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이 자꾸 늘어 86화>
11. 반격 - 5
“일단 오늘 수업부터 시작할까요?”
“예. 사부님.”
한 지붕에 두 명의 남녀.
유사 이래 수많은 역사를 만들고 내키면 생명까지 창조해 낸 이 고전적인 상황, 그러나 여기에선 영 힘을 못 쓰는 분위기였다.
담백하고 학구적이며, 로맨스의 기운 따윈 무균실 먼지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게 있었다면 내 [눈치]가 싫어도 가르쳐 줬겠지.
강렬한 열망에 사로잡힌 그녀에게, 좀 과장해서 나는 지식을 뱉어 내는 자판기 같은 존재에 불과했다.
“이건 이렇게…….”
“그럼 이건 어떻게…….”
“이 부분은 이해 가…….”
“그러니까…….”
우리의 대화는 대충 이 네 가지 서두로 정리가 됐다.
내가 실습 주제를 주면 그녀는 한 구석으로 쪼르르 사라져 손끝이 물러 터져라 집중했고, 그럼 나는 그 옆에서 붓을 들고 캔버스를 채웠다.
우린 각각의 템포로 시간을 보냈고.
따라서 같은 방에 있어도 다른 공기를 마시는 듯했다.
가끔은 붓질을 하다가도, 제각기의 속도로 흐르는 우리의 시간들에 수평을 맞추기 위해 특별한 상대성 이론 계산식을 고안해 보기도 하였다.
이를테면 이런 것.
“쌤, 저 뭐 달라진 거 없나요.”
“어제보다 머리가 더 자랐네.”
“그건 당연하잖아요.”
“아닌 사람도 있단다. 그분들께 얼른 사과하렴.”
“……아니 그게 아니라. 뭔가 얼굴이 반질반질하다든가. 물이 올랐다든가. 뭐 그런 면에서…….”
한 번은 그렇게 묻자, 그녀는 날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실내등을 확인하고는,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음, 화장실도 아닌데…….”
화장실 형광등의 자뻑 빔에 맞은 것도 아닌데 뭔 헛소리냐는 눈빛이었다.
계산 실패의 반작용으로 나는 바로 쭈구리가 되었다.
생각해 보니 상대성 이론을 발견한 아인슈타인도 연애는 그닥이었지.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껍기도 했다.
모두가 내 외면 변화에 시끄럽게 반응했다.
생면부지의 타인에서부터 심지어 윤정희까지 태도가 바뀌었다. 명백히 긍정적인 방향으로.
그러나 이현지 쌤의 눈빛은, 자판기가 좀 더 깨끗해졌구나, 정도의 의미로만 심플하게 반응했다. 난 그녀의 수수함이 편했다.
시선을 주고받는 일에 느리고 미숙해서이겠지.
어찌 보면 그것이 그녀의 무능일 것이다.
그녀가 사는 조금 느린 세상에 방문할 수 있는 전용함수를 언젠간 발견해 낼 수 있기를 바라는 건 욕심일까.
반면.
위와는 완전히 다른 부분에서, 그녀는 말도 안 되는 재능충이었다.
이론을 빨리 흡수하는 건 그러려니 했다.
-수의대 다니다 중퇴했으니까. 관련 공부는 넉넉히 해 뒀지.
중의학과 현대 의학은 완전히 체계가 다르지만 겹치는 부분도 꽤 많다.
먼치킨 천재 샤오진은 그 둘을 접목시키는 독자적인 이론 체계를 개발했고, 따라서 현대 의학의 전문가라면 샤오진의 이론을 따라오는 게 상대적으로 수월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전과 지식은 별개.
샤오진이 창안한 침법은 시술 난이도가 극악한 수준이었다.
그럴 수밖에.
애당초 그녀는 중의학의 발전이나 체계화된 보급 따윈 관심도 없었다.
단 한 명의 환자를 위해, Rank C급의 재능러가 자기 역량의 한계치까지 계산해서, 침법 시술의 극의라 할 만한 마스터피스를 만들어 냈다.
난이도 따윈 이미 승천해서 안드로메다를 기웃거리고 있다.
나야 황색 카르마를 지불해서 쉽게 쓰지만, 보통의 재능이라면 평생을 쏟아서 흉내라도 겨우 낼까.
