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이 자꾸 늘어 75화>
10. 냉정과 열정 사이 - 26
* * *
흑장미 동맹.
세미, 온조, 나리, 이 세 여고생의 모임을 지칭하는 단어였다.
본인들은 장미의 고고함, 순흑의 무구함을 연상하며 작명을 했고, 여타 사람들은 ‘순 속이 시커먼 것들끼리 유유상종하며 다닌다.’는 의미에서 그 작명을 인정해 주었다.
출신지, 소속 반, 동아리조차 모두 다른 이들이 모인 이유는 단 하나.
전부 배윤하로부터 예비 남친―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렇다. 논란의 여지가 무궁무진하다는 점만은 언급해 두겠다―을 빼앗긴 경험이 있다는 것.
그리고 실연의 동질감이 고스란히 그들의 유대감이 되었다.
흑장미 동맹의 주장에 따르면, 그들의 활동 목표는 ‘상처 입은 영혼의 치유’다. 그리고 그들은 목표에 맞게 활동했다.
배윤하가 거절한 남자들의 상심을 도닥임으로써 자신을 그의 연인으로 승격시켰는가? 아니다. 그보다는 좀 더 효율적이고 간편하며 확실한 방법을 택했다.
그들은 호박씨를 깠다.
주요 화제란 배윤하가 얼마나 파렴치한 창녀이며 상종도 못할 망종이고 세상의 모든 악을 자궁에 담고 다니는 서큐버스의 핏줄인지를 증명하는, 그야말로 듣고 있던 호박씨가 화들짝 놀라 그 자리에서 발아해 버릴 법한 것들이었다.
과연 현명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구애를 했다가 실패해서, 본인이 배윤하보다 매력적이지 못한 인물이 되어 버리는 위험을 감수하느니, 그냥 남자는 재껴 두고 본진을 타격하는 게 멘탈 관리에 유리하다.
-그러니까 그년이 말이지…….
-말하자면 그 쌍년이란 것이…….
-어쩌면 그 개잡년이…….
그리고 끝내, 자신들의 골방 뒷담화가 널리 알려지지 못한다는 사실에 통탄하기 시작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우주의 법칙을 발견했는 데 가만히 있을 인간은 없다.
바로 그렇기에 그 많은 부처들이 혼자만 해탈하지 않고 꼭 아리송한 법열의 문구를 남겨 두었으며, 예수의 제자들이 기를 쓰고 성경의 두께를 늘려 후대의 신학자들을 괴롭혀 왔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녀들은, 배윤하가 쌍년이며 개잡년이라는 이 만고불변의 진리를, 만천하에 알려야 한다는 어떤 숭고한 사명감에 사로잡히고야 말았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너 그거 몰랐어? 걔가 말이지…….
-그렇지? 걔가 그렇다니까. 너도 조심해 언젠가…….
-고아잖아. 그거 다 애정 결핍이라니까. 사정이 딱하다고 봐주다가는…….
소설이 진실로서 받아들여지는 극적인 희열은 그들의 행위를 가속시켰다.
가끔 ‘어? 내가 얘를 이렇게나 싫어했나?’ 같은 의심이 생기기도 했지만, 잠깐일 뿐이었다.
인간은 왜 무리를 짓는가.
잘못된 생각과 행동을 서로 교정해 주는 집단의 순기능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사회화된 문명인이라는 증거다.
검열과 감시로 구성원의 이탈과 헛생각을 막고, 동시에 개소리를 생산하고 서로 긍정해 주는 아름다운 상부상조, 이 환장의 악순환이 바로 ‘흑장미 동맹’을 구성하는 주된 축인 것이다.
다만,
사람들은 알까. 이 모든 것이 단 한 명의 혓바닥으로부터 출발했음을.
그녀들의 만남을 주선하고, 방해되는 요소들을 제거해 주고, 달콤한 말로 가책을 덜고, 부추기고, 유도하고…….
-아 정말? 안됐다……. 걔 정말 너무한 거 아니니? 너 같은 애가 또 있던데. 완전 상습범 아니야?
-너희 같은 희생자가 또 나오면 안 되지……. 안 그래?
-이렇게 하면…….
그리고 오늘에 이른다.
