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이 자꾸 늘어 71화>
10. 냉정과 열정 사이- 22
우린 무대 뒤편의 잔디밭으로 가서 남은 우비를 깔고 앉았다.
각자 쌍화탕과 사이다를 들고 건배했다.
무대 위에선 부드러운 톤의 오버드라이브 기타 사운드로 개리 무어의 ‘Loner’가 연주되고 있었다.
“재준 선배, 많이 느셨네요.”
“그런 것도 아니야. 저 연습 벌레가 부실에 얼마나 붙어 있는데. 그거 감안하면 지금의 두 배는 더 잘해야지.”
“그러게요. 그래도 저보다는 열 배 정도 잘 치지만.”
“아…… 그…….”
박재준의 재능은 보통이었고, 실력은 아마추어에서 잘하는 수준이었다. 무시하지 못할 노력을 들여 보통보다 한 걸음 앞서는 정도.
그에 반해 김수림은 재능충이었다.
노력을 들이면 그에 정확히 비례해 실력이 늘었다.
마지막으로 내 재능은 불가해한 수준이었고, 비장한 노력을 들여 비참한 결과 값을 이룩했다.
“미안…….”
김수림이 우물쭈물하다 사과했다.
“선배가 사과도 할 줄 아시네요. 의외예요.”
“뭐, 뭐래니. 나도 사과 정도는 할 줄 알거든?”
“물론 그러시겠죠. 전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지만.”
“음…… 그건 미안…….”
그녀는 눈에 띄게 의기소침해져서 체구가 반쯤은 줄어든 듯 보였다.
난 그 모습이 신선했다.
내가 기억하는 반년 전의 그녀는 사과를 하느니 사과를 받을 대상을 암살해서 갈등을 해소해 버리는 사람이었다.
완고한 세계관의 소유자로서, 세상을 본인의 틀로 재단해 두고 그 바깥의 것들을 용납하지 못하는 부류이기도 했다.
- 너 음악 왜 하니? 자기만족이야? 그럼 집에 가서 혼자 즐겨. 사람들 앞에서 멋대로 소음공해 일으키지 말고. 그거 다 민폐야. 알아들어? 그딴 건 음악이 아니라고.
그 당시 그녀에게 음악이란 일종의 종교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나란 존재는 신성 모독을 매일 저지르는 악덕의 덩어리였겠지.
그래서 그녀를 오랜만에 만났을 때 조금은 놀랐었다. 그녀가 내게 죄책감을 느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었으니까.
“……그때 나는 이래저래 몰려 있었거든.”
“…….”
“나 원래 보컬이었던 건 알지? 성악 쪽.”
“……성대 결절로 그만두게 됐었다는 얘기는 들었어요.”
“그래. 밴드부에 들어온 게 그즈음이었지. 사실 밴드부 들어온 건 반쯤은 도피였어. 말하자면 삐뚤어지기? 자포자기의 선택? 뭐, 그런 거였지.”
“그런 것치곤 너무 잘하셨던 거 아녜요?”
“재능이 있었으니까. 대충 해도 아마추어 정도는 압살할 정도로.”
재수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봐 주었다.
“……뭔가 엄청 재수 없다는 얼굴이네.”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봐도 어쩔 수 없어. 사실은 사실이니까.”
“그것도 부정하지 않도록 하죠.”
그녀가 베이스를 튕기는 걸 보면 기분이 묘연해진다.
그건 몸에 밴 그루브를 악기에 옮기는 듯한, 연주와는 완전히 별개의 작업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저건 격이 다른 재능이라고, 짧은 귀로도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조차 내 보컬리스트로서의 재능에 비하면 하찮았어. 그땐 정말 천국에 있다가 지상으로 곤두박질쳐진 기분이었지.”
“…….”
“어쩌면 밴드부에 남아 있던 건…… 내 자존감을 유지하기 위한 유치한 방편이었을지도 몰라. 어쨌든 여기서 난 유능했으니까. 사람들의 찬사를 받을 수 있으니까…….”
“지금은 다른가요? 아니, 달라졌나요?”
“조금은? 다는 아니지만, 조금씩은 달라지고 있어.”
“왜요?”
그녀가 희미하게 웃었다. 아니, 울상을 지은 건가?
“친한 친구가 자살을 기도했거든.”
울상 쪽이 맞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녀가 내 표정을 보더니 손사래를 쳤다.
“아냐. 안 죽었어. 그러니까, 시도했다가 실패한 거지. 그 뒤로 많이 안정돼서 지금은 멍청한 짓이었다고 스스로도 말하고 다니지만…… 어쨌든 당시의 내겐 큰 충격이었어. 그리고 충격은 충격이지. 없어지지 않아.”
