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이 자꾸 늘어 59화>
10. 냉정과 열정 사이 - 10
“그만둬!!”
배윤하의 목소리였다.
밀폐된 공간. 찢어지는 여성의 목소리. 정체불명의 덜그럭거림.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라면 신파 드라마의 오프닝 레퍼토리를 열다섯 개 정도 떠올릴 수 있을 만한 소스였고, 전상진은 상상력이 풍부한 편이었다.
녀석은 상상한 그대로 오해해 버렸다.
“윤하야!!”
전상진이 호들갑스럽게 문을 박찼고, 나는 그보다 좀 천천히 뒤따랐다.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목소리 톤이 별로 시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연 안쪽 상황은 험악하긴 했지만 긴급한 범죄 상황과는 거리가 멀었다.
머쓱해진 전상진은 히어로에서 쫄보로 빠르게 복귀했다.
“어! 왜!”
“……어. 음. 아. 아, 안녕?”
“안녕하지 못하니까 얘들 좀 말려 봐아아아……!”
“어어…….”
두 야구부원이 멱살을 잡고 뒤엉키고 배윤하는 그 둘을 떼어 내려 애쓰고 있었다.
영락없이 부대끼는 물소 사이에 낀 치와와 꼴이었다.
그러나 그 노력이 아무 소용없던 건 아니었는데, 그 둘은 으르렁거리는 와중에도 사이에 낀 배윤하가 염려된 것인지 더 야만적으로 뒹굴지는 못했다.
대신 입이 야만스러워졌다.
“네가 그딴 식이니까 계속 민폐만 끼치는 거지! 부끄럽지도 않냐?! 이……! 이런 시베리안 허스키 같은 놈아!”
“뭐!? 민폐는 네가 끼치는 거겠지!! 너야말로 시야가 모기 눈구멍만 해서 맨날 실수만 하는 거 아니냐! 이 말라리아 같은 놈아!”
“십장생 거북 같은 놈!”
“왜 하필 거북인데!”
“제일 못생겼으니까!”
“너 나랑 쌍둥이거든!”
“내 유전자가 더 세거든?!”
물론 여기서의 야만은 상스럽다기보다 비문명적이라는 뜻에 가까웠다. 어휘력이 아주 원초적이다.
“정말! 너네 그만두지 못해!? 아오! 이 떡대들! 힘만 무식하게 세서! 상진아! 잡아당겨!”
“어어……!”
“이한열 너도 좀 도와아아!”
굳이 그럴 것까지야.
근육을 귀찮게 만들기 싫었던 나는 그냥 폰을 들어 올려 사진을 찰칵 찍었다.
“너네 당장 안 떨어지면 학생회장님한테 이거 보내 버린다. 야구부 통째로 징계 먹고 싶으면 어디 계속해 봐.”
상황은 즉각 정리되었다.
학생회장에겐 부활동 지원비를 조정할 권한이 있었고, 그건 곧 회식 장소를 고깃집에서 산채비빔밥집으로 바꿔 버릴 수 있다는 걸 뜻했다.
그 정도면 운동부원에겐 서로의 증오를 잠시 내려놓기에 충분한 중대사였다.
그러나 떨어지고도 두 녀석은 계속 으르렁거렸다.
“고구마 같은 새끼……!”
“지는 싹 튼 감자처럼 생겨서는!”
두 야구부원, 그러니까 동명 해명 형제는 일란성 쌍둥이에 머리도 세트로 빡빡이고 옷도 같은 야구 복장이라, 저렇게 낯짝 맞대고 서로를 욕하고 있으니 격렬한 자아비판처럼 보이는 면도 있었다.
뭔가 웃기네.
헉헉 숨을 몰아쉬는 배윤하에게 슬쩍 물었다.
“그래서 이거 무슨 상황인데?”
“헉헉, 그러니까 이게…….”
“여기 한열이 왔으니까 직접 물어보면 되겠네!”
“……무…….”
