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능이 자꾸 늘어-69화 (69/164)

<재능이 자꾸 늘어 69화>

10. 냉정과 열정 사이 -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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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윤하 : 어디 있냐? 니가 불러 놓고 왜 안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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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방 간다고 문자를 보내고 걸음을 옮겼다.

늦었으므로, 서둘러야 한다.

그리고 그 생각을 떠올린 순간, 정체모를 위화감이 날 사로잡았다.

처음엔 사소한 이질감이었다.

그러나 한 걸음을 떼고 디딜 때마다, 날숨과 들숨이 서로 자리를 뒤바꿀 때마다, 뭔가 어긋나고 있다는 감각이 내 몸 어딘가에 아무렇게나 쌓여 갔다.

그러다 결국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와르르 무너져 내 의식을 덮쳤다.

-왜 늦었는가.

난 대체로 시간을 엄수했다. 무능했기에 생긴 일종의 습관이었다.

남들이 ‘-타임’이라며 당연하게 몇십 분씩 늦을 때, 전생의 나는 그들과 반대의 지점에서 데칼코마니를 이루듯 몇십 분 일찍 일에 착수했다.

그래야만 대충 비슷하게 일이 끝났으니까.

노력은 언제나 최대치였고 재능은 늘지 않으므로 내가 투자할 건 시간밖에 없었다.

내게 정시를 지키는 건 당연함을 넘어서 사치였다.

그 관성은 회귀 후에도 남아 있었다.

근데 오늘은 내 쪽에서 약속 시간을 정해 두고도 늦고 말았다. 어째서.

위화감은 또 다른 지점에서도 발견됐다.

- 난 정말 서두르고 있는가.

아니다.

서두르자는 이성의 판단이 밑으로 하달되지 못하고 두개골에 갇혔다.

그래서 내 의식의 템포와 몸의 박자가 조금씩 어긋나고 있었다. 리듬감이 엉켰다.

손발이 반항기를 맞은 청소년처럼 사사건건 엇나갔다. 고물로 분류되기 직전의 몸뚱이에 빙의된 느낌이었다.

정리하자면.

난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소극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

인정해야겠다.

아까 전의 나는 상진이와의 잡담에 쓸데없이 오랜 시간을 들였다.

그게 늦어 버린 직접적인 이유다. 그와 보내는 시간이 너무 즐겁고 아까워서? 그럴 리가 있겠나.

나는 배윤하를 만나러 가기 싫었던 거다.

“……젠장.”

잠시 멈춰 서서, 흐트러진 숨을 가다듬었다.

생각해 보면 윤정희에게서 그 이야기를 들은 뒤부터 계속 이랬다.

의식하지 못했지만, 수학여행 오기 전부터 나는 계속 배윤하를 피하고 있었다.

- 내가 준 그 자료, 네 기대보다도 더 내용이 충실하지 않아?

그날, 윤정희는 김송헌 X-file이 담긴 박스를 가리키며 말했었다.

- 내가 주요 인사들의 정보를 꾸준히 수집해 온 건 사실이지만…… 그걸 감안해도 그건 내용이 너무 많아. 그리고 내 입장에서 김송헌은 그렇게 중요한 인물도 아니었어. 가진 바 배경에 비해 노는 스케일이 소박하다 해야 하나…….

- 걘 ‘건드려도 되는 사람’을 칼같이 구분했어.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길 거 같으면 얼씬도 안 한달까. 현명하다고 봐야지. 자기 주제를 안 거니까. 걔의 유일한 실패라면 널 건드렸다는 점인데…….

- 아무튼 내게 있어서 문제적 인물은 아니라 이거야. 성향만 보자면. 내가 그렇게 아득바득 약점들을 캐 모을 이유가 없었지.

그럼 이건 다 무어냐고 나는 물었다.