“왜 그런 짓을?”
“발레 하던 아이였거든. 도무지 따라갈 수 없는 태양 같은 존재를 발견했고, 상심했고, 상심이 자신을 해치도록 방관했지. 그런 거야.”
“…….”
“그때 난 ‘그깟 재능이 뭐라고’라고 생각해 버렸어. 내 세계를 반석처럼 떠받드는 진실이 기우뚱 기울어진 거지. 그리고 뭔가 현타가 왔다고 해야 하나…….”
‘현타’를 발음하면서 그녀는 가뭇없이 웃었다.
안개처럼 붙잡히지 않는 표정을 좋을 대로 방치했다. 내가 모르는 그녀의 얼굴이었다.
“그때 네 생각이 많이 났어.”
“왜요. 제 재능이 제일 일천해서?”
“응.”
“……직설적인 건 그대로이시네요.”
“그것까지 바뀌면 내가 아니지.”
“그 부분은 좀 바뀌어 주세요…….”
“근데 그렇게 너 못한다고 구박하고, 혼낸 모든 일들이 말이야, 그땐 널 향해 외쳤다고 생각했지만…… 잘 생각해 보니 아니었어. 사실 난 날 향해 그랬던 거지.”
“…….”
“그거 알아? 세상에서 가장 중독적인 감정은 자기혐오라는 거. 혼자서는 헤어 나올 수가 없거든.”
그즈음 그녀가 마시던 사이다가 바닥을 드러냈다. 알루미늄 캔이 그녀의 손안에서 와그작 찌그러졌다.
“난 네가 불편했어. 재능도 없으면서 왜 그러고 있는 걸까…… 하고. 난 도피했는데, 넌 없는 재능으로도 계속 도전했으니까. 사실은 나 자신을 혐오했던 건데, 그땐 네가 밉다고 착각했던 거지.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았어. 네가 그만두고 난 뒤에야.”
김수림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 정면에 섰다.
한참 동안 말없이.
그러나 할 말은 그녀 안에 다 있을 것이었다.
단지, 넓은 징검다리 앞의 머뭇거림, 색인되지 않은 낯선 단어 들, 말로 다 하기엔 굽이굽이 굴곡이 심한 감정들이, 동시에 몰려들어 목 부근에 서로 얽혀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감정의 병목 현상을 결국 극복해 내었다.
“미안했어.”
내게 고개를 조아리며.
“네 열정을 그렇게 폄하해서는 안 되는 거였어.”
이십 년이나 늦어 버린 사과를
“네 노력과 진정성을 하찮게 봤던 건 비열했지.”
그래서 이젠 화석처럼 굳어 버린…….
“선배로서, 재능은 재능일 뿐이라고 말해 주지 못했어. 난, 여러모로 모자란 사람이었어.”
내 안의 웅크린 아이에게 건네주었다.
“미안해.”
“……왜.”
그때 불쑥 치오른 감정은.
분노였다.
난 가까스로 격정을 억누르고 목소리를 평이하게 뽑아냈다. 그러나 그 끝이 떨리는 것까지 막을 순 없었다.
“왜 이제야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너무 늦었니?”
“늦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요. 필요 없는 말이었으니까.”
“그게 무슨…….”
“과거의 선배가 옳았습니다.
입술 안쪽을 지그시 사려 물었다.
“못할 만한 건 애당초 때려치웠어야죠. 그게 세상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이로운 일입니다. 열정? 그딴 건 낭만적으로 포장된 자해에 불과합니다. 혹은 효과 좋은 우울증 촉진제라고 할 수도 있겠군요. 좀 세련된 자살 방법을 찾는 사람이 아니라면 추천할 게 못 됩니다.”
“…….”
“원래 수학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잘하니까 좋아하게 되더군요. 경시대회 대상을 탔을 때는 짜릿했습니다. 사람들이 떠받들어 주니까 신 나서 날아갈 거 같더군요. 열정이나 호오라는 건 결국 그 정도의 것입니다. 아주 일순간의 착각만으로 좌우될 수 있는 것.”
“……잘 모르겠네.”
“…….”
“그건 좋아하는 것보다 잘하는 걸 하겠다는 말이야?”
“당연하죠. 아니, 그 자체가 우문입니다. 결국은 잘하는 걸 좋아하게 될 테니까요. 못하는 건 결국 진절머리가 날 것이고!”
실수다.
결국 허파에 힘이 들어가고야 말았다.
난 뒤늦게야 숨을 가다듬으려 해 봤지만 호흡은 스스로 탄력을 받아 가며 거칠어졌다.
