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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이 자꾸 늘어-73화 (73/164)

<재능이 자꾸 늘어 73화>

10. 냉정과 열정 사이- 24

*   *   *

우중충한 날씨.

우중충한 거리.

우중충한 얼굴들.

그러나 그녀는 얼어붙고 새까매진 겨울 호수를 튀어 오르는 은어처럼 그 모든 우중충함을 자신의 배경으로 만들어 버렸다.

어디에 있든 그녀는 홀로 빛났다.

“비눗방울 누가 더 오래 살아남게 하나 내기할래? 벌써 난 오의를 터득했거든.”

비눗방울 장난감을 사 놓고 몇 분을 가지고 놀더니 하시던 말이었다.

옆에서 지켜본 바로는 5초 이상을 못 버텼던 것 같은데…….

어쨌든 바라셔서 해 드렸더니 정말로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거의 일이 초 차이로 계속 내가 지는 것이었다.

비결이 뭐냐 물으니 비눗방울과 감응해야 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뭐야 그게.

“페이스페인팅 해 주세요.”

“어, 진짜 괜찮으시겠어요? 번질 수도 있는데.”

“그거 재밌겠네요.”

“……?”

현지 쌤과 나란히 페이스페인팅을 받았다.

금방 망가질 걸 왜 받느냐고 물으니, 그럼 배고파질 걸 밥은 왜 먹느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뭐야 그게.

어쨌든 그녀는 얼굴에 피카츄를 그렸고 나는 펭구를 그렸다.

그리고 5분도 지나지 않아 피카츄의 형태가 무너지기 시작하더니 따끈따끈한 유황 증기를 뿜어내는 노란색 슬라임으로 변신했다.

지옥에서 막 상경한 느낌이었다.

“네 펭구 완전 웃기다.”

피카츄가 더 웃기다고 반박하기엔 내 얼굴을 확인할 길이 없었다.

“재밌지 않아? 어떻게 변할지 본인도 모르는 거잖아. 음, 그러니까 다시 서로 고쳐 주기 하자.”

그러면서 손가락으로 내 얼굴을 만지작 조물딱 성형하면서 펭구 응급 처치를 시도하셨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펭구의 둥근 형태에 삐죽한 직선이 그렇게 많이 쓰일 이유가 없었다.

난 복수하는 차원에서 슬라임을 해골로 성형시켜 드렸다.

물론 그것들도 오 분 만에 지워졌으므로 난 그녀가 뭘 그렸는지 결국 알아내지 못했다.

“솜사탕 두 개 주세요.”

“응? 이제 장사 접을 건디…… 비 와서 아무도 안 사가서 말이여.”

“그럼 떨이로 싸게 주시면 안 돼요?”

“아이고, 그려. 아가씨가 이쁘니까 해 드리는 거여.”

우린 각자 솜사탕 두 개씩 양손에 들고 거리를 걸었다.

비에 닿아 순식간에 쪼그라드는 솜사탕을 보며 그녀가 외쳤다.

“없어지기 전에 다 먹어 치우기 대회.”

그런 대회는 없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이미 예선전을 치르고 있었다.

하도 열심히 하기에 나도 무심코 진심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장절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우린 둘 다 실패했고, 설탕 범벅인 서로의 입가를 보며 비웃음을 참아야만 했다.

이게 뭐야.

솜 같지 않은 솜사탕.

못생긴 페이스페인팅.

짧게 사는 비눗방울.

당연히 즐길 수 없던 것들을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이 즐겼다.

그건 마치 기피되고 일그러진 귀퉁이들을 찾아내 위무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괜찮다고. 너는 그대로여도 좋다고. 내가 너의 사랑스러움을 찾아내 기어코 사랑해 주겠다고.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어둡고 우중충한 거리에서, 그녀는 팔 닿는 곳마다 자신만의 축제를 차려 놓았다. 그리고 난 그곳에 초대된 유일한 방문객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향기롭고 달콤한 놀이터였다.

“이거 불편해.”

어느 순간부턴 숨기는 것도 그만두었다.

틀니도 빼고, 가발도 벗어 던졌다.

빗물은 분장을 씻어 내고 그녀의 맑은 얼굴을 드러내었다.

들키면 안 되는 거 아니냐고 물어보았더니 과연 예상했던 대답이 돌아왔다.

“안 되지만 괜찮아.”

