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이 자꾸 늘어 70화>
10. 냉정과 열정 사이- 21
윤정희는 우릴 낮 동안 굴려 먹은 것도 모자라 새벽잠까지 강탈했다.
불침번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미리 협의된 사항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는 배신당한 기분을 느꼈다.
그건 마치 결혼 10년 차 남편이 ‘내가 서명한 혼인 신고서에는 그녀의 히스테리와 용돈 압박과 금주에 관한 경고는 적혀 있지 않았다.’고 술회하는 것과 비슷했다.
우리는 통제 요원의 업무에 수백 마리의 원숭이에게 질서를 가르치는 일까지 포함된다는 건 듣지 못했었다.
보험 사기급 정보 누락이었다.
이 상황에서 불침번이 거론되자 우리 중 몇 명은 쿠데타까지 고려하는 눈빛이 되었다.
그러나 윤정희는 과연 노련했다.
“먼저 자원하는 사람에 한해서 내일 저녁, 축제 시간 때 근무 빼 줄 거야.”
그 한마디에 순식간에 파벌이 갈리고 쿠데타는 실행되기도 전에 분쇄됐다.
몇 명이 자원하고, 몇 명은 무작위로 뽑혔다.
상진이도 자원했는데, 내일 고백에 변수를 차단하기 위함인 듯했다.
일하다 늦어선 곤란하니까.
같은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배윤하도 불침번에 자원했다.
“…….”
나도 자원했다.
다른 이유는 없고, 어차피 심란해서 잠이 올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두 시 반까지 뒤척이기만 하다가 뜬눈 그대로 불침번에 투입되었다.
몸이라도 좀 움직이면 나을까 싶어서 부지런히 걸어 다녔다. 그쪽이 불침번의 취지와도 맞았다.
군대의 불침번이 적 침입을 대비함이라면, 우리는 내부의 빌런들을 단속하는 자경단에 가까웠다.
누군가는 새벽 세 시까지 뚝심 있게 버티다 술병을 하나둘 꺼내 들었다.
검거됐다. 술 대신 쌍화탕을 처먹이고 다 재웠다.
여자 숙소와의 랑데부 포인트를 찾던 일당도 내 손에 발각됐다.
그 담장 넘었다가 성범죄자로 오인된 사례들을 줄줄이 읊어 주니 얌전하게들 복귀하더라.
그러고 있자 진정한 새벽이 찾아왔다.
새벽달조차 잠결에 꾸벅꾸벅 조는 시간.
밀물처럼 몰려든 어둠에 세상은 고요히 잠겨 있었다.
적막감이 암살자가 되어 사람들의 의식을 하나하나 끊어 냈다. 이제 곧 풀벌레 소리만 남을 것이다.
그러나 내 의식은 끝내 잠기지 않고 둥둥 표류했다.
저 바깥의 고요함보다 내 안의 소란이 더 강력해서일 것이다.
날 거꾸러뜨리지 못하는 밤의 무능함이 야속했다. 결국 난 지칠 때까지 돌아다니기로 결정했다.
이런 상황을 내다본 건 물론 아니겠지만.
무당이 내게 건네준 오카리나가 꽤 도움이 되고 있었다.
‘……왠지 이 근처인 거 같은데.’
반쪽짜리 오카리나를 쥐고 집중하면 세상이 기우뚱하는 감각이 엄습한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건 방향감이라기보다 균형감에 가까웠다.
몸이 한쪽으로 쏠려서 균형을 잃고, 그것을 되잡기 위해 반대 반향으로 기울이는, 그런 느낌으로 날 인도하는 것이다.
난 한동안 만취한 취객의 흉내를 내야 했고, 덕분에 다른 생각을 할 새가 없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이 느낌이 날 목적지에 데려다 놓았다.
어느 복도 위였다.
여기엔-.
‘……?’
아무것도 없었다.
물론 소화기나 화분 같은 건 있었지만, 그것들은 아무리 살펴도 오카리나와 비슷한 구석 따윈 없었다.
그러나 [율리시즈의 나침반]과 오카리나의 반쪽짜리 탤런트가 인도하는 감각은 여기가 맞았다.
이 온전한 평형감각을 다르게 해석하긴 힘들다.
그런데도 찾을 수 없다면 이유는 하나뿐이겠지.