내 시점에서 왼쪽의 빡빡이, 그러니까 양해명이 목소리를 빽 높였다.
“한열이 너 얘 때문에 공 안 던지는 거 맞지?!”
“……아.”
“그게 왜 나 때문이냐?! 한열이가 스스로 고사한 건데!”
“너한테 미안하니까 그랬겠지! 네가 그 못생긴 얼굴로 죽상을 하고 있으니까!”
“뭐야?! 니가 더 못생겼거든?!”
“하여튼 무능하면 지 무능한 걸 좀 알아 처먹어야지! 뭘 대단한 실력이라고 미련하게 붙잡고 있어? 주전 자리 내놓고 그냥 꺼져!”
“하이고. 지는 엄청 유능한 척하고 있네. 니 지시가 엉망이니까 내가 계속 헛손질하는 거 아니냐?! 그리고 너 자꾸 형한테 반말 쓸래?”
“누가 니 형이야?! 내가 먼저 귀 빠졌거든? 우리 엄마가 그랬거든?”
“우리 아빠가 내가 먼저 나왔다고 했거든?!”
대충 알겠네.
양해명은 포수고, 양동명은 투수다. 서로에게 과를 떠넘기기 적당했다. 투수는 포수의 리드가 엉망이라 실투를 했다고 비난하고, 포수는 투수의 제구가 꽝이라 계속 안타를 맞는다고 일갈할 수 있다.
내가 볼 땐 그냥 둘 다 총체적 난국이었지만…….
어쨌든 그동안은 꾹 참아 왔던 것이, 그럴듯한 대안―아마도 나다―이 등장하자 터진 게 아닐까 싶었다. 특히 포수 쪽에서. 그런데…….
“그만들 좀 해!!”
이번엔 내 오른쪽에서 소리가 빽 터져 나왔다.
배윤하는 아침 대나무 같은 모양새로 거기 서 있었다.
바닥에서 꼿꼿이 돋아난 마른 몸 가장 위쪽부터 이슬이 주르륵 흘렀다.
몇 방울의 눈물은 이곳의 모든 남정네들을 당황시켰다.
“……어. 어……. 야. 니가 욕하니까 윤하 울잖아.”
“아니, 니가 자꾸 소리 지르니까 그러는 거 아니야.”
“둘 다 입 다물어. 씨이……. 나 야구부 나가는 꼴 보고 싶으면 계속 떠들어 봐.”
“네.”
“응.”
“이익! 짱 나……. 파데 다 번졌잖아…….”
“미안…….”
“잘못했어…….”
“사과는 나한테 하면 안 되지!”
두 형제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진심 없는 사과와 진정성 없는 화해가 진척되려 할 즈음.
이한승 코치가 대기실에 불쑥 난입했다.
“오! 여기 다 있었구나!”
관계자인데 어째서 난입이냐고?
기억해 두는 것이 좋다.
눈치 없는 등장은 설사 본인 자택일 지라도 난입 내지 침입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 시대 모든 아버지들이 가정에서 외부자가 되어 버리는 이유다.
“한열아! 오늘은 공 던지고 싶은 기분이 안 드니?!”
“안 드는데요.”
“아니, 잘 생각해 봐. 분명 네 안에는 위대한 투수의 혼이 잠자고 있다니까. 한번 그 혼을 느껴 보면 손이 근질근질해서 참을 수 없을걸? 자, 날 믿고! 어서 느껴 봐!”
“코치님은 일단 분위기를 느끼셔야…….”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아재는 눈치가 없었다.
그렇게 배윤하는 한 번 더 폭발했고, 전상진은 긴장했던 게 무색게도 데이트 얘기는 꺼내지도 못했다.
* * *
정리와 청소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깔끔한 안타 소리와 함께 탄성이 들려왔다.
난 철제 펜스를 오른편에 두고 걸었다.
펜스 저편으로 석양이 넘실댔다. 야구부원들이 열정을 뿜으면 하늘이 그걸 넙죽 받아 더 다채롭게 불태우는 듯했다.