잠깐의 텀을 두고 이런 말도 덧붙였다.

“축제잖아. 축제 때는 뭘 해도 괜찮은 법이야.”

그러시다니 장난을 좀 쳐 보았다. 앗, 학생 부장님이 저기에?!

“엄마야아-!”

그녀가 내 손목을 붙잡고 뛰었다.

웅덩이가 밟혀서 비명을 지르고 안개비가 까불대며 얼굴에 달라붙었다.

그러나 손목이 뜨거워서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을 쓰긴 어려웠다.

이 우주에 온도가 죄다 사라지고, 그 부근에만 체온만큼의 온기를 남겨 둔 것 같았다.

오래 즐기진 못했다.

공교롭게도 우리가 도망친 그곳에 진짜 학생부장이 순찰을 돌고 있었다.

첩보 작전을 방불케 하는 민활한 다이빙으로 우린 근처 덤불에 몸을 처박았다.

학생부 이대헌 선생이 지나가자마자 동시에 한숨이 터져 나왔다. 우린 서로를 어이없이 보다가 묽게 웃었다.

푸히히-.

물론 나는 거짓말의 대가로 두 뺨의 감각을 헌납해야 했다.

“으아아. 덥다 더워. 완전 땀범벅이네-.”

불과 몇십 초의 질주는, 안 그래도 후텁지근하던 우비 속을 사우나처럼 달궈 냈다.

살이 익는 기분이었다.

보통은 땀이 식을 때까지 참겠지만, 이현지 선생은 알다시피 보통이 아니었다.

문답무용으로 우비를 벗어 재끼는 것이었다.

당장은 시원하겠으나, 땀 대신 빗물로 몸을 적시는 우행이라고 지적하니, 그녀가 어른의 표정으로, 그러니까 뭘 모른다는 듯이 날 쳐다보았다.

“그거 알아?”

그녀가 이렇게 물으면 난 대개 몰랐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젖는 걸 꺼리곤 하지. 하지만 딱 젖기 전까지만 그럴 뿐이야. 막상 다 젖으면 두려울 게 없어지거든.”

과연 그녀는 두려울 게 없어 보였다.

별 논리는 없었지만 그 모습 자체로 놀라운 설득력을 발휘했다. 적어도 난 설득됐다.

그래서 나도 우비를 벗어 던졌다.

이번에도 그녀는 옳았다.

*   *   *

“와, 여기서도 공연 다 보인다. 구경 좀 하다 갈까?”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우린 어느 야트막한 산 중턱의 공원에 잠시 안착했다.

그녀의 말대로 멀리 저편에 무대가 정면으로 보였다.

물론 무대 위 아이돌들은 개미처럼 작았고, 음향은 안개에 실려 다니듯 아스라했다.

그러나 우린 이보다 열악한 것들을 상대로 훌륭하게 놀아 재낀 커플이었다.

이 정도 페널티는 코웃음 치며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죠, 뭐.”

근처 자판기에서 따듯한 음료를 뽑아 돌아오니.

현지 쌤이 고양이처럼 길게 기지개를 피다가 난간에 몸을 기대었다.

표정은 여전히 희미하지만, 잘 보면 평소보다 1.5배 정도 움직임이 과장돼 있다.

살짝 들떴다는 뜻이다.

“후우. 간만에 신 나게 놀았다-.”

“……이 데이트 제 급여 아니었나요. 어째서 쌤이 더 즐거워 보이시죠?”

“같이 즐거워야지 제대로 된 데이트지. 그래서? 한열이는 별로였어? 환불할 거야?”

환불해서라도 다시 한 번 즐기고 싶은 데이트이긴 했다.

“뭐, 그런 건 아니지만요. 근데 괜찮으세요?”

“뭐가?”

“그냥요. 누가 우릴 봤을 수도 있고. 아니더라도 남자 친구분한테 폐 끼치는 건 아닌지…….”

그녀가 손을 쭉 뻗어 내 젖은 머리를 헝클였다.

“으이그. 우리가 뭐 못할 일이라도 했니? 꼬맹이 주제에 별걸 다 걱정하네.”

“으앗. 남자한테 꼬맹이라는 말은 금기어…….”

“그리고 나 남자 친구 없는걸. 지금은 돈 벌기도 바빠서 연애는 생각도 없네요.”

“……그래요?”

“응.”

거짓의 낌새는 없었다.