-진짜 너무하지 않니? 내가 상진이 좋아한다는 거 뻔히 알면서도……. 얘들아, 도와줘. 내가 아니라 상진이를 위해서. 그런 년한테 가기엔 너무 아까운 아이잖아.
-많이도 필요 없고. 딱 30분만 어디 잡아 두면…….
이세희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어 버린 셋은 기꺼이 그러마했다.
배윤하의 악마적 구애 활동으로 인한 희생자를 막는 것은 ‘흑장미 동맹’의 설립 취지와도 일치했다.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오늘 이렇게까지 비가 올 줄은 몰랐다는 거지만, 그것도 큰 문제까진 아니었다.
배윤하가 이상할 정도로 고분고분했기 때문이다.
“으아. 비 졸라 많이 오네. 아나, 내 필살의 아이라이너가…….”
“야!! 농땡이 피지 말고 좀 도와……!!”
“아 왜. 고분고분하구만. 그냥 옮겨다가 묶으면 되겠네.”
“얘 왜 이렇게 조용해? 이제야 지 처지를 좀 깨달았나?”
“고분고분은 씨댕. 이건 그냥 젖은 솜이야 그냥……. 아 쫌! 무거워 죽겠다고!”
“온조야. 네 두꺼운 팔뚝이 활약할 때가 되었다.”
“이년이? 내 팔뚝은 두꺼운 게 아니라 항상 부어 있을 뿐이거든?”
“어쨌든.”
“이 씅늉드리쯤 드으들르그흐쓸튼드……!”
“아 알았다고. 어머? 이년 진짜 무겁네? 욕을 그렇게 처먹더니 그걸로 살 좀 찌우셨나?”
“아님 이렇게라도 반항하는 거 아냐? 힘 빼면 더 무거워지잖아.”
“쌍년이 쌍년 하셨네. 이런 한결같은 년.”
“으아 다 됐다!!”
어쨌든 셋은 축 늘어진 배윤하를 이름 모를 창고에 처넣는 데 성공했다.
원래는 밖에서 문을 잠그고, 방치한 채로 돌아가는 게 계획이었다. 그러나 무지막지하게 퍼붓는 비로 인해 약간 변경됐다.
이대로 돌아가다 다칠 수도 있으니, 비가 좀 잠잠해질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는 쪽으로.
본의 아니게 고립된 조건도 형성됐겠다, 배윤하의 뇌수에 주제 파악이라는 단어를 친히 심어 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고.
셋 중 가장 살집이 있는 여자, 온조가 발끝으로 배윤하를 툭툭 건드렸다.
“야, 일어나 봐.”
“…….”
“이거 왜 이래? 어디 뒤통수를 세게 맞으셨나. 정신을 완전 놓으셨어?”
“미친년. 이제 시체놀이냐?”
이상을 느낀 건 그중 장세미뿐이었다.
같은 반이었던 그녀는 이중 배윤하를 가장 잘 알았다.
평소엔 가볍다가도 때로 무섭게 강단을 세우는 아이다.
저 성격 좋은 아이에게 왜 ‘여왕’이라는 별명이 붙었겠나. 운동 신경 발군에 온갖 호신술까지 익혀서, 까부는 남자들 제압하고 교실 분위기 흐리는 일진마저 평정해서 주어진 칭호다.
요컨대 여자애들이 배윤하를 따르는 이유에는 이른바 ‘걸 크러시’도 한몫했다.
누군가 선을 넘으면, 딱 넘어온 만큼만 손모가지를 잘라 내는 아이.
그래서 오늘을 위해 이세희가 수면 마취제까지 준비해 건넨 게 아닌가.
이런 것까지 써야 하나 싶었지만, 그 고민이 무안하게도 그녀는 시종일관 얌전했다. 폭우에 우두커니 서 있는 걸 그냥 끌고 오기만 하면 됐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비 좀 많이 오던 날은 아예 등교도 안 했던 거 같은데…….’
문득 불안감이 선득거렸다.
뭔가 잘못됐다는 강한 예감.
“야, 잠깐만. 걔 지금…….”
“야, 얘 그러고 보니 카메라를 그렇게 애지중지한다며?”
“이거 가져가도 계속 시체인지 어디 볼까?”
“야! 그건……!”
“안 된다고? 안 되긴 뭘 안 돼. 하면 다 되는 거지.”
