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이 자꾸 늘어 85화>
11. 반격 - 4
* * *
요즘 내 하루 루틴은 꽤 단순하다.
우선 정오가 되기 전, 담임에게 일신상의 이유로 수업이 불가함을 간곡한 어조로 희구한다.
“조퇴요.”
“……이번엔 또 무슨 사유로?”
“음. 대충 세계 경제 시장에 대한 염려로 앓아누웠다고 해 둘까요.”
“미친놈아.”
남 말할 처지가 아닐 텐데.
사실 고윤숙도 창의력은 빵점이라, 현재 생활기록부상의 나는 살아 있는 게 경이로운 수준의 걸어 다니는 종합병동이 되어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맹장 수술 이틀 뒤에 식중독으로 조퇴라는 설정은 너무하지 않는가.
분명 이 여자는 숙제 베끼다가 이름까지 베껴 버리는 타입의 인간임이 분명하다.
“……진짜 그렇게 써 버릴 테다.”
“맘대로 하세요.”
조퇴한 뒤에는 체육관으로 출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빡세게 운동하는 일에는 회의적이었다.
운동보단 재능 빨로 노력 대비 최고 효율을 뽑아내는 게 아무래도 현명해 보였으니까.
근데 깡패들이랑 직접 부딪치다 보니 이거 아무래도 한계가 있다.
한 번은 상대 맷집이 상상 이상이라 요대술이 안 먹혔던 적도 있었지.
동물 마취제를 부무장으로 지참하지 않았다면 진짜 곤혹을 치렀을 것이다.
아찔한 순간을 겪고 나니 생각이 바뀌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대처할 수 있도록 기본적인 스펙업이 필요하다고.
그게 체육관을 나오는 첫 번째 이유.
“어머, 한열이 왔니?”
“네에, 안녕하세요. 누나.”
프론트의 여직원이 사근하게 웃으며 반겨 준다.
피트니스 센터가 아님에도 접수원이 있는 이유는, 선수 양성보다 다이어트 복싱이나 에어로빅 쪽으로 노선을 틀었기 때문이다.
한때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를 배출했던 곳이었지만 그 사실이 월세를 삭감시켜 주진 않으니까.
자본주의는 냉엄했다.
“오늘은 좀 늦었네? 안 그래도 아줌마들이 난리였어. 너 안 오냐고. 세 번이나 물으러 왔다니까.”
“에이 농담도.”
“진짜라니깐.”
이게 내가 이 체육관에 출근하는 두 번째 이유다.
아줌마들 관심 받는 게 좋아서냐고? 당연히 아니다.
처음 이 체육관에 와서 관장과 면담할 때의 일이었다.
-전 대회 나갈 생각도 없고, 운동에 오랜 시간을 할애할 수도 없지만, 체육관에 있을 때만큼은 프로 수준의 훈련과 교육을 받고 싶습니다.
그것이 당시 내 요구.
난 ‘애송이놈, 어딜 복싱을 우습게 보고!’라는 식의 소년 만화적 전개를 기대하고 그 대응을 준비했지만, 여기 관장은 내 예상을 뛰어넘고 대뜸 이런 제안을 날렸다.
-자네 우리 체육관 간판 모델 해 볼 생각 없나? 해 준다면 체육관 무료 사용은 물론이거니와 내가 직접 붙어서 지도까지 해 주지. 물론 모델비는 따로 계산. 어때?
때마침 [부처핸섬]의 훈풍을 타고 외모가 일취월장하는 중이었고 키도 170 후반 대에 진입한 시점이었다.
당시 관장은 내 선수로서의 역량 따위엔 아예 관심이 없고 철저히 외모만 보고 날 발탁했다.
-한국 복싱은 사양세야. 이젠 못생긴 챔피언보다 잘생긴 몸짱이 사람들을 불러들인다고. 음. 생긴 게 적당히 가냘픈 것이 여성 회원 모집에 특히 효과가 좋겠군.
챔피언 키우다 지루해진 나머지 어디서 MBA 학위라도 따오신 모양이었다.
잘 보면 동공에서 ₩기호가 발견될지도 몰랐다.
어쨌든 내겐 나쁠 거 없는 제안.
난 내친김에 조건 하나를 더 걸었다.
-그럼 저것들, 만질 수 있게 해 주세요.
나름 담백하게 제안했다 생각했는데, 과연 딱지 쳐서 금메달 딴 게 아닌지 관장의 눈치와 수완이 보통이 아니었다.
-모델 계약 기간 중 한 달에 하나씩. 어때?
-……관장님 장사 잘하시네요.
어쨌든 그런 이유로 난 ‘이정철 체육관’의 간판 모델로 일주일에 세 번은 출근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효과는 발군이었다.
