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이 자꾸 늘어 79화>
10. 냉정과 열정 사이 - 30
===
[xx월 xx일 월요일. 날씨 맑음.]
오늘도 한열이가 다쳐서 돌아왔다.
무엇 때문에 다쳤느냐 물으니, “땅바닥이 솟아올라서 내 아구창을 후려 갈겼다.”고 했다.
넘어졌다는 말을 참 거창하게도 했다.
한열이는 대개 이런 식이었다. 그 아이에겐 단순한 게 복잡해지고 어려운 게 쉬워졌다.
난 좀 어렵고 복잡한 아이였으나, 그래서인지 한열이는 날 쉽게 다루어 냈다.
그의 손에서 난 한낱 평범한 아이가 됐다.
그게 좋았다.
그렇다고 귀찮은 성격인 게 고쳐지진 않아 나는 오늘도 틱틱 핀잔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마. 뭐야, 그게.”
내 대꾸를 완벽히 무시하며 “요즘 땅덩이가 사납다니까, 밤길 조심해.”라고 말하는 것도 다 이한열다웠다.
그의 뻔뻔함이 날 웃게 한다.
[수요일. 날씨 흐림]
종철이는 내가 싫은 거 같다.
떠들고 웃다가도 나만 보이면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맨날 같은 표정. 방에 돌아가서 ‘대배윤하경멸용필살표정’ 같은 걸 연습해 오는 것이다.
내가 지은 말이 아니다.
오늘 우연히 그의 일기를 보고 알게 됐다.
진짜 이런 애가 있구나 싶어서 신기했다.
가끔 심심할 때마다 종철이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그럼 연습했던 표정을 꺼내 주겠지.
좀 자동 자판기 같아서 재밌을지도.
[화요일. 날씨 맑음]
아직도 혼자 다니는 건 무섭다.
땅바닥이 솟아올라서 때린다는 한열이의 표현이 생각났다.
말은 안 했지만, 그 표현은 어쩐지 나를 안심시켰다.
왜인지 이제는 알 것 같다.
공감의 문제다. 그런 감각을 너도 아는구나 싶어서 반가움을 느낀 것이다.
그러니까, 그날 난 하늘과 땅이 내 몸을 굴려 대다 팽개쳤다고 느꼈다.
지금도 혼자일 때면 세상이 거꾸로 뒤집혀서 날 어딘가로 추락시킬 것만 같다.
이 세상은 어쩌면 가짜라서, 어느 순간 돌변해 악몽의 살결을 드러낼 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무섭다.
내가 있다는 게 무섭다.
땅이 내 발바닥을 만지작거리는 게 무섭다. 하늘이 내 머리를 내려다본다는 게 무섭다.
내가 있으니까 나는 아픈 것이다. 차라리 사라지면 좋을 텐데.
지나치게 무서운 날이면 난 도리어 그날을 떠올렸다.
그날 빗물과 함께 떠내려가서 바닷물 밑에 침수된 나를 상상했다.
거기서 나는 없고 물과 유영하는 고기와 플랑크톤 따위로 분해되어 영원히 평안…….
그만하자.
한열이를 생각했다.
솟아오른 땅과 진지하게 격투하는 아이를 생각했다.
그러면서 항상 “그놈이 내 콧잔등은 터뜨릴 수 있어도 날 굴복시킬 순 없지!”라며 너스레를 떠는 아이였다.
바보 같아.
하지만 바보는 가끔 최강이라, 그 아이와 있다 보면 어쩐지 땅도 하늘도 조금은 만만해 보였다. 세상은 견딜 만한 것이 되었다.
한열이의 손은 조금 서늘하고 가을 하늘의 냄새가 났지. 큼직하고 단단했다. 날 어디로든 데려다줄 수 있을 것 같은 손.
그 손 안에서 뛰어놀고 싶었다.
[금요일. 비.]
하루 종일 나가지 않았다.
