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이 자꾸 늘어 80화>
10. 냉정과 열정 사이 - 31
* * *
“근데 한열아 너네 수학여행에서 사고 났었다면서? 자세한 건 학교에서 쉬쉬해서 잘 못 들었는데. 괜찮은 거야?”
약속 장소로 가는 길, 현지 쌤이 차를 운전하면서 입을 열었다.
쌤은 나와 헤어지고 바로 올라왔기 때문에 어떤 사고가 어떻게 일어났는지 잘 모르신다고 했다.
“예, 뭐. 비가 좀 많이 오긴 했죠.”
“그 정도는 뉴스에서 봤어. 깜짝 놀랐지 뭐야. 근데 깃털도 탈모 중인 망할 대머리 독수리 교장이 아무것도 안 말해 줘. 교무회의에서도 입단속하라고만 하고.”
호칭이 뭔가 또 늘어났다.
“비 내려서 산사태 나고 숙소가 파묻혔어요. 다친 사람은 몇 있는데 실종이나 사망자는 없다네요.”
지나치게 과격한 대답이었는지 현지 쌤이 입을 떡 벌렸다. 그리고 그 상태로 도착할 때까지 턱을 고정시켜 두셨다.
도착한 곳은 룸이 있는 전통 찻집.
연인들보다는 사업 논의로 격리된 장소가 필요한 이들이 찾는 곳이었다.
“턱 아파. 입을 다무는 걸 깜빡했어.”
“……그걸 깜빡할 수도 있나요.”
“난 가끔 그래. 어쨌든 근처에 있을게. 얼마나 걸리니?”
“음, 빠르면 이십여 분. 늦어도 삼사십 분이요.”
“알았어. 잘하고 와.”
예약해 둔 룸에 들어가 세팅까지 하고 나니 약속 시간이 근접해 왔다.
짧은 여분의 시간, 나는 만남에 필요한 정보들을 머릿속에 되새김했다.
이름 이연미. 최석현의 모친. 남편과는 소송 끝에 이혼을 했으며, 남편 최기영 씨는 취중에 겨울 거리를 걷다가 사망했다.
정확한 사인이 실족으로 인한 뇌출혈인지 아니면 저체온증인지는 불명확했다.
두 요인 모두 엇비슷한 시간대에 그의 목숨을 끝장냈기 때문이다.
참으로 쓰레기다운 최후였다.
이연미 씨는 몇 년 후 재혼, 현재는 사업을 하는 남편 밑에 두 딸을 두고 주부로서 평범하게 살고 있었다.
그리고 최석현의 유산.
이게 규모가 꽤 된다.
그는 딱히 취미도 없었으므로, 대학 교수의 연봉 몇 년치가 고스란히 복리로 저축되었다.
거기다 주가 변동을 수학적으로 예측해 보려는 시도 속에서 주식으로 불린 돈은 그 이상이었다.
물론 나중엔 뉴튼과 같은 결론을 내며 그만두었지만.
어쨌든 한 인간의 변덕을 부추기기에는 충분한 액수였다.
그때 문이 드륵 열리면서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중년 여성이 등장했다.
다소곳이 고개를 숙인다.
“안녕하세요. 전화하셨던…….”
“……예, 들어오시죠.”
여자는 차분하면서 불안해 보였다.
살얼음이 낀 유리창 같았다.
멀찍이 보면 그저 투명할 뿐이지만 가만 보면 떨어지는 낙엽에도 베일 듯했다.
그리고 단아한 품위를 여전히 간직한 미인이었다. 그러니까 두 번째 결혼도 가능했겠지만.
“몇 가지, 분명히 해 둬야 할 게 있습니다. 우선 최석현 씨가 당신들에게 직접 남긴 유산은 없습니다.”
“……그게 무슨. 전화로 들은 말과는 다른…….”
“끝까지 들으세요. 최석현 씨는 후견인이자 법적 보호인인 이용하 씨에게 모든 유산의 처분을 맡겼습니다. 당신도 그걸 알았으니까 장례식에도 안 간 거겠죠? 다만, 그는 유언으로 개인적인 부탁을 남겼습니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일이 그 유언의 집행임을 유념해 주세요.”
“유언장에 쓰여 있으면 그게 곧 상속 아닌가요?”
“말했잖습니까. 개인적인 부탁이라고. 좀 꼬여 있긴 한데 법적으로는 상속보다 증여에 가까울 겁니다. 그러니까 소송으로 어떻게 찾으려 할 생각 마세요. 불가능하니까.”
