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능이 자꾸 늘어-65화 (65/164)

<재능이 자꾸 늘어 65화>

10. 냉정과 열정 사이 - 16

“고생했어.”

옆자리에 앉은 윤정희가 무감동한 격려를 전해 왔다.

내게 저 말은 ‘앞으로도 고생할 테지만’을 생략한 말로 번역되어 들렸다.

그래서 나도 무감동하게 회답했다.

“예에. 회장님도요.”

“후후, 진짜 죽어 가네. 이런 거 처음이구나?”

“오늘 저는 악의 평범성이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보았습니다. 한나 아렌트가 옳았습니다. 선량한 개인도 집단의 일부가 되면 광기에 휩싸이는 것입니다…….”

“그게 그렇게 쓰이는 말이 아닐 텐데.”

차가운 생수를 건네기에 받아 마셨다.

흘러드는 냉기가 선명해서 식도의 모양을 그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정신이 조금은 깨었다.

“스탈린이랑 히틀러가 제 머릿속에서 쎄쎄쎄 하다 간 기분이에요. 끔찍하네. 이러다 성악설을 믿어 버릴 거 같네요.”

“어제 잠 못 잤니?”

“아니요.”

“아니야?”

“어제만이 아니라 최근 계속 잘 못 잤어요.”

“왜?”

“……그냥.”

당신이 한 말 때문에 신경 쓰여서 못 잤다는 말은 굳이 꺼내지 않았다.

불필요했으니까.

“근데 왜 수학여행 장소가 바뀐 걸까요?”

“……음?”

“그렇잖아요. 원래 계획대로 인원 쪼개서 동남아로 갔으면 지금처럼 개고생할 일은 없었을 텐데. 한꺼번에 우르르 가서 이게 뭔 난리야.”

“글쎄. 동남아면 신경 쓸 일은 더 많았을걸.”

“그건 상관없어요. 규모가 작아진다는 게 중요하지. 원래 군중은 규모가 커질수록 절제를 잃고 사악해지는 법이라구요. 이 이론대로라면 소규모일수록 인간은 선해집니다. 독수리 오형제가 왜 다섯 명뿐일까를 생각해 보죠. 다섯 명에서 더 많아지면 악에 물들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와, 내가 생각해도 완벽한 논리였다.”

“완벽히 바보 같은 논리네.”

“어쨌든요. 기후에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니고. 돈 없어서 못 가는 사람이 있던 것도 아니고. 문제 하나 없는데 갑자기 바꾸는 게 이상하잖아요. 말 들어 보니 몇 년 동안 계속 경산이었다던데.”

뭐, 덕분에 김송헌을 날릴 계획을 짤 수 있었으니 나로선 이득이긴 했다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뭐, 복잡한 사정이 있어. 사실 이사회에서 이사장 몰래 추진했던 일이거든. 근데 이사장이 나중에 알고 바꿔 버린 거지.”

“그 사람은 왜 그랬대요? 경산 상인회에서 로비라도 했나?”

“…….”

가볍게 질문했는데 의외로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옆을 봤다가 나는 깜짝 놀랐다.

오늘 난 그녀의 무표정을 처음 보았다.

“그런 말 들어 봤지? 살인자는 범인 현장에 반드시 돌아온다고.”

“……예? 들어는 봤죠. 신빙성은 잘 모르겠지만.”

“왜 그럴까? 살인자는 왜 현장에 돌아오는 걸까? 그런 위험을 왜 감수하지?”

“글쎄요. 제가 알기로는 불안해서 그런 걸로 알고 있는데. 증거는 안 남겼나, 경찰들이 날 의심할 기미는 있나…… 뭐 그런 것 때문?”

“그럴 수도 있겠지. 근데 내 생각에…… 그건 확인하고 싶어서야.”

“……확인?”