[수요일. 흐림.]
고양이가 생겼다.
이름은 크리스티나라고 지었다.
단적으로 말하건대, 한열이와 종철이는 네이밍 센스가 저질이다.
사명감이 생겼다. 이런 센스의 남자애들이라면 호랑이 새끼처럼 강하게 키운답시고 절벽 밑에서 떨어뜨릴지도 몰라.
그러니 내가 분발해야 하는데.
잘할 수 있을까.
나 따위가.
막 의기소침해지려고 할 때, 뜬금없이 돌을 던져 대던 한열이의 등이 생각났다.
돌멩이들은 뭐 하나 맞추지 못하고 담장 밑에 툭툭 떨어졌다.
어미 고양이가 그걸 봤다면 비웃었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교활한 짐승도 그의 목소리만큼은 피하지 못할 것이다.
한 치의 의심 없이 직진하는 곧은 말. 적어도 내겐 그랬다.
신기하지.
한열이는 그런 아이였다.
세상이 할 일을 못 해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므로, 빚진 것은 우리가 아니라 이 세상이라고 그는 당당히 외쳤다.
우리가 주눅 들어 있으면, 채무자에게 주눅 드는 채권자 따윈 없다고 우리를 대신해 목청을 높였다.
그래서 그는 이곳 모두의 히어로이고 아빠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힘을 낼 기운을 얻을 수 있다.
[금요일. 이슬비.]
종철이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구경해도 되냐고 물어보니 역시나 ‘대배윤하경멸용필살표정’을 보여 주었다.
열심히 연습했구나. 예전보다 표정이 자연스러워 보여.
그러면서도 쫓아내지 않는 게 박종철답다.
크리스티나 그림이었다.
자길 그리는 걸 아는 건지 고양이는 신기하게도 얌전히 앉아 있다. 꼬리도 조심스럽게 턴다.
난 종철이가 그리 싫지 않다.
지켜보다 보니 알겠다. 얜 내가 미운 게 아니라 혼자인 게 무서운 거였다.
한열이가 나한테만 신경 쓰면서부터 요새는 혼자 다니게 됐으니까.
병을 핑계 삼아 독점적 지위를 누리는 게 옳은 일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난 그에게 항상 미안했다.
옆에 앉아 그림에 대해 이것저것을 물었다.
귀찮아하는 표정 연습은 못 한 모양이다.
그는 필살 표정을 유지한 채로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말을 하다 중간에 크리스티나의 작명을 두고 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갈등은 가일층 심화되었고, 고양이는 우릴 보며 권태롭게 하품을 했다.
크리스티나는 자기 이름에 관심이 없나 봐.
한열이는 오늘도 다쳐서 왔다.
[수요일. 폭우]
무서워.
무서워.
미안해 아빠.
난 아직도 벌을 받고 있는 거겠지?
[목요일. 맑음]
선생님에게서 예후가 좋다는 말과 함께 칭찬을 들었다.
발작과 의존증이 조금씩 완화되고 있다고 하셨다. 지금처럼만 하면 다 괜찮아질 거라 하셨다.
나도 그렇게 느낀다.
모든 게 다 잘될 것 같은 느낌.
한열이는 오늘도 다쳐서 왔다.
[화요일. 흐림]
요새 한열이가 자주 다쳐서 오는 이유를 알았다.
나 때문이었다.
아이들이 날 괴롭힌다는 걸 그도 알았던 거다.
사실 괴롭힘 자체는 아무래도 좋았다. 어느 정도는 수긍도 했다.
내 생각에도 난 짓밟아 보기에 꽤 매혹적인 조건을 지녔다.
원색을 뿌려도 탁하게 추락시키는 음침한 아이. 누구도 나 같은 도화지에는 그림 따위 그리고 싶지 않겠지.
세상이 맑고 밝다고 이해해 온 아이들에게 나는 외계에서 툭 떨어진 불가해의 덩어리일 것이다.
