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능이 자꾸 늘어-74화 (74/164)

<재능이 자꾸 늘어 74화>

10. 냉정과 열정 사이 - 25

*   *   *

눈을 떴지만, 배윤하는 여전히 꿈속에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다만 자글대는 백색소음이 주변에 가득해 바깥의 잡다한 소리들을 내쫓았다.

소음임에도 균일하여 평안했다.

어쩌면 저 소음들은 밖에서 들려오는 게 아니라 몸 안에 채워진 건지도 모르겠다고, 소녀는 생각했다.

불쾌한 꿈을 꾸었다.

엄마와 아빠는 둘 다 무연고였다. 하지만 그 공통점 하나를 제외하곤 모든 부분이 달랐다.

젊었을 적 아빠는 세상에 널린 피사체를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발걸음에 정처를 두지 않았다. 그럴 이유가 없었다. 뷰파인더에 담고 액자 안에 가두면 그곳이 그의 집이요 세계였다. 온 세상이 그의 정처定處였으니 그는 어딜 가든 귀향하는 것이었다.

엄마는 지방 중소기업의 경리였다.

그러나 언젠가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될 미래를 예견 받은 처녀였다. 그렇게 교육받고 믿어 왔기 때문에 그녀는 그 레일 위의 삶을 의문 없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엄마와 아빠는 만났다.

완전히 다른 삶의 궤도를 지닌 두 천체의 충돌은 서로의 방향을 크게 뒤틀었다.

이제 아빠는 자신이 찍은 가족사진의 액자 안에 머물고자 했다. 딸과 아내만을 유일한 정처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그녀는,

배기섭 포토그래퍼의 뮤즈로서 큰 인기를 얻고, 완전히 다른 방식의 찬란함을 목격하고야 만 여자는, 이제 그 자그마한 액자에 자신을 가두기 싫어졌다.

반대의 지점에서 출발해, 서로의 교차점에서 잠시 머문 두 사람은, 그러나 오래 머물지 못하고 엇갈려 완전히 다른 궤도로 뻗어 나갔다.

얄궂게도 그들의 미래는 서로의 과거를 닮아 있었다.

그런 이유에서, 배윤하에게 엄마에 대한 기억은 아주 희미했다.

집에 자주 없던 것.

가끔 있어도 취해 있던 것.

둘이 싸운 날이면 집에는 꼭 아빠만 있던 것.

그리고 어느 날부터 아예 사라졌다는 것.

마지막으로, 갑자기 죽어서 마지막까지 아빠에게 상처를 주었던 것.

그 정도만 기억에 있었다.

약물 오남용이니 뭐니 했었지만 복잡한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녀에게 중요한 건 그날 이후로 아빠가 점점 야위어 간다는 사실이었다.

-엄마를 너무 미워하지 마. 그녀는 잠깐 방황했던 것일 뿐이야. 애석하게도 길을 아주 잃은 바람에 돌아오지 못했지만.

아빠는 그럼에도 그녀를 옹호했다.

겉으로 반발하진 않았지만, 그때야말로 배윤하의 삶의 방식이 결정된 순간이었다. 몇 마디의 말들이 그녀의 심장에 심겼다.

-그건 방황이 아니라 무책임이야.

-난 그런 사람이 되지 않을 거야.

-가족은 내가 지켜야 해.

그러나 그녀는 아직 아이였고, 따라서 아이다운 방식으로 말의 씨앗이 움텄다.

아빠가 매일 밤 그녀의 사진을 붙들고 울었으므로, 그 사진들이 없으면 아빠의 슬픔도 없으리라는 지극히 단선적인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녀는 결행했다.

엄마의 얼굴이 담긴 모든 사진과 필름들을 모아 뒷산에 옮겼다. 그리고 모조리 불태웠다.

그녀는 전에 없던 뿌듯함을 느꼈지만, 그날 밤에는 뿌듯함을 모조리 상회하고도 잔돈이 한참 남을 만큼의 전례 없는 공포를 느꼈다.

