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이 자꾸 늘어 78화>
10. 냉정과 열정 사이 - 29
“그 전에 저희 숙소 설계도 구하실 수 있으십니까?”
-요청하면 바로 팩스로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건 왜…….
“제가 있는 위치를 설명하려면 반드시 필요하거든요.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5분……. 아니 3분이면 됩니다.
“그럼 그때 다시 연락 주시겠습니까? 저도 배터리를 아껴야 하는 처지라.”
-그러도록 하지요.
난 배윤하를 불러서 사정을 설명했다.
“LS그룹? 그쪽이랑 네가 왜 엮이는데?”
“자세한 건 설명할 시간 없고. 너, 나 대신 플래시 좀 키고 있어라. 나 배터리 아껴야 돼.”
“……대체 뭘 하려는 거야?”
뭘 하긴.
생각해야지.
이제 와서 느낀 건데, [공간지각력]과 [암기력]의 시너지 효과는 대단했다.
감각 기억법을 알 것이다.
필기의 감촉, 리듬으로 가사 외우기, 시각 연상법, 그 외 여타 감각의 얼개들은 기억을 건져 올리는 훌륭한 낚싯대다.
시험 전날의 냄새를 유지하려고 안 씻고 같은 옷을 입는 것도 같은 맥락의 행위다.
감각이 선명할수록 기억이 수월하게 출력되는 건 당연한 일.
그리고 내겐 Rank D의 공간지각력이 있다.
공간지각이란 부피감과 거리감을 ‘감각’하는 일, 따라서 그 공간적 생동감은 의식 밑의 기억에 파고들어 과거를 보다 정교하게, 그리고 명확하게 재구성해 낼 수 있었다.
여기에 원래도 우월했던 [암기력]을 더하니.
그야말로 압도적인 현장감이 현재의 수면 위로 떠올라, 내 의식을 그 불면(不眠)의 밤에 떨구었다.
섹터B 무궁관.
눈을 감으니, 난 지금 그곳 근처의 담벼락에 있다. 천천히 걷는다. 슬리퍼라 발밑의 감촉이 축축하다.
한편으로는 손가락을 들어, 현실의 바닥에 진흙을 잉크 삼아 도면을 그린다. 손끝 또한 축축하다.
기억의 내가 걸음을 딛고 뗄 때마다, 현실에선 점과 점이 이어지고, 길이가 결정되고, 마침내 토대가 깔리며 그 위에 벽돌과 철근들이 차근차근 얹힌다.
그리하여 발의 축축함과 손의 축축함이 완벽히 접점을 이루었을 때.
점과 선으로 시작했던 도면은 한 채의 건물이 되었고.
나는 마침내 그날 밤의 복도 위에 도착해 있었다.
여기다.
지금 내 머리 위는 바로 이곳으로 통한다.
바로 그때 전화가 다시 걸려왔다. 난 스피커 모드로 돌리고 폰을 바닥에 놔두었다.
“예. 이 과장님.”
-한열 군. 도면이 꽤 많고 복잡한데…….
“필요한 건 제가 말씀드릴게요. 일단 섹터B의 무궁관입니다. 이 건물의 자세한 재원이 필요합니다. 특히 그 밑의 지하 시설에 대해.”
-음. 일단 재원은…….
난 그가 말해 주는 수치를 도면 위에 꼼꼼히 적었다. 수치까지 면밀해지니 기억력은 점점 강렬하게 튀어 올랐다. 산란기의 연어들이 뇌수를 가로지르는 것 같았다. 머리가 띵했다.
“지하는요?”
-그게, 좀 이상합니다. 제가 받은 준공 계획서에는 딱히 지하랄 게 없습니다. 그 부분은 완전한 공란이에요.
“없다구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제가 거기에 있는 걸요.”
-확실히 없습니다. 그런데 그래서 더 이상하군요. 전 건축토목에는 문외한입니다만, 이렇게까지 토대와 바닥 사이에 하부 공간이 떨어져 있는 건…… 비상식적이군요. 여기가 다 메워져 있으면 시멘트값만 엄청 들었겠는데요.
“……그건, 지하를 만들었다는 사실 자체를 명시하지 않았다?”
-그렇게 보이는군요.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물론 한열 군이 이곳 지하에 있는 게 맞다면 말이죠.
“확실합니다.”
생각해 보니 크게 상관할 문제는 아니다.
비어 있는 공간만큼 그냥 지하 공간이라고 가정하면 되는 문제였다.
“음, 그런데 과장님. 5분 뒤에 다시 전화 주시겠습니까? 이쪽에서 조사해야 할 게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배윤하, 당장 나가서 여기 가로세로 길이 재와. 보폭으로. 대충, 이 정도 길이. 난 저 아래쪽 잴 테니까. 이해했어?”
“어? 어? 보, 보폭으로?”
