인을 찾아오겠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제가 근처에 CCTV를 설치해 놨습니다. 그러니…….”

“푸…….”

“푸……?”

“푸하하하하핫!!”

장건철 회장이 돌연 웃어 젖히기 시작했다.

회장님이 충격에 돌아 버리셨는가, 의심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 실장에게 ‘정신병증도 119를 불러야 하는가’를 고민케 만든 폭소는 그 후 몇 분 동안이나 지속됐다.

“……괜찮으십니까?”

“응? 아, 어어. 괜찮지. 괜찮고말고. 근래 들어 상태가 가장 괜찮은 것 같네만. 아아, 오랜만에 신 나게 웃었구만. 크히히…….”

“……역시 안 괜찮은 거 같은데.”

“뭐라고?”

“아닙니다. 어쨌든 범인은 제가 반드시 잡아 오겠습니다.”

“범인? 무슨 범인?”

“예? 작품을 저렇게 망쳐 놓은 범인이 있을 거 아니겠습니까? 규모가 큰 것으로 봐서는 아마도 팀 단위의…….”

“아아, 그렇게 보이나? 아냐. 저건 작품을 망친 게 아니라 변화시킨 거야.”

“……음, 변하긴 많이 변했습니다만…….”

“어쨌든 누가 저런 건지 궁금하긴 하군. 알아 올 수 있겠나?”

“예, 그럼 지금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그래. 난…… 보면서 좀 생각을 해야겠군.”

이 실장이 떠나고, 장건철 회장은 새로이 탈각한 석상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그의 눈은 앞을 보았지만 또한 깊은 과거로 향하였다.

-전요, 아버지. 예술을 신성불가침적인 뭔가로 생각하는 게 싫어요. 그런 건 너무 딱딱하잖아요. 자유롭지도 않고. 그래서 미술관에 두지 말자는 거예요.

원래 그런 거 아니냐? 예술이란 게?

그게 그렇게 가치 있다면 잘 보존해서 만인이 감상하도록 해야 하지 않겠느냐?

-작품을 얌전히 모셔다 두면, 그래요, 예쁘겠죠. 예쁜 박제가 되는 거예요. 영원히 변하지 않아 거기 영원히 죽어 버린 시체. 전 제 작품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삶은 변해요. 달리 말해, 변하는 것만이 삶이에요.

그러면?

-제 작품 위에 누군가 낙서를 해 줬으면 좋겠어요. 물론 의미가 있는 낙서를. 계속해서 릴레이처럼 이어지도록. 제 작품은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재창조의 퇴비가 되었으면 해요. 그럼 제 이야기는 죽지 않아요.

-전 영원히 박제되는 레닌이 아니라 한순간 불타오르는 틱꽝득과 전태일이 되고 싶어요. 저의 불은 사라지겠죠. 하지만 제가 피운 불은 무수히 옮아 가 미래로 향할 거예요. 저의 찰나로 영원을 지피는 거죠. 멋있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모든 것이 변할 거예요, 아버지. 변해 가는 미래 속에 저도 있었으면 좋겠어요.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사실은 아니지만 장민욱은 루게릭을 앓고 있었다.

아들은 굳어 가는 손으로 돌을 깎아 내며 영원을 말했다. 멈춰 가는 몸으로 변화를 논했다. 이건 끝이 아니라 삶이 옮아 가는 것일 뿐이라고, 굳어서 어눌해진 혀로 말했다.

그런가.

그래서 이런 걸 만들어 둔 것이냐. 이건 내게 보내는 선물이냐, 아니면 질책이냐.

“…….”

한참 생각에 잠겨 있으니 이 실장이 CCTV 영상을 복사해서 돌아왔다.

태블릿은 한 소년이 석상에 기어 올라가는 장면을 재생해 냈다. 석상에서 뭔가를 뽑아내더니, 석상이 스스로 움직여 지금의 형상이 되는 것까지.

그걸 본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소년이 빼내어 손에 든 물건들이 눈에 익었다. 조각칼, 끌, 붓, 팔레트, 전부 다 민욱이가 평생토록 쓰던 애장품들이었다.

그렇다.

민욱은 아비인 자신만이 알아챌 수 있는 열쇠를 저기 숨겨 놓은 것이었다. 부디 기억해서 찾아내 주길 바라면서.

그리하여 작품이 변하고, 의미가 달라지고, 그 변화 속에서 이윽고 불멸이 된 자신을, 아비에게 기필코 보여 주고 싶어서.

그러나 자신은…… 저 석상을 수십, 수백 번 봤지만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장건철의 입장에서 예술 작품이란 여전히 감상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건드려선 안 된다는 생각이 저 안에 키가 있다는 발상 자체를 차단했다.

‘……아비 자격이 없구나. 너는 그렇게나 말했는데, 나는 전혀 귀담아듣지 않고 있었어.’