그러나 저 까불대는 불꽃도 곧 시퍼렇게 멍들어 사라지고 말 것이었다.
난 그걸 안다.
절절 끓는 열정, 언제나 계속될 것 같던 그 용광로는, 사실 기간 한정에 유료 결제까지 필요한 까다로운 서비스다.
종자돈이, 마땅한 재능이 없다면, 애당초 태우지 않는 것이 낫다.
어설픈 불씨는 당신을 어설프게만 태울 것이다.
그리고 남겨진 당신이 평생 기억할 것은 불꽃이 아니라 어중간한 그을음일 뿐이겠지.
그래서 나는 저 힘찬 함성을 감히 응원해 줄 수 없었다. 그건 무의미하고 얄팍했다.
배윤하가 벤치에 앉아 펜스 저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퉁퉁 부어서 만두 같았다.
축축하기까지 하니 물만두이겠군.
난 물통을 건넸다. 배윤하는 날 보지도 않고 받아서 들이마셨다.
“너 야구부 왜 하냐?”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었다.
그동안 관찰하면서 깨달은 사실.
여긴 인맥을 쌓을 만한 곳이 못 됐다.
운동부 애들은 서클 안에서만 뭉치는 경향이 있다. 관계망이 밖으로 확산되지 않는 것이다.
상진이가 오기 전까진 변변찮은 인재도 없었다.
게다가 대회에서 예선 통과도 못하는 야구부의 매니저라고 해 봐야 커리어의 오점밖에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배윤하는 여기 진득하게 붙어 있다.
그것도 굉장한 감정 소모를 해 가며.
눈치 없는 아빠와 철없는 동생들에 치이며 고군분투하는 장녀의 모습으로.
“동명이랑 해명이, 부모님이 서로 이혼하셨어.”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일단은 잠자코 듣기로 했다.
“동명이는 아버지가, 해명이는 어머니가 맡아서 키우기로 했나 봐. 근데 묘하지. 해명이는 아빠한테 버림받았다고 생각해. 반대로 동명이는 엄마한테 외면받았다 생각하고. 그래서 서로를 미워하는 거야.”
“…….”
“그런데 둘은 여전히 같은 야구부에 있지. 왜일까? 정말 싫다면 아예 안 볼 방법은 많을 텐데. 어떻게 생각해?”
“정말 쓸데없다고 생각한다. 배가 부른 거 같기도 하고.”
“그래?”
정말로.
나라면 한쪽이라도 가진 것에 감사하며 살았을 것이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생각해 봐야 달라질 게 뭔가. 왜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랑 다르네. 난 걔들이 부러웠어.”
“…….”
“어쨌든 서로를 향해 열심히 부딪치잖아. 그래서 자주 깨지지만, 그럴수록 둥그렇게 서로를 닮아 가고 있어. 걔들은 상대에게 서툴러. 하지만 외면하지는 않지.”
“글쎄. 그게 화해로 이어질 것 같지는 않던데.”
“해 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 아닐까?”
“그래서? 그게 네가 야구부에 있는 이유랑 무슨 상관인데? 너 야구 별로 좋아하지도 않잖아. 오히려…….”
“오히려 그 좋아하는 사진부에는 안 들어가고 말이야. 그런 뜻이지?”
“그렇지.”
배윤하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이번에도 뜬금없는 말로 비약했다.
“그러는 너는? 너도 야구 같은 거 안 좋아했잖아. 밴드부는 왜 그만뒀어?”
“……갑자기 왜 나한테 질문이 옮아 오냐.”
“내가 궁금하니까?”
그래, 밴드부 같은 데 몸담았던 적이 있긴 했지. 회귀 전까진.
돌이켜 보자면 열정에 멱살이 잡혀서 끌려 가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열정이 늙어서 은퇴해 버린 지금으로썬 다시 돌아갈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밴드부 사람들도 그걸 반길 것이다.
과거의 난 참 열심이었고, 그건 곧 꾸준한 소음 공해 발생기였다는 뜻이다.