아빠가 처음으로 화를 낸 것이었다.

그날 윤하는 앙앙 울었지만, 동시에 어린애다운 아집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난 잘못된 일을 하지 않았다. 아빠의 태도는 부당하다. 중간에 논리는 없지만, 아무튼 그녀의 신념은 확고했다.

냉전은 무려 3일이나 지속됐다.

두 부녀의 서로에 대한 사랑에 비추어 본다면 굉장한 장기투쟁이었다.

그리고 그 나흘째 되는 날은 배윤하의 생일이었다.

어쨌든 딸에게 좋은 생일을 안기고 싶었던 아빠는 협상을 타진한다.

-엄마 사진 어디에 있어? 숨긴 거 말해 주면, 앞으로 윤하 앞에서는 안 꺼내 볼게. 아빠가 좀 더잘 할 테니까. 응?

3일 만에 돌아온 아빠의 따듯한 목소리는 배윤하에겐 최고의 협상 도구로 작용했다.

그러나 사진은 이미 태우고 없었다.

진실을 말했다가, 가까스로 되찾은 아빠의 상냥함을 또 잃으면 어쩌나. 어린 마음에 덜컥 겁이 났다.

-학교 뒷산에 묻었어요. 근데 어제부터 비가 와서 지금은 없을지도 몰라요. 거기 없어도 너무 화내지 마요. 네?

그게 아이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답안이었다.

그리고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그날은 비가 왔다.

정말, 지독히도 많이 왔다.

성난 먹구름이 세상에 거친 물질을 해 대고, 육지는 졸지에 강 밑바닥 체험을 하게 되었다.

자동차 앞 유리가 두터운 빗줄기로 코팅됐다. 와이퍼는 비를 쓸어내지 못하고 막대한 빗물 속에서 허우적댔다.

보통은 내려다보는 물결을 올려다보고 있다는 초자연적 공포와 아빠의 분노와 실망이라는 유아적 공포가 결합되며, 배윤하로 하여금 이런 대응을 촉발시켰다.

-오늘은 비 너무 많이 오니까 돌아가요. 나중에 와도 되잖아요.

물론 이 끔찍한 강우에 사진 실종의 책임을 떠넘기기 위해서였다. 적당한 변명거리다.

그러나 아빠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오늘을 고집했다. 그는 오늘이 아니면 정말로 사진이 사라지고 말 거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는 이 날씨에 기어코 운전대를 잡았다.

-괜찮아. 갔다 오는 길에 윤하 생일 케이크 사자. 알겠지?

-케이크 같은 건 괜찮아요. 그런 거 없어도 돼요. 돌아가요. 네? 비 너무 많아. 윤하 무서워요. 빨리. 빨리이-.

-어허 윤하. 아빠가 떼쓰지 말랬지?

-돌아가. 돌아가자아.

윤하가 아빠의 팔을 붙잡고 흔들었다. 아빠가 윤하에게 주의를 주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빠앙- 큰 소리. 덮쳐 오는 빛. 더 큰 소리. 쾅. 쾅쾅. 세상이 빙빙 돌고, 얼굴이 화끈해지고, 붕 뜨는 부유감이 엄습하고, 눈앞이, 눈앞이…….

검게 사라졌다.

그런 지독한 꿈을 꾸고 있다고, 윤하는 생각했다.

이 꿈, 언제쯤 깨려나.

깨면 엄마 사진은 건드리지 말아야지. 내겐 몰라도 아빠한테는 소중한 거니까. 그리고 거짓말은 어지간하면 하지 말자. 그냥 입을 다물고 있는 게 나을 거 같아. 그리고, 그리고…….

흘러가는 생각을 한편에 두고, 배윤하는 귓가를 건드리는 백색소음을 음미했다. 쏴, 쏴아아-. 근데 이 소리들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윤하야. 윤하……야. 괜찮니?”