근데 현지 쌤은 꽤 수월하게.
아니 우수하다고 말할 수준으로 잘 따라오고 있었다.
“사부님, 검사를 부탁드리옵니다.”
“음. 어디 볼까요.”
이게 맞는 자리에 순서대로 꽂는다고 다 되는 게 아니다.
환자의 상태와 기질에 맞게, 침을 누르는 깊이는 물론이고, 강도와 속도까지 매뉴얼에 맞춰야만 하는 고난이도 작업.
따라서 기존의 모형으로는 검증이 되지도 않는다.
샤오진이 그랬듯, 풍선에 침을 꽂으며 터뜨리지 않는 연습을 해야 된다.
누가 봤다면 여윽시 대륙의 기상이라며 괴물 보듯이 했겠지.
그리고 결과는-.
‘……놀랍네. 벌써 여기까지.’
길이와 굵기가 서로 다른 침 7개가 각기 다른 크기의 물풍선에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그중 가장 굵은 침은 거의 바늘에 준했다.
이만한 묘기를 부릴 수 있는 사람은 중국 본토에서도 샤오진 한 명밖에 없었다.
“완벽하네요. 이렇게 빨리 하실 줄은 몰랐는데.”
“사부님이 훌륭하신 덕이지요.”
“아니, 빈말 없이 진짜로. ……재능이 있으시네요.”
“그렇다는 모양입니다. 몸 쓰는 일은 대체로 잘하게끔 되어 있는 식이죠.”
“자기 잘났단 말을 이렇게 담백하게 말하는 사람도 없을 거야.”
“글쎄요, 그래도 전 사부님이 더 부럽습니다.”
“뭐가요?”
“넌 마음껏 쓰담쓰담을 할 수 있잖니!”
“아니, 흥분은 하지 마시구요. 님 캐릭터 유지 좀…….”
또 기이한 지점에서 버럭.
세상 모두가 부러워할 재능을 타고났지만 정작 하고 싶은 단 하나를 못 하는 인생.
그건 배가 불렀다고 봐야 할까 불행하다고 봐야 할까. 예전의 나였다면 무조건 전자로 해석했겠지만…….
난 진심으로 울컥하는 그녀를 보며 픽 웃었다.
‘이젠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뿐이네.’
그러나 그런 마음과는 별개로 내 안의 음흉함이 속삭인다.
아니, 침법을 아무리 수련해 봐야 동물들이 도망가면 다 소용없지 않나.
현지 쌤은 이전에 내가 보여드린 퍼포먼스가 뇌리에 깊게 박혀서 이것만 익히면 세상 모든 동물들을 쓰다듬을 수 있으리라는 허황된 착각에 빠져 계셨지만, 아무래도 이것보단 동물 마취제가 몇 십 배는 쉽고 간편하다.
가끔 천재란 것들은 이런 식이지.
보다 신선한 계란을 얻기 위해 마트를 일찍 가기보단 유전자 조작을 시도하는 것이 흔한 천재들이 범하는 실수였다.
‘물론 난 지금이 좋으니까 말하지 않을 테지만.’
“어쨌든 이제 인체 실습을 해도 되겠네요. 뭐, 다소의 실수는 제가 잡아 드릴 수 있으니까요. 괜찮으시겠어요?”
“물론입니다. 사부님.”
어쨌든 약간의 죄책감과 그를 상회하는 만족감 속에서, 평범한 하루는 그렇게 밤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 * *
황혁수는 짜증이 났다.
“이상용 과장, 어디 갔어?”
“예? 오늘도 외근이라고…….”
“나가지 말고 처박혀 있으라니까 새끼가. 밑으로 몇 명을 붙여 줬는데 또 외근이야? 내 배려를 똥구멍으로 받아 처먹고 있네.”
물론 편하라고 붙여 놓은 부하들은 아니었다.
라이벌이란 단어가 말랑하다고 느껴질 만큼 앙숙으로 지내 왔다지만, 그래도 황 팀장은 이 과장의 업무 능력만큼은 높이 샀다.
그래서 도리어 일거리를 퍼 줬다.
대신 그 밑에 심복들을 심어서, 잘하면 공을 가로챘고 삐끗하면 그대로 덮어 씌웠다.