“그래. 살인자에게 살인 현장은 일종의 자식 같은 거지. 아니면 공들여서 만들어 낸 작품이든가. 그러니까 보고 싶은 거야. 자식을 자랑하는 어버이처럼. 작품을 전시하는 예술가처럼. 타인이 거기에 반응하고 논평하는 걸 청취하고 싶은 거지.”

“……?”

알쏭달쏭한 말이었다.

뭔가가 엄청나게 빠져 있는 논리전개였다.

그녀가 1분 전에 내 독수리 오형제 이론을 비난했던 점을 상기한다면 배신감마저 느껴지는 허술함이었다.

뭔가의 비유일 텐데, 왜 하필 살인자라는 꺼림칙한 보조 관념을 사용했는지도 의문이었다.

“그래서요? 그게 이사장이 수학여행 장소를 바꾼 거랑 무슨 상관이죠?”

“…… 그러게…… 별 상관 없나?”

“이잉?”

“그냥…… 그렇다고.”

그리고 입을 다물었다.

그 입을 열려면 렌치나 지렛대를 가져와야 싶을 만큼 단단하게 닫혀 있었다.

다만 난 입매의 단호함보다 그 배경이 된 그녀의 얼굴이 더 신경 쓰였다.

무표정.

알다시피 윤정희에게 표정은 감정의 반영이 아니라, 감정의 은폐를 위해 쓰이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늘 어떤 표정이라도 짓고 있다.

민낯을 사수하려는 여성들의 의지에 대입한다면 이해가 쉽다.

‘쌩얼 메이크업’이라는 형용 모순의 단어는 가장 무방비할 법한 상황조차 방비하는 여성들의 철저함을 웅변한다.

윤정희는 그런 식으로 표정을 지었다.

따라서 그녀의 무표정은, 표정이 없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가장 명백한 형태의 표정이었다.

초조.

불안.

미약한 공포.

균열 진 틈새에서 그런 것들이 방울져 뚝, 떨어졌다.

딱 3초 동안.

“응? 근데 그건 뭐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윤정희는 싱긋 웃으며 내 손을 가리켰다.

정확히는 왼손의 나무덩이와 오른손의 나이프를.

난 나무의 바깥쪽을 서걱서걱 잘라 내면서 대답했다.

“조각요.”

“조각? 헤에. 너 그런 것도 할 줄 알아?”

“제가 좀 다재다능하죠.”

“뭐 깎는 건데?”

“음…… 고양이?”

“고양이면 고양이지 왜 의문형인데?”

“모델이 몇 있는데, 어느 쪽인지 아직 안 정했거든요.”

네발짐승의 형태는 잡아 뒀는데, 꼬리 디테일을 지크프리드로 할지 베오울프로 할지 고민 중이었다.

그러나 가벼운 고민이었다.

장민욱은 구체적인 상을 정해 놓지 않고 그때그때 내키는 대로 손을 놀렸다.

그러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게 툭 탄생했다. 그게 그의 대체적인 작업 방식이었다.

이 조각도 완성될 즈음엔 지크프리드를 닮은 베오울프가 되어 있을지 모른다.

아니면 그 둘의 특징만 딴 암표범이 될 수도 있겠지.

장민욱 예술관의 핵심은 자유였으므로, 나 역시 내 손이 나무덩이 위에서 방랑하도록 놔두었다.

“신기하네.”

“깎아 둔 거 좀 있는데 드릴까요?”

“응? 진짜?”

난 내 자신작을 비닐 봉투에서 꺼내 그녀에게 선물했다.

처음에는 푸우를 의도했는데 지나치게 디테일해져서 실사 곰이 되었고, 몇몇 소품을 더하니 사이다를 마시는 북극곰이 완성되었다.

작품 제목은 [양심고백 : 사실 나 콜라 별로였어].

내 설명을 들은 윤정희는 쿡쿡 웃으며 북극곰의 콧잔등을 두드렸다.

“귀엽네, 고마워. 잘 간직할게.”

“그래요.”

나는 조각에 몰두했다.

윤정희는 예의 대외 활동용 표정을 장착하고 주변 사람과 담소를 나눴다.