그리고 카메라에 손을 댄 순간,
쾅쾅-!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비타협적으로 직진하는 칼날처럼, 그 소리는 두터운 빗소리를 뚫고 그녀들의 목덜미까지 바싹 추격해 왔다.
소리만으로 세 자매는 모두 압도되었다.
다급한 눈길이 오가고,
대꾸하지 말자는 합의가 암묵하에 오간다.
다음에 들려온 목소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의 합의를 무시했다.
“……여기 있는 거 다 안다. 문 열어.”
마찬가지로 침묵은 계속됐다.
목소리는 이번에도 침묵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았다.
“밖에서는 못 열 줄 알고?”
그리고 철컥, 철컥, 가느다란 쇳소리가 창고의 적막을 훼손했다. 닫힌 문고리를 잡아 돌릴 때의 소리가 아니다.
그건 분리된 금속들을 잇고 결착시키는 소리.
강제로 해체되는 기계 장치가 내지르는 나약한 비명이었다. 마침내 비명이 멎고, 허무할 정도로 쉽게 문이 열렸다.
“……이런 씨발.”
남자는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세 여자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배윤하에게 직진했다.
곁에 있던 나리와 온조를 간단히 재끼고,
배윤하를 안아 들어 평평한 곳에 조심히 눕힌다. 이내 젖은 머리칼을 옆으로 젖히니 처참한 몰골이 선명히 드러난다.
섬뜩할 정도로 새하얀 안색.
반쯤 뒤집힌 눈과, 누렇게 뜬 각막.
팔다리는 기이한 각도로 꺾여 있고, 당장이라도 넘어갈 듯이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가만히 누워 있음에도, 마치 전력으로 달리는 듯이.
“봉투!”
남자가 외쳤다.
“……에?”
“종이 봉투나 비닐 봉투! 아무 거나 찾아서 가져와! 아님 그 비슷한 거라도!”
“갑자기 무, 무슨…….”
“과호흡! 일일이 설명할 시간 없어! 빨리!! 이대로 애 죽이고 싶어?! 다 같이 살인자 될래?!”
남자의 단호한 지시에, 세미는 저항할 겨를도 없이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다행히 여긴 창고여서 자질구레한 것들이 즐비했다.
봉투를 건네받은 남자가 그것을 곧바로 배윤하의 얼굴에 뒤집어씌웠다. 그 상태로 봉투에 작은 구멍을 뚫고, 언젠지 모를 타이밍에 풀었다 다시 막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가까스로 배윤하의 숨이 원 궤도에 안착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
“극도의 스트레스로 인한 과호흡 증후군이다. 호흡을 조절해서 혈중 이산화탄소 농도를 정상화시켰지. 설명은 이제 끝. 이제 내가 묻고 싶은데.”
남자의 눈이 그제야 세 여자를 차례로 보았다.
날카로운 칼로 목덜미를 훑는 것만 같다.
“애가 이 지경인데 왜 이런 곳까지 끌고 왔지?”
“……그런 상태인지 몰랐어.”
“몰랐다는 게 말이 되나! 내가 안 왔으면 얘 여기서 이대로 죽었어! 자세히 관찰만 했어도 이상하단 걸 알았을 텐데! 왜 숙소로 안 데려가고 이딴 곳으로 왔느냔 말이야!!”
“모, 몰랐다니까!!”
그때 온조가 입매를 뒤틀며 앞으로 나섰다.
“무슨 소리? 우린 그냥 비 피해서 여기 왔을 뿐인데? 얜 우리가 왔을 때부터 여기 있었어.”
“헛소리.”
“왜 헛소리인데? 너야말로…….”
“내가 여길 어떻게 알고 찾아왔겠냐. 너네가 윤하 데려가는 거 관리인이 다 목격했다. 낌새가 이상했다고까지 증언하셨지. 변명할 거면 제대로 해라, 아마추어들 같으니.”
“그, 그건…….”
“빌어먹을. 여긴 안 돼. 빗소리가 너무 잘 들려! 밝고 방음이 잘된 곳에서 안정을 취해야 되는데……. 그때 바로 숙소에 데려갔으면 됐다고! 이 상태에서 빗물 맞아 가며 돌아갔다간 가는 길에 또 발작이다! 그땐 나도 손 쓸 수 없을 수도 있어!”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인데?!”