내가 눈을 쨍그리자, 이연미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대체 그 부탁이란 건…….”
“제가 드리는 지시에 성실히 응해 주세요. 10분이면 됩니다. 그래 주신다면 최석현 씨의 유산은 고스란히 당신의 것이 될 겁니다.”
“너무 어려운 것은…….”
“일 자체는 간단합니다. 제가 지금부터 드리는 말씀을 ‘잘’ 들어주세요. 그게 전부입니다.”
“예?”
“한국말을 이해할 줄 알고 청각장애가 없다면 아무 문제없지요?”
“……정말 그거면 되나요? 어떤 담보라든가, 조건이라든가…….”
“그런 건 없습니다.”
“쉬, 쉽네요.”
“그 쉬운 걸 당신들은 평생토록 안 했잖아.”
“……예?”
마지막 말은 작게 웅얼거렸을 뿐인데 어떻게 알아듣고 화들짝 놀란다.
과연.
낭떠러지 목전에서의 한 걸음과 평지에서의 한 걸음은 전혀 다른 민감성으로 다가올 테지.
그녀가 예민한 건 천성이 위태로운 사람이기 때문이리라.
나로선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으므로 모른 척 넘어갔다.
“시작하도록 하지요.”
난 박스에서 유품을 하나씩 꺼냈다.
사실 첫 번째 것은 유품이 맞긴 하나, 미국에서 건너오고 이용하 교수가 건네준 다른 유품들과는 종류를 달리한다.
이건 지금은 내거다.
그리고 중고장터에서 손쉽게 구했다.
난 최석현의 ‘수학의 정석’을 탁상 위에 올려놓았다.
“석현 씨는 이 책을 참 좋아했죠. 문제 풀이가 필요해서 책을 펼쳤다기보다, 이 책만이 뛰어 놀 수 있는 유일한 놀이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보통 아이들은 널뛰듯이 흥밋거리를 바꾸고 그게 보통일 테죠. 하지만 그는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난 혀를 매끄럽게 굴리면서 그녀의 표정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는 특별했죠. 경주마들에게 눈가리개를 해 주지요? 시야를 제한하는 겁니다. 목적지만을 보고 집중해서 뛸 수 있도록요. 그는 선천적으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넓게 볼 수는 없지만 아주 멀리 볼 수 있는 사람. 그걸 누군가는 재능이라 할 것이고 누군가는 천형이라 하겠지요. 당신은 어느 쪽이었습니까?”
그녀는 무표정했다.
하지만 근심하지 않아도 좋다.
난 이 분야의 스페셜리스트다. 내 주변에 표정 장인들이 즐비하거든.
그러니까 당신의 안면 근육들이 다소 무능해 표현에 서툴지라도 난 다 알아볼 수 있었다.
당신이 당혹스러워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다는 사실 정도는.
“감사합니다. 얼굴로 대답해 주셨군요. 인정합니다. 물론 사람으로서는 약점이었겠죠. 누군가 그에게 넓게 보는 법을 가르쳐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걸 제때 가르친 사람은 없었고, 그는 오랫동안 멀리보고 달리기만 하다 결승점을 아예 지나치고야 말았습니다. 그 결승점이 뭔지는 굳이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이젠 안색도 창백해졌다.
물론 그 얼굴에서 시퍼런색이 빠지고 그림자마저 사라지더라도, 봐주지는 않겠다.
“이삿짐이 부담스러우셨나 봅니다. 책 종류를 한꺼번에 다 파셨던 모양이에요. 이 소중한 게 중고장터에나 돌아다니고 말입니다. 덕분에 저로선 도움을 받았으니, 뭐랄까요, 세상에는 행운과 불행의 대류 작용이라도 벌어지는 걸까요? 어쨌든, 감사합니다.”
난 수학의 정석을 수거해 가방에 넣었다. 이건 유품이 아니므로 넘길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괜찮다.
박스에서 꺼낼 것은 아직 차고 넘쳤다.
“서론이 길었군요.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요? 자, 이건 뭘까요. 오, ‘Curry&Cary’ 음식점 쿠폰들이군요. 이 많은 걸 다 모았어요. 이거면 4인 식구 세트를 시켜서 즐길 수 있겠네요. 좋으시겠어요. 안 그래도 지금 가족이 딱 네 분이죠? 재혼한 남편. 그 슬하에 딸이 둘. 단란하네요. 물론 미국까지 날아가셔야 쓸 수 있겠지만.”
