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능이 자꾸 늘어-66화 (66/164)

<재능이 자꾸 늘어 66화>

10. 냉정과 열정 사이 - 17

“나 참, 갑자기 무슨 말인지. 왕은 뭐고 신하는 또 뭔 말이야…….”

물론 내색하지는 않았다.

난 영문을 모르겠다는 투로 중얼거렸고 그것이 무당을 자극한 게 분명했다.

그녀가 내 말을 듣고 벌떡 일어났으니까.

난 긴장했다.

이제 잠시 벗어 둔 광기를 뒤집어쓰고 재돌격을 감행할 것인가?

반쯤은 그러길 바라기도 했다.

그러면 이 모든 해프닝이 광인의 돌발 행동으로 해석될 테니까.

그러나 그녀는 내 바람과 정확히 반대로 행동했다.

흐트러진 머리를 가다듬고, 무복에 묻은 먼지를 털고, 갓을 가지런히 쓴 뒤 무당 방울을 품에 여몄다.

그러곤 몇 발자국 다가와, 내게만 들리는 목소리로 속삭이는 것이었다.

“……왕께선 암행 중이셨군요. 미처 헤아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니, 그런 거 아닌데요.”

“그러시겠지요. 저는 다 이해합니다.”

아니 진짜 아니라니까.

“지금 이 순간 왕께서 왕래하신 것도 다 만신이 인도하심이겠죠. 꼭 드려야 할 말이 있습니다. 들어 주시겠습니까?”

“……솔직히 관심은 없지만, 안 들으면 꿈에까지 따라올 거 같으니까. 일단은 들을게요.”

“감사합니다. 꿈에 들어가는 것은 저로서도 아직 미숙하여…… 저도 이쪽이 좋습니다.”

“……!”

“저 땅, 저도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진 못합니다만…… 지금 아주 위험한 상태입니다. 원래부터 위험하긴 했지만, 터가 영험하고 지맥이 튼실하여 그동안은 삿된 기운이 억눌려 있었죠. 그런데…….”

무당은 내 뒤편의 숙소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알기로 저 숙소는 대원재단의 소유로, 수학여행 때 학생들 숙소나 휴가철에 교직원들에게 대여해 주는 용도로나 쓰였다.

넓긴 하지만 건물도 오래됐고 시설도 변변찮아서 학생들은 별로 선호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삿된 기운이 어쩌고 하는 건 완전 금시초문이다.

“최근 터널 공사로 지맥이 손상되고, 설상가상으로 사람들이 계속 드나들면서 땅 밑의 망자들을 자극했습니다. 이제 한계입니다. 무슨 일이든 일어날 겁니다.”

“무슨 일요?”

“저는 모르죠.”

“……이런 건 모르면서 참 단호하시네요.”

“그래서 더 무서운 것입니다. 지신께서 땅을 울려 주벌을 내리실지. 그도 아니면 망령이 산 자의 몸을 빼앗고 해코지를 하는 게 먼저일지…… 가능한 일이 너무 많습니다. 어쩌면 제가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질 수도 있겠지요.”

“……글쎄요. 당장은 별일 안 일어날 거 같은데.”

“단정하고 계시군요.”

왜냐면 전생에서는 별일 없었으니까.

너무 지루해서 차라리 뭐라도 일어났으면 싶었다.

물론 지금은 지나치게 다이나믹해서 제발 아무 일도 없었으면 했다.

“뭐, 그렇죠. 까놓고 말해서 뭘 어쩔 수도 없잖아요?”

“일이 생기기 전에 망혼제를 지내어 망자들을 위로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럴 생각은 없으시군요.”

“생각이 있어도 못해요.”

“아, 암행 중이셨죠.”

“그건 뭐 맘대로 생각하시고.”

“흐음…….”

무당이 손가락으로 볼을 툭툭 치며 생각에 잠겼다가, 불쑥 말했다.

“왕께서는 그럴 리 없다 하셨지만, 왕이 계시므로 더욱 그럴 것입니다.”

“……음?”

“왜냐면 왕께선 그럴 운명이시기 때문이죠. 가는 곳마다 거기 잠든 것들을 깨워 내는, 그래서 마침내 자신의 인과율로 끌어들이고 마는, 고귀한 수레바퀴의 소유자.”

존재 자체가 엄청난 민폐라는 뜻으로 들렸다.

“저들 입장에서는 민폐일 수 있겠지만.”

“……진짜로 말했어……?!”