한 번씩 건드려 보고 싶겠지.
게다가 난 진짜 무서운 게 뭔지 정도는 안다. 그래서 아이들이 건드리는 건 무섭기는커녕 귀찮지도 않았다.
(걔들도 카메라는 안 건드린다. 건드리면 본인들이 귀찮아진다는 걸 경험으로 알거든.)
그런데 한열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날 괴롭혔던 아이들에게 일일이 찾아가 주의를 주곤 했던 모양이다.
말로 풀리지 않은 날이면 주먹이 오갔다.
대체 얼마나 많은 날들을 그래 왔을까.
이유 없이 “땅바닥에 후려 맞은”그 많은 나날들이 내 속에서 샘솟았다.
바보. 얼굴은 다 터진 주제에 웃지 좀 말라고. 괜찮다고 하지도 말고. 바보.
바보라니까.
진짜.
땅이 솟아서 사람을 때릴 리가 없잖아.
사람을 때리는 건 언제나 사람이었으니까. 난 왜 그동안 그걸 몰랐던 걸까.
[금요일. 비]
크리스티나가 죽었다.
비가 많이 와서 나는 나가 보지도 못했다.
슬프고.
한심하다.
[월요일. 맑음]
한열이가 오늘은 정말 심하게 다쳤다.
차라리 핏덩이었다.
그만한 피가 흘렀으니 그만큼 생명이 덜어졌을까 싶었다. 시체에 더 가까운 몸. 발버둥 같은 호흡들.
그래, 잠시 잊고 있었다. 인간의 목숨이란 이토록 사소하게 끝장나 버릴 수도 있는 것이었다.
한열이는 오래 입원해야만 했다.
원장 선생님은 드물게 화나셔서 고소를 하겠다고 하셨다.
난 죽지 말라고 열심히 울어재꼈다. 달리 말해 울기만 했다.
쇳덩이에 깔려 있던 그날과 달라진 게 하나 없었다. 비루할 만치 무력하고, 한심할 만큼 무능했다.
아니, 안 한 거지.
날 지키려던 사람들은 다 다치거나 죽었다.
아빠는 미련하게 내 옆에 있어서 죽은 걸지도 몰라.
크리스티나는 내 마음을 살펴 주다 정작 제 발밑은 살피지 못했다.
자, 봐.
한열이도 나 때문에 저렇게 다쳤다.
행여나 그가 죽기라도 한다면, 그게 정말로 땅이 솟은 게 사인이라 해도, 난 나를 용서하지 못할 것 같았다.
나와 함께 있다간 한열이는 천천히 죽어 갈 뿐이겠지.
그와 거리를 두기로 결심했다.
[수요일. 비]
강해져야만 한다는 생각에 나가서 비를 맞았다가 한열이 옆자리에 나란히 입원했다.
[목요일. 흐림]
생각해 보니, 나 스스로가 강해질 필요는 없었다.
그 계집애도 쓸 만한 어깨들을 불렀을 뿐 본인이 나서진 않았다. 재수 없지만 배울 건 배우자.
내 싸움은 권투 경기가 아니라 체스가 되어야 한다. 플레이어는 아무리 하수라도 직접 판 위에 올라가진 않는 법.
결론은 일목요연하다.
언제 어디서건, 상대방보다 내 손에 쥔 패가 더 많아야 한다.
양질의 체스 말이.
인맥을 쌓아야 한다.
[목요일. 맑음]
결국 한열이에게 절교를 통보받았다.
각오했지만, 생각보다 더 힘들다.
오늘은 아무것도 쓰고 싶지 않다.
[금요일. 흐림]
카메라 문제로 발작을 일으켰다. 평소라면 한열이가 와 주었겠지만 오늘 나는 혼자였다.
그리고 내 행위의 결과를 스스로 감당해야 했다.