어렵지 않은 일이다.
황혁수는 ‘이런’ 일에서만큼은 이상용을 한참 압도했다.
이 과장은 성격 자체는 유들유들하지만, 회사 일에 있어선 약지 못하고 뻣뻣한 원칙 주의자였다.
황 팀장의 눈에 그는 약점 범벅의 과녁이나 다름없었다.
“요샌 담당 중 한 명이 골치라던데요. 이름이 뭐더라…… 특이했는데.”
“그래……. 그놈이 문제였지. 이한열인지 안중근인지 뭔지 하는 놈.”
장건철 회장의 예술 문화에 관한 오지랖에 가까운 관심은, 수많은 예술가와 지망생들을 대상으로 한, 막강한 후원으로 표현됐다.
처한 조건이 열악한 예술가에게 경호 인력을 붙여 주는 일도 흔하다면 흔했다. 따라서 이한열에 대한 추가 지시라 해 봐야 주목할 것도 못 된다.
그래서 별 의미 없이 이 과장의 밑에 붙였다.
하찮고 힘든 일은 네가 다 하라는 모멸적인 뜻도 살짝 담아서. 그리고 잊어버렸다.
‘그런데 하필 사고가 나 버렸지…….’
목숨이 달린 일이었으므로 보고가 회장 비서실까지 직통으로 올라가 버렸다.
회장은 민감하게 반응해서 당장 보안팀장인 황혁수를 불렀고, 그로선 현재 상황과 경호 대상을 누구보다 빠르게 브리핑할 수 있는 이 과장을 앞세울 수밖에 없었다.
회장 앞에서 ‘이야, 별놈 아니어서 잊어버리고 있었지 뭡니까. 하하.’ 따위로 보고할 순 없으니까.
문제는 그다음이다.
사태는 이 과장의 진두지휘하에 마무리됐고, 장건철 회장은 그의 업무 능력을 높이 산 것도 모자라 그를 기억해 버렸다.
-아아, 이제야 자네가 기억나는구먼. 이상용 과장, 철수가 자네를 많이 아꼈지 아마?
-저한테는 아버님 같은 분이십니다. 친부보다 더 가족처럼 따랐지요.
-그래. 전임 팀장이 그렇게 가고 마음고생 좀 했겠어. 내 앞으로 지켜보도록 하지. 한열 군을 잘 부탁하네.
이런 상황에서는 공을 빼돌리거나, 그를 이한열 담당에서 배제해 버리는 일은 불가능했다.
접근을 달리해야 한다.
가능한 빨리, 이한열은 장건철 회장의 기억 속에서 잊혀야만 했다.
그는 이한열에 관해 올라오는 정보는 최대한 축소하고, 쳐 내고, 의도적으로 누락하면서 존재감을 지워 갔다.
그러나 이한열은 이름값을 하는 건지 뭔지 사사건건 반항적이었다.
사건을 축소하면 더 큰 사고를 치고, 존재감을 지우면 그날 밤 9시 뉴스에 존재감을 드러냈다.
“근데 이 새끼가 왜 자꾸 조폭이랑 엮이는 거야……? 진짜 얘들이랑 뭐 있나? 아, 짜증 나게, 진짜.”
“보육원이 뭐 문제 있진 않을까요? 조폭들이 운영한다든지.”
“경쟁 조직을 조지는 히트맨으로 보육원 출신 고아를 쓴다? 요즘은 영화도 그런 식으로 시나리오 쓰면 욕먹어 인마. 그리고 그 보육원 별문제 없던데? 재무 구조도 건실하고. 자세한 건 더 파 봐야 알겠지만.”
“근데 팀장님, 얘가 걔잖아요.”
“대명사로만 말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들어 새끼야.”
“그 제음일기 발굴해 낸 애. 파 보니까 동명이인이 아니라 그냥 동일인이던데요? 이거 뭐 있지 않을까요?”
“뭐야?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그 순간 황혁수의 뇌리에 뭔가가 번뜩했다.
두뇌 속 어떤 미지의 기관이 작동했다.
동료를 짓밟고 이간질을 할 때마다, 그러니까 ‘옳은 판단’을 할 때마다 작동해서 자신을 성공의 궤도에 올려놓은 그 감각이었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는데. 말이 되겠어.”