“상관이 왜 없나! 너희가 여기로 데리고 왔잖아! 얘 잘못되면 최소 과실치사! 고의가 입증되면 상해죄가 될 수도 있다. 특히 너! 장세미!”
장세미가 깜짝 놀랐다.
“……나, 나? 나?”
“넌 배윤하랑 같은 반이잖나. 친하진 않아도 폭우에 트라우마가 있다는 정도는 알았을 거 아니냐. 근데도 이딴 곳으로 끌고 와? 알고 그랬다는 것이니 고의가 인정되기 쉽지. 안 그래?”
“어……. 그, 그래도 나, 난 진짜 이 정도인 줄은……. 근데 너 내 이름을 어떻…….”
“어젯밤. 그 담벼락에서 윤하 험담을 신 나게도 하더군. 누군가 싶어서 조사 좀 했다. 이런. 평소에도 악의를 품었음이 밝혀졌군. 고의 입증이 더 쉽겠는걸.”
깜짝 놀란 그대로, 이젠 입까지 떡 벌어졌다.
“너…… 너, 그때 그 흙 던진 미친놈?!!”
“그래, 나다. 어쩔래. 나한테 되갚아 주고 싶어? 마음대로 해. 근데 이것만 알아 둬. 얘 잘못되면, 내 모든 인맥과 재력을 모조리 동원해서, 네년들 다 지옥행 열차에 일일이 처박아 줄 테니까……! 알아들어?!”
“나…… 나보고 어쩌라고?! 난 진짜로 몰랐단 말이야! 그, 그냥 잠깐만 골려 주고……. 그리고…….”
“그러니까 지금 당장 내려가.”
“응?”
“난 여기서 윤하를 봐야 하니까 움직일 수 없어. 윤하를 데리고 내려갈 수도 없지. 전화도 안 통해. 그러니까 다른 누군가 내려가서 사람을 불러와야…….”
그 순간 세미에게 남자의 의도가 느껴졌다.
남자가 목소리를 높이고 윽박지른 이유는, 아마 진짜로 화났던 것도 있겠지만 자신을 몰아붙여 협조를 구하기 위함이었음을.
들끓는 격정 속에서도, 배윤하를 구하기 위해 최선의 방책을 찾아 움직인 것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알았다고 말하려는 순간,
이번엔 나리가 옆에서 끼어들어 세미의 앞을 막아섰다.
“웃기고 있네. 우리가 왜 그래야 되는데?”
“…….”
“장세미, 가지 마. 이 새끼 다 허풍이야. 과실치사? 상해죄? 웃기지 마! 우린 그냥 얘를 여기 데려왔을 뿐이야! 얜 그냥 혼자 죽어 자빠지고 있는 거라고! 그게 무슨 큰 죄나 된단 말이야?!”
“……하.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흥. 지는 뭐 얼마나 똑똑하다고. 됐어. 꺼져. 네 말대로 할 생각 없거든? 문제가 생겨도 세희가 다 해결해 줄 거거든?! 너 걔보다 법 잘 알?”
“……세희? 이세희?”
“그래! 너도 걔 이름 정도는 들어 봤겠지? 알아들었으면 꺼져 줄래?”
그러자 남자가 미간을 좁히더니 혼자 중얼대기 시작했다.
“……이세희. 그렇군. 그렇게 된 거였나. 그렇다면 꽤 오래…….”
그러다 돌연 눈을 부릅뜨며 정면을 응시했다.
강렬한 시선에 노출된 나리는 움찔했지만, 바로 다음 순간 그 사실에 격분하며 목청을 키울 준비를 했다.
“야! 그렇게 본다고……!”
“이게 뭐지?”
“사람한테 이게라니……! 이게 진짜!”
“……왜. 땅 밑이…….”
강렬한 눈빛도 잠시, 다른 감각에 할애하느라 시각의 집중을 포기한 듯, 그의 시선은 멍하니 허공을 부유하고만 있었다.
장세미는 곧 그를 이해하게 되었다.
진동이었다.
그건 처음엔 발바닥만 간질이다, 이내 발목을 울릴 정도가 되었고, 마지막엔 몸 전체를 뒤흔들며 이변의 시작을 고했다.
