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이 자꾸 늘어 77화>
10. 냉정과 열정 사이 - 28
* * *
길게 이어지던 환풍구는, 어딘가에서 찢기고 주저앉아 막혀 있었다.
찢긴 틈새를 통해 낑낑 내려오니, 어둡고 축축한 건물 어딘가로 떨어졌다.
철근 콘크리트의 보호 아래에 들어왔다고 자축하기엔 일렀다.
타일 위로 외딴 점토의 벽이 돋아났다 싶으면, 어김없이 천장이 침강한 곳이었다.
그랬다. 이 천재지변은 지하 밑까지 틈을 뚫고 진흙들을 꾸역꾸역 밀어 넣고 있었다.
물비린내가 우릴 추격하는 것만 같았다.
주변은 건물을 물리적으로 쥐어짰다가 대충 흩뿌려놓은 것처럼 혼란했다.
부서진 나무판자, 꺾인 쇠파이프, 난이도 높은 직소퍼즐처럼 철저히 조각난 콘크리트 덩어리들.
온전하게 남은 것들을 토대로 원형을 추론해 보려는 시도는 모조리 실패했다.
온전한 게 없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염세적인 예술가가 인류 문명의 끝을 꼼꼼하게 재현해놓은 듯했다.
완고한 어둠 밑, 얄팍한 플래시에 의지해, 보폭과 방향을 신중히 가늠해 가며 정체불명의 지하를 탐험한다.
우리 모두는 말이 없었다.
선두의 나는 공간을 파악하고 위험요소를 제거하는 것만으로 바빴다.
배윤하는 탈진 직전이었으며, 세미는 죽음의 공포로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다.
공기가 무겁게 느껴졌다.
그래서 짐덩이1+1이 발견되었을 때 나는 거의 반가워할 뻔했다.
“……사, 살려 줘……! 세, 세미야! 나 좀 살려…….”
“…….”
통통한 여자애가 바닥에 처박혀 있고, 마른 여자애는 이마에 장대한 혹을 달고 기절해 있었다.
이름이 온조였나.
그녀는 땅에 자라난 식물처럼 머리만 바닥에서 툭 돋아 있었다.
플래시를 비쳐 보니, 그녀 주변에 고인 물과 진흙이 절묘한 농도로 섞여서 늪지를 이루고 있었다.
적당히 되직해서 단번에 잠기진 않지만, 근본은 웅덩이라 몸을 끈질기게 끌어당기는 곳.
대충 상황이 짐작됐다.
앞뒤 안보고 도망치다가 한 명은 빠지고, 한 명은 자체 헤딩으로 정신을 날려 버린 상황이겠지.
“얘, 얘들아. 나, 나 놓고 가, 갈 거 아니지? 서, 설마 아니겠지? 세, 세미야? 우, 우리 치, 친구잖아……?”
난 별생각이 없었고, 장세미는 버리고 튄 주제에 뭐가 친구냐는 표정을 지었으며, 선천적인 오지라퍼 배윤하조차 선뜻 나서지 않았다
격렬한 반응이 터져 나왔다.
물론 몸을 움직일 수는 없으므로 입술만 격렬했다.
“이 쌍간나 새끼들아아!! 그러고도 니네가 사람이야?! 사람이면 사람을 구해야지!! 그건…… 그건……! 그러니까! 과실치사! 그거라며! 범죄라며!! 너네 나 안 구하면 다 범죄자 되는 거야!”
난 그녀의 희망을 친절히 짓밟아주었다.
“과실치사가 아니라 방조겠지. 미안하지만 방조죄는 범죄 행위를 간접 지원할 때에나 생기는 거다. 이런 일이 다 죄가 되면, 해변가에 놀러 갔다가 사고를 목격하게 된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들도 다 방조죄로 잡아넣어야 되게?”
“……그, 그런! 아까랑 말과 다르잖아아!!”
