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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이 자꾸 늘어-76화 (76/164)

<재능이 자꾸 늘어 76화>

10. 냉정과 열정 사이 - 27

*   *   *

배윤하가 몸을 추스르는 데까지 그 뒤로 오 분이 더 걸렸다.

놀랍도록 짧은 시간이었다.

동시에 속 터질 정도로 긴 시간이기도 했다.

배윤하가 이 악천후 조건에서 제정신을 차린다는 것부터가 이미 기적적이다.

기적에 소요된 시간이 5분이라면 과분할 정도로 짧다. 평소라면 그랬을 거란 소리다.

그러나 지금은 조난 상황이었다.

평소 얌전히 있던 땅이 솟아오르고 물결치며 우리를 덮칠 의지로 충만했다.

꽤 격렬한 반항기다. 지금 좀 곤란하니 5분만 기다려 달라고 해 볼까.

평소 내가 땅에게 공손했는지를 가늠해 보았다.

전망은 어두웠다. 맨날 짓밟고 침 뱉은 기억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젠장.

그렇다고 가까스로 안정되고 있는 배윤하를 닦달해서 2차 폭발을 일으키는 우를 범할 수도 없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짧고도 길었던 5분을 얌전히 감내했다.

“……우으. 미안. 못난 꼴을 보였네.”

“새삼스럽게 이제 와서. 그동안 너 나 없이 어떻게 살았냐? 쯧쯧.”

“그러게. 어떻게 살았더라…….”

“일어날 수 있겠어?”

“……응.”

그녀는 내 부축을 받아 일어섰다.

“정신 차리자마자 미안한데, 상황이 썩 좋지는 않아.”

“……무슨 상황인지는 알아? 컴컴해서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네가 그러고 있을 때 나름대로 조사를 했지.”

그동안 알아낸 걸 그녀에게 말해 주었다.

“그리고 이건 추측인데, 우리가 있던 곳의 땅이 통째로 주저앉은 것 같아. 아님 휩쓸려 내려오다가 추락했던지.”

“어떻게 알아?”

“잘 봐.”

플래시를 켜서, 깎아지른 암벽을 수직으로 쭉 훑어보여 주었다.

암석과 진흙이 섞인 지층의 단면, 그 사이사이에 꺾인 철근과 반듯한 시멘트 조각이 자주 발견됐다. 인공물의 흔적이다.

“……저건.”

“그래. 여긴 아마 창고 밑에 있던 지하 공간이었을 거야. 허술하게 만들어져서 충격에 무너진 거지.”

“나가는 길은 있어?”

“아직은 발견 못 했어. 만약 바닥이 붕괴한 거라면 없을 가능성이 높지. 다만…….”

“지하 시설이면 다른 곳으로 통하는 통로는 있을 수 있겠네.”

“그렇지.”

역시 똑똑한 애랑 대화하니 편하다.

“어느 쪽 길이든 찾아야 해. 지금…… 그렇게 시간이 많아 보이진 않거든.”

저 위를 비춰 보니, 복잡하게 얽힌 철근에 토사들이 쌓여 가고 그 밑을 콘크리트가 아슬아슬하게 받치고 있었다.

척 봐도 규모가 어마어마한 데다, 바람이 불 때마다 조금씩 기우는 듯했다.

저러다 결국 못 버티게 되면…….

“우리 머리 위로 다 쏟아지겠지. 질식사 전에 뇌진탕으로 골로 갈 가능성이 높을 테고.”

“……한가하게 있을 시간이 없네.”

“그래. 네가 빼먹은 시간까지 계산해서 열심히 일해라, 배가시.”

“안 그래도 그럴 거거든?”

그녀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날 흘겼다.

다시 말해 표정을 지을 만큼의 기력을 회복한 것이다. 이런 얼굴일 때의 배윤하는 믿을 만했다.

우린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떨어져 각자 주변을 탐색했고, 탐색 3분 만에 짐덩이1을 발견하는 실적을 올렸다.

“사, 살려 주세요. 이, 이제 안 까불게요. 끄히이이잉……. 제발요오오…….”

삼인방 중의 한 명, 나리라는 이름의 여자애였다.

저 위에 있을 땐 가장 공격적인 포지션이었지만, 이 천재지변과 어둠이 그녀의 정신 연령을 한 10년 정도 퇴행시킨 듯했다.

여자애가 달달 떨면서 울고 있었지만 연민은 여름철 콧물만큼도 솟지 않았다.

“뭐, 나야 상관없다만. 일단은 윤하한테 사과해야지?”

“죄송합니다! 제가 감히 대원고교 여신이신 배윤하 님의 위대함을 못 알아보고 까불었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저 좀 버리지 말아 주세요오오……. 흐아아앙…….”

“…….”

지나치게 신속한 사과라 오히려 진정성이 없었다.