“……아?”

꿈이 아니다.

그걸 깨달은 순간, 간과해 두고 있던 실감들이 무서운 속도로 엄습해 몸을 일깨웠다.

가위라고 생각했던 무거운 감각이, 어떤 구겨진 알루미늄 철판으로 변해서 온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포근하던 백색소음은 폭력적인 빗소리가 되어 사방을 빽빽이 포위했다.

아프다. 축축해. 어두워. 춥다. 반대로 얼굴은 뜨겁다. 무서워. 아프다. 어딘지는 모르겠는데 아파. 어지럽다. 어두워. 무서워. 어두워. 무서워. 무서워…….

“아빠아아……. 아파. 아파요……. 아. 아앙…….”

“괜찮아. 아빠 여기 있어. 괜찮아……. 다 괜찮아.”

그때 사람의 온기가 윤하의 팔뚝을 어루만졌다.

“아빠?”

“……그래. 아빠 여기에 있어.”

“안 보여. 아빠 안보여요……. 어디야? 깜깜해. 어두워. 무서워……. 아빠 어디…….”

“괜찮아. 아빠 옆에 있어. 지금 비가 많이 와서……. 잠깐 안 보일 뿐이야. 괜찮아. 조금만 참으면 선생님들이 다 와서 불도 밝혀 주고, 거기서 꺼내 줄 거야. 걱정할 거 없어.”

“진짜아-?”

“그럼 진짜지. 아빠가 거짓말하는 거 봤어?”

“응, 봤어.”

“윤하 머리가 너무 좋아서 아빠는 가끔 힘들어.”

“……흐히.”

아프지만, 무섭지만, 아빠의 목소리만으로도 윤하는 웃어 내었다.

울음을 꿍 하고 참아 냈다.

“아빠 얼굴 보고 싶어. 너무 어두워.”

“못 참겠어?”

“웅…….”

“……잠깐만…….”

부스럭하더니, 어둠 저편으로부터 차가운 뭔가가 손에 쥐어졌다.

카메라였다.

글러브 박스에 있던 메인 카메라는 이 극심한 사고 속에서 기적적으로 온전했다.

“자, 이거 쥐고 있어.”

“카메라아……?”

“아냐, 이거 이제부터 아빠야.”

“아빠?”

“그래, 아빠. 아빠 카메라 뒤에 늘 서 있는 거 알지? 윤하 맨날 찍어 줬잖아. 그렇지?”

“응, 맞아.”

“그래. 카메라 뒤에 아빠. 그러니까 카메라랑 아빠는 한 몸이야. 사실 아빠는 카메라의 부품 같은 거지. 몰랐지?”

“아빠 부품이야……?”

“모든 사진사들은 사진기의 일부야. 윤하도 팔다리 있잖아?”

“응.”

“사진기의 팔다리가 사진사인 거지.”

“……모르겠어.”

“나도 잘 모르겠네.”

“뭐야아 그게에.”

“어쨌든 이것만 기억해. 카메라는 아빠다.”

“……카메라는, 아빠다.”

“그래, 윤하 착하다. 착해.”

“아빠.”

“응?”

“미안해요.”

“뭐가?”

“엄마 사진 건드려서. 아빠 아프게 했어.”

“그래, 그럼 돼.”

“으응?”

“잘못했을 때는 그렇게 미안하다고 하면 돼. 그럼 누구나 용서받을 수 있어.”

“그럼 나 용서해 주는 거야?”

“아빠는 늘…….”

잠시 말이 끊겼다.

“……아빠?”

“……미안. 어제 잠을 못 잤거든. 아빠가 좀 졸리네.”

“아빠 졸려?”

“만약 아빠가 대답이 없으면……. 졸고 있는 거야. 깨우고 싶으면, 거기 카메라한테 얘기해. 카메라가 아빠니까.”

“카메라는 안 졸아?”

“걔는 야행성이거든.”