“의지를 갖고 집행한 것과 가만히 있는 건 엄연히 다르다. 넌 죄를 저질렀어. 그리고 이 상황에서도 저지른 것에 대해선 한 마디도 하지 않는군. 그런 녀석을 우리가 왜 구해 줘야 하지?”
온조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이제 조금 있으면 꿀이 아니라 진흙을 흡입하게 되겠지. 그녀는 그 미래를 그려 볼 만큼의 상상력은 있던 모양이다.
“……미, 미안.”
그럼에도 무반응으로 일관하니 목청을 키운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세, 세미야. 아, 아까 내가 말이 심했지? 너, 너무 무서워서 그랬어. 진심이 아니었다구! 그, 그리고 윤하야. 미안해. 나 평소에 네가 너무 부럽고 질투나고……. 그래서 그랬어. 앞으로는…….”
“온조야. 방온조.”
“으응?”
배윤하가 늪지대의 경계선까지 다가가 쪼그리고 앉았다.
“정말로 미안해? 뉘우치고 있어? 앞으로는 안 그럴 거야?”
“무, 물론이지.”
“절대로?”
“저, 절대로! 절대 안 그럴게!”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걸 그동안은 왜 안 했어? 내가 나쁜 년이라고 굳게 믿고 있던 거 아니었어? 날 까야 세상의 정의가 구현된다는 식으로 굴었잖아. 어떻게 신념이 그리 쉽게 꺾이니?”
“……어어. 그건. 어…….”
“날 설득시켜 봐. 네가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걸. 내 모자란 머리로도 잘 알 수 있게.”
내 위치에선 안 보이지만, 아마 배윤하는 상냥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짓고 있을 것이다.
얘도 은근히 웃으면서 칼 꽂는 부류의 인간이었다.
“……어, 어, 그러니까……. 난, 그……. 그렇지! 나, 나는 나쁜 년이야!”
그 뒤로는 뭐랄까, 북한식 자아비판이나 종교적 고해성사에 가까운 자기 고백이 두서없이 행해졌다.
물론 행위의 나열만 있을 뿐, 진지한 성찰의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당연하겠지. 윽박질러서 나오는 반성이 반성이겠는가.
다만 이 판국에도 ‘자신은 원래 이런 인간이므로 그런 짓을 하게끔 되어 있다. 네가 이해해야 한다.’는 식의 뉘앙스를 풍기는 건 본성이 썩었다고밖에 해석되지 않았다.
책임 회피랑 안면 몰수로 조기 교육이라도 받은 건가.
“……알았어.”
“고, 고마워! 윤하야! 이, 이 은혜는 저, 절대 잊지 않을게!”
그럼에도 배윤하는 근처에서 긴 전선을 구해 와 휙 던져 주었다.
사실 어떤 대답이 나오든 구해 주긴 했을 것이다. 다만 밑바닥을 보고 싶었겠지.
그리고 온조는 전선줄을 잡은 순간 제 교활한 밑바닥을 드러냈다.
“사, 살았다!! 으아앗!! 씨발!! 개년들!! 개새끼들!! 감히 사람 목숨으로 흥정해?! 나가기만 하면 너네 다 고소야! 고소!! 세희한테 말해서……!”
교활하긴 한데 머리는 좀 떨어지는 아이였다.
배윤하는 전선줄을 놓았다.
“윤하님!! 천사님!! 사랑합니다!! 방금 것은 제가 한 말이 아닙니다!! 악마가 빙의됐습니다!! 제가 이렇게 아픈 년입니다!! 이 불쌍한 년을 좀 도와주십쇼!!”
윤하는 그 뒤로도 한참 전선을 잡았다 놓았다 하며 이 기묘한 낚시를 즐겼다.
그리고 온조의 입에서 ‘배윤하의 장점 10가지’를 기어코 다 들은 뒤에야 꺼내 주었다.
흙탕물로 목을 축여 가며 고백한 마지막 10번째 장점, “배유아눙 카프루아눈가가 죠으타!!”의 의미는 영원히 불명으로 남을 것이다.