- 대부분이 윤하가 준 것들이야. 배윤하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 김송헌에게는 적이 많았어. 물론 개개인은 별 볼 일 없지만 그 정도 숫자가 되면 꽤 위협적이지. 윤하는 그중에 협력할 만한 사람을 모은 거 같아. 그리고 차근차근 정보들을 수집해 온 거지.

- 보면 알겠지만 하루, 이틀 모아 온 게 아니야. 꽤 꾸준히…… 적어도 일 년 이상은 걸렸겠지.

그녀가 그럴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 동기 같은 건 나는 모르지. 짐작되는 건 있다만, 함부로 추측하지는 않겠어. 어쨌든 윤하가 이걸 내게 건네면서 내건 조건은 단 하나였지.

- 이 자료들이 가장 위협적이고, 결정적인 순간에 사용되었으면 좋겠다. 그걸 도와준다면 당신의 충실한 수족이 되어 주겠다. 이래 봬도 나는 꽤 유능하다…… 뭐, 그런 귀여운 말을 하더라고.

‘…….’

-아마 자신만의 힘으로는, 약점 같은 거 아무리 모아 봐야 역부족이라 판단한 거겠지. 모으면 모을수록 김송헌의 힘을 실감할 수 있었을 테니까. 그래서 날 찾아온 거고…….

-뭐, 내게 나쁠 거 하나 없는 조건이니까 받아들였지. 그리고 난 지금이 그 ‘결정적이고 위협적인 순간’이라고 판단했고. 그래서 네게 넘기는 거야.

그때 내 표정과 행동거지가 어떠했을까.

기억나진 않지만 아마 썩 아름답진 않았을 것 같다.

그럼에도 윤정희는 무덤덤한 태도로, 끝내 진실을 내 귓가에 쑤셔 넣었다.

- 걘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아 달라고 했지만…… 적어도 넌 알아야 될 거 같아서 얘기해 주는 거야.

그때 이후로, 나는 생각의 반쪽을 얼려 두었다.

일부러 그렇게 했다기보다,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은 미봉책.

만나서 한마디라도 나누면 가둬 두었던 상념들은 기어코 범람하고 말 것이었다.

“…….”

숨이 다시 고르게 내쉬어진다.

나는 근섬유 하나하나를 직접 잡아당기는 느낌으로 완고히 걸어갔다.

행위에 집중했다.

그러지 않으면 꼼짝없이 붙들려서 여기에 잠길 것만 같다.

잠겨서 익사해 버린다고 누가 내 시체를 수습해 주지도 않을 테니까, 난 부지런히 움직여 날 따라잡는 생각들을 떨쳐 냈다.

거의 다 도착했다.

배윤하는 벤치에 앉아 추락하는 가로등 빛을 견디고 있었다.

빛의 무게를 감당하기 힘들었는지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림자가 머리칼 밑으로 드리워 그녀의 얼굴을 어둡게 지워 냈다.

대충 어두운 거리와.

가장 밝은 가로등 빛.

그리고 그 아래에서 가장 어두운 얼굴.

그 모든 것이 어색하지 않고 놀라울 정도로 조화로웠다. 그래서 더욱이 기이했다.

난 이 기이한 풍경에 내 모습을 덧칠하듯이 걸었다. 서서히. 조심스럽게. 풍경의 조화를 해치지 않으려 주의를 기울이며-.

멀리서 외딴 목소리가 뿌옇게 들려왔다.

내 더딘 발걸음에 맞춰 목소리도 더디게 커지고 명료해졌다.

“배윤하 걔는 눈치도 없나 봐. 싫다는 티를 내도 친한 척…… 아오, 재수 없어.”

“미친년, 걔 성격 좋다고 붙어 다닐 땐 언제고.”

“그땐 그때고…… 시발. 이젠 얼굴만 봐도 토 쏠려.”

“야야. 네가 이해해. 쟤가 사모하는 오빠님께서 배윤하한테 고백했댄다. 그 뒤로 완전 저기압이라는 거 아니니.”