“……그런 건, 상속과는 아무 상관없잖아요. 아니, 근데 제 뒷조사라도 한 건가요?”
“뭘 대단한 사람이라고 뒷조사까지. 뭐, 엄밀히 말해 별상관은 없죠. 근데 그거 아세요?”
“…….”
“여기가 스탠퍼드 시 음식점 중에 한국식 카레 맛에 가장 근접했거든요. 그래서 자주 이용했죠. 죽기 일주일 전까지도. 마지막 날에는, 쿠폰을 다 모으고 싶었던지 안 먹을 음식까지 시켰어요. 왜 그랬을 거 같아요?”
“……난.”
“음식 솜씨 없는 당신도 카레는 제법 괜찮았으니까. 그래서 석현 씨는 맛있게 먹었고 당신은 웃었지. 그가 기억한 건 카레 맛이 아니라 당신의 미소였어.”
표정이 깨졌다.
벌써부터 그러면 안 되지.
아무렴. 멋대로 망가지는 거야 자유지만 좀 페이스 조절을 하시길 바란다.
나중 가서 더 깨질 게 없으면 내가 재미가 없잖아.
“다음으로 넘어가죠.”
박스는 계속해서 최석현의 인생을 토해 냈다.
만년필.
얼마 쓰지 못한 일기장.
물이 차서 액정이 보이지도 않는 삐삐 디지털 손목시계.
다만 시간 순으로 정리되어 있지도 않고, 맥락도 없이 툭툭 튀어나오는 스토리들은 분명 최석현의 인생답지는 않았다.
자폐증의 여파 때문인지, 그는 일관되고 직선적인 삶을 선호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구불구불하고 뜬금없는 흔적도 분명 그의 일부였으며, 전부 다 가족과 연관되었다는 점에서 역시 일관됐다.
그러나 난 설명을 완전히 끝맺지 못했다.
“……그만하죠.”
“이제 다……. 다 하신 건가요? 그럼…….”
“예, 유산 상속 건은 없던 일로 하죠. 수고 많으셨습니다.”
“예?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뭔가 문제라도.”
“다 들으면 된다고 했잖아요! 왜 자꾸 말을……!”
파랗게 질려 있던 얼굴은 어느새 안색을 되찾고, 이제는 불그스름한 울화까지 머금었다.
난 픽 웃었다.
“화내시네요.”
“……그럼 내가 화를 안 내게 생겼어요?”
“이거 봐. 내 조건도 제대로 안 들었네. 분명 내 조건은 ‘잘’ 듣는 거였습니다. 근데 아주머니, 중간부터 안 듣고 딴생각했죠?”
“……그걸, 어, 어떻……!”
화들짝 놀란다.
어떻게 알기는.
안색이 회복되다 못해 아까부턴 동공까지 아예 풀고 있더만.
“그 쉬운 걸 못할 리는 없으니 당신의 의지 부족이라고밖에 안 보이는데요. 이렇게 성의 없는 대접을 받아도 될 만큼 최석현 씨의 인생이 허투루는 아니었습니다. 아시겠어요?”
“……들었어요. 듣고 있었다구요.”
“그래요? 그럼 이건 뭐죠? 이 유품은 어떤 내력이 있습니까?”
“…….”
“거봐요. 모르잖아.”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두 손으로 무릎을 움켜쥐며 치맛주름을 역동적으로 구겨 냈다.
파도가 거칠다. 아마 그녀의 심사도 그 비슷하게 구겨져 있겠지.
그러든 말든.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그녀가 빽 외쳤다. 아마 입에서 시꺼먼 종양 같은 게 튀어나오지 않았을까.
“……나한테, 나한테 대체 왜 이러는 건데?!”
“뭘 말입니까?”
“왜 다들 나한테만 그래……. 왜. 나, 나도 힘들었다고……! 시댁에서는 장애아 낳았으니 둘째도 장애아일 거라고 하고……. 다 내 탓이라고……. 아이 아빠는 그걸 핑계로 나돌고! 보란 듯이 바람피우는데! 내가 거기서 뭘! 더 어떻게 했어야 하는데……!!”
이제는 피해 의식에 자기 연민인가.
너무 뻔해서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왜 이자들은 항상 이런 식일까.
버림받은 아이들은 제각각의 방식으로 크는데, 정작 버린 자들을 보면 하나같이 모양새가 비슷했다.
난 의자 등받침에 몸을 느슨하게 기댔다.
두꺼운 말이 좀 더 쉽게 목구멍을 돌파할 수 있도록.