“카메라는 야행성……. 메모.”

“…….”

“아빠 자?”

“……아니.”

“더 얘기하자.”

빗소리가.

빗소리가 너무 컸다.

“……윤하야.”

“응?”

“그 카메라 안에, 메모리 카드에, 윤하 생일 선물 있거든?”

“메모리 카드가 뭐야?”

“그 안에…….”

“응?”

“……에…….”

“아빠?”

아빠의 말소리는 꺼질 듯 이어지고, 이어질 듯 끊어지고, 템포를 점차 늘여 가며 들려오다가, 어느 순간부터 빗소리에 완전히 잠식되어 사라졌다.

빗소리.

“아빠.”

윤하는 카메라를 어루만졌다.

카메라 뒤편에는 당연히 아빠가 있을 것이므로, 이건 아빠를 만지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빗소리의 거대함에 압도될 것 같으면 셔터를 눌렀다.

셔터 소리와 플래시가 잠깐 동안 그녀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빠 손처럼 따듯했다.

“……아빠.”

빗소리.

빗소리.

너무 많은.

“……아…….”

그 뒤로 4시간 27분 뒤에야 배윤하는 구조되었다.

발견 당시 극심한 쇼크 상태였으며 정신을 잃고도 카메라를 절대 놓지 않았다고 구조 요원은 술회했다.

동승자인 부친 배기섭은 사고 10여 분 만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됐다.

그리고 사고 당시 카메라 셔터를 누른 횟수가 총 47번에 달한다고, 사건 조서는 기록하고 있었다.

*   *   *

숙소로 돌아가는 길.

비가 오고 있다.

오늘 내내 말하긴 했지만 이번엔 뉘앙스가 조금 달랐다.

“……이거 갑자기 너무 많이 오잖아.”

“오늘 날이네 날이야. 천지신명께서 날 잡고 뿌리시는 게지.”

택시 기사 아저씨가 내 속도 모르고 흥겹게 중얼댔다.

시트 젖는 걸 감수하는 대신 따불로 교섭을 마친 상태였다. 비 때문에 교통이 지체되고 미터기가 신 나게 숫자를 올려 대니 흥겨울 만도 하지. 그런 의미에서 난 지랄을 하기로 했다.

“10분 안에 도착하면 세 배.”

물론 돈지랄이다.

“이거, 만만찮은 학생이구만. 하지만 이 날씨는 우리 같은 베테랑에게도…….”

“네 배.”

“학생, 개인 기사 구할 생각 없으신가?”

택시 기사가 갑자기 어디선가 레이싱 가죽 장갑을 꺼내와 끼더니, 절도 있는 손짓으로 기어를 수동 모드로 전환했다.

“후후. 개포동 날다람쥐가 돌아왔도다.”

택시는 물살을 가르는 요트가 되어 도로를 주파하기 시작했다.

돈의 힘은 은퇴한 도로의 무법자를 불러들일 만큼 강력했지만,

그럼에도 내 초조한 마음까지 해결해 주진 못했다.

‘……젠장, 비가 갑자기 왜…….’

이현지 쌤과 헤어질 때만 해도 부슬비에 불과했다.

그러나 산을 다 내려온 순간부터 장대비로 변하더니, 택시를 잡을 즈음에는 거의 몽둥이 같은 기세로 내 어깨를 때려 대고 있었다.

폭우다.

그리고 배윤하는 폭우에 트라우마가 있다.

만약 나무 밑에서 기다리다가 폭우를 맞이했다면, 어쩔 도리도 없이 거기서 달달 떨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젠장, 갑자기 이게 무슨 난리야.”

그 순간 머리를 스치는 목소리들.

-왕이 계시므로 더욱…….

-왕께선 그럴 운명이기 때문…….

-거기 잠든 것들을 깨워 내는…….

-다가올 환란이…….

분명 전생에선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었다.

내가 회귀했다고는 하나, 나비 효과가 이렇게까지 극적으로, 공교롭게 불어닥칠 수 있는 건가?