그랬다. 말이 좀 이상하지만, 그동안 나는 ‘마음 놓고’ 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신을 잠시 외출시켰다가 귀가하면 모든 일은 해결되어 있었다.
오늘은 달랐다.
혐오 어린 시선. 연민과 경멸이 섞인 말소리.
그리고 한 덩이의 전염병이 되어 버린 몸뚱이가 여기에 있었다.
그동안은 누군가의 등에 가려지고, 품에 안기어, 잠시 잊고 있던 현실이 여기, 너무도 신랄한 형태로 엄존했다.
너는 저것을 마주하며 살아왔겠구나, 나 대신.
내가 여기서 무력하고 무능한 동안, 넌 너의 살과 가죽으로 저 날것의 난도질을 받아 왔겠구나.
시간이 지날수록 한열이의 빈자리를 느낀다.
그 빈자리를 더듬어 그의 온기를 떠올려 보았다.
앞으로는 계속 혼자일 테니 열심히 기억해 두어 야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
그 뒤로는 일기라기보다 일지나 리포트에 가까운 글들이 적혀 있다.
누구를 사귀었고, 누구를 사귀어야 하고, 누구와 가까워야 유리하고…….
그런 글들.
몇 년치의, 건조하고 차가운 기록들을, 나는 남김없이 읽었다.
===
[수요일, 맑음]
보육원 동생인 기정이가 오늘도 맞고 돌아왔다.
삼 일째다.
기정이는 알아서 한다고 했지만, 삼 일이면 남자의 자존심을 충분히 지켜 줬다고 생각한다.
[목요일. 맑음]
인맥을 돌려서 범인을 찾아냈다. 허일표. 걔가 다니는 태권도장 선배와는 꽤 깊은 친분이 있지.
그렇게 주먹을 좋아하는 아이니 똑같이 주먹을 선물해 줘야겠다.
…….
미나 표정이 좋지 못하다.
…….
종철이가 오늘은…….
…….
쌍둥이들이 또 사고를…….
[월요일. 비]
비가 많이 내려서 오늘은 차분히 방에 틀어박혀 글을 쓴다.
시끄러운 빗물.
차가운 밤.
오늘 같은 날이면, 배윤하라는 나약한 계집애가 등장한다.
울고불고 난리를 친다.
난 그 아이를 엄중히 타이르고 상냥하게 달래서 내 안에 다시 가둬 놓는다.
세상은 울보가 다녀도 좋을 만큼 만만하지 않으므로. 삶의 방식을 정한 그날, 난 너를 그저 마음의 얼룩으로 남겨 두기로 했다.
난 울타리가 될 것이다.
뛰어놀기에 넉넉한 한 뼘의 땅이 되어 줄 것이다.
저들의 방종한 시선과 무례한 말이 닿지 못하도록 내 살과 뼈로 두텁게 담장을 세워 두겠다.
한열이가 내게 그래 주었던 것처럼.
난 내 울타리 안의 아이들을 지키기로 결정했다.
괜찮아 아직은.
아직은 버틸 수 있어.
===
그래서 그 인맥을 그렇게 열심히 쌓아서 하는 일이란 게 고작 뒷바라지였던 거냐.
너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보태지 않고.
그렇게 미련하게.
===
[월요일. 비]
인맥을 넓게 쌓아서는 어쩔 수 없는 사람들도 있다.
김송헌.
짓밟기 좋은 곳에 있으니 짓밟는다는 놈들. 왜 이런 애들은 어디에나 있는 걸까. 왜 세상은 이런 아이들에게 아무 대가 없이 큰 힘을 허락해 주었을까.
어렵다.
더 높고, 힘 있는 패가 내게는 필요하다.
===
끝까지 다 읽고 메모리 카드를 얌전히 박스에 수납한다.
나는 링거를 줄줄 매달고 병원 복도를 거닐었다.
복도 어디쯤에 무심코 멈추니, 공교롭게도 병실 문 너머로 배윤하의 잠든 모습이 보였다.
