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능이 자꾸 늘어-64화 (64/164)

<재능이 자꾸 늘어 64화>

10. 냉정과 열정 사이 - 15

[샤오메이]

저번에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 연락이 닿지 못했던 그녀다. 난 반가운 마음에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근데 한국말이 튀어나왔다.

“……응?”

-저는 샤오메이입니다.

또박또박하지만, 잘 들으면 중국어 특유의 성조 표현이 말에 변덕스럽게 묻어 있었다.

“한국말 공부했어요?”

-……그러긴 했지만요, 저 두 마디 정도는 전에도 할 줄 알았거든요?

다시 중국말로 돌아온 덕에 익숙한 목소리가 되었다.

익숙하다? 사실 이상한 말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같이 보낸 시간은 다 따져도 24시간이 안 될 것이다. 둘만 있던 시간을 추리면 그마저 반의반으로 줄어든다. 누군가가 익숙해지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다.

다만 달리 보면 누군가의 호감을 사기 위해 그때만큼 압축적으로 시간을 보낸 적도 없었다.

그래서 더 겸연쩍었다.

본래 익숙함이란 물속의 조약돌 같은 게 아닌가. 시간의 흐름에 다듬어지다 그런 모양이 되어 버리는 것. 그러나 내 경우는 내 편의에 따라 우악스럽게 덧붙여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말하자면 조각보다 소조에 가까운 친밀함.

난 내 익숙함의 형태가 부끄러웠고, 따라서 익살 속에 내 부끄러움을 잘 접어 숨기고자 했다.

“국제 전화 비싼데.”

-에에? 오랜만에 목소리 듣고 하는 말이 그거예요?

“오랜만이라고 통신사에서 제 사정을 봐주지는 않거든요. 아주 냉정하죠. 그거 알아요? 한국에서 핸드폰 요금 체납되면 공안이 찾아와서 취조하는 거?”

-……어, 어어?

“일종의 방첩 활동이죠. 국제 전화를 쓰는 사람들 중에 체납자가 발견되면 사상범으로 의심돼요. 간첩들은 주머니 사정과 관계없이 국제 전화를 써야만 하니까……. 일종의 분단국가의 비애라 할 수 있죠. 일단 공안에 끌려가면…….”

-내…… 내가 내줄게요! 저 그 정도 돈은 있어요!

“에, 제 계좌번호가 캔디은행 5252-503503…….”

-저, 적었어요. 어, 어, 얼마 보내야 되지? 아, 그리고 혹시라도 공안에서 물어보면 우리 아버지 이름을……. 음. 근데 한국에도 공안이 있어요……?

“없죠.”

-아 뭐야아!!

수화기 저편에서 익룡의 울부짖음이 가일층 피치를 올리다, 한순간 진지하게 안도하는 숨소리로 변모했다.

묘한 부분에서 상식이 부족한 점이 딱 샤오메이다웠다.

그리고 다시금 버럭.

-진짠 줄!

“크크. 아무리 그래도 캔디은행쯤에서는 알아챘어야 하는 거 아닌가?”

-아 몰라요. 나빴어……. 나중에 나도 놀릴 거야……. 두고 봐…….

샤오메이가 여전히 샤오메이이고 내게 [눈치]가 있는 한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바퀴벌레들이 한꺼번에 자살하거나 김송헌이 개과천선하길 바라는 게 빠르겠지.

나는 “네, 건투를 빌어 드리죠.”라는 빈말 100퍼센트의 응원을 보냈고, 샤오메이는 응원에 힘입어 전의를 불태우며 씩씩거리다, 결국 풉 웃고야 말았다.

우리는 전화기를 붙들고 한참 깔깔대며 웃었다.

“오랜만이에요. 몸은 좀 어때요?”

-예, 많이 괜찮아졌어요. 그날…… 한열 씨가 조치해 주셨다면서요? 감사해요.

“뭘요.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인데요.”

-그래도요.