‘위치는 맞지만, 수직적인 위상차가 있는 건가.’
성층권에 있지는 않을 테니 지하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 뒤로 건물을 돌아다니며 지하로 내려가는 길을 찾았지만, 결국 발견하지 못한 채 불침번 시간이 끝나고 말았다.
자리에 눕고도 생각은 끊이지 않았다.
그럼 땅에 묻힌 채로 건물이 세워진 걸까?
그렇다 보기에는 이 건물이 너무 낡았다. 어쩌면 건물 밖에서 여기 지하로 통하는 길이 있을지 모른다.
아님 하수도 어딘가에 걸려 있는 것인지도…….
그런 생각은 도움이 됐다.
수면에 도움이 됐다는 소리다.
어느새 생각이 끊겼다 싶더니 누군가 내 어깨를 흔들고 있었다.
“한열아, 일어나! 아침이야! 아침은 아니고 아직 새벽이지만. 어쨌든.”
눈 감았다 뜨니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잠은 좀 잔 거 같지만 머리는 여전히 무거웠다.
* * *
오전부터 날씨가 흐려서 학생들은 희망에 가득 찬 얼굴이 되었다.
이상한 표현이지만 정말 그랬다.
비가 오면 외부 일정의 절반은 취소될 것이기 때문에.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중학교 때부터 센다면 경산에는 총 네 번째 방문이다.
게임도 세 번이나 클리어하면 지겨워질 텐데, 수학여행의 정규 일정이라 해 봐야 오래된 수석 관람, 혹은 먹 갈고 난 치기 따위의, 있던 도파민도 분해시킬 따분함으로 점철된 것들이었으니 모두가 한마음으로 기우제를 지낼 만했다.
그리고 아이들의 간절한 기원에 힘입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다만 어설프게 내렸다.
우비가 지급되었고 일정은 강행되었다.
안개비는 우리에게 진흙으로 무거워진 발을 선물하고, 열대 우림의 후덥지근한 기후를 우비 안쪽에 강림시켜 주었다.
불쾌지수가 치솟고 있음은 그네들 얼굴만 봐도 확연했다.
누군가 외쳤다.
“야, 이 개자식아! 내릴 거면 확 내리든가! 아님 오지 말든가!! 왜 대충만 내리고 지랄이야아-!”
이 진심 어린 포효는 많은 이의 공감을 받았지만 안개비의 꾸준함을 저지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우울한 분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통제 요원들에겐 이득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드레날린 과다 분비로 특별 관리를 받던 놈들이 거세된 종마처럼 시무룩해져 있는 광경은 우리에게 묘한 카타르시스마저 안겨 주었다.
다소 용이해진 통제 환경 속에서, 민속촌 관람, 천문대 방문, 서원 체험 따위의 일정이 쭉쭉 진행됐다.
그리고 안개비는 오후 일정이 다 끝난 직후 딱 멈췄다.
마지막까지 속을 긁어 놓는 유종의 미를 거둔 것이었다.
“예? 무대 설치요?”
“응. 비 때문에 좀 더뎌지고 있나 봐. 저녁 식사 인솔은 신경 안 써도 되니까 넌 거기 지원 나가 있어. 그쪽 일 끝나면 쭉 쉬어도 좋아.”
“상관은 없지만요, 경산 축제에 우리가 돕고 자시고 할 이유가?”
“거기 우리 학생들도 나가서 공연하거든.”
“……아.”
“바로 가 봐. 어제 불침번부터 시작해서 수고 많았어.”
“옙.”
윤정희의 지시로 나를 비롯한 두 명이 경산 축제 하이라이트 무대를 설치하는 데 투입되었다.
나 외에 선정된 둘 모두 어제 불침번을 같이 섰던 애들이었다. 나름의 홀가분함을 공유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와, 이거 끝나면 진짜 다 끝인가.”
“축제가 끝나도 또 할 일이 있겠지만 말이야.”
“그래도. 축제 통제가 가장 큰 일 아닌가?”
“그렇지. 사고 날 확률도 가장 높고.”
“물론 시청 공무원들 협조 받으니까 아주 헬은 아니겠지만 말이야.”
“그래도. 이것도 다 끝나 가는구나…… 봉사 활동 다 채워 준다는 꾐에 넘어가서 이게 무슨 개고생인지, 원…….”
대화를 나누다 보니 현장에 도착했다.