“현재 남편 분께선 자상하시죠? 아이들도 ‘아직은’ 예쁘고. 사업도 꽤 잘나가셨던 걸로 아는데. 근데 요새는 영…… 아닌가 봐요?”
“……지금 그게 무슨……!”
품 안에서 통장을 꺼내 앞뒤로 흔들었다.
“그래서 내가 돈 준다니까 냅다 쫓아온 거 아닙니까. 사업이 위기에 몰리고, 슬슬 부도 얘기도 나오고, 집안 분위기 개판이고……. 아아, 이번엔 잘 버티나 싶었겠지. 지금처럼 이상적인 가정은 찾기 힘든데 말이야.”
“……그래요. 그게 뭐 잘못됐습니까?”
“아니, 그냥 궁금해서.”
“대체 뭐가…….”
“딸들, 이번에도 버릴 거예요?”
“무, 머, 무, 무슨……?!”
픽 웃으며 다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시선을 송곳처럼 세워서 그녀의 미간을 찔렀다.
“그렇잖아. 당신은 열심히 잘 기르고 싶었는데, 주변이 안 도와줘서 버릴 수밖에 없었다면서. 사업 망하고 남편이 방황하면, 딸들도 덩달아 말썽 부리고, 그래서 아이고 나 죽겠다 싶으면, 이번에도 또 버리겠네? 상황이 비협조적이니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리고 석현이도 버린 건 아니야!! 난 그저…….”
“그래, 정부 지원 영재개발사업. 나도 알아요. 근데 당신, 매달 나오는 돈은 받고 면회는 한 번도 안 갔잖아. 스탠포드에 스카웃되니 이때다 싶어 이사 가고 번호까지 바꿨지.”
“…….”
“직접 손 끌고 고아원 앞에 갖다 놓은 게 아니니 버리지 않았다고? 에이 양심 없는 인간아. 당신이 최석현을 몇 년이나마 데리고 살았던 이유? 간단하지. ‘아이 버린 엄마’라는 사회적 멍에를 짊어지기 싫었기 때문이야……!”
“아니야!! 아니라고!!”
“근데 그걸 최석현이 몰랐을까? 속도 모르겠고 말도 제대로 안 하니까, 다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천만에. 안다고. 아이들은 다 느낀다고. 자세히 몰라도 상황이 거지같다는 건 아이들이 더 잘 알아……!”
진정하자.
싸우러 온 게 아니니까 괜히 나까지 언성 높일 이유는 없어. 차분하게. 할 말만 건네고 빠지는 거야.
하지만.
그래도 이 한마디는 꼭 해야겠다.
“석현 씨를 보내기 훨씬 전부터, 당신은 이미 그를 버린 지 오래였다고.”
그녀는 결국 무너졌다.
짐승 같은 울부짖음.
그리고 그녀는 울부짖음을 언어로 뭉쳐서, 남편과 남편을 만든 시댁과 시댁을 성립케 하는 사회와 사회를 구성하는 인간 문명을 전방위적으로 비난했다.
그야말로 우주 전반이 원망의 대상이 됐다.
우주도 과연 억울했는지 가장 만만한 놈을 희생양 삼아 비난에서 벗어났다.
요컨대 어느 순간부터 이연미의 타깃은 나로 고정됐다.
현명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녀는 내 손에 통장이 있다는 이유로 입을 다물고 쏘아보기만 했으니까.
저주와 비난을 동공에 깡그린 맹렬한 시선이었다.
“차라리 그런 눈인 게 좋겠군요. 집중은 잘하실 테니까. 계속 하도록 하지요.”
물론 난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건 ‘푸엥카레 추측’ 연구일지입니다. 수백 페이지는 되죠? 최석현 씨는 이걸 연구하기 위해 안락한 안식도, 좀 더 늘릴 수 있던 수명도 포기했습니다. 왜 그런 짓을 했을까요?”
“…….”
“인정받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대상은 수학자들이 아니에요. 언론도 아니죠. 바로 당신입니다. 발상이 천재적이랄지 유아적이랄지. 세상 모두가 자신을 보게 만들면 당신도 자신을 보리라고 생각한 거죠.”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내, 내가, 그렇게……. 그 아이가 날 그렇게까지…….”
“아이에게 부모는 세상 전부입니다. 세상에게 홀대받는 느낌이야 모두가 받지만 그렇다고 세상을 저버리는 사람은 얼마 없죠. 모든 인간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직진하다가 결국 요람으로 돌아오는 법입니다.”