가볍게 붙었다 또 가볍게 떨어져 나갈 말들이었다.

배윤하도 그걸 알겠지. 그럼에도 그녀는 어렵잖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납득시키는 데는 한숨 한 번이면 충분했다.

“내 뒤만 따라다니고. 돌발 행동 하지 않고. 내 말에는 무조건 복종. 알았어?”

“……예. 예에에. 윤하님. 견마지로를 다 할게요오오…….”

“견마지로까진 필요 없으니까.”

짐덩이2, 짐덩이3…… 그러니까 온조와 세미도 곧 조우할 수 있었다.

혼자 공포에 짓눌린 나리와 달리, 그녀들은 힘을 합쳐 공포를 극복할 방법을 찾아낸 듯했다.

그것은 바로 분노의 떠넘기기.

현실 외면에는 역시 책임 전가만 한 특효약이 없는 법.

“그러니까 내가 처음부터 이런 건 하지 말자 그랬잖아!”

“뭐야?! 그럼 이게 다 내 탓이란 말이야?!”

“그럼 아니야?! 뒷담화나 까는 거랑 직접 감금시키는 거랑은 다르다고! 내가 그렇게나 반대했는데!!”

“웃기시네. 뭘 얼마나 반대했다고. 그러는 너는 세희만 오면 가장 먼저 달라붙어서……. 아유. 그동안 말은 안 했는데 얼마나 눈꼴시었는지 알아?”

“뭐, 뭐야?”

“세희 앞에선 별말 못 하더니? 왜? 나는 만만해서 이러는 거냐? 가증스러운 년.”

우리가 도착했을 즈음, 그들은 누가 더 똥물에 가까운가를 주제로 열심이었다.

둘 다 똥물이라고 겸허히 인정하고 지나쳐 주면 고마웠을 텐데, 어째서인지 그녀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우리 대열에 합류했다.

당연히 둘만 있기엔 무서우니까 그런 거겠지만 명목상 이유는 이랬다.

“나, 나리 뒤따라가는 거거든? 너네 따라가는 거 아니거든?”

“……아, 그러니. 딱히 안 물어봤지만.”

“얼굴로 물어봤잖아?! 얼굴이 딱 궁금한 얼굴이었어!!”

“너네! 감히 윤하님한테 대들지 마! 윤하님은 우릴 영도해 주실 거란 말이야!”

“……뭐야. 나리 쟤 미쳤나 봐.”

부적이 좀 지나치게 영험해 버렸다.

이렇게까지 깡그리 다 구할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한두 명 정도는 기절시켰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어쨌든 그런 누더기 같은 파티를 이끌고도 던전(?) 탐험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10분 정도 더 살펴본 뒤, 나는 대략적인 결론을 낼 수 있었다.

“음, 이거 큰일인데.”

“……뭐가?”

“여긴 완벽히 고립됐어. 나가려면 이 절벽을 타고 올라야 될 거 같은데.”

내 말이 떨어지자, 굶주린 발작 같은 반응이 터져 나왔다. 몇 개의 신음이 화음을 이루었다.

“……저, 저걸 어떻게…….”

까마득했다.

빛을 비추면 그 끝이 보이긴 하지만, 그래서 더욱 오르다 추락하는 이미지가 실감나게 상상됐다.

“못 하면 다른 길을 찾아야지. 보다시피 여긴 어딘가의 지하야. 여기 쌓인 흙이나 돌들을 치우다보면 연결된 통로를 찾을 수도 있겠지.”

“각자 흩어져서 찾아보는 게 낫겠네.”

“그래. 너무 멀리 떨어지진 말자고. 통로를 찾으면 다 같이 모여서 길을 뚫어야 할 테니까.”

“알았어.”

우린 벽에 다닥다닥 달라붙어 돌과 진흙을 퍼냈다.

무모하고 대책 없는 작업. 희박한 확률의 도박. 절망적인 상황 속의 발버둥…….

이 행위의 본질이 그것임을 다들 알고 있지만, 말로 꺼내면 견딜 수 없게 될까 봐, 하나같이 입을 여미고 묵묵히 작업에 임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왜 그다지 불안하지 않을까.

난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오카리나 조각을 어루만졌다.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방향감이 엄습했다.

바로 지금을 위해 이 조각이 내게 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진짜 이게 맞을까?’

물론 이 감각은 방향만을 지시할 뿐이다.

벽이나 장애물까지 고려해 길을 찾아 주는 네비게이션이 아니다.

따라서 이 방향감을 곧바로 표지판처럼 활용할 수는 없다. 그랬다간 외딴 담벼락과 이마끼리 깜짝 미팅을 해 버리고 말겠지.

그러나 이번에는 이게 맞다고, 어떤 불가해한 확신이 날 충동질하고 있었다.

