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이 자꾸 늘어 58화>
10. 냉정과 열정 사이 - 9
“와. 김송헌 오랜만이네. 이게 얼마 만이냐?”
그리고 해맑게 웃으며 김송헌에게 안부 인사를 건넸다.
사방이 조용해졌다.
그러나 그건 긴장감이 만든 딱딱한 고요가 아니라 영화 시작 전에 사람들이 입을 다무는 이유와 비슷했다. 우리 반 학생들이 좀 덜 상식적이었다면 이렇게 말해 버렸을 것이다.
-오, 꿀잼 매치.
어디선가 팝콘 씹는 환청도 들리는 듯했다.
물론 난 이 상황이 기꺼웠다. 이전의 난 조연도 아니었다. 엑스트라조차 되지 못했다. 다만 배경 어딘가에 존재하는 발닦개 같은 것으로서 누군가 밟고 지나갈 때에만 잠깐씩 보이는 소품에 불과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소품이었던 내가 배우로서 이 무대 위에 올라와 있었다. 그러므로 이 촌극의 장르는 호러다. 움직이지 말아야 할 것이 대뜸 움직여서 이빨을 들이밀고 있다는 점에서.
요컨대 김송헌의 입장에서 지금 상황은 새벽의 저주나 사탄의 인형과도 같겠지.
“……하.”
김송헌이 같잖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음, 이건 클리셰 같은 것이지. 원래 호러 영화에서는 재수 없게 웃는 놈일수록 잔챙이고 비명이 맛깔날수록 오래 살아남는다.
실수했구나, 김송헌. 살아남고 싶었으면 당장 비명을 지르면서 엎드려야만 했을 텐데.
장르의 법칙에 의거해 넌 이제 곧 퇴장이다. 앞으로는 단역을 전전하다 아예 이 바닥에서 잊히게 만들어 주마.
“에효. 또 뭔 지랄을 하자고……. 저거 내 옆에 못 오게 해라. 병신스러움이 옮을라.”
세 놈이 불쑥 튀어나와 김송헌으로 가는 길을 막아섰다.
순서대로 차재철, 이요한, 박종철이었는데, 늘어놓고 보니 어쩐지 키 순서대로 서열이 정해진 느낌이라 난 피식 웃고 말았다.
그 뒤의 김송헌은 무척 언짢다는 표정이었다.
거기엔 벌레나 소매에 묻은 얼룩 따위를 볼 때의, 그러니까 하찮은 것 때문에 눈을 더럽혔다는 귀족적인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본인의 심리적 우월감을 챙기고 타인에게 모멸감을 주는, 정확히 그 목적으로만 쓰이는 얼굴을 정면으로 보이며 녀석이 말했다.
“참 나. 뭘 믿고 그리 나대나 싶더니, 고작 이거냐? 반 애들 몇 명한테 꼬리 쳐서 친해진 거? 정말 그걸로 될 거라고 생각한 거야? 발상이 귀엽네. 좀 불쌍하기도 하고. 쯧쯧. 나 없는 동안 애썼다.”
“…….”
“근데 말이야, 이한열. 넌 모르겠지만 세상은 참 넓단다. 여긴 좁아. 너무 좁지. 저 바깥으로 시선을 돌려 볼까? 매일같이 뼈 빠지게 돈 벌어서 비싼 학비 내는 부모님들을 생각해 보자고. 아아. 참 고생들이 많으셔. 그런 분들, 나도 개인적으로 아주 존경해.”
김송헌은 모노드라마에 선 배우처럼 얼굴 근육을 섬세하게 사용했다. 존경한다는 말을 할 때는 애국지사가 따로 없었다. 역시 정치인의 자식답게 낯짝부터 기만적이었다.
“그 존경스러운 분들이 갑자기 직장을 잃으면 슬프겠지? 분통도 터지고. 근데 안타깝게도 그 억울한 일이 잘도 벌어진단 말이야. 의외로 손쉽게. 힘 있는 누군가의 한마디만으로. 그리고 나는 그 사람들 전화번호가 내 핸드폰에 빼곡한 사람이지.”
김송헌이 학급을 쓱 둘러보다가 내게 다시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리고 이 반에 몇 명 정도는……. 내가 어떻게 해 버릴 수 있을 거 같은데. 어때, 그때도 쟤들이 네 편을 들어 줄까?”
“열다섯 명.”
“……뭐?”
“그중에 일곱 명이었지. 나머지 여덟은 어떻게 됐냐? 김송헌.”
“…….”
그 몇 마디에 김송헌의 얼굴이 싹 굳었다.