현장은 아주 엉망진창이었다.
행사 준비 단계에서 우천을 고려치 못한 게 분명했다.
차단막이 이제야 막 세워지고 있고, 가련한 전자기기들이 자그마한 방수포 하나에 터질 듯이 모여 있었다.
비에 다 젖은 의자를 어떻게 할 건지 내부에서 협의도 안 됐는지, 누구는 의자를 닦고, 누구는 치우고, 누구는 치운 걸 다시 설치하고 있었다.
의자를 치우던 사람과 설치하던 사람이 우연히 맞닥뜨려 혼란한 시선 교환이 이루어지던 찰나에, 시청 담당자가 우리를 발견하고 불러 모았다.
“어, 야. 마침 잘들 왔다. 한 명은 저쪽에서 차단막 설치 돕고. 한 명은 우비 지금 온다니까 그거 입구에 비치하고. 또 한 명은…… 어, 무대 설치 경험이 있거나, 밴드부 같은 거 해 본 사람?”
“…….”
정적. 나밖에 없는 모양이라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럼 넌 무대 쪽으로 가서 세팅 돕고. 너는 우비. 너는 차단막. 오케이?”
“넵.”
“그래, 와 줘서 고맙고. 수고 좀 해…… 어이, 아저씨! 그거 의자 이제 설치 안 해도 된다니까!”
음, 역시 치우는 사람 쪽이 맞았던 모양이다.
무대 위 역시 무대 아래와 사정이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저마다 혼돈의 멱살을 잡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선박에 비유하자면 함장이 열 명쯤은 되어 보였다.
모두가 서로에게 지시했고 그 지시 대부분이 무시되는 가운데 노잡이들은 중구난방으로 노를 저어 배가 제자리를 선회하고 있었다.
버뮤다 삼각 지대가 절찬리에 구현되고 있는 이 경이로운 장면 앞에선 과연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와, 개판이네.”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므로, 나는 그냥 알아서 일을 찾아 했다.
해 봤던 일이라 수월했다.
음향 장비를 나르고, 동선에 방해되지 않게 전기 배선을 깔고, 왠지 모르게 뒤집혀 있는 모니터 스피커들을 제대로 뉘여 놓았다.
그러다 아는 얼굴을 만났다.
“어라? 이한열?”
“……수림 선배?”
“……어, 오랜만이네.”
“그러게요.”
“…….”
단발머리에 동글동글한 얼굴.
김수림은 예전에 밴드부 활동하던 시절의 선배였다.
음악적 자질이 출중하고 자부심도 넘쳐 나던 사람으로 기억한다.
그래서인지 날 별로 좋아하지 않았었지.
아니, 날 좋아하던 사람이 거기 있긴 했나…….
“그럼 수고하세요.”
“그래…… 너도.”
우린 그렇게 데면데면 지나쳤지만, 이 좁은 공간은 함장만 많고 사공으로 일하는 사람은 몇 없었으므로 필연적으로 불편한 마주침은 계속되었다.
나야 별상관은 없는데, 저쪽에서 특히 더 불편해했다.
결국 그녀 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왔다.
“……그동안 잘 지냈어?”
“그럭저럭요. 밴드부는 별일 없어요?”
“별일이라면 오늘 생겼지. 리허설도 못했는데 비 쫄딱 맞고…….”
“아하. 그건 좀 안됐네요.”
“네 얘긴 오다가다 들었어. 대단하더라.”
“……네. 별말씀을요.”
“…….”
“…….”
그리고 대화는 끊겼다.
끝마무리가 나빴기로는 그녀도 배윤하 못지않았다.
다만 배윤하는 모르는 사람도 5분이면 10년지기 베프처럼 굴 수 있는 초인적인 친화력의 소유자인 반면, 김수림은 그냥 인간이었다.
노말 휴먼.
“한열아…… 옛날부터 물어보고 싶었던 건데 말이야.”
“네?”
“혹시…… 나 때문에 밴드부…… 그만둔 거니?”
케이블을 정리하던 손이 잠깐 멈칫했지만, 이내 다시 능숙하게 움직이면서 답했다.
“딱히 그런 건 아니에요.”
“……그래?”
“그만둔 이유 중의 하나일 뿐이죠.”
“…….”
분위기가 늪에 빠져 버렸다.