“하지만 괜찮습니다. 왕께서 정도를 잃지 않으신다면, 그 모든 흐름은 정리(正理)로 회귀할 것입니다. 당신의 바람대로 그렇게 되겠지요. 왕의 수레바퀴는 복잡하게 엮인 사기를 단번에 끊어 낼 힘이 있으니. 그러나…….”

“…….”

“아직 왕께선 어리시므로 다가올 환란이 버거우실 수 있겠지요. 그때 조력이 될 것들을 조금 드리겠습니다.”

무당은 품 안에서 종이 한 장과 손가락 길이의 조각 하나를 건넸다.

노란종이 위엔 새빨간 글자들이 복잡하게 적혀 있다. 부적이었다.

“이 부적은 단 한 번, 위기의 상황에서 왕을 구해 드릴 것입니다. 단 한 번이므로 맹신하진 마십시오. 그리고 이 물건은…….”

두 번째 물건은 좀 기묘했다.

도자기 재질인 듯한데, 깨진 조각의 일부인 듯 완전하지 못했다.

단면이 다소 거칠고, 둥근 곡면이 어느 순간 툭 잘라져 있었다.

그러나 난 어딘가의 구멍을 발견하고 그것의 원형을 떠올릴 수 있었다.

“……오카리나?”

“저와 운명이 엮여 있어 갖고 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보니 왕께 갈 물건을 잠시 맡아 두었을 뿐이었군요. 그 아이 또한 왕께 길을 인도해 줄 것입니다. 소중히 간직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일단 잘 받아 두지요.”

“이제 시간이 다 되었군요.”

“음?”

“경찰이 왔습니다. 왕이시여, 부디 명심하십시오. 당신은 필연적으로 길을 만들지만 전능하지는 않다는 것을. 힘에 부쳐 쓰러질 수도 있음을.”

“예…… 뭐, 그러죠. 그런데…….”

“배고파.”

“……배고…… 응?”

정체를 캐물으려는 시도는 엉뚱한 답변으로 좌절되었다.

그 잠깐 사이에 무당은 완전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청명하다 못해 시퍼렇게 날이 서 있던 눈빛은 흐리멍덩하게 흐려져 있었다.

심지어 날 보지도 않았다.

주변을 산만하게 훑더니, 또다시 맥락 없는 말을 늘어놓는 것이다.

“김 씨 아저씨는 오리고기 뺏어 먹어어…….”

그러고는 어디론가 터덜터덜 사라졌다.

폭풍 같은 등장과는 대비되는 허무한 퇴장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떠난 뒤 촌각의 차이를 두고 경찰이 등장했다.

관리인과 경찰 사이에 ‘그 미친 여자 또 왔다 갔다’는 얘기가 오갔고, 통제 요원들은 내게 몰려들어 광인과의 관계를 캐묻기 시작했다.

난 입으로는 대충 말을 지어 냈고.

입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감각은 손안의 오카리나 조각에 할애했다.

오카리나 조각.

여기엔 온전하지 못한 탤런트가 깃들어 있었다.

귀수의 화투장들처럼, 장민욱의 화구들처럼, 다른 조각들을 다 모아야 비로소 하나의 카르마를 드러내는 미완성의 유물.

그리고 난 그것이 [율리시즈의 나침반]과 조응하여 내 감각을 유도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마치, 나머지 남은 조각들의 위치를 가리키듯이.

*   *   *

유도하든 어쩌든 난 통제 요원이었고 수학여행의 일정을 따라 움직여야 했다.

다음 목적지인 운중사는 빌어먹게도 산속에 있었고, 그건 중간에 차에서 내려서 걸어야 한다는 걸 뜻했다.

그리고 짐작할 만한 그런 일들이 일어났다.

갑자기 프론티어 정신으로 충만해진 놈들이 산길을 개척하겠답시고 이탈하는 걸 막아야 했고, 등산을 혐오하는 자들에게 당신들의 각력은 좀 더 분발할 수 있음을 계속 일깨워 주어야 했다.

그런 간난신고 끝에 도착한 곳.

운중사(雲中寺).

구름 속 사찰.

“실제로 안개가 끼면 마치 구름에 떠다니는 분위기를 자아낸다는 이 절은, 고려 중후기에 세워져서…….”

기쁘게도 여기엔 전문 가이드들이 있었다.

대부분의 통제 요원들은 인솔 책임을 떠넘기고 사찰 밖에 퍼질러지는 걸 택했다.

아니라면 다른 학생들과 함께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도 좋지만, 난 제3의 선택을 하기로 했다.

“음. 저 혼자 이 근처 구경해 봐도 되나요?”

“혼자? 뭐, 미아가 안 될 자신이 있다면.”