“그래서 그러는 거야? 그래 뭐…… 그런 거면 인정해 줄게.”

“인정은 무슨. 야야, 솔직히 그렇잖아. 배윤하 그년…….”

목소리는 벤치에 인접한 담장 뒤편으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내가 알기로 그쯤에 으슥한 짜투리 공간이 있다. 꽤 은밀하게 숨겨진 곳이라, 연인들의 밀회 장소, 혹은 일탈을 꿈꾸는 어린양들의 대피소로 애용됐다.

그러나 담장은 공간을 나눌지언정 담배 냄새와 연기, 그리고 목소리까진 막아 내지 못했다.

그쪽도 여기 누가 있는지는 모르는 듯했다.

“솔직히 남자들한테 꼬리치고 다니는 거 꼴사납잖아. 너희도 그렇게 생각하지?”

“별생각 없는데.”

“너는 일단 2D에서 좀 빠져나와야 할 필요가 있어.”

“근데 가끔 별스럽다 싶을 때는 있지. 저렇게까지 여우 짓을 해야 하나 싶은? 그렇게 남자들 다 홀려 놓고 막상 사귀지는 않잖아.”

“다 어장 관리지 뭐.”

“그러니까. 고년 그거 즐기는 거야. 영향력 과시? 뭐, 그런 거지. 내가 이렇게 매력 있다. 내가 이 정도의 사람이다. 얼- 마나 자존감이 없으면 그러겠냐.”

“고아가 다 그렇지, 뭐. 평소에 사랑 못 받고 자라니까 그런 데서 자존감 채우는 거야.”

다 아는 목소리였다.

조금만 더 생각하면 이름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왜냐면 저들 모두가 배윤하와 같은 반 친구들이었으니까.

꺅꺅대면서 윤하와 손뼉을 마주치던 게 기억났다.

어디 파운데이션이 좋다느니, 컨실러는 이게 최고라느니, 생글생글 떠들며 같이 웃던 아이들이었다.

그러나 난 결국 그들의 이름을 떠올리지 못했다.

정확히는 떠올릴 겨를이 없었다.

안쪽 어딘가가 부글부글 끓었다.

심장이 독을 뿜어내는 듯했다. 유독한 피가 내 몸을 휘돌다 뒷골을 아리게 찔렀다. 이가 갈릴 정도로 거북했다.

“……이런 개 같은…….”

좋아. 결정했다. 저편으로 건너가서 깽판을 좀 쳐야겠다.

그래, 거기가 좀 은밀한 장소이긴 하지.

그러나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그 은밀함만 믿고 생명 탄생의 실험을 감행하려던 연인을 다섯이나 잡아 낸 전력이 있었다.

그 전력에 담배 태우는 비행 청소년 검거를 하나 추가해도 괜찮겠지.

그때 날 막아 선 건 배윤하였다.

그녀는 내 소매를 꽉 쥐고, 말없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얇은 소매 너머로 그녀의 잘은 떨림이 느껴졌다.

……미련하기는.

물론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될 이유는 없다.

난 그녀의 손을 떼어 내고, 근처 웅덩이로 걸어가 무기를 제조하기 시작했다.

소재는 진흙, 날아가는 중에 형태를 유지할 만큼의 찰기는 있으나, 적중한 후에는 형태를 무너뜨려 피격자의 온몸에 재앙을 퍼뜨릴 만큼의 수분을 충분히 함유한, 즉석 투척 무기가 생성되었다.

손으로 무기의 무게를 재고.

담장 위의 연기로 상대의 위치를 가늠.

목소리로 거리를 대강이나마 어림한다.

목표는 가장 아가리가 걸걸한 년.

나머지는 [투석]의 감각과 [수리적 통찰력]의 궤도 계산으로 메우기로 한 뒤, 담장 너머로 휙 던졌다.

팍-!

제대로 명중했음은 터져 나오는 비명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꺄아아아악! 뭐, 뭐야!! 어떤 미친놈이야아……!”