그러나 말을 취소할 생각은 없었다.
1년은 아등바등 구를 수 있겠지.
어쩌면 5년 동안 이를 악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십 년이라면.
십오 년이라면.
평생이라면?
안쪽으로 파고드는 자기 멸시와.
일상이 되어 버린 열등감.
열정이라 믿어 온 아집들을 짊어지고.
그렇게 도달한 끝에도 과연 가치는 있는가.
타인을 감동시키지도 나를 구원하지도 못하는 열정에 과연 가당찮은 점수가 매겨지긴 할 것인가.
“그러니까 사과할 필요 없습니다. 과거의 말을 취소할 이유도 없구요. 실언이 아니라 현실적인 충고였다고 전 받아들일 겁니다.”
결국 내 열정을 포기했을 때, 아이러니하게도 당신들의 말이 도움이 됐다.
내가 그만둬야 할 이유들이 다 당신들의 말속에 있었다.
근데 이제 와서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왜 어제부터 계속, 이미 내려 버린 결정들을 되짚어 볼 걸 강요해. 왜 너희들은…….
“……그 말은 좀 이상해.”
“뭐가 말이죠?”
“그럼에도 넌 즐거워 보였는걸. 그렇게나 재능이 없는데도 좋아했잖아. 반대로 말하면, 그거야말로 진짜 감정이라는 뜻이 아닐까? 내가 잘못 본 거야?”
“네. 잘못 보셨어요.”
“왜?”
“진짜 감정, 가짜 감정 같은 건 없어요. 시간이 지나면, 다 그저 그런 감정들만 남죠.”
안개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깨끗이 트인 시야가 흐려져서 세상은 적당히 좁아진 듯하였고, 동시에 당신과 나의 사이는 기묘하게 멀어진 듯 보였다.
눈꺼풀에 물방울이 맺혀 그녀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이때다 싶어 나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 볼게요.”
“……한열아.”
“남은 음료수는 밴드 사람들한테 나눠 주세요. 제 얘긴 안 하셔도 되고요. 미안할 필요 없다고 했지만, 선배 마음이 불편하시다면 사과는 받은 걸로 할게요.”
“…….”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웠어요.”
그녀를 뒤로하고 걷다 보니, 문득 그림이 반대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과 일 년 전만 해도, 김수림이 내 무능을 성토하고, 나는 그럼에도 꿋꿋이 꿈을 꾸는, 소년 만화의 왕도적 구도가 우리 밴드부의 단면을 차지했다.
그러나 이젠 반대.
소녀는 꿈을 잃은 지점에서 다시 꿈을 꾸기 시작했다.
이제부턴 높진 않아도 더 넓어진 꿈의 세상을 거닐 거라 하였다.
반면 소년은 너무 오래 꾸어서 악몽이 되어 버린 꿈에서 뒤늦게야 깨었다.
누가 옳은지는 나도 모르겠다.
다만 그녀는 고작 일 년 만에 그렇게 변했지만, 나는 수십 년에 걸쳐 서서히 나를 퇴화시켜 왔다.
세월은 내 심장을 느리고 두껍게 만들었다. 그녀의 송곳이 뚫기에는 좀 버거울 것이었다.
“한열아! 그래도 기다릴게-!”
멀리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난 고개를 돌려 보았지만, 안개비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 * *
축제의 거리.
그러나 여전히 비는 애매하게 내렸다.
사람 복장 뒤집어 놓기 딱 좋은 날씨였다.
애매했지만 여전히 비였으므로, 장난감이 만든 비눗방울은 탄생되자마자 소멸됐고, 축축한 안면에 칠해진 페이스페인팅은 초현실주의적 추상화가 되었으며, 솜사탕은 막 구출된 수재민 꼴로 오지 않을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아무리 긍정적인 시민이라도 여기서 축제의 활기를 느끼긴 힘들 것이다.
반대로 애매한 빗줄기는 돌아가기도 애매하게 만들었다.
돌아가자니 이왕 나온 게 아깝다. 있다 보면 비가 그칠 것도 같다.
돌아가자고 하고 도로에 오른 순간 비가 그친다면 그 눈총을 감당키는 힘들 것 같다.
그래서 누구도 ‘먼저’ 돌아가자고 말하지 못한다…….
악순환.
비극의 고리.
누구도 죄를 짊어지지 않아 다 같이 고통 받는 이 사바세계의 연옥 속에서 사람들은 좀비처럼 배회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꽤 기분이 나아졌다.