음, 이상하네.

그녀에겐 학생과의 부적절한 관계가 발각되어 퇴직되는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 한 달 뒤 즈음이었지. 안 그래도 넌지시 충고를 해 둘 생각이긴 했는데…….

내가 회귀해서 나비 효과라도 생긴 걸까?

‘아니면 전생에서도 그냥 누명을 쓰신 것일 수도 있지.’

이 빌어먹을 학교라면 그런 일도 충분히 있을 법했다.

안 그래도 지나치게 우월한 미모 때문에 가만히 있어도 구설수가 생기는 그녀였다.

‘어떤 괘씸한 놈인지 걸리기만 해 봐라.’

낯짝을 절구통에 갈아 버릴 거다.

감히 우리 이 쌤을…….

“앗, 우리 애들 나온다.”

자그마한 스크린에 익숙한 얼굴들이 비쳤다. 대원고교 밴드부가 무대 위에 오른 것이다.

- 밴드 미리내입니다! Let`s Rock`N Roll!!

별 설명도 없이, 하이톤의 기타 리프가 선빵을 때리듯 울려 퍼졌다.

My Chemical Romance의 히트곡 ‘I`m Not Okay’였다. 첫 곡이라 신 나는 음악으로 선곡한 모양이었다.

물론 이 먼 거리는 락 음악의 박진감을 맹맹하게 희석시켰다.

메아리처럼 산란되는 소리들은 심장을 스치지도 못하고 흘러 지나갔다.

다행이라 생각할 즈음, 현지 쌤이 내 맥박에 엇박을 치고 들어오듯 말을 꺼냈다.

“이제 기분은 좀 나아졌니?”

“…….”

잠시 침묵.

“……알고 계셨어요?”

“그렇게 죽을상으로 다니는데 모르는 게 이상하지.”

“……네에.”

그러리라 생각은 했다.

조각하는 데 방해돼서 중간부터는 나도 모르게 탈을 벗고 있었지. 그럼에도 그녀에게선 한마디 지적도 없었다.

본인이 발각되는 것도 감수하고, 내가 근심 걱정 잊고 몰두하도록 배려해 준 것이었다.

명치 어딘가가 찡하게 아렸다.

그러고 보면 근 며칠간 내 상태를 알아차리고 그녀처럼 말해 준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녀는 옛날부터 그랬다.

양호실 출입이 잦았던 시절이 있었다.

절반은 빈혈이었지만, 절반은 김송헌의 괴롭힘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함이었다.

이렇게나 자주 오면 누가 봐도 꾀병이다 싶었을 거다.

양치기 소년 법칙에 의거해 나를 상습적 꾀병꾼으로 판단하고 퇴치하는 게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귀찮아하지도, 내쫓지도, 사정을 캐묻지도 않았다.

그저 변함없이 우아한 손길로 열을 재고, 별 이상이 없더라도 영양제와 양호실 침대를 내주었다.

내가 도망칠 구석을 자그맣게 마련해 주었다.

난 그녀에게서 무관심한 방치가 아니라 무덤덤한 배려를 느꼈다.

이번에도.

사실 그녀는 닭꼬치 완판이니 하는 건 처음부터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녀가 적자, 적자 하면서 투덜거렸던 건 전적으로 나 때문이었다.

이젠 그걸 알 수 있었다.

“쌤.”

“응?”

“왜 저한테 이렇게 잘해 주세요?”

“흐음. 자뻑 아니니? 난 누구에게나 친절한데.”

“……앗.”

“농담이야.”

그녀는 무대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나도 부모님이 안 계셔. 아주 어릴 때 여의었지. 근데 친가 쪽은 날 골칫덩이로 생각했나 봐. 누구도 날 맡으려 하지 않았던 거 같아. 그래서 어렸을 때 이 집, 저 집 떠돌아다녔던 게 어렴풋이 기억이 나.”

“…….”

“그리고 내가 미모가 좀 되잖니? 어렸을 때도 그랬거든. 그것 때문에 어딜 가든 그 집 여자들은 날 싫어했어.”

말투는 덤덤했다.

다소 장난기를 섞기도 하였다. 그러나 난 말소리 깊은 곳에 숨은 상흔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게 모두가 떠넘기다 고아원에 갈 지경이었는데, 외숙모가 그때 히어로처럼 딱 등장해서 날 데려가신 거지. 욕 한바가지 쏟아 내고. 그때부터 내 부모님은 삼촌하고 숙모였어.”