내가 언급한 숫자들, 녀석의 입장에서도 꽤 익숙할 것이었다.
날치기 사건으로 총 열다섯 명이 기소되었으며, 그중 일곱 명만이 무죄 및 사회봉사 처분을 받았다.
나머지 여덟 명은?
몇 명은 소년원에 처박혔고 그중 일부는 집행 유예.
그리고 눈앞의 차재철은 집행 유예에 해당한다. 소년원이 가장 엄한 형벌이라고 생각하는가? 관점에 따라선 꼭 그렇지만도 않다.
“차재철. 소년원행보다 집행 유예가 낫다고 생각하고 있냐? 설마 그 정도로 생각이 없진 않겠지?”
“……뭐, 뭐라는 거야.”
“멍청한 놈아. 소년부에 송치된 사건은 전과에 안 남아. 소년원에 갔다 와도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은 대개 지워진다. 근데 지금의 넌 전과자다. 몸만 자유로울 뿐 열다섯 명 중에 가장 중범죄자로 간주되고 있다는 소리야…….”
“닥쳐, 이한열! 차재철, 저 새끼 말 듣지…….”
“김송헌이 이런 설명을 해 주긴 했어? 아니, 사회봉사도 안 해도 되니까 더 낫다고 말하지 않디? 대체 왜 그딴 말을 한 걸까?”
“이요한! 박종철! 저 새끼 입 닥치게 만들어!”
그러나 난 놈이 나서기 전에 기어코 진실을 끄집어내 차재철의 심장에 꽂아 넣었다.
“네가 가장 몸빵이 되니까다! 븅신아! 다 구하긴 곤란하고! 넌 구하기 애매한데! 너까지 소년원에 보내면 주변에 힘쓸 놈이 없으니까! 그래서 일부러 집행 유예로 돌린 거라고! 김송헌의 우산에서 너만 쏙 빠지고 덤탱이까지 쓴 거다!”
이요한이 달려들었지만, 난 주변에 있던 걸상을 걷어차서 놈의 발밑을 어지럽혔다.
결국 걸려 넘어지는 놈을 피해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 와중에도 나는 시선만큼은 정면에 곧게 고정시켜 두었다.
“너희도 정신 차려라. 박종철, 이요한. 김송헌이 너네 뒤 다 봐줄 거 같아? 이번에 무죄 받은 놈들은 뭐 죄질이 낮아서 그런 줄 알아? 천만에.”
“……이런 씨…….”
“고위 공무원 자제! 기업 총수 손자! 법조인 집안! 다 그런 식이었다. 너네는 그중 뭐라도 해당되어서 이러는 거냐? 그렇게 개처럼 엎드려서 충성하면? 쟤가 알아줄 거 같아? 그거 딱 삶아먹기 좋으라고 모가지 내놓는 짓이다, 븅신들아.”
김송헌, 역시 정치인 아들이라 뭘 짚어야 하는지 안다.
내가 인기를 얻으니, 지지층을 건드려서 무너뜨려야 한다고 본능적으로든 이성적으로든 판단한 거겠지. 옳다. 훌륭한 판단이었다.
근데 네가 한 판단을 내가 못 내리겠냐. 정치 만렙 이완용이 내 두개골에 들어앉아 있는데.
“김송헌. 왜 넌 항상 누군가의 뒤에 있는 거냐. 진짜 그게 멋있다고 생각해? 아, 뒤에서 부려야만 권위자로서의 카리스마가 사니까? 아니다. 아니야. 네가 카리스마라고 주장하고, 그리고 네 똘마니들에게 그렇게 믿게 만든 그것, 그건 말이지…….”
“……너 이 새끼 입 닥치지 못…….”
“사실은 책임 전가성 쇼맨십에 불과해. 겁쟁이의 도피 행위지. 제 손 안 더럽히려고 남한테 떠넘기는 것. 아무리 거창하게 떠들어도 본질은 그거다. 그리고 능력 밖의 일이 벌어지면 이번처럼 그냥 버리는…….”
“입 닥치지 못해!!”
김송헌이 드디어 움직여서 내 멱살을 잡았다.
숨결이 얽히는 가까운 거리, 배우로서의 가면을 벗어 버린 날것의 살갗이 솔직하게 경련하고 있었다.
아까는 그래도 제법 정치인 같았는데, 이제 보니까 흉내만 낼 줄 아는 초짜였구만.
소개하건대 윤정희라고, 이쪽 계열의 최고 권위자가 있으니까 가서 안면근육조형법 기초 강론부터 수강하고 다시 오길 바란다.