모두가 공평하게 시궁창에 있음을 보고 있자면 내 삶의 시궁창스러움도 어느 정도 용서가 되는 법이었다.
그렇게 군중 사이를 휘휘 걷고 있는데.
무언가가 내 시선을 탁 잡아챘다가 놓쳤다.
뭐지?
왔던 걸음을 되밟으며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모든 게 물처럼 흐르는 군중 안에서는 매 순간마다 장면이 바뀌었다.
내가 뭘 발견했는지를 알아차리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알아차렸다.
나는 군것질거리를 파는 노점 중 하나를 정확히 포착하고 걸었다. 닭꼬치와 떡볶이, 오뎅 따위를 파는 평범한 노점이었다.
문제는 그 주인이었다.
“뭐 드릴까요, 학생? 닭꼬치? 떡볶이?”
“…….”
역시나 그런 컨셉이신가.
나는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현지 쌤,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전 이현지라는 사람이 아닙니다아-.”
“저도 이현지라고는 안 했는데요. 현지 쌤이라고 했지.”
그녀, 보건 교사 이현지 선생이 한숨을 푹 내쉬더니, 오뎅 국물 한 컵을 냅다 원샷해 버리셨다.
“어떻게 알았어? 나름 열심히 분장했는데.”
두꺼운 뿔테 안경에 노란색 단발 가발을 쓰고, 눈썹도 두껍게 칠하고, 심지어 입안에는 틀니까지 끼운 듯했다.
이러면 어지간하면 모르긴 하겠지. 하지만-.
“제가 눈이 좀 좋거든요.”
[눈치]의 부가 효과 같은 것이다.
눈치란 결국 보이고 들리는 걸 잘 통찰하는 능력이고, 그건 곧 눈썰미가 좋다는 말과 일맥상통했다.
적어도 여자 친구의 ‘뭐 바뀐 거 없어?’라는 질문 앞에서 곤혹을 치를 일은 없었다.
“근데 매번 등장하실 때마다 쇼킹하네요. 이번엔 웬 가발까지…….”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
“아마 저 말고는 모를 테죠. 분장 잘하셨네요.”
“맞아. 네가 이상한 거야. 완벽한 위장이었다고.”
아, 방금 언짢아하셨다. 위장이 간파당해서 기분이 상하신 건가. 그럼에도 친절을 베푸는 것이 그녀다웠다.
“일단 안쪽으로 들어와. 거기 서 있으면 비 맞잖아.”
“우비 있어서 괜찮은데요.”
“그래도 비 맞으면 춥잖아. 아, 우비의 느낌을 즐기는 스타일이니?”
“그런 스타일은 대체 무슨 스타일이죠.”
“왜? 난 우산보다 우비 파인데. 비를 맞으면서 젖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 특히 멋지지 않아?”
“죄송해요. 전혀 모르겠습니다.”
“그럼 안으로 들어와.”
분부대로 들어갔다. “실례합니다.” 노점은 작지만 측후면이 확실히 구획되어 있어서 나름 아늑했다.
우비를 벗고 있는데 그녀가 하회탈을 척 내밀었다.
이런 건 대체 왜 구비하고 다니는 걸까.
“……뭐예요?”
“쓰고 있어. 네가 여기 있으면 나라는 걸 들키잖아.”
“상관은 없는데…… 이거 쓰면 이목은 더 끌릴 텐데요.”
“뭐 어때. 정체만 모르면 되지.”
그리고 그녀는 날 그냥 옆에 두고 태연하게 장사를 재개했다.
놔두면 아무 설명이 없을 분위기라서 굳이 환기시켜 드렸다.
“돈 버시는 건 이젠 그러려니 하겠는데요. 근데 왜 하필 분장을……?”
“으음…… 네가 저번에 교사가 투잡 뛰어도 되냐고 물어봤었지?”
“네? 아. 그랬죠.”
“물어봤는데, 교감이 안 된다고 하더라고. 그 망할 대머리가. 그래서 이렇게 숨어서 하는 거지.”
“마, 망할 대머리라니…… 학칙은 교감이 만드는 게 아닐 텐데요…….”
“응? 당연히 그렇지. 그렇다고 교감이 망할 대머리 독수리라는 점이 달라지진 않아.”
“……한 단어가 늘었어…….”
첨언컨대 그녀는 ‘망할 대머리’를 무척 사무적인 어조로 발음했다. 누가 들으면 잘 알려지지 않은 조류 학명을 읊는 줄만 알겠네.
어쨌든 그녀 입에서 험담조의 말이 나오는 건 드문 일이다. 그리고 그 대상은 대충 정해져 있었다.