“여기서 줄자 구할 재주가 있으면 그걸로 하든가. 아무튼, 정확하진 않아도 되는데 최대한 정확하게 해.”
“그게 무슨 말이야!”
“여하간 빨리 움직여! 시간 없어! 장세미! 넌 내 쪽 플래시 좀 비춰!”
“어, 어어……!”
엉망진창의 측량이 시작되었다.
엄밀할 필요는 없지만, 그 대충을 재는 것만도 난관이었다.
천장 곳곳이 무너진 지하는 구겨진 캔처럼 이 공간을 더 난해하게 만들었다.
그럴수록 쥐어 짜내듯이 [공간지각력]을 혹사시켰다.
눈가가 축축해 손으로 쓸어내니 땀이 한가득이었다.
내 두뇌가 수당 없는 추가 근무에 진저리를 치는 듯했다. 두통이 쨍했다.
“……좋아. 대충 이 정도면…….”
핸드폰으로 돌아왔다.
-됐습니까?
“예. 됐습니다.”
그가 일러준 도면 속 지하 구조와 현실 공간을 일치시키는 작업은 간단했다.
나침반을 이용하면 된다.
스마트폰에는 보통 자성 센서가 내장되어 있으므로 어플만 있으면 간단히 잴 수 있다.
그리고 난 GPS 활용 문제 때문에 해당 어플을 깔아 둔 상태였다.
이 어설픈 측량으로 지도를 그려 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과장님, 지금부턴 현장 사람들과 소통해야 합니다. 가능하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지금 현장에 나가 있는 통제관과는 나름 안면이 있어서요.
“다행이네요. 지금 섹터 B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건물이 기울진 않았습니까?”
-토사물에 거의 잠긴 상태입니다. 산사태 끄트머리라서 위력이 많이 죽었는지 다행히 기울어진 건물은 없다고 하는군요. 섹터 C는 거의 반파 상태던데……. 그 밑은 어떤가요?
“제 감각으로도 기울어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괜찮겠네요. 그럼 토사가 쌓인 두께와 면적, 음, 그러니까 산사태가 숙소를 어떤 식으로 뒤덮었는지 묘사해 주실 수 있습니까?”
-어……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건 현장 사람과 직접 소통하는 게…….
-전화 바꿨습니다. 에, 그러니까 여기는…….
정보가 접수될 때마다 머릿속의 숫자들이 탁탁 체결되면서, 토류의 침략에 신음하는 숙소 근방의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이번엔 [공간지각력]과 [수리적 통찰력]의 시너지를 보일 때였다.
계산은 거의 반사적이었다.
-그래서 동서쪽부터 지금 작업을…….
“아뇨. 동서쪽은 안 됩니다. 그쪽이 당장 뚫기 용이해 보이겠지만 유체역학적으로 무너지기 쉬운 구조예요. 진흙을 끊임없이 파기만 할 겁니다. 운 나쁘면 파다가 인부들이 휩쓸릴 수도 있고.”
“네네, 남서 방향으로 비스듬히. 네. 그쪽입니다. 그쪽 배수 시설을 잘만 이용하면 됩니다. 아니요. 서쪽 방향이 당장 파기는 쉽겠죠. 하지만 그쪽은 건물이 무너져 있어요. 이쪽에서 봤을 땐 그렇습니다. 결과적으로 작업 시간이 더 오래 걸릴 겁니다.”
안쪽에서 측량한 이유는 이것.
설계도상의 벽면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간 구조 요원들은 낭패를 보겠지.
어딘가는 이미 무너져서 철근콘크리트 더미까지 통째로 방해물이 되어 있을 테니까.
따라서 여기까지 올 수 있는 최단 거리는 우리만이 알려 줄 수 있다.
“예, 그러니 그쪽에서 파다 보시면…….”
그리고 내 핸드폰 배터리가 완전히 방전됐다.
절로 침음했지만, 그래도 전할 것은 대부분 다 전했다.
이제는 기다리는 수밖에.
“……가자. 어느 쪽으로 와야 하는지 대강 말해 뒀으니까. 거기서 대기하고 있자고.”
“어어…….”
그러자 배윤하와 장세미가 뭔가 멍한 눈으로 날 보고 있었다.
난 [눈치]로 그게 어떤 반응인지 알았지만 기운이 없어 내색하지 못했다.
어차피 배윤하가 직접 말할 테지.
“이야아. 이한열 믓찐대?! 전교1등 하더니만 아주 대굴빡이 펄럭펄럭 날아댕기고 있어!?”
“머, 멋지다.”
“……고마운데, 그런 건 살아남은 다음에 해 주라.”
“구조대 온다는데 당연히 살겠지!!”
그녀들은 1시간 안으로 2차 산사태가 밀려올 거란 사실을 모른다. 내가 말하지 않았으니까.