짧게 말해 민폐다. 민폐를 지양해야 하는 건전한 사회인으로서 나는 밴드부를 때려치웠다. 그리고 당신들의 반고리관을 지켜 냈다는 사실에 뿌듯해하기로 했다.
그런 사정을 짧게 세 줄로 줄이면 이런 말이 되겠지.
“별 이유는 없어. 그냥 재미없어진 거지. 적성도 꽝인 거 같고.”
“난 좋아했는데.”
“……뭐가.”
“너 기타 치고 노래 부르는 거.”
“웃기는 소리.”
그 끔찍한 연주가 좋을 수도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당장 고막 상태를 진지하게 검사해 봐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그 처참한 미적 감각에 애도를 보내야 하겠지.
픽 웃어넘기려는데, 그녀의 말이 내 호흡을 막아섰다.
“진짜야. 듣기엔 좀 이상하긴 했지만 그때 넌 행복해 보였거든. 재밌게 치니까 나도 덩달아 즐거워지고, 그랬었는데. 어렸을 땐 작곡도 하고 막 그랬잖아.”
“……그럴 때도 있었겠지.”
“지금은 아니야?”
“아니게 됐지.”
“……그래, 아쉽네. 그럼 앞으로 기타는 안 칠 거야?”
회귀 직전, 죽음을 앞두고는 그렇게나 음악이 하고 싶었다.
그래서 했다.
그때 얻은 수확이라면, 밖에서 쏟아지던 날카로운 비웃음과 안에서 돋아나던 자조의 가시들.
안팎으로 갈가리 찢어진 열정.
그리고 내 안의 가시들은 금속성이라서 차갑게 심장을 식혔다.
“그래.”
“재능이 없어서?”
“……아마도.”
그럼 재능이 생기면 다시 기타를 쥘 수 있을까.
이상하게도, 확신이 생기지 않았다.
자꾸 내가 화젯거리로 세워지는 것이 마뜩잖아서 나는 화제를 강제로 돌려 버렸다.
“상진이가 너 좋아한다.”
생각해 보니 지나치게 돌린 감이 없지 않았다.
물론 남의 감정을 함부로 밝히는 행위는 무례하겠지.
그러나 이 경우엔 딱히 ‘밝히는’ 게 아니므로 문제 될 건 없었다. 무슨 소리냐고?
“응, 알아.”
배윤하도 다 알고 있었단 소리다.
그리고 저주스러울 만치 우수했던 내 [눈치]는 그녀가 그걸 안다는 사실도, 그리고 그녀의 심경도 대강 짐작해 냈다.
“수학여행 때 기회 봐서 고백할 거 같던데. 사귈 거냐?”
“……아마, 그러겠지?”
“‘아마 그러겠지?’ 뭘 남 얘기처럼 말하고 있어?”
“남 얘기까진 아니고. 그냥 실감이 안 난다고 해야 하나…….”
차분하게 말하는 그녀는 벤치와 한 세트로 거기에 붙박인 듯 보였다.
처음부터 그렇게 생산된 공산품처럼.
그 장면은 지나치게 정적이어서 말조차 말풍선 안에 갇혀 버린 듯했다.
“잘 사귀어 봐. 맹하지만 괜찮은 녀석이야.”
“그 정도는 나도 알거든?”
“맹하다는 거?”
“응. 맹하다는 거.”
그녀가 푸힛, 하고 푼수처럼 웃었다.
그러고는 펜스 저편 어딘가로 손가락을 짚었다.
거기선 공이 오가고, 누군가 고함을 치고, 노을이 그들을 쫓으며 그림자를 찍어 내고 있었다.
“멋진 장면이지? 참 못하는데, 그럼에도 힘내고 있잖아. 저 봐, 반짝반짝 빛나고 있어.”
“…….”
“난 저 아이들의 열정을 지켜보고 싶었어. 단지 그뿐이야.”
말뜻을 잠시 헤아리다가, 나는 그녀가 최초의 질문에 답했음을 깨달았다.