정말 그 무당의 말이…….

‘어차피 확인할 수도 없는 일. 자책해 봐야 소용없다.’

괜한 양심을 괴롭히는 대신, 핸드폰을 자주 꺼내어 확인하기로 했다.

시골 촌동네라 원래도 신호가 간당간당했는데, 폭우가 시작되면서부터는 이젠 아예 권외로 표시되고 있었다.

그러다 가끔씩 한 칸 정도 올라올 때를 노려서 잽싸게 전화를 걸어 보길 반복했다.

아직까지 성과는 없다.

이쪽에서 걸리다 끊어지기도 했고, 저쪽에서도 권외인 상황은 마찬가지이니까.

“크윽, 인간은 결국 자연 앞에서 무력한 존재인 것인가…….”

그런 속수무책의 상황에서, 택시는 결국 미션을 성공하지 못하고 20분을 꽉 채우고서야 도착했다.

앞으로는 안전 운전을 하라는 뜻에서 돈을 뿌려 드리고 나왔다.

“이게 비가 오는 거냐. 아님 광역 소화훈련 중인 거냐.”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거의 빗물로 싸대기를 맞는 기분을 느꼈다.

도로 옆 하수도는 이미 역류한 지 오래.

탁한 물이 발목까지 잠겨 혼란스럽게 너울치고 있었다.

빠르게 발을 옮긴다.

오르막길 도중, 산 중턱에 위치한 숙소가 까마득하게까지 느껴졌다. 거칠게 굴러 내려오는 물살이 종아리를 치고 가끔 얼굴까지 침범해 왔다. 협곡의 격랑을 거스르는 느낌이었다.

[엄복동의 대퇴부]가 없었다면 벌써 퍼져서 저 아래에 둥둥 떠다니고 있었을 테지.

그럼에도 난 꾸준히 빗살을 뚫어 냈고,

마침내 ‘운명의 나무’ 밑동까지 치고 올라오는 데 성공했다.

“…….”

그리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여기엔 아무도 없었다.

*   *   *

그 시각 전상진은 숙소 안에서 나갈 채비를 마치고 있었다.

“상진아, 어디 가는 거야?”

“응? 왜?”

“비 많이 오잖아. 급한 일이야?”

이제 곧 윤하와 약속한 시간이 다가왔다.

비가 좀 심하긴 했지만, 그건 약속을 어길 이유가 되지 못한다. 통화도 안 통하는 지금이라면 더더욱 달려가서 자신의 남성다움을…….

그때 이세희가 그를 막아 세웠다.

“걱정돼서 그래……. 이 날씨에 나갔다가 무슨 봉변을 당하려고.”

“……어.”

가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경솔해지는 전상진이지만, 이렇게 말하면 최소 한 번은 멈춰 서서 고려하도록 몸의 습관이 배어 있었다.

이세희는 그걸 잘 알았다.

조사했으니까.

“……그래도 어쩔 수 없어. 약속한 거라서. 일단 나가서 바로 들어오더라도…….”

“무슨 약속인데?”

“어, 그냥 개인적인…….”

“에이, 우리 친구잖아. 숨길 게 뭐가 있어.”

“……어…….”

이세희는 노련한 사냥꾼이었다.

전상진 같은 토끼의 도주 반경 따위야 훤했다.

애당초 그는 이쪽이 사냥 중이라는 것조차 모르고 있을 테지. 사슴 같은 눈망울만 반짝반짝 뜨고 있다가 목덜미를 물리는 게 그 같은 초식 동물의 운명이었다.

‘윤정희가 그렇게까지 싸고돌 줄은 몰랐지만. 이 정도면 예상 범위 내지.’

윤정희를 경계해서, 어제 일부러 불침번에도 자원하지 않았다.

단지 숙소 대기 인원으로 자신의 보직을 한정시키는 데 주력했다.