표현이 전보다 격렬해졌는데 이젠 아주 삼도천을 넘어 버린 걸까.
“그럼 그냥 다른 데서 일을 하시는 것이…….”
“나도 수학여행이 여긴 줄 알았으면 안 이랬지.”
“아? 아아…… 대충 알겠네요.”
수학여행은 중간에 한 번 바뀌었다.
“축제니까 돈 되겠다 싶어 날 맞춰서 휴가까지 냈거든. 노점도 대여하고 자릿세도 미리 다 내놨는데…… 수학여행이 중간에 턱 바뀌는 거지 뭐니. 갑자기 틀니 구한다고 혼났어.”
“……그럼에도 강행하는 선생님도 보통은 아녜요.”
“그런데 비가 오네. 오늘은 뭔가 날이 아닌가 봐.”
“하하. 그러게요.”
정말 꼬일 대로 꼬였다 싶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갑자기 전생에도 이러셨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때 나도 이 거리 돌아다니면서 군것질 좀 했는데 어쩌면 스쳐 지나갔을 수도…….
‘……어……?’
잠깐. 뭔가…… 이상한데?
오늘 하루 여유가 없어서 그냥 지나쳤는데, 전생을 돌이켜 보면 둘째 날에 비 따위는 오지 않았었다.
오히려 사람이 지나치게 북적거려서 쾌적하지 못했던 걸로 기억한다.
‘……뭐지. 나비 효과인가?’
카오스 이론 따위 잘은 모르지만, 아예 없으리란 법은 없을 것이다.
그러려니 하고 넘기려는데 불쑥 불안감이 치밀었다.
- 왕이 계시므로 더욱 그럴 것입니다.
- 가는 곳마다 거기 잠든 것들을 깨워 내는, 그래서 마침내 자신의 인과율로 끌어들이고 마는, 고귀한 수레바퀴의 소유자.
……설마.
아니겠지.
그때 현지 쌤이 입을 쭉 내밀고 귀엽게 투덜거리는 바람에 복잡했던 머리가 리셋됐다.
“적자야 적자. 완전 적자. 엄청 적자. 심각한 적자…… 음. 홍길동 애비도 이 적자는 싫어하겠네. 홍길동한테 호부호형을 허락한 이유가 있었어. 그야말로 율도국을 세워 버린 자금난이라 할 수 있지.”
“……쌤. 그 개그는 어디 가서 안 하시는 게.”
“에. 삼촌이 할 땐 재밌었는데.”
“삼촌도 좀 말려 주시고요.”
“에.”
“부탁드릴게요.”
“어쨌든 결론. 오늘 장사는 폭망이다…….”
시무룩해지셨다.
이렇게 표정을 지으면 귀여워진다고 어디서 특강이라도 받아 온 듯한 얼굴이었다.
틀니를 껴도 그다지 퇴색되지 않는 미모가 마냥 감탄스러웠다.
결국 남성의 뇌하수체에서만 발산되는 호르몬 하나가 날 굴복시켰다.
이름은 아직 없지만 효과는 강력하다.
미인 앞에서는 호구가 된다.
“……컨설팅이라도 해 드릴까요? 저라면 이거 한 시간이면 다 팔 수 있는데.”
“응? 컨설팅?”
“뭐, 사실 그 분장만 지우시면 쌤도 30분 만에 완판시킬 수 있겠지만요.”
“그건 안 돼.”
“그러니까요.”
“……음. 좋아. 너의 그 신기라면 믿을 수 있으니까.”
선생님은 아직도 이한열 무당설을 믿고 계신 듯했다.
“컨설팅 비용은?”
“글쎄요. 저 부자라 돈은 별로 필요 없는데요.”
“그러네. 한열이 나보다 돈 많았지…… 안 돼. 그래도 노동은 신성한 거야. 정당한 대가를 지불받아야지.”
“그럼 선생님이 제시해 주세요. 돈 외의 것으로. 되도록 무형의 서비스면 좋겠네요.”
어차피 혼자 있으면 땅굴만 파고 있을 거다.
지금은 생각을 지우고 뭐라도 하고 싶었다. 따라서 그녀가 뭘 제시하든 그냥 받아들일 셈이었다…… 는 생각은 중간에 좀 바뀌었다.
선생님.
되도록 연령 제한이 높은 서비스일수록 좋습니다.
윤리적 문제가 걸리시겠지만 사실 제가 회귀자이므로 그런 통상적인…….
“무릎베개에 쓰다듬 이용권.”
하.
참나, 헛웃음이 나오네. 대체 날 뭘로 보고…… 내가 그걸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한 건가?
당연히 받아들여야지.
“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