“……다행이네요. 정말로요.”

“그치? 하여간 그때부턴 부족함 없이 자라서…… 너희를 완전히 이해한다거나 할 순 없어. 하지만 나도 방치되고, 소외되고, 모두의 관심에서 빗겨나 있는, 그런 느낌은 대충 알아. 세상에서 겉도는 기분.”

좀 부끄러운 기분이었다.

병 든 강아지 취급을 받아서는 아니었다.

전생에서 지금까지, 그렇게나 오래 도움을 받아 놓고, 이제야 그 호의의 이유를 알았다는 사실이, 내 사정에만 골몰했던 편협함이 부끄러웠다.

“그래서 난 아픈 아이들을 놔둘 수가 없나 봐. 몸이 아픈 아이들이나, 마음이 아픈 아이들이나.”

“……그런가요.”

“응.”

적막이 잠시 우리 사이에 내려앉았다.

그 틈을 타고, 잠시 잊고 있던 무대 소리가 밀려 들려왔다.

- 이번엔 전 잠시 쉬고, 저희 창작곡으로 베이시스트가 노래합니다. 부디 들어 주세요.

메인 프론트맨이 물러나고, 스크린 위로 김수림의 얼굴이 떠올랐다.

상기되고, 조금 경직된 표정.

- ……아, 저. 마이크 앞에 서는 건 오랜만이라. 좀 긴장되네요. 많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불렀습니다. 아니 만들었습니다. 아니, 그, 지금부터 부를 거구요. 으아 내가 뭐라는 거지…….

난 피식 웃었다.

관객들의 웃음소리와 밴드부원들의 야유가 마이크에 수음되어 들려왔다.

‘하하하.’, ‘어디서 약한 척이야! 김수림!’, ‘긴장하지 마요!’, ‘요즘 로봇이 많이 진화했네. 사람 흉내도 내고.’

내게도 김수림의 저런 약한 모습은 생소했다.

전생에도 저걸 보았던가?

……아니.

아마 보지 않고 중간에 아프다고 돌아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 아, 어쨌든. 음, 제가 쓰고, 제 이야기를 담은 거라, 제가 부르게 됐습니다. 좀 모자라도 귀엽게 봐주세요. 곡 제목은 ‘Stairway To Ground’.

Led Zeppelin의 ‘Stairway To Heaven’을 오마주한 건가?

마이너풍의 어쿠스틱 기타 사운드가 전주로 깔리고, 신디사이저가 가냘픈 멜로디를 그 위에 올렸다.

그리고 탁한 흉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고, 무신경한 말들. 날개가 꺾여 보지 못한 사람들은 쉽게 말해. 다시 날면 된다고.

무척이나 낮고, 멜로디가 희박하며, 읊조리듯이 늘어놓는 보컬이었다.

- 하늘이 왜 그렇게 높은지 누군가 물어봐 줄래. 높은 하늘. 긴 추락. 땅은 너무 낮은 곳에. 난 허공에 잠겨 있어. 숨을 쉴 수 없는 순간들.

노래가 점차 오르락내리락 멜로디를 쌓아 가는 가운데.

나는 무심코 입을 열었다.

“……나름, 소중한 사람들이 있었어요.”

난 내 이야기를 말했다.

보육원에서의 이야기들이었다.

박종철과 배윤하, 말썽꾸러기 동생들, 믿고 싶던 원장 선생님. 한때 내 전부였던 사람들에 대해서.

물론 실명 없이 A나 B로 지칭하고, 구체적인 사건이나 상황은 뭉뚱그려진, 그야말로 횡설수설에 가까운 말들이었지만, 그럼에도 내 진심을 입 밖으로 꺼내어 말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전 그들이 저를 배신했다고 생각했어요.”

우릴 도구로만 보던 원장 선생님도.

자기 혼자만 높이 올라가 버린 배윤하도.

다들 나 따윈 땅바닥의 개미처럼 하찮게 생각하고 있을 거라고.

“그러므로 그들을 저버려도 나는 정당하다고. 나 혼자 도망가도 무방하다고. 난 그럴 자격이 있다고…… 근데 이젠 잘 모르겠어요. 한번 흔들리고 나니까…… 모든 것이…….”