모든 건 변해야 한다고,

그러니 변하게 해 달라고,

진정 그런 말이렷다.

“이 실장. 이 학생, 찾아낼 수 있겠나?”

“예. 이자에게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을 거실 생각이십니까?”

“소송? 이보게, 장난으로 한 말이지? 이걸 보고도 그런 생각이 드나?”

“어쨌든 작품을 발로 밟고 훼손하지 않았습니까?”

“그게 원작자의 의도라면?”

“하지만 이건 LS그룹의 자산…….”

“그만하게.”

이 실장은 장 회장이 왜 정색하는지 알 수 없었기에, 그 즉시 직장인의 미덕을 발휘하기로 했다.

“찾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회장님.”

“그래? 얼마나 걸리겠나? 좀 만나 보고 싶은데.”

“더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이미 찾았습니다.”

“……응?”

“지금 이 공원에 있더군요. 바로 만나 보시겠습니까?”

장건철 회장이 곧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익재는 그의 돌덩이 같던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   *   *

스무 명째 손님을 받고 있자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예. 다음 분 오세요.”

빠진다. 팔이 빠지고 있다. 젠장. 팔 같은 건 그냥 탈착 가능한 부착물인 거다! 그게 아니면 이렇게 덜렁거릴 리가 없어.

위기는 신체 이상만으로 찾아오지 않았다.

그보단 정신 공격이 더 강력했음을 미리 밝혀 두겠다.

“화가님 예쁘게 그려 주세요! 자기야. 여기 앉아. 어딜 가는 거야? 네 지정석 있잖아. 당연히 내, 무, 릎, 위.”

내 안의 [미학적 재능]이 발동했음인가, 갑자기 공예가로서의 충동이 들끓었다. 그러니까 저놈의 무릎을 반대로 꺾어서 진짜배기 의자로 만들어 버리고 싶었다.

이 공원에는 뭐 이렇게 연인이 많은 거냐.

어디서 이렇게 증식을 하는 거야.

그러나 질린 와중에도 난 자본주의 미소를 잃지 않았다. 지금의 나는 그림으로 행복을 전도하는 젊은 화가 장민욱. 그래, 웃자. 웃는 것이다.

“네에. 예쁘게 그려 드릴게요.”

그리고 열심히 목탄을 그어 초상화를 완성시켜 나갔다.

내가 왜 그림을 그리고 있느냐면, 장민욱이 예술가로서 가장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기가 바로 젊을 적 초상화 알바를 하던 때라 스스로 자평했기 때문이다.

재벌가 도움 하나 받지 않고, 모든 학비와 생활비를 알아서 벌어 쓰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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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 총론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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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일단 요걸 얻어 놓고, 장민욱의 젊은 시절에 빙의해 그림 노다가에 돌입.

이제 손쉽게 황색 카르마를 벌어들일 일만 남았을 텐……데…….

그러나 스무 번째 그림을 완성시켰음에도 카르마는 생기지 않았다. 예술이란 게 의외로 중노동에 가깝다는 사실만이 덜렁이는 어깨와 쑤시는 삭신으로 증명되고 있을 뿐이었다.

“와아, 그림 진짜 잘 그린다. 화가님 존잘님이시네여. 이거 SNS에 올려도 되여어?”

“네, 그럼요. 당연히 되지요.”

“화가님 이름 뭐예여? 인스타 하세여? 해시태그로 띄우게여.”

“인스타는 안 합니다. 그냥 제 예명 ‘카이로스’만 적어 주세요.”

“카이로스? 오. 뭔가 라노벨에 나올 거 같은 이름이다.”

“……하하.”

카이로스는 그리스 신화의 ‘기회의 신’이며, 장민욱이 젊을 적에 쓰던 예명이었다.

최대한 유사하게 상황을 조성하려고 예명도 따라 쓰고 있는데 아직까진 개뿔 아무것도 없었다.

장소가 문제인가?

그것도 아닐 텐데. 애당초 민욱공원은 장민욱이 초상화 그리던 옛 공터를 중심으로 건립됐다.

그럼 뭐가 문제지? 뭐가 빠진 것일까?

‘……정 안 되면 종목을 바꿔 봐야 되나.’

놀랍게도 장민욱은 여러 개의 기술을 동시에 보유했다.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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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 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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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소 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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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공예 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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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 세 분야 모두에서 경지에 이른 진짜배기 천재였다.

황색 카르마를 얻을 포인트도 다양하다는 뜻이므로 꼭 회화에 매달릴 이유는 없다.

근데 조각이나 소조는 육체적으로 더 힘들 게 뻔하잖아? 그러니 웬만하면 회화로 뽕을…….

그때 누군가 내 이젤 앞 햇빛을 가렸다.

“혹시 나도 좀 그려 줄 수 있습니까?”

정장을 세련되게 차려입은 노신사가 거기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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