“누가 이 밤에 담배를 피우고 지랄이야? 냄새가 진동해서 잘 수가 없네. 너네 선생들한테 직접 항의할 테니까 이리 나와 봐라. 아주 혼구멍을 내 줘야지.”

“이씨…… 미친, 속옷 안에 다 들어갔어…….”

“야야, 그냥 가자. 미친놈인가 봐…….”

“그래그래. 빨리 가자. 괜히 엮였다 복잡해지면…….”

“야! 내가 이 꼴을 당했는데 그냥 가자고?!”

당한 본인은 길길이 날뛰었지만, 그네들 우정의 얄팍함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친구를 위해 위험을 무릅쓸 용의 따윈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내 예상은 구역질 날 정도로 적중했다.

“아, 그럼 어쩌라고. 우린 간다.”

“그래, 가서 씻으면 되잖아.”

“야아아-!! 진짜 너네 이럴 거야?!”

그리고 그 본인도 혼자서는 달려들 용기가 없던 모양이다.

그들은 씨발, 씨발 하면서 천천히 멀어져 갔다.

난 팔자걸음으로 척척 걸어서 배윤하의 옆에 앉았다.

“어떠냐 내 제구가. 코치님이 나 스카우트하려고 혈안인 이유가 다 있지?”

“잘난 척은…….”

배윤하가 힘없이 웃으며 내게 손수건을 건넸다.

난 사양할 것 없이 받아서 손을 찹찹 닦아 냈다.

“나서지 말라니까.”

“뭘 나서지 마. 넌 그걸 다 듣고만 있냐? 미련하게.”

“이런 거 한두 번이 아니니까. 일일이 대응하다가는 나만 피곤해.”

내 손이 멈칫했다.

“……처음이 아니야?”

“화장실에 앉아 있으면 가끔 듣는데, 뭐.”

“재주도 좋다. 그런 애들이랑 좋다고 웃고 그러냐? 그럼 속이 남아는 나냐?”

“남아나지 않으면, 뭐. 어쩔 수도 없잖아.”

“뭘 어쩔 수 없어. 머리끄덩이 잡고 내 두피가 더 강력하다는 걸 증명해야지.”

“풋.”

배윤하가 뿜듯이 한 번 웃더니, 뒤이어 둑이 무너진 듯이 길게 웃음의 다발을 늘어놓았다.

킥킥킥-.

그러나 웃음의 톤은 금세 낮아지고, 느려지고, 합쳐지다, 결국 가느다란 울음소리로 바뀌었다.

그녀는 자기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소리 죽여 흐느꼈다.

“…….”

난 어깨를 토닥여 주지 않았다. 위로의 말을 건네지도 않았다. 너스레를 떨어 분위기를 환기하지도 않았다.

그냥 옆에서 같이 숨을 쉬었다. 가끔 작게 헛기침도 했다. 내가 이곳의 무거움을 함께 감당하고 있다는 사실만 알렸다.

가끔은 그것만으로 충분할 때가 있었다.

침묵이 울음소리를 대체했을 즈음, 난 그녀에게 진흙범벅의 손수건을 되돌려 주었다.

“뭐야. 이걸로 얼굴 닦으라고?”

“잘 보면 귀퉁이에 깨끗한 부분도 있어. 세심함을 발휘해 봐.”

“하여튼 간에 말은 진짜…….”

그러더니 진짜 귀퉁이로 눈가를 훔쳐 내는 것이다. 재주도 좋은 녀석일세.

“그래서? 할 말은 뭔데?”

나는 말없이 봉투 하나를 건넸다.

핑크핑크한 겉면에 금박이 예쁘게 박힌, 러브레터 외의 용도로 쓰면 심히 난감해질 법한 편지였다.

“……이게 뭔데?”

“배윤하 전상서. 전상진 올림. 내용은 직접 읽어 봐. 난 배달부일 뿐이니까.”