녀석은 결정적으로 착각하고 있다.
난 네 생각만큼 훌륭한 놈이 아니다.
어릴 적 널 돌본 것은 그래야만 내가 우월해지기 때문이었다. 별 볼 일 없는 내게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 결과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했고.
난 네 히어로가 아니다.
결코 아니었어.
근데 넌 내게서 가짜인 것을 배워서 진짜가 되려 하는구나.
문득 어떤 충동이 꿈틀거렸다.
무척 뜬금없었다. 어떤 논리가 깃들어 비약해 버린 건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건 맥락의 양해를 구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내 의식을 차지했다.
마치 세상에 외따로이 놓인 천애고아처럼.
그랬다.
사람은 사랑으로 태어난다는데, 우리는 사랑 없이 단지 태어났을 뿐이라 우리가 사람임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여야만 했다.
난 충동이 지시한 대로 움직였다.
--
나 : 교수님. 최석현 씨의 유품, 제가 유가족에게 전달하겠습니다.
--
그래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
이용하 교수님 : 알겠네. 준비해 놓도록 하지.
--
* * *
“……고맙네. 떠넘기는 기분이라 착잡하기도 하고, 시원하기도 하고 그렇구먼.”
이용하 교수는 내게 박스 일체를 건네며 덧붙였다.
“수학이나 현실이나 똑같아. 자네도 알겠지만 증명되었다고 해서 영원한 진리는 아니지. 우리의 진리에 결함이 있음을 확인해 가는 것, 오히려 그것이 수학일세. 그러니까 답이 안 보인다는 건 좌절할 일은 아니야. 그건 당연하니까. 답이 있다고 믿는 자세야말로 수학자의 덕목인 게지. 결국 인간이란 삶이라는 미증명 문제를 평생에 걸쳐 풀어 나가는 자들 아니겠는가?”
그는 대뜸 그런 덕담을 건넸다.
난 그가 어떤 의미에서 그렇게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의 격려를 감사히 받아 두기로 하였다.
교수는 직접 건네러 가진 못했지만, 그들과 연락할 방법 정도는 수소문해 두었다.
돌아오는 길에, 그가 일러준 번호로 전화를 걸어 보았다.
다만.
“여보세요. 이연미 씨 되십니까?”
-……예, 그런데요?
“안녕하세요. 저는 최석현 씨의…….”
뚝-.
예상대로라면 예상대로일까.
일은 결코 순조롭지 않았다. 생각은 했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입맛이 썼다.
그러나 이럴 때의 대응도 생각해 두었다.
난 문자 하나를 남겼다.
-최석현 씨가 유가족에게 유산을 남겼습니다.
난 손으로 문자를 보내면서도, 마음으로는 내 행위가 수포로 돌아가기를 빌었다.
차라리 반응하지 마라.
무시해.
이미 당신들은 최악의 인간들이지만, 이 이상 가면 인류 바깥의 카테고리로 당신들을 추방해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게끔 해 줘. 제발, 사람으로 남아 줘.
안 그러면 최석현 씨가 너무 비참하잖아.
그러나 그들은 내 마지막 바람조차 존중해 주지 않았다.
[최석현 모친 이연미]
문자를 보내고 채 오 분이 지나지 않아 전화가 걸려왔다.
* * *
며칠 쉬겠다고 통보했으므로 등교할 필요는 없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학교에 있었다.
다만 교실로 가진 않았다.
나는 어째서인지 양호실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계세요?”
문은 열려 있었는데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창문도 반쯤 열려 있었으므로 양호실은 양쪽으로 개방된 상태였다.
따라서 고양이만큼이나 틈새를 좋아하는 바람이 환장하며 창틈에 달려들었다.
곧 양호실은 바람의 난장질에 온몸으로 진저리를 치게 되었다.
책상 위 펼쳐진 책이 몇 페이지 씩 뭉치로 휘날렸다.