배윤하는 무척 개운한 표정이 되었다.
“후후. 후후후…….”
“……좋냐?”
“어. 내 안에서 뭔가가 눈뜬 거 같아. 후후…….”
“…….”
난 카메라를 어떻게든 다시 주워 와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을 느꼈다.
트라우마가 뭔가 이상한 식으로 극복되고 있어…….
어쨌든.
우린 실신한 나리와 반쯤 실신한 온조를 팽개친 채로 탐색을 재개했다.
그리고 걸을수록 느껴지는 위화감.
‘……너무 넓다. 그리고 지나치게 복잡해. 대체 이런 식의 지하가 무슨 용도로 지어진 거지?’
지하는 보통 창고나 강당으로 쓰일 것이다.
그런데 지나온 것들을 종합하면 작은 방 규모의 구획이 촘촘하게 나누어져 있었다. 원룸이나 될까 싶은 방들. 그리고 간혹 발견되는 쇠창살들. 자연히 뭔가 연상됐다.
‘감옥?’
예전에는 수감 시설로 쓰인 곳인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재해가 이 지하를 철저하게 빻아 놓아서 더 구체적인 추론은 무리였다.
그리고 그렇게 몇 분이나 더 나아갔을까.
“……막다른 길인데.”
“하……. 여기까지 와서.”
허탈한 탄식이 터져 나왔다.
구석구석 둘러봤지만 나갈 길 따윈 없었다. 산사태가 구멍이란 구멍은 모조리 막아 버린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 우린 고립됐다.
“……이런. 완전 조난이잖아.”
“아까부터 계속 조난 상황이었거든.”
암담한 상황이었다.
산사태 한 방으로 이 지경까지 박살 난 곳이었다.
아직까진 버티고 있다만,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기대는 지나치게 순진한 거겠지. 얌전히 구조를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그리고 내게는 아직 찾아볼 것이 더 남아 있었다.
“……각자 흩어져서 좀 더 찾아보자. 모르잖아. 뭐라도 발견될지.”
나는 품 안의 오카리나 조각을 손에 쥐었다.
감각이 시키는 대로 발을 척척 옮겨 도착한 곳은 평범한 독방.
난 그 가장자리에 쪼그려 앉아 타일을 쓱 훑듯이 만졌다. 그중 미묘한 이질감이 드는 타일 하나. 그걸 손가락으로 쓱 누르니 한쪽이 기울어지며 들어내기 쉽게 되었다.
오카리나의 두 번째 조각은 타일 밑에서 발견됐다.
누가 봐도 일부러 숨겨 놓은 모양새였다.
“……흠.”
발견은 순조로웠지만 아쉽다.
오카리나는 두 조각을 합쳐도 불완전했고, 당연히 탤런트도 아직 획득할 수 없었다.
내심 탤런트 주인의 기억을 읽어서 비밀 통로라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기에 조금 실망스러웠다.
성과라곤 새 조각의 귀퉁이에 새겨진 이니셜뿐.
“……L.J.H?”
역시나 지금 도움이 될 정보는 아니다.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며 다음 수단을 떠올리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깜짝 놀랐다.
일차적으로 갑작스러워서.
이차적으로는 전화는 울리는데, 핸드폰 상단에 여전히 ‘서비스 안 됨’이라고 뜨고 있었기 때문에.
액정 위에는 수신자 번호조차 박혀 있지 않았다.
귀신의 소행인지 핸드폰 결함인지 찬찬히 따져 볼 생각은 없었다.
난 바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 돼, 됐다! 과, 과장님! 연결됐습니다!!
전화 저편의 우당탕거리는 소란이 이내 시원시원한 목소리로 변신했다.
-이한열 군입니까?
“맞습니다만. 누구시죠? 이 전화는 대체…….”
-차근히 설명 드리겠습니다. 저는 LS보안 경호팀의 이상용 과장이라고 합니다. 본론으로 바로 넘어가죠. 입에 발린 거짓과 열 받는 진실 중에 어느 쪽을 선호하십니까?