본부장 샤오첸의 단언하에, 그날 내가 침술로 그녀를 살린 건 불문에 부치기로 했다. 위법이기 때문이다.

소문은 좀 새어 나가겠지만, 젠린 측에서 완고하게 부정하면 문제 삼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본인도 모르는 걸로 봐선 약속은 잘 지켜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상하죠. 그날 대부분의 기억은 흐릿하고 모든 게 뒤죽박죽이었는데, 그 와중에도 묘하게 감각만은 또렷했던 거 있죠?

“……?”

-뭔가가 내 몸을 부드럽게 파고들어서 달궈 주는 느낌. 상냥한 침입. 나쁜 것만을 태우고 떠나가는……. 그런 것들요. 아하하. 말로 하려니까 이상하네요. 근데 그게 어딘가 그립고 그래서…….

“그랬나요?”

-네. 그때 이후로 몸이 상당히 좋아졌어요. 그건 대체 뭐였을까요?

“글쎄요. 여동생이 잠깐 내려와서 축복이라도 내려 주고 간 건 아닐까요?”

-……네, 그랬으면 좋겠네요.

그 뒤로 우리는 잡담을 나누었다.

그녀는 치료로 한동안 정신없었다는 것, 주치의를 떨어뜨려 놨다고 혼났던 것, 그 와중에도 음악은 꼬박꼬박 들었던 것 등을 소박하게 늘어놓았다.

반면 나는 얘기해 줄 것이 별로 없었다.

‘학교를 지루하게 생각하는 동급생이 있어서 대신 화끈한 법정으로 출근하게 해 주었습니다.’라는 주제는 내가 생각해도 좀 거시기했다.

‘갑자기 미술의 재능이 솟아나서 길거리 초상화를 그리던 중에 재벌 회장과 인연을 맺었습니다.’라는 일화는 팩트 주제에 개연성이 너덜너덜했다.

그래서 난 그녀의 말을 잠자코 듣기로 했다.

내가 되돌려준 말은 거의가 추임새로, 그러니까 문장구조를 갖췄을 뿐 ‘얼쑤!’와 본질적으로 기능이 다르지 않았다.

물론 계속 그럴 수는 없었다.

-제가 보내 드린 기타는 받아 보셨어요?

“……예? 아, 네. 그럼요. 감사했어요.”

-에에. 뭔가 반응이 만족스럽지 못한데요. 별로였어요?

“아뇨, 좋은 물건이었어요. 근데 좀…… 부담이. 선물로 받기엔 지나치게 비싼 물건이라.”

-에이, 뭘요. 한열 씨가 저한테 해 준 게 얼만데요. 그 정도는 받을 자격 되세요.

“그 대부분이 법인카드의 힘이었는뎁쇼. 대신 받으려니 염치가 없네요.”

-으응, 아뇨. 그런 거 말고요. 저는 그냥…….

“일이었는데요. 뭐, 회사에서 충분히 인센티브도 받았고.”

-……그런가요?

그녀는 사적인 고마움을 말했고, 따라서 나는 공적인 업무 뒤에 숨었다.

이 주제를 붕 뜨게 만들어서 얼렁뚱땅 지나치게 하려는 전술이었지만,

아쉽게도 실패했다.

그녀는 붕 뜬 주제에 공중 도킹을 시도하여 목적지에 안착시켰다. 내 귓바퀴로 단도직입하는 한마디 문장.

-어쨌든, 그 기타 쳐 보셨어요?

그 말은 귓구멍을 타고 심장에 직격했다.

재벌이라 그런지 대륙인이라 그런지 빠꾸가 없으시다.

여기서 거짓을 말하는 건 쉬웠다.

하지만 어쩐지 내키지 않았다. 그녀의 호의를 내 편의에 맞춰 흠집 낼 수는 없었다.

물론 날것의 진실 또한 그녀를 상처 내긴 마찬가지일 것이다.

난 거짓과 진실 사이에서 잘 균형 잡힌 말을 내놓아야 했다.

“아니요.”

-……왜요?