뭔가를 타개하려고 한마디를 하면 더 깊게 처박히는 상황.
대충 시작해 어설프게 끝난 대화는 분위기를 한층 더 애매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난 분위기를 늪에서 건져 올릴 의향이 없었다.
그녀의 의도도, 심경도, 하고 싶은 말도 짐작했지만, 지금의 난 내 마음을 가누기에도 버거웠으니까.
타인의 죄책감까지 헤아려 줄 여유 따윈 없었다.
그때였다.
“아 거기까지 볼륨을 줄이면 크랭크 업 된 소리가 다 죽잖아요!”
“아니, 그럼 계속 피크 뜨고 하울링 뜨고 난린데! 어쩌라고!”
“그걸 알아서 하는 게 엔지니어들 일이잖아!”
“이 어린노무 새끼가 어디서 반말지거리야?!”
“하…… 하여간 꼰대들 말만 막히면 나이 들먹이지…… 뻔해서 아주 지겹다 이제.”
“이 자식이 진짜……!”
무대 저편에서 소란이 팍 튀어 올랐다.
그중 하나는 우리 둘 다 아는 목소리라 자연히 시선이 옮아갔다. 픽 웃으며 말했다.
“재준 선배도 여전하네요.”
“……그러게. 쟨 어딜 가든 저러네.”
“가 보셔야죠.”
“응…… 나중에 보자.”
“네.”
박재준은 밴드부 기타리스트인데, 고만고만한 실력과 완벽주의적 성질이 결합되었을 때 어떤 지랄맞은 성격으로 귀결되는지를 보여 주는 사례라 하겠다.
어쨌든 김수림은 밴드부 부장으로서 분쟁을 해결하러 떠났다.
그리고 중재자라 쓰고 샌드위치라 읽히는 꼴이 되었다.
“재준아! 넌 말 좀 곱게 쓰라고 했지!”
“지금 그게 중요해?! 사운드 엔지니어가 사운드를 죽이고 있는데? 아, 혹시 믹서가 아니라 스패너 만지는 그 엔지니어였나?”
“이 새끼가 듣자 듣자 하니까…….”
“죄, 죄송합니다. 기사님, 얘가 성격에 좀 문제가 있어서…… 근데 정말 어떻게 안 되나요? 감쇄기 없어요?”
“안 된다니까. 내가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요.”
“아니, 그래도 기타는 마스터 줄이면 뉘앙스가 확 죽는 거 아시잖아요.”
“아는데 어쩔 수 없다니까. 무대 구조상 너무 올리면 밸런스 확 망가지게 돼 있어요. 나 참, 학교 밴드 주제에 무슨…… 누가 보면 U2라도 내한한 줄 알겠네.”
“예? 그건 말씀이 좀 심하신 거…….”
“하여간 지들 무능한 건 생각도 안 하고 딴소리는.”
“뭐야? 이 새끼 진짜 안 되겠네. 야! 너 내려와. 나도 너 같은 애새끼 사운드 봐 주기 싫으니까.”
“하이고. 이젠 프로 정신까지 내팽개치셨네. 돈 벌기 싫으신가 봐?”
“재준아! 그만!”
결국 멱살잡이가 일어났다.
목청이 커지고, 주변 스태프들이 떼어 말리고, 가운데 낀 김수림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치이다가 결국 튕겨 나와 무대 어딘가에 대차게 넘어졌다.
쾅-!
넘어지는 소리가 하도 요란해서 소란이 잠깐 멎었다.
시선도 모여들었다. 애꿎은 사람을 말려들게 했다는 자책이 두 남자의 멱살잡이를 잠시 중단시켰다.
그 잠깐의 소강상태를 틈타 내가 말했다.
“소리 키울 수 있어요.”
“……뭐?”
“기타 소리 키울 수 있다고요.”
사실 넘어지는 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다.
내가 뒤에서 그녀를 슬쩍 받아 냈으니까.
이 소리는 내 [돌주먹]이 무대를 후려치며 난 것이었다. 내 오지랖이 왜 갑자기 발동됐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일단 끼어들었으니 최단기간에 처리해야지.
“기타 앰프 위치를 1.5m 정도 앞으로 당기고 안쪽으로 15도 정도 틀어요. 그럼 음향학적 간섭이 최소화될 겁니다. 그래도 마스터 절반 이상 올리긴 힘들겠지만, 그 정도면 충분하죠? 재준 선배?”