불안감을 굳이 증식시켜서 정신 사납게 할 필요는 없겠지.
우린 구조대를 기다리며 통로에 늘어지듯 앉았다.
곧 시간 감각이 이상해졌다.
불안한 탓에 시간이 좀 더 빨랐으면 했지만, 실제로 빨랐다간 산사태가 우리 정수리를 쓰다듬겠지.
느긋하게 가라고 주문하기엔 내 안의 초조함이 이미 전력으로 날뛰고 있었다.
내 혼잡한 심사를 반영해서인지 시간은 취객처럼 비틀거렸다. 도무지 똑바로 흐르는 것 같지 않다.
작업이 얼마나 걸릴지 들었던가?
인부는 숫자가 몇 명이나 되지?
통화가 끊긴 사이 다른 변수가 생기진 않았을까?
김송헌이 저주를 내렸다면?
수많은 생각이 범람했지만, 지금으로선 하릴없었으므로 그것들은 고스란히 쌓이기만 했다.
발끝부터 정수리까지 온몸이 걱정의 토사로 메워졌다. 아주 안팎이 산사태로 난리였다.
“……잘될 거야.”
그때, 배윤하가 내 팔을 두드렸다.
난 말없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그녀의 말대로 되었다.
콰릉!! 쿠구궁!!
다행히 소리는 위쪽이 아니라 앞쪽에서 들려왔다.
통화 종료 후 47분, 구조대는 반항기 넘치는 토지를 제압하고 그 한가운데를 일점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아이들이다!! 아이들이 여기 있다!!”
구조 요원의 부축을 받고 나오면서, 나는 각막에 신선한 바깥 풍경을 쐬어 주었다.
폭우는 기세를 잃지 않았고, 흘러내리는 진흙들은 여전히 광폭했다.
그러나 다닥다닥 도열한 착암기와 굴삭기들, 그리고 그보다 더 빼곡한 인부들의 인파는 그 이상으로 장관이었다.
일개 군단을 끌고 왔다고 해도 믿길 지경이다.
회장님, 돈지랄은 이렇게 하는 거군요. 역시 한 수 배웠습니다……. 그 와중에도 난 그런 감상을 품었다.
그로부터 15분 뒤에 2차 산사태가 덮쳐 와 숙소 일대를 완전히 초토화시켰음을, 나는 다음 날 전해 들었다.
왜 다음 날이냐면, 나오자마자 기절해 버렸기 때문이다.
* * *
병원 침대에 비스듬히 앉아, 나는 윤정희로부터 소식을 전해 들었다.
호사네.
학생회장한테서 보고도 다 받아보고.
“부상자는 좀 있는데, 실종 및 사망은 아무도 없어. 기적적이지.”
“숙소에 있던 애들은 상진이가 다 대피시켰다면서요?”
“그래. 근데 표정이 왜 그래?”
“놀라서요. 평소에 어벙해서 몰랐는데, 생각해 보니 걔 꽤 엘리트였죠.”
“당연한 소리를. 내가 그 정도로 사람 만들기까지 얼마나 걸렸는데.”
윤정희는 아직 사고 수습에 여념이 없는지 눈 밑이 퀭했다.
“어쨌든, 고생 많았어. 병원비 걱정은 말고 푹 쉬어. 학교 차원에서 유감 표명도 있을 거야.”
“유감 표명을 돈으로 해 줬으면 좋을 텐데요.”
“아마 진짜 그럴걸.”
“진짜요?”
“응, 숙소도 재단 부지였고. 안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니까. 심하게 피해 본 몇몇한테는 합의금 제안이 갈 거야.”
“오오…….”
“어쨌든 몸조리 잘하고. 간다.”
“몸조리는 그쪽이 하셔야 할 거 같은데요. 몰골만 보면 조난은 회장님이 당하신 거 같네요.”
“차라리 그랬으면 속은 편하겠네…….”
그녀는 표정만으로 비명을 지르며 병원 문을 나섰다.
그 뒤로 원장 선생님과 보육원 동생들도 내원했다.
물론 이 쌍노무 시끼들은 ‘남자는 알아서 잘 회복하쇼’라며 안면 도장만 찍고는 바로 배윤하에게 달려갔다.
그나마 원장 쌤이 잠깐 남아서 과일을 깎아 주셨다.
“……고생했네. 얘기 다 들었다. 네 덕에 윤하도 나머지들도 다 살아올 수 있었다면서.”
“구조요원들이 거의 다 했죠 뭐.”
“어쨌든 자랑스럽구나. 잘했다.”
[눈치]를 얻은 후 처음으로, 난 원장 선생님의 기색을 차분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동안은 그러지 못했다.
온통 거짓만 감지될 것 같아 일부러 읽지 않거나 대면 자체를 피해 온 것이다.
왜 그랬을까.
이토록이나, 진심이 가득했던 것을.