누님에서부터 아주머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여인들이 와르르 몰려들어 입관신청을 해 왔다.
-유투브에 네 영상 올렸거든. ‘얼짱 신참 복서 복근 노출’로.
-그거 몰카 아닙니까? 그런 거 허락한 기억이 없는데요.
-모델 계약서 약관에 있음.
-……젠장. 좀 더 자세히 볼걸. 이거 글자가 왜 이렇게 깨알 같아요!? 당연히 못 보지 이런 건!!
-실전은 존만이야 인생아!! 크하하핫!
어쨌든 그녀들은 다이어트 복싱을 빙자한 관음을 당당히 행사하기 시작했다.
마치 나는 돈을 냈으니 볼 자격이 있다는 식으로 구는 것이다. 분명 그러라고 낸 돈이 아닐 텐데…….
‘좋아. 세 달만 지나면 당장 때려치울 테다.’
왜 세 달이냐면, 여기서 흡수할 수 있는 탤런트가 무려 셋이나 되기 때문에.
낡은 복싱 신발에 깃든 자색 탤런트 하나. 트로피에 깃든 적색 하나. 마지막으로 금메달에 깃든 적색 하나.
물론 그 셋은 유리장 안에 얌전히 들어가 있었고, 장은 당연히 잠겨 있었다.
내가 한 달에 한 번 ‘만질 권리’를 얻은 게 저것들이다.
“한열이 만인의 연인 다 됐네. 체육관 파리 날릴 때는 나만의 한열이였는데. 그때 우리 참 좋았잖아……. 그치?”
“그랬던 적은 없습니다. 기억을 왜곡하지 말아주세요.”
“헿, 안 넘어가네.”
“관장님 안에 계시죠?”
“그럼. 너 오는 시간엔 항상 계시잖아. 회원들 몰려서 관리해야 되니까.”
“……참으로 불순함이 넘쳐 나는 체육관이라니까. 스포츠 정신은 대체 어딜…….”
그때 뒤에서 누군가 뒤에서 내 운동가방을 거세게 밀쳤다.
“시발, 뭔데 길을 막고 있어? 여기가 니네 집 안방이야? 선수도 아닌 새끼가.”
“…….”
스포츠머리의 남자가 부릅뜬 눈으로 날 째려보다가, 접수원을 힐끗 보고는 고개를 훽 돌린다.
난 그러려니 했는데 접수원 아가씨가 더 날뛰었다.
“야! 이준!! 너 이게 무슨 개념 없는 짓이니?”
“아 뭐!”
“통로 넓은데 굳이 여기까지 와서 그러는 건 무슨 심보람?”
남자, 이준은 얼굴만 붉히다가 대답 없이 그냥 체육관 안으로 픽 들어가 버렸다.
“저게 진짜! 한열아. 너무 신경 쓰지 마. 예전에는 저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너한테 간판 뺏겨서 심술부리는 거야 저거.”
“네, 별로 신경 안 써요. 감량하느라 힘드신가보죠.”
이준은 내가 오기 전까지 이정철 체육관의 간판 선수였다.
나는 딱히 선수는 아니지만 어쨌든 체육관의 얼굴이 됐으니 자신이 받아야 할 관심을 뺏겼다고 생각해도 무리는 아니다.
물론 그보다 간편하고 알기 쉬운 설명도 가능하다.
이준 선수는 접수원 아가씨에게 연심을 품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싫은 거다.
“저 이만 들어가 볼게요.”
“그래. 오늘도 파이팅!”
에효.
잘생긴 게 죄라니까.
흫.
* * *
체육관에서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나는 ‘작업실’로 향한다.
아파트를 하나 구해서, 3개의 룸을 각각 휴식실, 화방, 전략실로 꾸며 둔 곳이다.
“……흠.”
전략실의 한쪽 벽면에는 사진과 신문기사, 누군가의 인적사항이 어지럽게 붙어 있고, 빨간 실이 그 사이를 가로지르며 논리적 관계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누군가 이 안에 들어와서 본다면 내가 뭘 하는지 대강 짐작할 수 있겠지.
전략 수립.
내 머릿속의 기억과 현실의 정보, 그리고 변수들을 종합하고, 재조직된 정보를 토대로 계획을 세우고, 거듭 수정하며, 다가올 결행을 보다 완벽하게 조정한다.
수십.
수백 번.
실패라는 두 글자가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사고 실험을 반복하는 것이다.
‘벌써 다섯 개의 근거지를 초토화시켰다. 더 이상은 무리겠지. 놈들도 이젠 몸을 사리고 있으니……. 이젠 다른 돌파구가 필요해. 경쟁 조직과 싸움을 붙여 봐? 조금 위험하겠지. 비리 정치인들을 엮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뒤탈도 있을 테고. 흠.’
