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능이 자꾸 늘어-63화 (63/164)

<재능이 자꾸 늘어 63화>

10. 냉정과 열정 사이 - 14

“나라면 성폭행이나 마약 음용 혐의를 씌워서 처넣었겠지. 자고로 음모란 단순할수록 강력한 법이야.”

악마다.

여기 악마가 있어요!!

그러나 나는 악랄함을 이유로 그녀를 비난하지 못했다.

왜냐면 나 또한 한 번씩 리스트에 올렸다가 폐기시킨 방안들이었으므로. 그리고 폐기 사유에 윤리나 양심 따위는 고려된 바 없었다.

“이 싸람 위험한 사람일세. 학생이 마약을 어떻게 구해요.”

“어머, 그래?”

“어머 그래는 무슨.”

“어디서 굴러먹다 온 포스가 예사롭지 않아서 말이지. 난 네가 마흔다섯은 되는 줄 알았지 뭐니. 아직 학생이었어?”

이 구절에선 어쩐지 뜨끔.

아니, 나이가 문제가 아니잖아.

“보통 사람은 마흔다섯에서 두 배를 더 살아도 마약 같은 건 못 구하거든요?”

“그러니까 말이야. 근데 어쩐지 너라면 약국에서 감기약 사 오듯이 구할 수 있을 거 같아서 말이지. 왜 그럴까?”

“…….”

또 한 번 뜨끔.

감기약은 좀 오버지만 사실 구하려면 방법은 있었다. 전생에 조폭 똘마니로 굴러먹은 게 몇 년인데 루트 하나 모르겠나.

다만 시도하지 않은 이유는 당연히 위험해서다.

그런 식의 작전은 성공해도 뒤탈이 남는다.

마약은 구매한 경로가 추적될 수 있고, 성범죄를 뒤집어씌우려면 믿을 만한 연기자를 섭외해야 하는데, 당연히 이런 종류의 연기자는 신뢰하기 힘들다.

어쨌든.

관심법 쓰는 학생회장의 시선이 버겁던 나는 결국 진실을 실토하고 말았다.

“사실 제가 회귀자거든요. 이 연륜에는 다 근본이 있답니다.”

“어머. 그럼 이세계도 갔다 와 봤니?”

“그쪽은 좀. 용사 전형 경쟁률이 치열해서요. 탈락하고 말았습니다.”

“저런……. 열심히 하다 보면 갈 수 있을 거야. 옆집 누구도 삼수 만에 붙었다더라.”

“괜찮아요. 저 같은 범인은 회귀자로도 만족합니다……. 행복이 멀리 있는 건 아니잖아요.”

“얘! 그런 식으로 해서 먹고살 수 있겠니? 마왕 한 마리쯤은 잡아야 사람 취급 받지! 회귀 그거 누구 코에 붙이니!”

그렇게 한참 의미 없는 잡담 속에서 허우적대던 와중 그녀가 기습의 일격 같은 한마디를 찔러 왔다.

“요새 상진이가 야구부에 푹 빠져 있던데.”

“네, 그랬죠. 저도 같이 하고 있어요. 매니저지만.”

“흠. 누가 자꾸 걔 허파에 바람을 넣는지 모르겠네.”

“하하. 허파에 바람은 그냥 숨 쉬면 들어가는 거…….”

“걔 너무 자극하지 마.”

평소처럼 평온한 어조가 날카롭게 치고 들어왔다.

“말했잖아. 상진이 걔 머리가 사시사철 꽃밭인 애라, 뭘 하든 쉽게 빠져서 물들어 버린다고. 그냥 백지가 아니라 젖은 스펀지나 다름없는 아이란 말이야.”

“뭐 그렇긴 하죠.”

“안 그래도 바쁜데 걔 뒤치다꺼리까지 하기 버겁다. 적당히 하고 돌려보내도록 해. 또 운동에 빠져서 진로 바꾸겠다고 떼쓰면 곤란해.”

“근데 전에도 느꼈던 거지만, 선배는 좀 상진이 매니저 같네요. 아님 보모라든가. 아니 그것도 아닌가? 보살핀다기보다는…… 뭐랄까, 골동품 애지중지하는 느낌인데.”

“…….”

가볍게 떠봤지만, 떠본 표지 아래로는 그저 백지만이 관찰될 뿐이었다.

그녀가 찻잔을 들어 올리는 모습은 완성된 그림 같아, 화폭 바깥으로부터의 침범을 거부하는 어떤 단호함이 느껴졌다.

보고 있자면 감히 덧칠할 엄두도 나지 않는다.

과연 전상진과 윤정희는 무슨 관계인가.

집안끼리 잘 알고, 어렸을 때부터 가까이 지냈고, 지금은 누나처럼 보살피고 있다, 따위의 사전적 정보로는 파악되지 않는 어떤 공백이 있었다.

윤정희를 알면 알수록 그 공백은 커져만 갔다.