“선생님.”
“응?”
“저, 선생님한테 물어볼 게 있는데요.”
“물어봐 그럼.”
“지금은 말고 나중예요. 하지만 진짜 중요한 거니까…… 그땐 꼭 답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원장 선생님은 날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느리지만 흔쾌했다.
“기꺼이.”
그다음의 인상적인 방문자는 LS그룹의 이상용 과장이었다.
통화 너머의 이미지는 샤프한 도시 남자였는데, 만나고 보니 그냥 살집 두둑한 아저씨였다.
“최근에는 사무실 근무만 해서요. 살이 좀 쪘습니다.”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다들 아무 말 안 하고 눈으로 물어보더라고요. 경호팀이 뭐 이렇게 둔해 보이냐며.”
“으음, 그런 생각까진 안 했습니다.”
“후후.”
능글맞기까지 하고 말이지.
인상은 평범한 직장인1이지만, 난 저 인간이 아무렇지도 않게 내 폰을 해킹했다는 걸 잊지 않았다.
또 내 마음을 읽은 걸까, 그가 내게 스마트폰 하나를 건넸다.
“이왕 다 들킨 거, 그냥 저희가 드리는 걸 쓰시죠. 위성 전화기라 악천후에서 무전 기능으로 돌릴 필요도 없습니다. GPS 기능도 최고죠. 통신료는 저희가 부담하겠습니다.”
“……제 위치 추적 쉽게 하시려고요?”
“네.”
“지나치게 솔직해……!”
“이 판국에 숨길 거 뭐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건 강요가 아니라 호의입니다. 그 위성 전화는 LS그룹의 주요 임원들에게만 주어지는 ‘골든 뱃지’이기도 하지요.”
물론 거절할 이유 따윈 없다.
내 하찮은 사생활 따위야 마음껏 훔쳐보라지. 어차피 나도 그만큼 당신들한테서 빼먹을 테니까.
“감사히 받지요. 그리고 저번 일, 회장님께 감사했다고 전해 주세요. 제 목숨의 은인이십니다.”
“이런. 그건 힘들겠는데요.”
“네?”
“아직 회장님하고 직접 대면할 짬이 아니라서요. 상관을 통해 전해 드리긴 하겠습니다.”
그는 그렇게 너스레를 떨며 사라졌다.
스마트폰 안에는 그의 번호가 1번으로 저장돼 있었다.
마침내 혼자만의 시간이 찾아왔다.
나는 침대 밑의 박스를 무릎 위에 올려, 그 안의 옷가지와 개인 물품들을 거들떠 살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두 가지 물품을 꺼냈다.
하나는 반쯤 완성된 오카리나.
음각된 L.J.H라는 이니셜에 진흙이 끼어 있다.
수학여행 후반부의 사건들은 그야말로 초현실적인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무당과 이 LJH의 오카리나가 있었다.
부적과 이 오카리나의 인도가 없었다면 난 이 자리에 없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고맙다고 하고 치우기엔 난 좀 삐딱한 인간이었다.
내 안의 냉소적인 부분이 이렇게 의심했다.
-이토록이나 공교로운 사건의 나열이라니, 이 모든 걸 설계한 본인이 아니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닐까?
라고.
물론 근거 따윈 없다.
억측에 괜한 누명일 수도 있겠지.
그럼에도 이 일련의 일들을 헤치면서 내가 분명히 받은 인상들은 있었다. 이건 확실하다.
‘L.J.H. 당신 나한테 뭔가를 말하고 싶은 거지? 그렇지?’
그건 오카리나를 다 완성시키면 알 수 있는 일이겠지.
지금도 한층 강해진 방향감이 이 자그마한 악기로부터 전해져왔다. 언젠가 또 기회가 올 것이다.
난 그걸 다시 종이에 조심스럽게 싸서 박스에 돌려놓았다.
그리고 두 번째 물건을 꺼내 들었다.
메모리 카드.
배기섭의 카메라 안에 있던 메모리 카드다.
난 배윤하 모르게 이걸 빼돌렸다.
나중에 은근슬쩍 돌려놓을 생각이었지만, 공교롭게도 카메라가 통째로 사라짐으로써 얼떨결에 완전 범죄가 되고 말았다.
배기섭은 슬롯1의 메모리 카드에는 사진을 담고, 슬롯2의 메모리 카드에는 개인적인 데이터들을 담아 두는 버릇이 있었다.
이를테면 일기라든지.
그리고 난 어쩌면 배윤하가 그 습관을 따라 했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다.
나는 랩탑을 꺼내 메모리 카드를 삽입시켰다.
사진, 영상, 몇 가지 잡다한 파일 사이에, 메모장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배윤하]
나는 그것을 클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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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x월 xx일 월요일. 날씨 맑음.
오늘도 한열이가 다쳐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