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이 자꾸 늘어 89화>
11. 반격 - 8
“확실한 거래를 위해, 일본 정부의 요원들과 외무성의 관료들이 미화산에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 거래 현장을 경찰특공대가 급습하면 어떻게 될까요. 한국 조폭과 야쿠자, 일본 정부로 이어지는 초특급 스캔들이 터지는 겁니다. 9시 뉴스 한 달치 예약이군요.”
이쯤 되면 이길재도 미쳐 날뛰지 않을 수 없겠지.
그렇게 풀숲으로 뛰쳐나온 그 순간, 나는 당신의 목을 거침없이 베어 낼 것이다.
“……신고 따위야 네가 하면 되잖나. 왜 굳이 날 끌어들이려는 거지?”
“확실히 해 두려는 거죠. 경찰이 제 말을 믿지 않을 수도 있고, 믿더라도 지나치게 적은 인력을 투입해 일을 그르칠 수도 있습니다. 요컨대 현 상황을 완벽히 이해하고 강력한 동기까지 갖춘 경찰 관계자가 필요한데 제게 그런 인맥은 없었거든요. 아, 지금 방금 생겼네요.”
난 증거 동영상이 담긴 핸드폰을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저울 반대편에 명예로운 정년 퇴임이 걸려 있다면 과연 강력한 동기가 될 만하다.
김 형사가 이를 으득 깨물었다.
“……널 지금 당장 처넣을 수도 있어.”
“그래요? 당장의 감정에 치우쳐서 직장을 잃을 위험을 감수하다니. 인생 계획을 꼼꼼히 짜는 분은 아닌 모양이군요.”
“빌어먹을 자식……. 애당초 넌 누구야! 대체 누구기에 갑자기 튀어나와서 이러는 거냐. 뭘 바라고 이러는 건데?! 그건 알려 줘야 할 거 아니야?”
난 피식 웃었다.
“뭐겠습니까. 당신 용돈의 출처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거죠. 뭐, 그렇게 되면 아마 앞으로 용돈은 못 받으시겠네요. 그래도 손목에 수갑 차시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어요?”
“……어차피 바퀴벌레들은 끊임없이 등장하게 되어 있어. 나는 적절한 타협점을 찾았을 뿐이다.”
“예에. 관심 없네요. 그쪽은 알아서 타협하며 사시고요. 그래서 도울 겁니까 말 겁니까?”
“…….”
김 형사는 날 매섭게 노려보았지만, 그 시선은 날을 뭉갠 칼처럼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그는 결국 고개를 떨궜다.
“……그럼 내가 어쩌면 되지?”
“신고는 제가 알아서 할 겁니다. 하지만 경찰 내부에서 신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일개 소대급 인력을 투입할 결정을 내리기까지의 과정은 제가 통제할 수 없죠. 그걸 해 주셨으면 하는 겁니다.”
“나라고 반드시 그걸 할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아, 미션에 실패할 경우에도 이 영상 파일은 언론에 뿌려집니다. 아셨습니까?”
“……이 개자식이 진짜.”
“음, 제가 욕을 들으면 엄지손가락에 경련이 이는 병이 있거든요? 문자를 잘못 삐끗해서 보내 버릴 수도 있을 거 같은데.”
“알았어! 알았다고!!”
씩씩대는 남자에게 마지막으로 통보했다.
“접선 장소와 정확한 시간은 실시간으로 바뀌는 것 같더군요. 제가 옆에 붙어 있다가 적당한 시점에 신고를 할 겁니다. 그때까진 얌전히 서에 붙어 계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렇게 합의를 마치고 밴으로 돌아왔다.
‘마지막 불안 요소까지 처리됐다. 좀 급박한 감이 없지 않지만 지금으로선 이게 최선이겠지.’
더 일찍 접근해서 세세한 협의까지 했다면 좋았겠지만, 생각해 보면 이게 차라리 낫다는 생각도 들었다.
추측이다만, 아마 이길재도 김한용 경사를 직접 만나 오늘을 특별히 강조했을 것이다.
만약 내가 회유한 뒤에 둘이 만났다면 어떤 낌새를 눈치챘을 가능성도 있다.
이길재는 나 정도는 아니어도 감이 탁월한 편이거든.
‘그리고 협박은 최근에 당한 것일수록 효과적이니까.’
이로써 신고는 중간에 무시되는 일 없이, 오히려 더 떠들썩하게 증폭되어 돌아올 것이었다.
“얘기 다 끝났습니다. 출발하시죠.”
검문을 마친 밴은 경매장을 무사히 빠져나가 국도에 올랐다.
* * *
30분 뒤.
경찰서로 날아든 한 통의 신고전화가 형사과를 떠들썩하게 달구었다.