책을 닫고.
마저 창문도 닫으려는 순간 나는 보았다.
엉덩이가 공중에 떠 있었다.
“……현지 쌤.”
“응.”
창문 밖 엉덩이가 대답했다.
이유 모를 경이로움을 느끼며 다시 말을 건넸다.
“거기서 왜 그러고 있으세요?”
“미안한데 집중해야 되니까 말 걸지 말아 줄래?”
“……아, 네.”
창문 대신 양호실 문을 닫아 바람을 의기소침하게 만들었다.
다시 돌아와도 엉덩이는 그 자리에 그대로 떠 있었다.
설명이 필요하겠군.
양호실은 2층이었고, 창문 가까이에는 튼실한 나무 한 그루가 팔을 드리웠다.
현지 쌤은 바로 그 나뭇가지에 네 발 짐승처럼 팔다리를 얹고 있었다. 위험하다고 경고하기엔 놀라울 만큼 안정적인 모습으로.
근데 내 눈높이와 그녀의 둔부 위치가 공교롭게도 수평을 이루고 있었다.
이대로 바라보고 있는 것도 실례여서 나는 의자에 앉았다.
더 위험해졌다.
왜 위험하냐면, 그녀는 정장 치마를 입고 있었고, 이 각도에선…….
그만.
그런 건 말해선 안 된다.
어쨌든, 그 말할 수 없는 볼드*트 같은 그것이 시선을 더 낮추면 진리의 편린을 볼 수 있다는 식으로 내 양심을 위협해 왔다.
다행히 내가 굴복하기 전에 풍경이 변했다.
그녀가 휙 뛰어서 가지 저편으로 쇄도했고, 동시에 자그마한 뭔가가 유연하게 몸을 뒤틀어 그녀를 피하더니 그대로 양호실 창문을 휙 넘어왔다.
그리고 내 품 안에 쏙 들어왔다.
그건-.
“고양이? 뭐야, 급식 타이거 13호잖아?”
야옹-.
“앗앗! 한열아! 걔 잡아 두고 있어!”
“……뭐. 잡을 것도 없는데요.”
13호는 얌전히 내 품 안에서 가르랑거리고 있었다.
현지 쌤이 고양이에 준하는 민첩함으로 되돌아와 양호실 바닥에 안착했다.
그녀의 눈이 반짝이며 선망의 빛을 뿜어냈다.
“오오. 오오오.”
“뭐, 뭡니까.”
“대단해! 고양이를 품에 안을 수 있다니!”
“……그런 건 아무나 다 하는 거 아닌가요?”
“아니라고!”
그녀답지 않게 버럭 화를 낸다.
“자, 잠깐만 잡고 있어 봐 내가 거기로……!”
그녀가 바싹 다가오자, 13호의 기색이 돌변하며 내 목덜미를 타고 정수리로 대피했다.
그러곤 전력으로 털을 세우며 하악질을 하는 것이다.
현지 쌤이 울상이 되어서 몇 걸음 물러서자, 그제야 13호는 그대로 내 정수리에 배를 깔고 앉았다.
경계 태세까지 풀진 않은 것 같다.
어쨌든 졸지에 13호의 둥지가 되어 버린 탓에 현지 쌤과는 양호실 끝과 끝으로 떨어져 있어야만 했다.
뭐야 이거. 대체 무슨 상황이야?
“……미안, 한열아.”
“미안하실 건 없는데요. 상황 설명 좀…….”
“내가 좀…… 이상할 정도로 동물들의 경계를 사는 타입이라. 그래서 평소엔 다가가고 싶어도 자제하는 편인데 말이야…….”
“근데요?”
“보니까 미노 옆구리에 길게 상처가 있더라고. 치료해 주지 않으면 안심이 안 돼서…….”
“미노? 이 13호요?”
정수리를 가리켰다.
“응. 머리에 점박이 소뿔 같잖아. 미노타우르스 줄여서 미노.”