“앰프가 없거든요.”

-으잉?!

“앰프 없으면 띵띵거리는 소리만 나잖아요? 저 그 소리가 좀 별로여서…….”

일렉 기타는 앰프로 소리를 증폭시키지 않으면 순수한 쇳소리만 난다.

음정은 있지만 음악이 되긴 힘들다. 그 소리가 별로라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한열 씨 얼마나 가난하신 거예요.

“아니 그렇게 가난하진 않은데요. 다만 앰프 사서 연주하면 옆방에서 내 목을 조르려 들걸요. 층간 소음은 선량한 시민도 살인자로 둔갑시킨다고요.”

-으으으…….

공감 불가능한 내용이 등장하자 역시나 샤오메이는 말문이 막혔다.

물론,

시중에는 헤드폰 앰프라는 좋은 대체제가 존재했다. 의지만 있다면 소음을 극복할 방법은 많고 많았지만, 굳이 나는 말하지 않았다.

그 뒤로 단 한 번도 기타를 꺼내 보지 않았다는 사실도,

음악을 듣기는커녕 일부러 피해 다녔다는 사실도,

나는 말하지 않았다.

-나중에 이사하시면 앰프도 제가 선물해 드릴게요.

“네. 그랬으면 좋겠네요.”

나는 무사히 화제를 옮기는 데 성공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이런저런 얘기들이 더 오갔다.

-……앗.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저 이제 진료 시간 다 된 거 같아요.

“그래요. 들어가세요. 오랜만에 목소리 들어서 좋네요. 안 그래도 걱정이었는데.”

-네, 저두요. 인사도 못하고 헤어져서 좀 그랬거든요. 그동안은 전자기기는 얼씬도 못하게 해서 통화도 못했었는데…… 이제 와서 보니 더 일찍 할 것 그랬어요.

“그런가요?”

-그럼요. 통화하고 나니 뭔가 속이 시원해진 거 같기도 하고. 심장이 튼튼하게 뛰는 거 같기도 하고. 그러네요.

“음…….”

난 보이지 않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냥 아까 깜짝 놀라서 그런 거 같은데. 일종의 운동 같은 거죠. 스쿼트 하면 대퇴근이 단련되듯, 주기적으로 펄떡펄떡 놀라야 심장도 튼튼해지는…….”

-……아니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도 많이 놀래 드릴게요.”

-그런 건 됐다니깐!

또 한 번 버럭.

그리고 웃음은 아까보다 더 일찍 터져 나왔다.

-쿡쿡. 아, 그러고 보니 말을 안 했는데, 아버지가 제 부탁 들어주기로 하셨어요.

그녀가 흥얼거리듯 말했다.

그녀의 웃음은 말을 받치는 반주처럼 흥겹게 연주되었다.

“……부탁이라면?”

-입양요. 제 동생으로. 음, 어쩌면…… 한국에서 그 대상을 찾을지도 모르겠네요.

“아…… 그런가요?”

-한국 진출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계시거든요. 한국계 입양아가 있다면 여러 가지 면에서 사업에 보탬이 될 테니까. 처음엔 제 부탁을 빌미로 삼는 것 같아 서운하기도 했지만요……. 지금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다 짐작하고 있어서일까. 새삼스럽게 흥분이 밀려오진 않았다.

묘한 일이지.

공들여 키워 마침내 탐스럽게 맺힌 과실 앞에서, 그래도 나름의 감흥은 있을 줄 알았는데, 이상할 정도로 내 심장은 차분하게 뛰고 있었다.

“그렇군요. 잘됐으면 좋겠네요. 동생 찾기. 진심이에요.”

-……예. 정말로요. 아, 선생님이 부르시네요. 이제 정말 끊어야겠어요. 음, 한열 씨. 이런 말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네?”

-그…… 아무래도 국제 전화 비용은……. 부담되실 테니까……. 통화가 길기도 했고……. 음……. 물론 공안은 없겠지만…… 그래도…….