“최소 서른 명이란다! 최대한 닥닥 긁어모아! 근방 지구대까지 싹 다 전화 돌리고! 조폭과 야쿠자가 엮인 대형 건수라고! 움직입시다!!”
물론 여기엔 신고에 열성적으로 반응한 김한용 형사의 몫이 컸다.
그는 종횡무진 돌아다니며 반장을 설득하고, 더하여 서장이 적극 지원에 나서도록 사발을 풀었다.
“너 왜 안 하던 짓을 하냐? 평소엔 가장 조용하던 놈이?”
“에이, 저도 형삽니다. 가끔 정의 구현에 불탈 때도 있는 법이라고요.”
“근데 이거 확실해? 일본 외무성 관료까지 얽혀 있다는 사실? 제보자는 그 관료를 어떻게 알아보고 이런 것까지 신고한 거야?”
“알아본 게 아니고 전화하는 걸 엿들었다는데요. 뭐, 진짠지는 가서 까 보면 알죠. 어쨌든 야쿠자가 얽혔다는 건 확실해 보입니다. 이거 우리가 다 잡죠. 국제 범죄 조직의 맹아, 한국 경찰의 손에 돈좌되다. 더하여 대규모 검거. 여기에 반일 감정까지 한 큰 술 얹으면 서장님 한순간에 스타 경찰 되시는 겁니다.”
“뭐, 내가 이 나이에 스타 돼서 어쩌겠다고…….”
서장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기대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경찰특공대 부를 수 있겠습니까?”
“근데 시간에 맞을지 모르겠군. 일단은 알아보지. 우선은 우리 애들부터 끌고 가서 현장부터 급습하자고. 그게 확실해. 현장 증거가 분명하지 않으면 잡았다가도 외국인이랍시고 다 풀어 줘야 되니까. 하려면 제대로 하자고.”
그렇게 바쁘게 서를 오가던 중.
김한용 형사는 핸드폰을 울리는 전화 한 통에 다급하던 걸음을 뚝 멈춰 섰다.
모르는 번호.
그러나 번호가 항상 바뀌어도 뒷자리 8764는 늘 같았기에 김한용은 송신자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챘다.
그는 구석진 곳으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
-형사님, 나 이길재요.
“……무슨 일이야. 나 지금 바쁜데.”
-뭐 별일은 없으신가 해서 전화 드렸소.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오늘은 나한테 특별히 중요한 날이거든. 그걸 잘 이해하고 계시나 해서.
“알겠다니까 뭘 자꾸 물어? 짜증 나게.”
-으메 까칠한 거. 뭐, 그래. 피차 덕담 나눌 사이는 아니니까 서론은 집어치웁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네. 그래서 뭔데? 별일 없다니까.”
-진짜요? 그 별일 없다는 거?
의미심장한 언질에 심장이 쿵덕 내려앉는다. 말의 행간마다 비웃음이 섞여 가슴에 깊게 파고드는 듯했다.
뭐지?
들켰나?
뭘 어디까지 아는 거지?
너무 많은 생각들에 아무 생각도 못하게 되었을 즈음 수화기 너머로 잔인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크흐흐흐……. 형사님 대가리 돌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네. 내가 서에 심어 놓은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 줄 아쇼? 장담컨대 형사님은 그 절반도 몰라.
“…….”
-아아. 형사님 왜 말이 없으실까? 자꾸 입 다물고 그러면…… 우리 은재, 아마 약쟁이로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될 텐데? 어째? 그래도 괜찮겠어?
“은재는 건드리지 않기로 했잖아!! 개자식아!!”
-그거야 우리 상호 신뢰가 예쁘게 지켜졌을 때의 얘기고. 근데 막, 내 믿음에 금이 막! 응? 쩍쩍 갈라지고 있단 말이야! 형사님, 내가 이 상황에서 어째야겠소?
김한용은 딸 은재가 날라리라는 건 일찌감치 인정했다. 딸내미 콩깍지 따윈 가방에서 담배가 한 무더기 발견됐을 때 스스로 벗어 재꼈다.
하지만 딱 그 정도다.
은재는 본드나 마약을 상습적으로 할 정도로 막나가는 아이까진 아니었다.
그런데 어떻게 손을 썼는지, 그녀의 혈액에서 마약 양성 반응이 나왔다는 진단서가 어느 날 우편으로 부쳐져왔다.
김한용 형사에게 아직 때가 덜 묻은 시절, 정확히는 동부파의 포섭을 거절하고 보름 뒤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때와 꼭 같이, 전화기를 쥔 손이 덜덜 떨려 왔다.