“……선택지가 왜 그런 식이죠. 음, 진실이요.”
-죄송하지만 저희가 한열 군 핸드폰을 해킹해 뒀습니다. 내부 소프트웨어를 수정한 이후 개인정보에 접근한 바는 일절 없으니 안심하시길.
“해킹?!”
-그래서 기지국 신호를 이용하지 않는 특수한 방식으로 1:1 통화가 가능하게 됐다는 사실만 말씀드리죠. 원리는 무전기랑 비슷하다던데, 기술적인 부분은 저도 자세히 모릅니다. 물론 거리 제한이 있어서 지금까진 연결이 어려웠습니다만…….
남의 보안을 막 뚫고 다녀서 보안팀인가?
통보하신 대로 열 받는 진실이었지만 지금은 불평이나 할 때가 아니었다.
난 그의 전화를 받자마자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단번에 이해했다.
“……회장님이 저한테 개인 경호를 지시하셨군요. 비밀 경호 상황에서 확실을 기하기 위해 핸드폰을 해킹해야 했구요. 그런 이유로 제게 사고가 난 걸 바로 아셨고. 맞습니까?”
-명민하시네요. 물론 각종 법률적 위반 사항은 숙지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 모든 건 회장님의 의사와 무관하며, 전적으로 제 주관하에…….
“지금 그런 건 됐습니다. 그럼 그 ‘모종의 방법’이란 걸로 제 위치까지 추적이 가능합니까?”
-힘듭니다. 해킹한 걸로는 고작 자체 GPS 신호를 전송받는 정도나 가능해서요. 하지만 지금은 아시다시피…….
“통신신호 쪽이 먹통이라 안 된다는 거군요. 알겠습니다. 그 외에 제가 알아야 하는 사실이 있습니까?”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뭐부터 들으시겠습니까?
“좋은 거부터 듣죠. 그동안 마음의 준비 좀 하게.”
-지금 경산시 전체가 물난리로 허덕이고 있습니다. 근데 회장님께서 직접 전화하셔서 이쪽에 요원과 작업자들을 최우선적으로 배치하도록 하셨죠. 벌써 굴착 작업에 돌입해 있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나쁜 소식은?”
-재난대책본부로부터 2차 산사태가 몰려올 지도 모른다는 언질을 받았습니다. 대략 1시간 뒤라는데, 더 빨라질 수도 있다고 하더군요. 그럼 작업이 더 늦어지겠지요.
뭐야 나쁜 소식이 아니잖아.
이건 아주아주 엄청나게 나쁜 소식이었다.
작업이 늦어지는 게 문제가 아니라 이쪽은 이대로 압사 당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제 쪽에서 먼저 여쭤보고 싶은데, 지금 대체 어디에 계신 겁니까? 저희가 한열 군 위치를 알아야 더 면밀하게 작업할 수 있습니다.
“…….”
나는 조난당한 위치와 걸어온 길을 추적해서 현재 위치를 가늠하는 복잡한 작업을 수행하려고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내가 떠올린 건 뜬금없게도 이니셜이었다.
L.J.H.
오카리나 조각.
어떤 날카로운 생각이 내 이성을 일도양단했다.
그 단면에는 이런 문장이 못생긴 필치로 적혀 있었다.
‘이 모든 건 과연 우연일까?’
무당에게 오카리나 조각을 받고, 나머지 파편을 추적해 여기까지 오고, 오자마자 거리가 닿아서 전화가 통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난 이 오카리나가 발견된 위치를 수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어디에 이르는지 알고 있다.
불침번 서면서 찾아봤으니까.
“5분입니다. 이 과장님.”
-예?
“제 핸드폰 배터리가 버틸 시간이 5분 정도 남았습니다. 그 안에 어떻게든 길을 찾아보죠.”
이과장이 대꾸하기도 전에 나는 바로 말했다.
“그 전에 저희 숙소 설계도 구하실 수 있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