내 횡설수설이 거의 다 끝나 갈 때 즈음엔 노래도 클라이맥스로 치닫고 있었다.

- 난 더 날지 않을래. 천국은 몰라도 좋아. 다만 얌전히 추락할 수 있게 내게 계단을 빌려 줘. 오오-. 당신. 거기 당신…….

-난 더 날지 않을래. 날개는 없어도 좋아. 다만 얌전히 추락할 수 있게 내게 계단을 빌려 줘. 오오-. 당신. 거기 당신…….

평생 그녀가 닦아 왔을, 성악적인 맑은 두성은 흔적조차 없었다.

간혹 음정이 흔들렸고, 농익지 않은 흉성 기반의 발성은 다소 어설펐다.

높은 피치로 반주를 헤집는 청각적 쾌감도 없었다.

아무리 좋게 평가해 줘도, ‘느낌이 괜찮은 아마추어’ 이상의 점수를 얻진 못하겠지.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 심장은 노래의 미드 템포에 어울려 뛰고 있었다.

- 그곳 땅 위에서 나는 가끔 넘어지고 그때마다 울겠지만. 그래도 Stairway To Ground. 힘껏 일어서려면, 일단은 넘어져야지. 그래서 Stairway To Ground.

그렇게 노래가 끝났다.

낯선 창작곡에 잔잔한 분위기, 아주 뛰어나다곤 할 수 없는 보컬, 여러모로 마이너스 요소가 많았다.

따라서 관객들에게서 열렬한 반응 따윈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멜로디와 가사에 배어든 곡진한 감정만큼은 살을 베어 낼 만치 선명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겐 매혹적이고 아름답게 들렸다.

나도 부르고 싶을 정도로.

- 감사합니다. 낯선 곡 들어 주셔서 감사해요. 이제 마지막 곡, Muse의 ‘Psycho’ 들려 드리고 저희는 인사드리겠습니다. 좋은 밤 되세요!

다시 들려온 강렬한 디스토션 사운드가 내 여운을 깨어 냈다.

나는 이현지 쌤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들은 누구야?”

“예?”

“친구?”

친구일까.

친구라기엔 너무 깊고 진하지 않을까.

“연인?”

순간 배윤하가 떠올랐지만, 그녀도 나도 서로를 그런 식으로 본 적은 없었다.

연인만큼 밀접하진 않지만.

연인보다 질긴 무언가.

“그럼?”

“…….”

난 그것의 이름을 사전 안에서 힘들여 발굴해 냈다.

“가족…… 요.”

서로 싸우고, 오해 끝에 미워하고, 한순간 멀어지더라도, 결국은 엮이어 마주해야만 하는 사람들.

내 안에서 뗄 수 없는 나의 일부.

난 그들을 결국 외면할 수 없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그럼 괜찮겠네.”

“……예?”

“가족들하곤 진창 싸우더라도, 나중에 얘기하다 보면 어떻게든 되더라고.”

“그런가요?”

“그렇다니까. 우리 삼촌하고 나를 보면 알잖아.”

“아하하…… 뭔가 단번에 이해가 되네요…….”

“그러니까.”

그녀가 내 머리에 손을 얹고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다 괜찮을 거야.”

비가 와서 다행이었다.

아니면 주책없이 찔끔 새어 나온 눈물들을 다 들켜 버렸을 테니까.

“……예.”

내 안의 어딘가가 탁 터져서, 마음의 군더더기들을 한 번에 쓸어 담고 흘러 버린 느낌이었다.

후련했다.

- 힘껏 일어서려면, 일단 넘어져야지.

- 막상 다 젖으면 두려울 게 없어지거든.

내 실수와 편협함을 마주하기가 그동안은 두려웠다.

그러나 일단 넘어지고 젖어 버리고 나니, 거기서부터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난 자리에서 일어섰다.

“감사해요, 선생님. 저 근데…….”

“가 봐.”

“……네?”

“가족이잖아.”

짧은 한마디였지만, 그녀의 맑은 미소 안에 나머지 말들이 다 들어 있었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날 봐 주었던 것이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가 볼게요.”

해결된 것도, 해명된 것도, 확실한 건 그 무엇 하나 없다.

배윤하의 동기도, 선택의 향방도, 그걸 내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아직은 몰랐다.

하지만 마주 앉고 얘기하면, 정말로 어떻게든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해 주셨으니까.

난 가뿐한 발걸음으로 산을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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