그러나 나만이 알 것이다.

조각난 파편들을 접착제로 얼기설기 봉했을 뿐 균열은 여전히 위태로웠다.

그녀의 표정은 가끔 흔들렸고 그때마다 내 조각칼은 멈칫했다.

그것이 여정 내내 계속됐다.

물론 그와는 별개로 버스는 무탈하게 달렸고, 교통 상황은 원활했으며 날씨는 얄미울 정도로 맑았다.

그리고 경산에 도착했을 즈음 난 두 개의 조각상을 추가로 완성시켰다.

===

!업적 임계치에 도달했습니다!

- 보상으로 황색 카르마를 200p 지급합니다!

===

*   *   *

숙소에 도착.

이후 일정은 짐을 내려놓고 숙소로부터 2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운중사라는 사찰을 내방하는 것이었다.

경산 축제의 일환으로 사찰 체험인지 뭔지를 한다는데 사실 관심은 없고, 내 관심사는 오로지 이 방종한 망나니들을 가이드에게 어떻게 토스시킬 것인가에만 집중되었다.

“가방 내려놓고 화장실만 간단히 이용한 다음 바로 이동합니다! 각자 지정된 호실에 따라…….”

그러나 상대가 수백 명의 학생들이라면 이 쉬운 지시도 아카데믹 난이도의 수학 문제가 되어 버린다.

내어 준 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절반이 함흥차사였다.

결국 나는 일일이 돌아다니면서, 그새 이불을 펴고 수면에 돌입한 자, 으슥한 곳을 발견하고 남녀의 구조적 차이를 탐구하려는 자, 갑자기 감기에 걸렸다고 주장하는 꾀병론자들을 끌어내고, 그중에 진짜로 아픈 한 명을 가려내 의무반에 인계해야만 했다.

“……죽겠네…….”

그렇게 고생고생하며 학생들을 버스에 다 태웠는데, 이번엔 숙소 바깥쪽에서 시끌벅적한 소란이 전해져 왔다.

“재앙이 올 것이야! 재앙이!”

뭔가 하고 나가 보니, 알록달록한 무복(巫服)을 입은 어떤 여자와 우리 학교 통제 요원들이 대치하고 있었다.

전상진이 근처에 있기에 물어봤다.

“뭔 일이냐?”

“……글쎄. 저 할머님께서 숙소에 자꾸만 난입하려 든다는데. 여기에 있으면 안 된다면서.”

“왜?”

“몰라. 재앙이 온다나 뭐라나…….”

마침 옆에 있던 건물 관리인이 덧붙였다.

“미친 여자야.”

“……상습범인가 보죠?”

“그럼. 옛날부터 저랬어. 몰래 숨어 들고, 쫓아내면 발악하고. 나보고도 떠나라고 소리 고래고래 지르고. 가끔씩 오는데 아주 진상이야, 진상.”

“경찰을 부르시는 게?”

“벌써 불렀어. 근데 잘 봐라? 저 아줌마 진짜 신기라도 있는지 경찰 오는 건 귀신같이 알아채고 오기 직전에 도망간다?”

“옛날부터 재앙이 내린다고 예언했다면서요? 진짜 신기가 있으면 여긴 이미 폐허가 됐어야 하지 않나?”

“그러니까 말이야. 신기가 줄행랑 하나에 특화됐나 보지.”

“참 나…….”

중학교 때부터 경산은 몇 번이나 왔는데도 저런 사람이 있는지도 몰랐다.

아마 그동안은 지금처럼 통제 요원이 잘 막아선 거겠지. 그리고 오늘은 내가 통제 요원이고.

젠장.

씁쓸하게 혀를 차는데, 그 순간 미친 무당이 갓을 확 재끼고, 품 안에서 금강저와 무당 방울을 꺼내어 양손에 쥐었다.

산발된 흰 머리, 충혈된 두 눈은 그야말로 광년이의 전형이라 할 만했다.

“쯧쯧. 필살기 등장했네.”