“중학교 때 두 번이나 와 봤는데요, 뭘. 다녀올게요.”

“그러렴.”

윤정희에게 허락을 받고 사찰 뒤편으로 직진했다.

웬만하면 나도 쉬고 싶었지만, [율리시즈의 나침반]이 새 카르마의 등장을 알려 와서 확인이 필요했다.

운중사 후문으로 야트막한 냇가가 구불구불 이어져 있고, 그 옆 공터에 여러 건설 장비를 배경으로 두고 인부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카르마의 느낌은 인부들 근처의 바위로부터 전해지고 있었다.

문제라면.

‘……금빛!’

특성을 주는 황색 카르마라는 것.

[서초패왕 항우의 역발산기개세]를 얻으려고 힘들여 천 포인트까지 벌어 놓은 상태.

만약 저걸 흡수한다면 다시 그만큼의 황색 카르마를 채워 놓아야 했다.

그건 또 얼마나 걸릴 것인가…….

‘뭐, 어쨌든 확인은 해 봐야지.’

난 인부들을 지나쳐 바위 근처까지 다가갔다.

금빛 카르마를 뿜어내는 바위는 1m 남짓한 크기로, 묘하게 인체를 닮은 모양새였다.

그 위에 손을 얹었다.

정보를 확인하니…….

“……허!”

이건 대박이다. 반드시 얻어야만 한다.

날 기다리고 있는 [역발산기개세]가 아니었다면 지금 당장 Yes를 클릭하고 흡수해 버렸을 것이다.

안타깝지만 다음으로 미루자.

이 바위는 어디 안 가겠지만, [역발산기개세]는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물건이므로. 나는 아쉬움을 삼키며 한 발 물러섰다.

“학생 거기서 뭐 해?”

그때 인부 한 명이 앉은 채로 말했다.

“예? 에, 아뇨. 그냥 이 바위가 신기하게 생겼다 싶어서요.”

“아아, 그치? 우리도 그 생각 했어. 돌멩이 주제에 묘하게 잘생기지 않았어?”

“돌덩이가 김 씨보다 얼굴이 낫네.”

“아 왜 가만있는 날 가지고 늘어지는데.”

“……하하. 잘 보니 묘한 매력이 있긴 하네요.”

“그치? 그래서 좀 안타깝다 싶기도 해.”

“예?”

인부가 피우던 담배를 툭툭 털었다. 담뱃재가 불티와 함께 휘날리다 공기 중에 녹아들었다.

“그거 이제 곧 치워야 되거든. 이 근처 싹 밀고 주차장 세운다고 해서.”

“아…….”

“뭐, 그냥 바위덩이로 태어난 죄를 탓해야지. 어쩌겠어.”

“잘됐네. 잘생긴 것들은 다 죽어야 돼.”

“이 자식은 왜 돌멩이한테까지 열등감 폭발이야?”

지금 당장 치운다고?

이렇게 빨리?

그렇다면 문제는 선후를 매기는 것에서 양자택일로 바뀐다.

뭐가 더 나한테 필요한 특성인지 엄중하게 따져 봐야 하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모든 병에 면역인 [역발산기개세]가 더 유용하다.’

하지만 주관적인 잣대를 세우자면 우열을 가릴 수가 없다…….

단 하나의 문장이 내 영혼을 격렬히 뒤흔들고 있던 것이다.

===

대머리 인자를 완전히 구축, 죽을 때까지 풍성한 머릿결을 유지합니다.

===

거기 당신이 신인지 악마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꼭 이러셔야만 했습니까.

건강.

그리고 모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이 상황에선 내게 엿을 먹이려는 어떤 악의적인 의지마저 느껴졌다.

난 두 눈을 감고 내면에 고요히 침잠해 들어갔다.

중년의 나를 떠올렸다.

서른다섯이 넘어가면서부터 머리카락이 훙훙 빠지기 시작했지…….

사십 대가 되기도 전에, 원형 탈모의 저주에 직격당한 내 정수리 중앙에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겼다.

가끔씩 방바닥에 털이 발견되면 그것이 꼬불털인지 직모인지를 확인하는 습관도 생겼고.

직모임이 밝혀졌을 때 마음을 가다듬는 법도 터득해야 했다.

그것은 단지 한 가닥의 터럭이 아니었다.

내 영혼의 한 줄기가 빠지는 것이었다…….

‘……좋아. 결정했다.’

일단 대머리를 탈출하겠어.

그리고 돌아가자마자 항우의 칼을 훔친다.

난 바위 위에 손을 올리고 망설임 없이 Yes를 클릭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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