전상진은 티끌 하나 없는 순백인데, 윤정희는 파 내려갈수록 진흙만 발견되는 여자였다.

진흙이 순백을 보살피는 이 모순적인 관계 설정이 난 잘 납득되지 않았다.

“말했잖아. 걔네 집안이 얼마나 성화인데. 걔한테 뭐 문제만 생기면 나한테만 닦달이라니까. 그래서 일찌감치 목줄을 채워 두는 거지.”

“우와, 목줄이래.”

“표현이 거북하면 관리라고 해도 좋아.”

단지 그거라면 내게는 베스트다.

연애라도 시작하면 그 목줄을 뜯고 도망가려 들 테니까.

그럼 그 반감은 고스란히 배윤하를 향하게 되겠지…….

“알았어요. 적당히 구슬려서 그만두게 하죠. 저도 이제 슬슬 질려 가던 중이거든요.”

“그래 주면 고맙고.”

그렇게 결론을 내렸음에도 여전히 공백은 채워지지 않은 채로 남았다.

좀 찜찜하긴 했지만, 다시 생각하면 아무렴 어떤가 싶었다.

둘 사이 따위 몰라도 아무 상관없었다.

난 윤정희의 총애를 얻고 이 땅을 조속히 뜨면 그만.

우주의 신비를 모른다고 공포에 떨 필요가 없는 것과 같은 이유로 나는 이 찜찜함을 그냥 방치하기로 결정했다.

“그나저나, 우리 학생회 새 인원 뽑아야 하는데.”

……음?

“어, 더 뽑을 수 없지 않나요? 지금 인원 꽉 찼잖아요.”

“결원이 생겼어. 불행히도.”

“……누구요?”

“지은이.”

은지은?

의외의 이름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요? 이렇게 갑자기?”

“그러게. 나도 갑작스러워서 좀 당황스럽네. 집안 사정이라는데 자세한 건 나도 잘 모르겠고.”

엉뚱함으로 조립된 것 같은 그 여자애는 천년만년 학생회에 달라붙어 있을 것 같았는데.

혹시 전생에 있었던 결원이 그녀였나? 그렇다면 어디서 시간 차가 생긴 거지? 대충만 따져도 한 달 이상의 간극이 있었다. 대체 무슨 나비 효과로…….

“그래서 이번 수학여행 지나면 회의해서 바로 새로 뽑을 거야. 너도 후보니까 기억해 둬. 설마 싫다고 뺄 건 아니지?”

“어라. 입후보도 안 했는데 자동으로 후보가 된 건가요?”

“싫으면 지금이라도 빼 주고.”

“설마요.”

“그리고…… 네 친구 중에 배윤하라고 있지? 그 아이…… 음.”

“음?”

윤정희가 말을 하다 말더니, 익숙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을 때처럼 미간을 찌푸렸다.

멈춰 선 지점이 묘해서 나를 괴롭게 만들었다. 쓸데없이 재기발랄한 망상들이 내 불안함의 텃밭에서 뛰어놀았다. ‘후보 같은 건 그냥 요식이고 사실은 얘가 내정자……’ 따위의 말들이 휙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그러나 정작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망상 어떤 것에도 속해 있지 않았다.

“이건 원래 말 안 해 주려고 했는데…… 그래도 너는 들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다만 충격은 그 모든 망상을 합한 것에 비길 듯했다.

* * *

머리가 멍했다.

정신 차리고 보니 난 박스를 들고 귀가하고 있었고, 저 멀리서 보육원 정문이 보일 듯 말 듯 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뜨니 난 내 방 침대에 앉아 있었다.

뭐지.

머릿속 시냅스가 어딘가 합선되어 제멋대로 신호를 주고받는 느낌이었다.

“……아, 지은이한테 연락해 봐야지.”

내 머리에게 일을 시키기 위해 강제로 떠올린 듯한 말이었다.

문자를 보냈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몇 분 뒤에 전화를 했더니 “지금 거신 전화는 없는 번호이오니…….”라는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화 저편의 그녀가 “성대모사였다!”며 당장이라도 깔깔 웃을 것 같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 * *

그리고 바로 다음 날.

난 ‘에멩이 엄마’ 연희재 변호사에게 전화해 차재철과 김송헌의 법정 공방에 대해 상담했다.

“혹시 변호사님이 개입하실 수 있나 싶어서요.”

-음……. 그 말씀은 제가 차재철의 변호를 맡았으면 한다는?

“아뇨. 그럴 수야 없겠죠.”

연희재 변호사는 차재철과 김송헌 일당을 응징하기 위해 가장 선두에 선 인물이었다. 아마 얼굴 정도는 몇 번이고 대면했을 터.

공짜로 변호해 준다고 해도 저쪽에서 안 받겠지.

-그럼 제 인맥을? 음……. 글쎄요. 저번엔 그게 그다지 잘 먹히지 않아서…….