“…….”

“물럿거라아아! 너희 삿된 것들이 이 부정한 곳에 눌러앉아 지력이 얼마나 쇠하고 하늘이 어찌나 노했는지 알고 있느냐아아……! 네놈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는 있는 게야아!”

“우악! 이 미친 할매 무기 들었어!”

“꼭 천벌을 정수리로 맞아 봐야 정신을 차리겠느냔 말이야!”

까릉! 까르릉-!

방울을 격렬하게 흔들며 금강저를 위협적으로 찔러 댔다.

물론 날도 안 선 금강저가 진짜 위험할 리는 없지만, 어쨌든 쇠붙이가 얼굴을 막 찔러 오면 식겁하는 게 당연하다.

난 한숨을 쉬며 앞으로 나섰다. 어느새 풀어낸 허리띠를 한 손에 쥔 채.

“네놈들의 죄를……!”

팡-!

“알렸으잉……?!”

내 허리띠는 금강저만을 정확히 타격해 뒤편 어딘가로 날려 버렸다.

금강저가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무당은 황망한 눈으로 빈손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다, 이제 내게 눈을 똑바로 고정하고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뭔가 스산하긴 했지만,

저 무당 방울로 고막을 집중 공격해서 날 퇴마시킬 셈이 아니라면야 겁먹을 이유도 없잖은가.

단지 무턱대고 달려들 상황에만 대비하면…….

무당이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와, 왕을 뵙습니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이야.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에 왕이라는 이름의 사람이 있나? 김왕? 이왕? 남궁왕? 물론 그런 사람은 없었다.

옳지. 무당이니까 영혼을 보는 것일 수도 있다.

한때 군주였다 망령으로 전직한 존재가 때마침 지나가던 중이겠지.

물론 진짜 그렇다는 게 아니라 그런 종류의 정신병일 수 있겠다는 것이었다.

난 내 추론에 만족했다.

그러나 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추론을 거기까지 진척시키지 못한 모양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나를 보았다.

“……한열아. 저 아줌마랑 아는 사이야?”

“응? 아니?”

“근데 왜 저 아줌마가 너를…….”

그럴 리가 없다. 그 망령이 우연히 내 근처에 있던 거겠지.

난 그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왼쪽으로 삼 보 이동했다.

그러자 무당이 고개를 들지도 않은 채 몸을 틀었다. 두 손을 공손히 모아 만든 삼각꼭짓점이 정확히 날 향하고 있었다.

“어, 어떻게 당신 같은 존재가 이런 저열한 곳까지 내방을 하시었나이까…….”

난 듣지 않고 다만 오른쪽으로 오 보 이동했다.

이번에도 무당은 정확하게 내가 있는 쪽으로 절을 했다.

난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정수리에 눈이 달린 것이 틀림없었기에.

아무튼.

이쯤 되니 나도 부정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주변 사람들이 슬슬 나를 저 무당과 한 묶음으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그 증거로 반경 1m의 동그란 공터가 내 주변에 형성되었다.

난 내 명예를 방어하기 위해 적극 나서야만 했다.

“……아줌마 나 알아요? 나 본 적 있어요?”

“모릅니다. 오늘 처음 뵙습니다.”

“근데 왜 아는 척을 하시죠?”

“어찌 모르겠습니까! 당신의 영혼에 그토록 찬란한 황금빛이 빗발치는 것을!”

나는 움찔 떨었다.

“아아…… 거느린 신하들이 많으시군요. 열일곱…… 열여덟? 열여덟이군요. 과연 그 젊은 나이에 그만한 성취! 왕이 아니고서야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이젠 소름이 돋을 차례인가?

돋았다.

난 현재 정확히 18개의 탤런트를 흡수한 상태였다. 저 무당은 그것을 정확하게 꿰뚫어 본 것이다.

이 무당이 미쳤는지 아닌지를 내가 진단 내릴 수 없지만…….

어쨌든.

뭔가 있는 건 분명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