뭐 그나마 칭찬하자면…….
“드디어 제 발로 오셨네. 좋아. 이제 좀 용기가 있어 보여. 유치원에서 초등학생 정도로 격상시켜 줄게. 아-주 축하해.”
“……넌 대체 뭘 믿고 이러는 거냐? 고아 주제에 대체 뭐가 그렇게…….”
“맷집.”
“……뭐야?”
“내가 맷집이 제법이거든. 덕분에 단련되었으니 조금은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한번 시험해 보지그래? 기꺼이 맞아 줄게.”
난 때리기 좋으라고 두 팔을 뒤로 치우고, 왼쪽 턱도 절묘한 구타 각도로 세워 주었다.
휘두르면 바로 클린 히트를 올릴 수 있는 친절한 자세였다.
“아, 너 주먹은 못 휘두르나? 그건 가위바위보 할 때 말고는 안 쓰지?”
도발을 또 해 보았지만,
내 멱살을 쥔 두 손은 시간이 갈수록 진동의 빈도와 강도만 올라갈 뿐이었다. 그 자세에서 꼼짝하질 못한다.
그렇겠지.
그럴 수밖에 없겠지.
정치인 자제이기 때문에 힘이 생겼지만, 또한 그렇기 때문에 너는 한없이 취약하다.
잃을 게 너무 많으니까.
반을 장악했던 과거에는 괜찮았겠지. 툭툭 치고, 머리카락을 뽑고, 체육복을 찢고, 그래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모두가 침묵해 주었을 테니까.
근데 이젠 아니지.
모두가 네가 주먹을 드는 순간만 기다리며 녹화 버튼을 대기시키고 있다.
이제 막 큰일을 수습하고 돌아왔는데 또 구타 사건에 연루된다?
그쪽 정치인 아비께서는 아예 호적을 파 버리는 걸 진지하게 고려하실걸. 그럼 네가 내세우던 그 쥐꼬리만 한 이점마저 사라지는 거지.
그게 두려운 거지?
그런 거잖아?
“쫄보 새끼.”
경멸을 숨기지 않고 그의 면전에 때려 박았지만, 김송헌은 종이 칠 때까지 어쩌지도 못한 채 씩씩대기만 했다.
띵동댕동-♬
“빌어먹을!”
그리고 그대로 도망쳤다.
제 추종자들을 그대로 방치하고 교실을 나가 버린 것이었다.
하, 어이가 없네. 고작 이런 놈 때문에 빌빌거린 과거들이 안타까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미안해 얘들아, 소란을 일으켰네.”
책상과 걸상을 정리하고 자리에 돌아오니, 김선기가 치켜세운 엄지로 날 반겨 주었다.
“오올, 말빨 지리구여. 김송헌 저거 집에 가서 우는 거 아니냐?”
“…….”
베갯잇을 적시며 질질 짜는 김송헌을 상상했더니 그건 그거대로 거북해서 할 말을 잃었다.
차재철과 박종철, 이요한도 뒤이어 교실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과연 김송헌을 따라갔는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 * *
“……아, 나 완전 떨려. 한열아 어쩌지.”
그러게.
널 어째야 되겠냐.
난 실제로 손을 달달 떨고 있는 전상진을 보며 참담함을 느꼈다.
“데이트 신청부터 이러면 데이트 당일엔 어쩌려고 그러냐.”
“그거 말인데, 혹시 한열이 너 그날 시간 되니……?”
“뭐? 그거 설마 나도 데이트에 같이 가자, 그런 말은 아니겠지?”
“……안 돼?”
참담함이 암담함으로 도약하였다.
“뭐라는 거야, 당연히 안 되지. 내가 간다고 해도 네가 막아야지 인마. 내가 옆에 있으면 진도 한 발자국이라도 나가겠어?”
“……근데 네가 없으면 진도는커녕 토를 해 버릴지도 몰라.”
“그건 좀 문제네.”
“그치? 그러니까…….”
“아 그래도 안 돼. 배윤하가 부처님이라도 널 경멸해 버릴걸. 그냥 우황청심원 다섯 개 씹어 먹고 나가.”
“으으……. 자신 없는데…….”
이놈과 배윤하를 연결시키자고 결심한 과거의 나를 살해하고 싶어졌다. 아, 지금이라도 그만두면 되나? 근데 막상 그만두자니 들인 노력들이 아깝고…….
그렇게 저마다 동상이몽의 고민을 품고 야구부 대기실에 도착했을 무렵이었다.
대기실 안쪽에서 날카로운 외침이 들려왔다.
“그만둬!!”
배윤하의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