만약 내가 전생에서 조직의 중추까지 올라갈 정도의 위인이었다면 복잡한 걱정은 할 필요도 없다.
단숨에 대가리를 날릴 수 있을 테니.
하지만 난 줄곧 말단을 구르다가 조직이 붕괴되기 직전에야 겨우 중간 관리자가 되었을 뿐이다.
가진 정보가 극히 제한적이다.
저 무성한 수풀 안에 어떤 구렁이들이 웅크리고 있을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수풀을 바깥에서 두드릴 수는 있겠지.’
그래서 그 안의 뱀들이 경악하여 스스로 튀어나오게 해야 한다.
지금까진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아직 결정적인 한 방이 부족하다.
이 한 방이 따라 주지 않는다면, 뱀들은 어쩌면 더 깊숙이 고개를 처박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난 보드를 위아래로 쓱 훑었다.
벽을 별자리처럼 수놓은 정보들이 망막을 긁으며 내 뇌리에 파고들었다.
‘비리 경찰.’
‘돈세탁. 예술품 위조.’
‘일본 외무성. 야쿠자와의 연결.’
난 보드 중앙에 빨간색 핀을 깊이 꽂으며 계획의 맥을 갈무리했다.
핀은 누군가의 사진을 짚고 있다. 난 그의 이름을 육성으로 읊었다.
“동부파 이길재. 역시 네가 붕괴의 시작이 되어 줘야겠다.”
수풀 안 구렁이 중 하나. 개인적으로도 전생의 악연이 있는 놈이었다.
전략실에서 나온 후로는 계속 화방에 처박힌다.
‘카이로스 예술대회’에 출품할 작품에 몰두한다.
만약 이게 잘 먹히기만 한다면 그만한 시나리오는 없겠지. 장건철 회장은 돈세탁이나 허세로 예술품을 사들이는 쭉정이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진짜배기 후원자다.
그의 앞에 앉아 ‘예술하는데 쟤들이 자꾸 시비 걸어요.’라고 한 마디만 한다면 상황은 종료되겠지.
그가 동부파를 무너뜨려 주진 않겠지만, 적어도 우리 보육원을 통째로 비호해 줄 수는 있을 것이다.
띵동-.
한창 작업하는 중에 누군가 작업실에 방문했다.
문을 열어 드리니, 이현지 쌤이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채로 문밖에 서 계셨다.
동양적인 단아함에 딱 떨어지는 핏이 어우러진 개량 한복이었다.
그러곤 고개를 유려하게 조아리는 것이다.
“사부님, 구배지례를 허락해 주시어요.”
“……쌤 제발요. 안 그러셔도 된다니까요. 오늘은 왜 또 한복이에요?”
“옛것을 배우려면 복장도 그에 맞춰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랍니다.”
“어휴 고집하고는. 일단 들어와요.”
그랬다. 이현지 쌤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유감스러운 여자였다.
내가 침술로 고양이를 재우는 걸 보고는, 어떤 고대의 신비로운 점혈법을 전수받은 전승자쯤으로 날 보기 시작하신 것이다.
학생에서 무당이 되고 화타로 완성되는 이 막장 전개가 그녀의 안에서는 자연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래서 어찌어찌 내게 침법을 사사받기로 약속하긴 했는데.
어디서 무협지 같은 걸 이상하게 읽으셨는지 진짜 제자면 구배지례가 어쩌고 하면서 부득불 고집을 피우는 게 현재 상황이었다.
“전 반드시 다음 대 전승자가 될 거랍니다.”
“아니, 전승 같은 거 없으니까요. 진짜로.”
“아, 그리고 택배 왔길래 대신 받아 왔어.”
“음?”
침법 전수에 관련된 문제가 아니면 순식간에 본래 말투를 되찾는 것도 이현지 스타일이었다.
그녀의 사제 관계는 탈착식인 모양이다.
어쨌든 택배를 건네기에 받았다.
“오. 드디어 왔네.”
“뭐야? 국제 배송이던데.”
“물감이요. 작업에 필요하거든요.”
“물감 같은 건 아무 데서나 다 팔지 않니?”
“이건 좀 특별한 거라서요.”
장민욱식 예술관에나 어울릴 법한 특수 물감이었다.
한국에 이런 괴기한 물건 따윈 팔지 않지. 멀리 스웨덴에서 공수해 온 것이다.
확신하건대.
이 물감을 써서 대회에 출품한다면 극찬 속에 대상을 받거나, 아니면 반대로 예선 단계에서 탈락하게 될 것이다.
“일단 오늘 수업부터 시작할까요?”
“예. 사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