이런 적은 처음인데.

‘어쨌든 해 볼 수밖에.’

그러나 마음을 먹은 뒤에도 문제는 여전했다.

방향감이 포괄하는 구간이 지나치게 방대하다. 이 모호한 감각은 나침반처럼 선이 아니라 면(面)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러나 진흙을 쓸고, 돌들을 치울 때마다, 난 내 손이 어떤 특정한 경로를 찾아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것도 오카리나의 힘일까?

곧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진동이 있다.’

그렇다.

내 손은 시멘트 더미와 진흙 너머로부터 전해져오는 미약한 진파를 감지하고, 무의식적으로 그 진원의 점을 향해 파 내려갔던 것이었다.

작지만, 엄연히 실존하는 물리적 파동.

어째서인지 그걸 느낄 수가 있었다.

‘……하. 그렇군. 이번엔 [어느 병아리 감별사의 민감성 손가락]인가.’

희소식이다.

이 일정한 템포는 자연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었다.

마치 프로펠러가 돌아갈 때나 느낄 수 있는 규칙적인 떨림. 그러니까 아마도 이건…….

“환풍구.”

난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배윤하가 가장 먼저 도착했다.

“……왜? 뭔가 찾은 거야?”

“난 이제부터 탤런트 커뮤니케이터가 될 테다.”

“뭐라는 거야?”

“세상에 나쁜 재능은 없다.”

“…….”

어쨌든 내 지시에 따라 아이들은 돌과 진흙을 퍼 날랐다.

그럴수록 점점 [민감성 손가락]이 감지하는 진동이 강렬해지고 있다.

이대로 조금만 더 파 들어가면 되겠다는 확신이 든다…… 싶은 순간에 문제가 터졌다.

“더는…… 못 하겠어!!”

장세미가 나르고 있던 시멘트 덩어리를 내팽개치면서 외쳤다.

이를 악물고, 쨍그린 눈은 왜인지 배윤하를 향하고 있다.

“다 헛짓이야!! 이런다고 뭐가 나아져?! 어차피 우린 여기서 다 죽을 거라고!!”

“장세미! 정신 차려!”

“내 정신은 멀쩡해!! 언제나 멀쩡했어! 나만 이상해? 내가 이상한 거야?! 대체 뭐라도……. 납득시킬 설명이라도 해 줘야 할 거 아니냐고!”

“말했잖아. 한열이가 길을 찾았다고.”

“웃기는 소리 하지 마! 그걸 어떻게 알아! 이렇게 콱 막혔는데!!”

“……지금 자세히 설명할 시간이 없으니까…….”

“배윤하 넌 언제나 그랬어!! 제대로 된 설명 따윈 하지 않았지!”

달려들듯이 외쳤지만, 정작 그녀는 한 걸음 물러서 있었다.

“친절한 척하면서 사실은 우릴 깔보고 있잖아! 우리 따윈 아무래도 좋을 년들이라고 생각하는 거 다 알아!!”

또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럴 것이다.

그건 해명 요구나 제대로 된 항의라기보다 그저 질겁해서 내지르는 비명에 불과했다.

공포가 그녀의 성대를 틀어쥐고 아무렇게나 발성을 시켰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에 솔직한 말이겠지.

줄곧 곱씹어 오다 마음의 자국이 되어 버린 것들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오고 있었다.

“중요한 건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고! 숨기고!! 네 주변에 친구가 있긴 해? 그거 다 그냥 장식일 뿐이잖아!! 네 옆에 있으면 비참하기만 하다고!!”

그리고 그녀의 솔직함은, 다른 곳으로 흩어지지 않고 배윤하만을 곧게 찔렀다.

“왜 우리한텐 솔직하지 않냐고. 왜 친구들 앞에선 웃으면서, 혼자서는 웃지도 않는 건데. 그 안에 대체 뭐가 있길래 그렇게 비싸게 구는 거냐고……. 진짜…….”

장세미는 어둠 속에서 돋아난 얼룩처럼 서 있었다.

지워 내면 지워지고, 놔두면 그대로 어둠에 스며드는, 나약한 그림자.

잠시간 조용했다.

빗소리만이 침묵의 배경으로서 근면히 활약했다.

우지끈.

하는 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위쪽이다.

반사적으로 시선을 올려 보자, 거대한 암흑이 쏟아지는, 비현실적이고 압도적인 양감이 망막을 가득 메웠다.

저 위에서 무게를 계속 쌓아 가던 토사가 비만을 비관하여 투신자살을 하는 광경이다.

“위험……!”

콰릉-! 토사가 바닥에 추락했다.

발밑이 기우뚱 기울고, 충격의 반발력이 우릴 형편없이 내팽개쳤다.

부유감이 평행 감각을 흩트리는 와중에도, 난 분명히 보았다.