“……어? 어어.”
“물론 엔지니어님 말도 다 맞아요. 근처가 산지대라 온통 다 지뢰죠. 이대로라면 사방에서 울리는 에코 때문에 다들 자기 소리보다 하울링을 더 많이 들을걸요.”
“야 근데 엔지니어도 못한 걸 네가 어떻게 알아? 웃기는 새끼네, 이거.”
난 피식 웃었다.
“일단 해 보세요.”
대안 없이 계속 길항하기만 하던 차에 나타난 유일한 해법이었다.
그들은 반신반의하면서도 내 제안을 시도해 볼 수밖에 없었고-.
“……어? 진짜네?”
“그렇지! 이 정도는 사운드가 나와 줘야지!”
“……학생, 이거 어떻게 한 거야?”
진지하게 설명해 줄 수도 있지만, 그러려면 여기에 칠판 세 개 분량의 긴 수식을 적어야만 했으므로 난 좀 더 단순하게 말해야만 했다.
“계산요.”
“응?”
“하울링이란 게 결국 특정 주파수의 간섭 효과인 거잖아요. 그럼 음파가 확산되는 경로를 계산해서 겹치는 부분을 최소화하면 되는 거죠. 그 주파수만 공명하지 않도록.”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수학경시대회 대상쯤 타면 다 할 수 있어요.”
좌중의 모두가 외계어를 해독하는 표정이 되었다.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해하시라. 천재란 것들은 원래 이런 법이니.
어쨌든 그 뒤로 난 입이 바빠졌다.
“하, 학생. 여기 베이스 킥이 먹먹하게 뜨던데. 이건 어떻게…….”
“글쎄요. 이건 어쿠스틱 사운드의 측면에선 큰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 그럼 드럼 세팅보다 마이크의 문제가 아닐까요? 이것저것 바꿔 보시죠. 고음역대 수음이 수월한 것으로.”
“학생! 여기 어쿠스틱 앰프는? 이거 완전 진상이야. 피크가 계속 뜨네!”
“흠. 적어도 이 공간에서는 저도 힘들 거 같은데. DI로 직접 빼는 건요?”
“난 그렇게 하고 싶었지. 근데 뮤지션들이 반발해서…… 저 앰프로 꼭 마이킹을 해야겠다는 거야. 그래야 사운드가 산다고.”
“그럼 이렇게 해 보죠.”
일단 흡음재 역할을 해 줄 천을 어디선가 구해 와서, 음이 난반사 되는 포인트를 잡아 구겨 넣거나 얇게 펴서 붙였다.
미관적으로는 좀 별로지만, 그 부분을 딴죽 건다면 친히 죽빵을 날려 주겠다.
“……됐다!”
“후우. 이건 저도 좀 힘들었네요.”
“고마워, 학생! 이야. 이거 완전 귀신이네.”
“여기서 앰프 위치 옮기면 안 돼요. 계산 다 틀어집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내가 이 배의 유일한 함장이 되어 진두지휘를 하고 있었다.
이럴 생각까진 없었는데…….
어쨌든 지휘 계통이 통일되니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애초에 더 설치할 건 많지 않았고, 소리들이 까불대다 부딪치기 딱 적합한 공간인 것이 문제의 핵심이었다.
그 부분만 내가 보완해 주니 작업은 30분 만에 끝났다.
“으아. 수고했어! 덕분에 리허설 한 번은 할 수 있겠네.”
“네, 수고하셨습니다.”
아까 멱살잡이까지 했던 그 엔지니어였다. 난 그에게서 명함을 받았다.
“혹시 알바 자리 필요하면 연락해. 우리랑 일하면 아이돌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고?”
“재미는 있겠네요.”
“그럼 또 보자.”
그 이후로도 기사들과 뮤지션들이 와서 내게 고맙다는 말과 함께 캔 음료 따위를 건네고 지나갔다.
마지막으로 다가온 건 김수림 선배였다.
“한열아. 음…… 잠깐 얘기 좀 할래? 괜찮다면.”
나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음료수 좀 나눠 들어 주시면요. 다 못 먹을 거 같은데.”
“크큭. 그래. 내가 다 먹어 줄게.”
우린 무대 뒤편의 잔디밭으로 가서 남은 우비를 깔고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