지나치게 겸손한 말이었다.

20대에 에르메스 버킨백을 들고 다니는 것만 봐도 알겠지만, 그녀는 잘나가는 법조인 집안의 무남독녀다.

아버지는 로펌 대표, 어머니는 서부지검 차장검사, 조부는 지난 정권에서 법무부 차관까지 오른 법조계의 거물, 거기서 뻗어 나간 자잘한 인맥들까지 따지면 셀 수도 없다.

그녀가 법조계 인맥을 들고 쑤셔 대지 않았다면 15명 모두가 다 회생했을 수도 있었다.

절반이나마 날릴 수 있던 건 전적으로 그녀의 공이었다.

“그것도 물론 필요하겠지만……. 이제부턴 폭로전이 될 거라서 말이죠.”

-호오.

“저한테 재밌는 자료들이 꽤 많거든요. 근데 제겐 법정의 흐름을 읽고 시의 적절하게 태울 능력까지는 없습니다. 법을 모르니까요. 이걸 도와줄 사람이 필요해요.”

-음. 팀을 꾸려 보지요. 후후……. 진흙탕 싸움이라. 저 그런 거 아-주 좋아합니다. 저번에는 개입할 게 적어서 아쉬웠는데 다행이네요.

“감사해요. 태스크 포스에 관한 수임료는 제가 부담하겠습니다.”

-언어도단! 은인님께서 그런 부담을 지실 이유는 없습니다. 저희 편에 서 주시는 것만으로 저희는 용기백배하여 싸울 수 있답니다. 부디 무운을 빌어 주십시오.

“……아, 예…….”

-게다가 이번엔 우리 할부지가 힘을 보태 주기로 했으니…… 꽤 재밌을 겁니다.

빈틈 하나 없는 목소리로 발음되는 ‘할부지’가 그렇게 생경할 수가 없었다.

“그것참 다행이네요. 근데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닌지…….”

-괜찮습니다. 애교 한번 떨어 드리면 됩니다. 그냥 뻑 가십니다.

“대, 대단하네요…….”

이제 자료를 건넨 뒤 내가 할 일은 정화수―비싼 에비앙을 특별히 공수하였다― 떠 놓고 무운을 비는 일밖에 없었다.

과연 에비앙은 강력했다.

예상대로 김송헌은 차재철을 물고 늘어졌고, 차재철은 사실무근을 주장하며 김송헌이 얼마나 파렴치한 인간인지를 증명하기 시작했다.

그 뒤로 이어진 일들은 아마 김송헌으로선 악몽에 가까웠을 것이다.

차재철이 말만 하면 증거가 쏟아지고, 판사를 매수하려던 시도는 왠지 모르게 실패하고, 증언을 조작하기 무섭게 반례가 튀어나왔다.

그렇게 김송헌은 진흙탕 속으로 서서히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재밌는 점은, 그 수많은 폭로전 가운데 내 이름은 단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는데, 왜냐면 날 등장시키면 그들이 음모를 꾸민 정황까지 드러나 버리기 때문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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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 임계치에 도달했습니다!

- 보상으로 황색 카르마를 200p 지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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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다……!”

나지막하게 외치니 손 안의 솜뭉치가 “끼앙.” 하고 화답했다.

학교 뒷산에 서식하는 급식 타이거 중의 한 마리였다.

몸이 유난히 작고 뒷다리가 거의 기형에 가까운 녀석.

난 오랫동안 이 녀석의 상태를 봐 가며 침을 놔 주고 있었다. 특히 기형인 뒷다리 쪽을.

한동안은 호전되는 기미가 잘 보이지 않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확 좋아지더니 오늘 완치되어 버린 것이었다.

골격이 아니라 혈관과 근육 계통의 문제여서 다행이었다.

아니었으면 침으로는 어림도 없었겠지.

‘샤오진이 수의獸醫로 침법을 단련했던 것에 착안했던 게 맞았군.’

사람이 대상이었다면 침 같은 건 들이대지도 못했겠지. 여러모로 운이 좋았다.

어쨌든 이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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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색 카르마 : 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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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반이나 모았다.”

손에서 놓아주니, 녀석이 등을 활처럼 구부리며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걷는다.

본인의 멀쩡한 발걸음이 어색하다는 양, 한 발 한 발을 새롭게 학습하듯이.

그러나 그것도 잠깐.

곧이어 녀석은 능숙한 잰걸음으로 내 주변을 빙빙 돌다, 이내 팍팍 뛰어서 나무 위로 올라가 버렸다.

“잘 살아라, 자식아.”

끼앙-. 꼬박꼬박 대답하는 걸 보니 한국말 잘 알아듣나 보네. 네가 박종철보다 낫다 야.

손을 흔들어 주고 돌아서는데 핸드폰이 지잉 울렸다.

[샤오메이]

저번에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 연락이 닿지 못했던 그녀다. 난 반가운 마음에 전화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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