갑자기 지금 이 순간을 찍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카메라.”
“응?”
“줘 봐. 사진 찍어 줄게.”
“아, 안 돼. 나 지금 엉망이란 말이야.”
“…….”
그러면서 손으로는 카메라를 건네주는 건 또 뭘까.
이게 그 입은 싫다면서 몸은 정직한 그런 거냐.
세상을 뷰파인더 안에 가두자 구도는 자연스럽게 잡혔다.
노을이 넓게 누운 야구장과 이쪽과 저쪽을 나누는 펜스 그리고 개구리처럼 부은 눈의 배윤하가 하나의 샷에 담겼다. 찰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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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 임계치에 도달했습니다!
- 보상으로 황색 카르마를 200p 지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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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돌이켜 보니 과연 그럴만했다.
-윤하야, 이거 봐라? 윤하 완전 못생기게 나왔다. 흐히히. 괜찮아, 괜찮아. 내 눈엔 예뻐. 그러니까, 못생기게 예쁜 거지. 하하. 괜찮다니까. 앗. 아앗. 아파. 아빠 아픈데. 윤하야. 아빠 뼈 맞았어. 진짜. 겁나 아픔. 아앗!
장면을 예쁘게만 찍던 그가 진짜 미의식을 깨달은 계기.
울고불고 난리 치던 딸을 찍었을 때.
외적인 내러티브와 내적인 구도를 일치시켜 사진에 의미를 담아 낸 순간.
기술자에서 예술가로 변모했던 그때가 재현된 것이었다.
나는 그때 그가 그랬듯이 찍어 낸 사진을 모니터링했다.
그리고 온당한 감상을 읊어 냈다.
“배윤하 완전 못생기게 나왔네.”
……그래도 뼈 맞고 뒹군 것까지 비슷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 * *
그날 밤.
고윤숙은 반갑지 않은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안 되겠어요. 이제 그놈 치워 버릴 겁니다. 역시 그놈하고는 같은 교실에 못 있겠어. 있을 수가 없지.
“……꼭 그래야 되겠니? 너무 일이 크게 번지면…….”
-무슨 소리야. 그걸 말이라고 해요? 걔가 오늘 아침에 뭐라고 지껄였는지 알기는 해? 아, 들었어도 별 감상이 없으신가?
“…….”
-잔말 말고. 저번에 말한 그거 있죠?
“그거라면…….”
-수학여행 환불비 있잖아요. 그거 학생들한테 현금으로 돌려줘야 된다며. 어떨까? 그게 전부 다 없어져 버리면?
“……제발 그건. 내가 너무 리스크가 커. 잘못하면 교사직은 물론이고 내 정치 인생까지 걸어야 할 수 있다고.”
-이미 걸고 있지 않아요? 설마 그런 각오도 없었던 거? 그럼 좀 실망인데. 그리고 내 말대로 안 하면 그때도 정치 인생은 없지 않나?
“…….”
-자, 그러니까 내일. 그 돈은 없어지는 겁니다. 그리고 학생부까지 싹 동원해서 쿵짝쿵짝 찾아 나서는데…… 이런! 이한열의 사물함에서 발견되다니! 알겠어요? 이런 시나리오입니다.
“……이해는…… 했어. 하지만…….”
-이해하셨으면 실행할 줄도 아셔야지. 정치, 계속하셔야죠, 고윤숙 여사님.
“…….”
-대답은요?
“……알았어.”
-그래요. 현명한 판단이십니다.
뚝-.
전화가 끊기자마자 고윤숙은 제자리에 무너지듯 쓰러졌다. 단순한 애 보기라고 생각했다. 몇 년 버티면 합당한 보상으로 되돌려 받는 정치적 거래였다고…….
근데 그 난이도가 점점 높아지더니 이젠 자신의 손을 넘어선 곳에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걸까.
고윤숙은 늪에 붙잡힌 듯이 일어나지 못하고 한참을 거기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