그 순간 남자가 몸을 던져 배윤하의 위를 덮고,
꽈릉-!
쾅!!
와릉-!
평소에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오감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그녀의 의식을 휴지 조각처럼 구겨 버렸다.
* * *
샤워 중 잠이 들었다 깬 기분으로 정신이 들었다.
왜 그런 기분인가 하면, 빗줄기가 내 얼굴을 후려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어는 났지만 상황 파악은 안 됐다. 대체 어떤 잠꼬대를 해야 이 밤에 비를 맞으며 깰 수가 있지?
잠들기 전 상황을 곰곰이 상기했다.
그리고 벌떡 일어섰다.
“배윤하!”
아무리 두꺼운 가죽의 소유자라 하더라도 이 빗물을 얌전하다 평가하진 못하겠지.
여전히 폭우다.
상황 파악이 덜 된 것과는 별개로, 내 의식은 배윤하도 이 비에 노출되었으리라는 사실로 곧장 도약했다.
암순응을 해 가며 주변을 살피는데, 내 품 안에서 뭔가 툭 하고 떨어졌다.
정정하겠다.
그것은 떨어지지 않았다. 추락하는 중에 허공에서 불타올라 재와 연기로 사라졌다. 무당이 건넨 부적이었다.
무당의 말에 따르면, 이 증상이 뜻하는 바는 분명했다.
난 방금 위험한 상황을 막 모면한 것이었다.
위기감이 아직 덜 깨어 있던 내 두뇌를 바로 각성시켰다.
암순응 따윈 집어치우고, 핸드폰으로 라이트를 켜서 상황을 파악해 나갔다.
그러나 라이트는 작았고 어둠은 끔찍하게 짙었으며, 빗물이 만들어 내는 그림자 또한 내 탐색을 방해했다.
난 집착적인 고고학자가 된 기분으로, 조막만한 일부들을 종합해 전체를 그려 보려 애썼다.
하다 보니 의외로 수월하다는 걸 느꼈다.
‘그렇군. [구급요원의 공간지각력] 때문인가.’
이 재능의 주인에겐 시야가 극도로 제한된 상황에서 재난 현장을 빠르게 통찰해 내는 능력이 있었다.
지금까진 없어도 그만이란 느낌이었는데, 과연 Rank D의 재능답게 날 실망시키지 않았다.
난 빠르게 주변 상황을 그려 나갈 수 있었다.
일단.
‘그 창고는 무너졌다.’
머리 위가 뻥 뚫려 있다.
깊이 생각할 거 없이, 내 위로 비가 쏟아지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깊은 곳으로 추락했다.’
위쪽으로 층층이 나뉜 암벽과 진흙들이 관찰되고, 빗물로 된 폭포들이 사방에 포진해 안쪽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정황상 우리를 휩쓴 건 지진이거나 산사태이겠지.
어떤 이유에서든 지반이 붕괴되어 밑으로 가라앉은 상황이었다.
깊이는 대략 5m 수준.
저 높이에서 내리꽂혔는데 어디 하나 안 부러진 건 기적이다. 실제로는 단계적으로 추락한 게 아닌가 싶은데 그보다는…….
‘아마 이 부적이 날 보호해 준 거겠지.’
이쯤 되면 부정하는 게 더 이상하다.
그건 그렇고.
“……그래서 윤하는, 윤하는 어디에…….”
이 부적이 나만 보호해 준 거라면 윤하는 크게 다쳤을 것이다. 난 발밑을 꼼꼼히 비추며 주변을 탐색했다.
그러나 내가 배윤하를 찾을 수 있던 건 빛이 아니라 소리 덕분이었다.
“아, 아파. 아빠. 어두워. 안 보여. 어디 있어? 어디? 어디야? 아파. 어두워. 아무것도 안 보인다고. 아빠. 아빠아. 아아. 아아아…….”
배윤하는 구석진 곳에서 몸을 둥글게 말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출혈 같은 건 관찰되지 않으므로 일단은 안심.
무당의 부적이 통 크게 세트로 서비스해 준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상태는 여전히 위태로웠다. 몸이 아니라 정신 쪽이. 그리고 심화되면 이제 육체를 갉아먹으며 다시 발작을 일으키게 되겠지.
“배윤하.”