“뭐가요?”
“거기 출토품이 제음일기 외에 꽤 됐잖냐. 그거 사실 걔가 발굴한 게 아닌 거지. 원래는 조직의 장물이었고……. 이놈이 어떻게 운이 좋아서 빼돌렸고……. 그래서 경쟁 조직에게 의탁했고……. 이런저런 이유로, 이놈은 조직의 원한을 산 상태다……. 어때?”
“예에? 방금 시나리오 대충 쓰면 욕먹는다던 분 어디 가셨죠?”
“왜? 말 되는 거 같지 않냐?”
“뭐 말은 되는데……. 다 억측이잖아요. 근거도 하나 없이.”
“우리가 경호만 하냐? 기본은 보안팀이야, 짜샤. 난 국정원 출신이었고. 이쪽 업계에서 진실 여부는 항상 두 번째 문제지. 기억해 둬,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말이 되느냐’다. 그럼 거짓이어도 진짜로 만들 수 있거든.”
“…….”
같이 담배를 피던 후배가 그의 발언에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선배, 이상한 생각 하시는 거 아니죠?”
“산은 높을수록 가파르고 한 번의 헛디딤이 치명적이지. 여기까지 어떻게 올라왔는데……. 난 이상용 꼴이 되느니 차라리 죽고 말겠어.”
“…….”
자신의 의도적인 태업이 부회장에게 간파됐다.
큰 질책을 받지 않을 수 있던 건 부회장과 회장의 불화 때문일 것이다.
부회장은 그룹의 자산이 한낱 환쟁이들한테 소비되는 상황 자체가 마뜩잖다.
하지만 회장의 의지를 거스를 수는 없으니, 그저 지출을 최소화하는 방책을 짜낼 뿐이다.
만약 조사 중에 이한열이 그룹의 비호를 받기 부적합하다고 판단되면 언제든 쳐 낼 수 있다.
부회장은 그런 결과를 내심 바랐기에 황 팀장을 내버려 뒀다.
놔두면 자신의 뜻에 맞게 행동할 것을 내다봤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부회장의 기대를 저버리면 이 목숨, 부지하기 힘들다.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라고, 나는.”
그는 핸드폰을 거칠게 뽑아 들었다.
* * *
“드디어 여기까지 왔네.”
오 여사님의 말에 아주 단단한 뼈가 심겼다. 할 말이 없었으므로 난 뒷머리만 긁적였다.
“……아니, 죄송하다니까요.”
“죄송한 건 아는구나?”
“쩝, 저도 나름의 사정이…….”
“그 사정이 뭔지는 얘기도 안 해 주면서.”
오늘 나와 오 여사님은 내 유물들이 출품되는 경매장에 나와 있었다.
원래는 수학여행 직후에 잡혀 있던 일정을 내가 사정사정해서 취소하고 옮긴 것이다.
경매장 측에 위약금이야 내가 냈지만…… 어쨌든 대리인이었던 그녀로서는 면이 안 섰다는 모양이다.
“그날 큰손 많이 와서 내놓기만 했으면 대박이었는데 말이야.”
“에이, 제가 그 대신 커미션 더 땡겨 드리기로 했잖아요.”
“어머, 얘 좀 봐. 내가 지금 돈 때문에 이러니?”
“아니에요?”
“맞아.”
그녀가 깔깔 웃었다.
나 때문에 고생 많으셨는데 더 웃게 해 드려야지. 그런 의미에서 나는 말했다.
“그럼 그날보다 오늘이 더 나을 수도 있을 거예요.”
“그래? 이쪽 경매장 직원하곤 별로 안 친해서……. 거물들이 꽤 왔나 봐?”
“거물이랄까요……. 어쨌든 치열하게 입찰에 참가할 사람들은 꽤 많아 보이네요.”
“네가 그걸 어떻…….”
되물으려던 그녀였지만, 홀에 진입한 순간 궁금증이 싹 사라졌을 것이다.
왜냐면 한국말보다 일본말이 더 많이 들렸으니까.
야마토노카미 야스사다.
우에스기 겐신의 것으로 감정된 고대 오오요로이.
값을 매기기 힘든 두 보물의 값을 친히 매겨 주러 일본에서 날아온 호ㄱ…… 아니 컬렉터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