나는 탁자 위에 통장을 내려놓고, 탁자를 가로질러 쓱 밀었다.
“이제 당신 것입니다. 부탁하건대, 이번엔, 제발, 버리지 마십시오.”
진심이었다.
솔직히 응징의 유혹이 없던 건 아니다. 그러지 않은 건 지금 내가 최석현의 대리인으로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궁금증.
이연미는 저 통장을 바로 남편에게 건네 사업에 보태게 할까, 아니면 숨기고 ‘자신’의 미래를 위해 남겨 둘까.
전자라면 최석현이 만족할 것이다.
후자라면 내가 만족하겠지.
결국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하고 구렁텅이에 남을 테니까.
물론 거기까지 내가 알 바는 아니었다.
나는 그녀를 두고 찻집을 나섰다.
룸의 문이 뒤로 닫히기 전에 자지러지는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가, 문이 닫히면서 깨끗이 사라졌다.
이집 정말로 방음이 좋구나.
애용해야겠어.
선생님에게 다 끝났다고 문자를 보낸 뒤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거리는 덜 아문 상처처럼 대지에 놓여 있었다.
땅을 헤집고 짓이겨서 만든 반듯함일 테니 저 밑에는 고름이 고여 있으리라. 도시의 신음 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다.
나는 주저앉았다.
얼마 걷지도 못하고.
밑바닥 없는 구멍에 빠진 듯도, 온몸이 아스팔트길에 접착된 듯도 하였다.
난 꼼짝없이 중력이 변덕을 부린 이유를 탐구했다. 실패했다. 두개골에 고압력 펌프를 쑤셔 박아 물을 분사해 대는 것만 같았다.
아니라면 눈에서 이렇게나 물이 쏟아져 나올 이유가 없다.
“……빌어먹을…….”
최석현.
당신은 실패했어.
실패했다고.
그녀가 기다린 건 네가 아니라 네 돈이었어. 무슨 말로 치장을 하든 그 사실이 바뀌진 않아.
당신은 굳이 이런 짓을 자초해서, 알고 있던 개 같은 진실을 그냥 확인한 것뿐이야.
그래서 뭐. 그게 당신한테 무슨 도움이 되는데…….
없잖아.
대체 여기 어디에 구원이 있다는 거야.
--
[수리적 통찰력] : 고마워. 울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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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량의 카르마가 들어왔지만 즐거운 기분은 전혀 들지 않았다.
당신은 바보다.
정말로…….
“한열아!!”
어느새 다가온 현지 쌤이 날 부축하고 일으켰다. 난 몇 번의 헛발질을 일으키고야 간신히 그녀에게 기댈 수 있었다.
벤치에 앉고도 숨이 헐떡거렸다. 어딘가 구멍이라도 뚫렸나. 숨을 스스로 가누려고 한참 사투를 벌이고 있는데, 얼굴이 어딘가에 착 안착됐다.
뭔가와 부드럽게 도킹된 느낌.
그 의외의 감각이 내 안의 복잡한 것들에 제동을 걸었다. 두뇌가 순백으로 리프레시 됐다.
“쌤.”
“응.”
“뭔가…… 닿고 있습니다만. 뺨하고 코하고, 막, 이것저것이.”
“내 가슴이야.”
“……살려 주세요.”
“왜?”
“과부하로 막 터질지도 몰라요. 심장이라든지. 뇌혈관계라든지.”
“무서운 말을 다 하네.”
그녀는 살해 의지를 멈추지 않았다.
더 파묻혔다.
부드러운 손길이 내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이걸로 저번 보수는 지불한 거다?”
“무슨 보수요?”
“무릎베개하고 머리 쓰다듬기.”
“여긴 무릎이 아닌뎁쇼.”
“옵션 업그레이드.”
“엌. 개꿀.”
그녀가 쿡쿡 웃었다.
웃음의 진동이 물결처럼 뺨에 전달됐다.
난 그녀의 웃는 얼굴을 못 봤다는 비탄과 봤다간 이 감각을 놓쳤으리라는 안도를 동시에 느꼈다.
복잡하고 부드럽고 아무튼 그런 기분.
“이제 좀 진정이 됐니?”
“……예, 감사해요.”
“이럴 거 같아서 같이 오자고 한 거구나?”
“부정하진 않을 게요.”
“무슨 일인지는 안 말해 줄 거야?”
“……음.”
무엇부터 말할까 하다가, 그냥 말할 수 있는 부분만 에둘러 말하기로 했다.
“……그냥, 제가 부끄러워서요.”
“그래?”
“예.”