쏟아진 토사가, 스티로폼을 파고드는 염산처럼, 닿은 바닥을 그대로 함몰시키며 더 깊은 곳으로 빨려 드는 것을.

역시 우리가 서 있던 지반은 불안정했던 것이다!

저 밑의 새까만 혼돈은 토사를 가뿐히 삼키고, 아직 모자랐는지 우리 발밑의 땅까지 게걸스레 갉아먹기 시작했다.

곳곳이 꺼지고, 갈라지고, 솟아오르며, 균열이 우릴 향해 빠르게 쇄도해 왔다.

그리고.

“……앗, 아앗!!”

“안 돼!”

가장 먼저 장세미의 몸이 주저앉고.

배윤하가 그녀를 향해 손을 뻗고.

난 배윤하의 허리를 채면서 근처의 철근을 붙들었다.

우르릉……. 후득. 후드득.

-잡았다.

아득한 어둠을 아래로 두고, 우리 셋은 서로를 붙든 채 위태롭게 이어져 있었다.

괴물의 아가리에 반쯤 몸을 담근 형국이었다.

천만다행으로 더 이상의 붕괴는 없었지만, 낙관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여전히 폭우가 우리 등을 내리찍고, 손은 물기로 미끈거렸으며, 배윤하의 컨디션은 이제 더 내려갈 구석이 없었다.

잠깐.

근데 짐덩이1+1은?

“……야! 너네도 좀 도와……!”

고개를 돌리자마자 아연실색했다.

방금의 충격은 우리가 작업 중이던 장애물들을 말끔히 치워 버렸다.

찾고 있던 환풍구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공포에 질린 짐덩이1+1은 환풍구에 서로 자기 몸을 먼저 집어넣으려고 경합 중이었다.

어쨌든 둘 다 빛의 속도로 사라졌다.

“…….”

저것들을 잠시라도 믿은 나를 탓하자.

“……유, 윤하야……. 사, 살려……. 살려 줘…….”

“살고 싶으면 입 다물어!!”

한계는 금방 찾아왔다.

장세미의 손이 빗물에 미끄러져 그대로 배윤하의 손을 놓치고 만다.

“악!!”

배윤하는 그 짧은 순간 기지를 발휘. 목에 메고 있던 카메라를 풀어내 던지듯이 늘어뜨렸다.

“장세미!! 그거 잡아!!”

가까스로, 본체에 손가락을 걸친 장세미.

그리고 카메라 스트랩은 손보다 마찰력을 확보하기 용이했다. 장세미는 카메라에 거의 매달리다시피 했고, 윤하 역시 밧줄을 잡아당기듯 그녀를 끌어올릴 수 있었다.

“죽게……! 놔둘 거 같아?! 혼자……! 지 할 말만……! 지껄이고……!! 말이야아……!!”

조금씩.

조금씩.

끙끙대면서.

“지레 짐작하고……! 멋대로 오해하고……! 치졸하게 뒷담화나 하고……! 나한테! 제대로! 사과하기! 전까지는……!!”

장세미의 몸뚱이를 기어코 끄집어낸다.

“절대 못 죽으니까아아!”

거의 다 올라왔을 땐, 나도 남겨 둔 여력을 끌어 올려 둘을 한꺼번에 끌어당겼다.

그리고 장세미를 완전히 땅 위로 올려놓은 순간.

스트랩의 결합 부위가 박살 나면서 카메라가 허공에 튀어 올랐다.

“……엇!”

배윤하가 무의식적으로 팔을 뻗지만, 여전히 내 팔에 묶여 있어 카메라까지 손이 닿지 않는다.

카메라는 그대로 그녀의 손을 벗어나 저 밑바닥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어둠 속에서는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아…….”

단 한마디였으나.

몸의 일부가 떨어져 나와 영구적으로 손실되어 버린 것처럼, 그 한 덩이의 탄식은 아주 무겁고 길게 떨어졌다.

난 그녀에게 상실감을 추스를 시간을 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배윤하, 여긴 위험해. 바로 이동해야 해.”

“그래. 알아.”

그녀는 덤덤하게 일어섰다.

난 알았다.

그건 괜찮은 척하는 게 아니었다.

괜찮지 않지만, 그럼에도 삶의 두터운 힘줄이 그녀를 밀어 올린 것이었다.

언제든 상실감을 받아 안을 수 있게끔, 단련해 둔 그대로.

우린 다리가 풀린 장세미를 양쪽에서 부축해 걸었다.

“괜찮냐?”

“……응, 괜찮아.”

심지어 그녀는 희미하게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작별 인사는 10년 동안이나 넘치게 해 온걸.”

우리가 환풍구를 통과하고 얼마 안 있어, 추가로 사토들이 쏟아져 내려 입구를 빈틈없이 막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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