전상진이 자유 시간에 이쪽에 남으리라는 확신이 있었으니까. 전상진은, 자신이 그의 옆에 정보원을 몇 명이나 깔아 뒀는지 모를 것이다.

‘……후후. 역시 귀엽네…….’

이세희가 전상진을 이성으로써 좋아하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방식은 각양각색.

그녀는 통상적인 사랑의 언어로 자신의 감정을 서술하지 않는다. 보통 사람의 상식에 비추어 본다면 군인의 전쟁 용어에 가까울 것이다.

전쟁에서 승리해,

트로피를 쟁취해 낸다.

당연히 그 트로피가 값지고 빛날수록 전사의 값어치도 높아진다.

이세희는 전상진이 취하기에 부족함 없는 트로피라고 판단했기에 그를 ‘좋아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그것이 그녀의 연애관.

따라서 트로피를 얻는 과정 역시 전투적일 수밖에 없다.

그녀는 우물쭈물하는 전상진에게 총탄을 박듯이 말을 날렸다.

“혹시 그 ‘운명의 나무’인가 뭔가 하는 데 가는 거야? 고백?”

“어……? 아, 아니……. 그게…….”

“……어? 어머. 어머어머! 진짜야? 와……. 그랬구나. 고백하는 거야? 아니면 고백 받는 쪽?”

“으응. 그게…….”

쑥스러워하면서도, 이러면 전상진은 결국 솔직하게 말을 하게 되어 있다. 그게 전상진이니까.

“내가 고백할 거야.”

“와. 그렇구나. 음, 그래. 아쉽지만 일단 응원해 줘야겠지. 힘내! 잘될 거야.”

“응응. 고마워. 근데 아쉽다고……?”

후일을 도모하는 떡밥을 꼼꼼하게 투척해 놓고-.

“아냐, 아냐. 신경 쓰지 마. 근데 상진이 지금 막 떨리겠다. 그치?”

“……아무래도 그렇지.”

“운명의 나무라는 게 그래. 미신이긴 해도, 모 아니면 도라는 느낌이니까. 그래서 확실히 될 게 아니면 시도하지 않는데, 상진이 용기도 가상하네.”

“그런 거야? 그런 건 잘 몰라서…….”

“당연히 그렇지. 거기서 거절하면 부정 탈까 봐 아예 나오지도 않는 애들도 있어.”

“……그래?”

“응. 물론 상진이가 고백한다는데 안 나올 사람이 있겠냐마는!”

전상진이 지나갈 자리마다 지뢰들을 숱하게 뿌려 놓는다.

“……아. 이젠 정말 가 봐야겠다. 시간 다 됐어.”

“그래. 빗길 조심하고!”

전상진의 뒷모습을 보면서, 이세희는 독사의 미소로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오늘 이 자리에서 목표한 것들은 다 성취했다.

떡밥 투척.

지뢰 살포.

마지막으로, 시간 끌기.

[잡아 뒀어. 완전 식은 죽 먹기던데.]

문자를 확인한 뒤 바로 삭제.

이제 전상진은 비를 한없이 맞아 가면서 오지 않을 배윤하를 기다리게 되겠지. 그리고 가련한 그의 곁을 달궈주는 것은 자신의 온기가 될 것이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해, 그녀의 바람은 이뤄지지 못한다.

애초에 전상진은 운명의 나무 근처도 가지 못할 운명이었으므로.

그즈음 그는 복도 한 복판에 서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있었다.

“……응? 정희 누나? 신호가 어떻게 떴네? 왜? 무슨 일이야?”

-……!! 가……! ……!! 으니……!! 빨리……!! ……라고!!

“뭐라고? 안 들려. 더 크게 말해 봐!!”

한참 신호 불량으로 노이즈만 끼던 중, 한순간 깔끔한 목소리가 팍 튀어 올랐다.

-지금 거기 위험해!!

그 순간 전상진은 발밑이 흔들린다고 느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