“……아아. 이름 다 지어 두셨나 봐요.”
“잘 보이는 애들만? 저 아이는 그중에 특히 쇠약하고, 다리도 불편하고, 무리에서 괴롭힘도 당하는 듯해서 예의 주시하고 있었거든? 근데 어느 날 갑자기 다리가 나아 있는 거지 뭐야?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아, 이게 중요한 건 아니고. 어쨌든, 오늘 보니까 또 다쳐 있더라고. 놔두기엔 자꾸 눈에 잡혀서…….”
현지 쌤이 뭔가 안절부절못한 태도로 빠르게 말을 쏟아 냈다.
이렇게까지 흥분하신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라 좀 얼떨떨했다.
“음. 그러니까 얘를 치료해 주고 싶다는 거죠?”
“그렇지!”
“그럼 그러죠, 뭐.”
“……근데 내가 다가진 못하니까. 한열아 혹시 근처 동물병원에…….”
“여기서 하면 되죠, 뭐. 어려운 일도 아닌데.”
“내가 다가가질 못한다니까?”
“제가 하면 되죠.”
정수리에 눌러 앉게 생긴 13호를 책상 위에 조심히 내려놓았다.
확실히 옆구리 거죽이 파헤쳐져서 피와 털이 엉겨 있었다.
심하진 않아서 간단히 처치하면 될 것 같다.
“……쉽지 않을 텐데?”
“아, 모르시는구나. 얘 다리 고친 사람 접니다.”
“응?”
난 품에서 침통을 꺼냈다.
옆구리만이 아니라, 다시 살짝 꼬이기 시작한 다리도 점검해 줄 필요가 있었다.
그 외 군데군데 뭉친 근육들도 다 풀어 드릴 생각이었다.
신속하게 침을 꽂으니, 13호는 근육이 싹 사라진 것처럼 느물느물 풀어지더니 이내 고롱고롱 잠까지 들었다.
아주 상전이 따로 없네.
내가 탈지면을 꺼내 드레싱까지 깔끔하게 해내자 현지 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열이, 너 그런 것도 다 배웠니?”
“네.”
현대의학과 중의학을 섭렵한 천재 의사의 삶을 간접 체험한 몸이라 말이지.
재능은 침술에 집중돼 있지만, 간단한 거라면 [손재주]의 힘을 빌려 대충 다 할 수 있다.
“……와. 부러워.”
“드레싱 정도는 현지 쌤도 다 하시잖아요. 침술은, 뭐…….”
“아니. 그게 아니라. 난 걔들 손도 못 대거든. 가까이만 가면 다 자지러져서.”
“……하하. 뭐, 이상하게 동물이 안 따르는 사람들이 있죠.”
“근데 그거 알아?”
“예?”
“나 원래 수의사 되려고 했거든. 동물을 좋아해서. 근데…….”
그녀가 시무룩해져서 고개를 푹 숙였다.
와.
나 오늘처럼 현지 쌤의 안면근육이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건 처음 본다.
물론 평균에 비추자면 보통이겠다만, 평소 그녀를 생각한다면 저러다 경련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다.
“이 체질 때문에 보류했거든. 오랜만이라 될까 싶었는데 역시는 역시나네. 쳇.”
“포기가 아니라 보류인가요?”
“당연한 거 아니니?”
그녀야말로 당연하다는 투로 고개를 갸웃했다.
“내 꿈인 걸. 꿈을 어떻게 포기하니?”
“어쩔 수 없다면 포기할 수도 있잖아요. 다 그러고 사는 걸요.”
“글쎄. 내게 꿈이란 이루는 게 아니라 그냥 꾸는 것인 걸. 그 자체로 행복하고 복된 일이니까. 너는 안 그래?”
“……잘, 모르겠네요.”