아무래도 그녀는 내가 농담으로 건넨 공안 괴담을 반신반의하고 있는 듯했다.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해 허세를 부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이렇게까지 진지하면 나 같은 악당은 장난기가 솟구칠 수밖에 없었다.

“눈치챘군요. 죄송해요. 괜히 부담감 드리는 게 싫어서…….”

-……아…….

“계좌는 아까 말씀드렸던 캔디은행으로…….”

-……네에. 알겠어요. 힘내요! 한열 씨!!

간단한 후일담.

샤오메이는 집사에게 금액을 이체할 것을 진짜로 지시했다고 한다. 캔디은행에.

보통이라면 집사의 부드러운 훈계로 이야기가 끝났겠지만, 불행히도 이 집안의 집사는 보통이 아니었으며 심지어 나와 동류였다.

집사는 다음 날 ‘캔디은행’이 찍힌 이체 전표를 ‘만들어서’ 아가씨에게 돌려 드렸다.

때문에 샤오메이는 한동안 한국의 공안과 캔디은행의 실존을 믿어 의심치 않았으며, 인과율의 엄중함에 의거, 정확히 보름 후 나는 그녀를 달래기 위해 진땀을 빼야만 했다.

*   *   *

통화를 마치고.

샤오메이로부터 느껴진, 그 익숙함이 내게 안긴 부끄러움을 생각했다.

그 새삼스런 감각을 되새겼다.

그게 무엇인지,

어째서,

이제 와서,

이 빡빡한 뇌에 비집고 들어와 한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는지, 그 경위를 밝혀냈다.

답은 금방 나왔지만,

결론을 내리기는 쉽지 않았다.

*   *   *

버스들이 줄줄이 도열한 운동장에서, 학생 집단은 마치 거대한 슬라임처럼 꿈틀거렸다.

은유가 괴랄해도 어쩔 수 없다. 내 눈엔 정말 그렇게 보였다.

“2학년 3반은 B-3 버스에 승차합니다!!”

그중에 통솔하는 무리는 불행히도 소수였다. 왜 불행하냐면 내가 그 소수에 속했기 때문이다.

우린 학생들이 사람이라기보다 한 줄의 소시지 다발이 되기를 바랐지만, 그들은 개인의 자존을 매 순간 증명해 냈다.

달리 말해 겁나 말을 안 들었다.

“아 쫌 움직이라니까!! 출발 좀 하자!! 줄 서고!”

“귀 아파……. 생리냐? 뭘 그렇게 보채……. 천천히 좀 가자…….”

“줄 맞추고! 야! 거기 나가면 안 돼!”

“화장실. 화장실 갈 거야.”

“아오……. 아까 갔다 오랄 땐 왜 안 가고…….”

“아 막지 마. 나 싼다. 여기다 그냥 쌀 거야?!”

직접 완장을 차 보기 전까지, 나는 ‘완장본체설’을 지지했던 사람이었다.

완장을 차기만 하면 다들 눈이 퀭해지고 입이 걸걸해지고 규율의 수호자가 되었으므로 타당한 가설이라 하겠다. 그토록 인간이 균일해지려면 본체가 완장이어야 했다.

그러나 아니다.

완장을 찬 통솔자들은 악마들을 상대함에 걸맞은 행동 양식을 체득하다 필연적으로 비슷해져 버린 것임을, 그 비정한 진실을 나는 오늘 비로소 깨달았다.

“출발합니다……!!”

마침내 전원 탑승.

프랑스 혁명에서 박애는 쏙 빼고 광기만 탑재한 것만 같은 놈들을 버스에 격리한 뒤에야 나는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물론 버스는 언젠가 설 테고 그들은 바스티유를 뛰쳐나온 수인들처럼 재등장하고 말 테지……. 역사의 비극은 반복되었다.

그 암울한 진실을 되새기며 나는 의자에 축 늘어졌다.

엉덩이 밑으로 울리는 버스의 엔진 진동마저 서글펐다.

어쩐지 녹록한 수학여행이 될 것 같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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