“아빠. 아파아……. 살려 줘. 답답해. 축축해. 여긴 어디야? 안 보여. 어두워. 미안.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용서해 줘. 제발. 응? 아파. 어두워…….”
“배윤하.”
“용서해 줘. 용서해 줘. 용서해 줘……. 미안해. 잘못했어. 내가……. 내가 다…….”
난 그녀의 앞에 앉아 무릎 사이에 묻힌 얼굴을 강제로 끄집어냈다.
오른 뺨은 왼손에 받치고, 오른손으로는-
왼 뺨을 인정사정없이 후려갈겼다.
짜악-!!
“……어.”
“배윤하. 정신 차려.”
“……아파. 아파……. 아빠 윤하 아파아…….”
“아프라고 때렸으니까 아프지.”
그러나 그녀의 유아 퇴행은 이 정도로 호전되지 않는다.
때린 건 일단 내게 주의집중을 시키기 위해.
난 그녀의 목에 걸린 카메라를 끄집어내서 그녀의 눈앞에 밀접하게 들이밀었다.
“배윤하, 이거 봐.”
“……나, 나, 나, 잘못했어. 못된 아이. 못된 아이야……. 용서해 주세요…….”
“이게 뭐지?”
“카메라, 렌즈. 카메라……. 용서…….”
“그래, 카메라야. 카메라는 누가 찍지?
“카메라는…… 사진사가 찍어.”
“그래, 그럼 카메라 뒤에는 사진사가 있겠네?”
“……응.”
“그럼 사진사는 카메라의 뭐지?
“사진사는…… 사진기의 손발.”
“그래, 그럼 이 카메라 뒤엔 누가 있지?”
“……카메라 뒤에는 아빠가 있어.”
“그럼 카메라의 손발은 뭐지?”
“아빠…….”
“다시 질문할게. 카메라는 뭐지?”
“아빠.”
난 그 타이밍에 맞춰 셔터를 눌렀다.
플래시가 팍 터지며 그녀의 시선과 의식을 일순 씻어 내리고 사라졌다.
그녀가 멍하니 렌즈를 응시했다.
“윤하야. 배윤하.”
“……응?”
“나 여기 있어. 내가, 여기 있다고.”
난 그녀의 팔뚝을 어루만졌다.
사고 현장, 반으로 갈라진 자동차 저편에서, 본인은 하체 절반이 뭉개졌으면서도, 그 남자가 신음을 참고 손을 뻗어 끝내 만져 낸, 바로 그 부위였다.
내 온기가 온전한 실감으로 그녀에게 남길 바랐다.
그동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겠지.
아팠을 것이고.
평생 누군가의 의지할 곳이 되고 싶었던 소녀는 정작 본인은 변변찮게 의지할 데라곤 없이, 다만 이렇게나 작고 보잘것없는 몸을 웅크려, 버티고 또 버텨 왔을 것이었다.
따라서 내가 해 줄 거라곤 이것밖에 없었다.
카메라 저편에 내가 아직 있다고, 어디 가지 않았다고, 네가 참혹하게 기다렸던 4시간 27분보다 더 오래, 더 끈질기게 살아남아서, 마침내 말해 줄 수 있다고.
이를테면 이런 말을.
“와, 배윤하 겁나 못생겼네.”
……이 말이 아닌가?
아무튼.
이 말은 예언이 되었다.
얼굴 가득한 새하얀 공포를 다른 감정들이 밀어냈다. 이 감정들은 하필 주름 곳곳에 자리 잡아, 한지에 스민 먹물처럼, 그녀의 얼굴을 아주 못생기게 구겨 냈다.
얘 얼굴 몇 번 구겨 봐서 아는데, 그 모든 못생김을 통틀어 최고의 걸작이었다.
“흐잉. 흐아앙……. 으아아아앙…….”
그녀가 앙앙 울기 시작했다.
“으이이이잉…… 이 나쁜 자식아아아…… 나 정도면……. 예쁜 거라고오오……. 으아아앙……. 몇 번을 말해애……. 흐이이잉…….”
물론 민주주의 사회에서 모든 주장은 자유롭다.
나는 구구절절 반론을 늘어놓는 대신,
카메라 셔터를 한 번 더 눌러 그녀의 못생김을 메모리 카드 안에 영원불멸 박제해 두었다.
찰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