“생각해 봐. 밥은 영양 섭취하려고 먹잖아. 궁극적으로는 배고픔을 제거하기 위해서지. 하지만 그게 전부인가? 점심 식사를 기다리면서 무슨 메뉴일지 고민하는 것까지 다 식사에 포함되는 게 아닐까? 그러니까. 음. 꿈이란 건 그런 거지. 알겠어?”
“더 모르게 됐는데요. 근데 왜 하필 비유가 밥이에요?”
“미노 잡으려고 뛰어다니다 점심을 걸렀거든. 배고파.”
“그럴 거 같았어요.”
그런가.
그녀처럼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녀에게 꿈이란 매일 점심 메뉴에 배반당하더라도 다음 날이면 다시 행복해지는 단기 기억 상실증 같은 것인가 보다.
그런 삶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뭔가 멍청해 보이는데…….
동시에 놀라울 정도로 포근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전생에 그녀처럼 말해 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내 삶이 바뀌었을까.
“선생님.”
“응?”
“저랑 거래 하나 하실래요?”
“뭔데?”
“제가 13호, 그러니까 미노 쓰다듬게 해 드릴 테니까…….”
“좋아!”
콧김으로 횃불도 끌 수 있을 것 같다.
“……뭔지 듣지도 않으시구요?”
“장기를 달라고 해도 드리겠어요.”
“각오가 무서워……!?”
나는 어이없이 웃으면서 13호에 꽂힌 침을 하나하나 제거했다.
방금 침법 구성은 고통을 완화하고 근육을 이완시키며, 마지막으로 깊은 수면을 유도하게끔 설계되었다.
지금은 호랑이가 와서 으르렁 거려도 깨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었다.
조심스럽게 손을 흔들어 부르니, 현지 쌤이 고장 난 로봇처럼 뻣뻣하게 접근했다.
지나치게 쭈뼛대기에 손목을 쥐고 완만히 이끌어 주었다.
그녀의 손이 천천히 13호의 털을 결대로 쓰다듬는다.
“……흑.”
“흑?”
그러더니 왕방울만 한 눈물덩이를 하나씩 떨어뜨리는 게 아닌가.
얼굴까지 와락 일그러뜨리면서.
고양이가 깨지 않게 입을 꽉 다물고 호흡을 억눌러서 흐느낌은 ‘끅끅’이라기보다 ‘꾸에꾸에’에 가깝게 들렸다.
“……어지간해서는 안 깨니까 숨까지 참으실 필요는 없어요.”
“흐어엉……. 살길 잘했어. 으어엉……. 부드러워……. 손을 가지고 태어나서 잘했어. 수고했어, 배아일 때의 나…….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어쨌든 훌륭해……. 흐어엉……. 고양이를 만지고 있다니……. 따듯하다고오…….”
감탄의 방향이 좀 이상했지만 어쨌든 좋아하니 다행이었다.
그녀는 10분 동안이나 지치지도 않고 쓰다듬었고 그 비슷한 시간 동안 눈물을 죽죽 뽑아냈다.
딱 10분 차에 화들짝 놀란 13호가 숲으로 돌아가자마자.
현지 쌤은 방금까지는 환상이었다는 태도로 태연해졌다.
뻔뻔하게까지 느껴질 정도다. 눈두덩이 2배로 부풀어 있지 않았다면 나도 깜빡 속았을지 모른다.
“음. 추한 모습을 보였네. 미안. 그리고 고마워, 한열아. 이제 장기를 드리면 될까요?”
“그런 거 필요 없다니까요. 그냥…….”
왜 학교에 와서 양호실을 들렀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내일 최석현의 모친을 만나러 가면서 제정신일 자신이 없었다. 아마 난 내 등을 떠밀어 줄 사람이 필요했던 거겠지.
그리고 오늘 대화를 나누면서 또 한 번 확신했다.
역시 그녀가 아니면 안 된다.
“내일 시간 좀 괜찮으신가요?”
이현지 쌤은 되물을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