오랫동안 무시하고 있던 최석현의 퀘스트를 왜 갑자기 수행했는지, 이제는 알 것 같다.
동시에 왜 그동안은 무시하고 있었는지도.
내가 저자들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내가 지금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내 일신의 안전을 위해 부잣집에 입양되어야 한다고? 그래야 깡패들 손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고?
곰곰이 따져 보면 이렇게 허술한 논리가 있을 수 없다.
내 능력이라면 더 빠르고 치명적인 방법을 몇 개든 떠올릴 수 있을 거다.
어쩌면 조직을 완전히 붕괴시킬 법도.
그런데 왜 하필 입양이라는 번거롭고 수동적인 방법을 떠올리고 그게 유일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가.
답은 간단.
부럽고.
무서웠으니까.
그래.
회귀 첫날에 난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난 17살의 몸에 들어온 45세의 영혼이 아니다.
45년간의 패배의 기억을 머리에 쑤셔 박은 17살 꼬맹이였다.
갑자기 비대해진 17세의 영혼, 그 사이 튼살에 새까만 감정들이 스몄다.
조직에 대한 뼛속 깊은 공포와 배윤하를 경멸하면서도 부러워하는 마음이 결합됐다.
그게 입양으로 탈출한다는 결론을 이끌어 냈다. 내 자가 심리 분석 결과는 그랬다.
난 나 자신의 그런 추한 모습을 직면해야만 했다.
그리고 최석현의 부모는 훌륭한 반면교사가 되어 주었고.
이제 난 내 심장 소리가 부끄러웠다.
“이래서 저렇다. 저래서 이렇다. 핑계를 대 가면서 가족을 버리는 것들을 저는 혐오했어요. 근데…….”
어느 순간 나 자신이 그러고 있던 거다.
어차피 이기지 못할 거라고 45살이 이성으로 속삭이고, 그럼 그냥 뺏어 버리고 튀자고 17살이 감성으로 조잘댔다.
이 웃기지도 않는 콜라보는 내 뒤통수를 스스로 후려 갈겨서야만 멈출 수 있는 것이었다.
“대단하네. 용감하고.”
“예?”
“자신이 잘못됐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거든.”
“……아니요. 전 하나도 용감하지 않아요.”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게 용감한 거야.”
“…….”
큰일이네.
아까와는 다른 이유로 울어 버릴 것 같아.
그랬다간 선생님의 흉부가 엄청나게 되어 버릴 것이므로 난 필사적으로 참아 냈다.
“전 지킬 겁니다. 제자리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덤비는 놈들은 박살 내고, 음, 안 덤비는 놈들도 다 박살 낼 겁니다.”
그래서 내 가족들에게 찾아올 비극의 미래를 모조리 막아 버릴 것이다.
내 손으로 직접.
도망 따윈 치지 않아.
그때 선생님이 의미심장하게 입을 여셨다.
“한열아.”
“네.”
“다 좋은데, 멋진 말은 좀 멋있게 해야 하지 않을까?”
“…….”
생각해 보니 여전히 난 말캉한 어딘가에 내 안면을 처박고 있었다.
위엄 따윈 있다가도 푸시식 빠질 것 같은 포즈였다.
내 각오까지 말캉해지는 느낌이라 재빨리 자세를 바로 했다.
“큼흠. 각오를 다시 다져야 할까요?”
“그것도 좀 모양 빠지지 않을까?”
“……그것도 그러네요.”
우린 서로를 잠깐 보았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피식 웃었다.
“쌤. 저 응원 한마디만 해 주세요.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안 되지.”
“에엑. 분위기 좋다가 또 왜요.”
“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응원해 주니? 우주의 절반을 없애려고 드래곤볼을 모으러 다니겠다는 각오일 수도 있잖아.”
“뭔가 섞인 그 설정은 뭐죠.”
“그러니까 질문은 내 쪽에서 해야지. 네가 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는 일인지. 진지하게 가능성을 따져 보라고 말이야. 어때?”
고민은 3초면 됐다.
“네, 할 수 있습니다.”
“그럼 됐네?”
“어, 그러네요.”
“그래, 그러니까 이제 말해 줄게.”
그때 그녀가 기습적으로 내 정수리를 몰캉몰캉 만지작거렸다.
“넌 잘할 수 있을 거야.”
감사한 말이었다.
그러나 이때 내가 정수리와 안면의 감촉을 장기 기억에 때려 박기 위해 [암기력]을 최대치로 발휘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영원한 비밀로 남겨 두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