“흠…….”

물론 집필을 내가 지도했으므로 내용은 다 알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내일 운명의 나무 아래서 만나자는 의미심장한 내용이 짧게 적혀 있었다.

“알았어. 일부러 전해 줘서 고마워.”

“그래.”

“다른 할 말은 없고?”

“아마도.”

“뭐야 그게.”

배윤하가 픽 웃더니 벤치에서 일어섰다. 얌전히 있던 그림자가 갑자기 격렬하게 너울쳤다.

“그럼 나 간다.”

“…….”

그대로 계속 입을 닫고 있으려 했다.

그러나 아까도 말했듯 오늘의 내 몸은 극심한 반항기를 앓고 있었다.

그녀가 얼마 멀어지기도 전에, 말한다기보다 게워 낸다는 느낌으로, 창자 어딘가에서부터 끌어 올려진 뭔가가 입 구멍을 통해 배출됐다.

“그렇게까지 해야 되냐. 그게 그럴 가치가 있어?”

“응.”

그녀가 고개만 까닥 돌려서 짧게 답했다.

내가 생각해도 맥락 없는 말이었지만, 놀랍게도 배윤하는 뭘 묻는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어째서?”

“한열아, 우린 고아잖아.”

“…….”

“그러니까 스스로 살아남아야 해. 누구도 우릴 보살펴 주지 않으니까. 내 발로 일어서지 못하면, 우린 그렇게 넘어져 있기만 하겠지. 그건 싫잖아. 비참하잖아.”

“……그런 거냐.”

“그런 거지.”

그녀가 내 쪽으로 반듯이 몸을 돌리더니, 경쾌하게 뒷걸음질을 쳤다. 다각, 다각.

“윤하야.”

“응?”

“너 상진이 정말 좋아하냐?”

“그럼, 당연하지.”

“아니, 남자로서 말이야.”

“그렇다니깐.”

그러면서 까르륵 웃는 것이다.

웃음을 잔향으로 남긴 채, 그녀는 점차 어둠에 물들어가다 이윽고 사라졌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벤치에 앉아 있었다. 무거운 생각들이 어깨를 짓눌러 일어나기가 힘들었다.

왜 그렇게 인맥에 집착하느냐.

그렇게 물으니 그녀는 고아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우린 사회적 불구이므로 일어서려면 남들보다 복잡하고 번거로운 단계를 거쳐야 한다고.

익히 알았고 공감도 하는 바였다.

하지만…….

- 그래. 그게 뭐 어때서. 왕따인 것보단 낫지.

- 아아아. 몰라 몰라. 어쨌든 난 상진이랑 친해지고 싶어. 협조 좀 해 주라.

- 이제 우리…… 어린애가 아니잖아. 어린애여서는 안 되잖아.

그녀는 계속해서 높이 올라가고 싶어 했다.

밤하늘의 별처럼.

모두에게 우러름 받고, 마음껏 빛나도 상관없는 위치에 오르는 것. 그걸 위해 배윤하는 살고 있다고.

그리고 자신을 그 위에 올리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발받침으로 써 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입양 가자마자 깔끔하게 우릴 잊어버릴 리가 없으니까.

근데 이제는 잘 모르겠다.

“……그래서, 뭐. 이제 와서 뭘 어쩌자는 건데.”

그녀가 상진이를 좋아한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남자로서’라는 단서를 붙였을 때는.

거짓을 말했다.

내 [눈치]는 저주스럽게도 그걸 간파해 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사귀겠다는 결심은 대체 어떤 동기로부터 비롯됐는가. 단지 신분 상승의 욕망인가. 그게 아니면…….

생각이 깊어질수록, 내 고개는 점점 하락해 이젠 스스로의 그림자에 파묻힐 지경이었다.

그랬다.

사람들은 두터운 보름달의 빛은 쉽게 받아 내면서 그보다 얄팍한 가로등 빛 아래서는 종종 고개를 조아리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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