-어쩌시겠소? 새파란 학생 하나 인생 조지는 거, 솔직히 나도 하기 싫어. 그거 한다고 하늘에서 돈이 떨어지길 하나? 하지만 나도 입장이란 게 있지 않느냔 말이야. 그러니까 말이요, 김 형사님.
“…….”
-내가 아직 말로 하고 있을 때 알아서 불어.
“……누군지는, 누군지는 몰라.”
-응?
“너네 밴에서 모르는 얼굴이 하나 내렸어. 그리고 내 약점을 잡고는 신고를 제대로 처리해 달라는 청탁을 받았을 뿐이야. 난 솔직히 동부파의 내부 분열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다고.”
-밴에서? 우리 밴에서? 누가?
“모른다니까. 너네 조직 애가 아니면 대체 거기서 왜 내린 건데?”
-……인상착의 좀 읊어 보쇼.
“검은 모자를 썼고……. 젊다 못해 어려 보였어. 갸름한 얼굴상에 이목구비는 또렷했고. 키는 180 전후. 그 정도가 전부다. 모자를 깊게 눌러써서 자세한 건 못 봤어. 그럴 정신도 없었고.”
-흠. 뭐 일단 알았소.
“……경찰 출동은 내가 최대한 늦춰 볼게. 그러니 제발 내 딸 은재만큼은…….”
-아아, 그건 됐어. 그냥 출동시켜요. 장소야 이쪽에서 옮기면 되는 거니까. 오늘은 허탕 좀 쳐 보쇼. 그 정도 벌은 받으셔야지?
“……그래.”
-우리 신뢰 관계에 대해서는 이 일이 끝나고 차분히 다시 얘기해 봅시다.
전화는 그대로 뚝 끊겼다.
김한용은 벽에 힘없이 등을 기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붕괴하듯이 주저앉았다.
* * *
“예 형님. 예예. 그렇습니까? 음, 네. 준영아 일단 차 돌려라. 장소 바뀌었다.”
사실 [눈치]를 발휘할 필요까지도 없었다.
[어느 피아노 조율사의 예민한 청각](Rank D)
이 탤런트는 먼 거리의 소리까지 잘 듣게 해 주진 않으나, 가까운 거리라면 아주 미세한 소리까지 민감하게 수용하는 재능이었다.
따라서 가만히 눈만 감고 있어도 김송재의 통화 내용 정도는 쉽게 엿들을 수 있었다.
‘음, 생각보다 더 빨리 들켰네. 이길재 이 새낀 진짜 이런 일엔 빈틈이 없구나.’
통화가 끊기고.
“야, 너 이름이 뭐랬냐.”
김송재가 날 지그시 바라보며 물었다. 난 순순히 답했다.
“사실 아까 말한 건 가명이고. 진짜 이름은 이한열이야. 기억하기 쉽지?”
“……시발, 첩자 새끼를 지금까지 끼고 다녔다니. 돌아가면 길재 형님한테 엄청 까이겠구만. 얘들아. 얘 잡아 둬라. 길재 형님이 직접 심문…….”
그러나 내 양옆과 정면에 있던 나머지 조직원들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푹 숙이거나 옆으로 쓱 쓰러졌다.
통화가 너무 길었잖니.
그리고 통화 중에 너무 많은 기색을 노출했다.
난 그의 심장 박동이 달라진 순간부터 움직였고, 통화가 끝날 즈음 목덜미에 주사 한 방씩은 다 박아둘 수 있었다.
“뭐, 뭐, 뭐야! 이 시벌 새끼가!!”
김송재가 품에서 나이프를 빼 들었지만, 그의 자리는 조수석이었고 날 등지고 있어서 당연히 움직임에 제약이 컸다.
칼날이 조수석 시트를 헤집은 틈을 타 그의 후미를 신속히 잡아챘다.
역시나 빠른 졸도.
남은 건 운전수 한 명. 이제 준비해 온 주사기도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난 바늘 끝을 그의 목덜미에 들이대며 말했다.
“그대로 가. 운전 끝날 때까지 핸들에서 손 떼지 말고. 운반은 다 끝마치고 잠드셔야지.”
“그, 그거 뭐냐. 도, 독극물이야?”
“단순한 동물 마취제. 성인 남성을 5초안에 기절시킬 수 있도록 농도랑 양을 맞춰 뒀지. 어쨌든 죽지는 않으니까 걱정 말고 운전해. 푹 자고나면 구치소에서 일어날 테지만.”
남자의 목울대가 꿀꺽 침을 삼키는 게 보였다.
‘역시 계획대로는 안 되나. 어쩔 수 없이 임기응변을 발휘해야겠네.’
난 남은 손으로 김송재의 품을 더듬어 폰을 꺼냈다. 그리고 손가락 하나만 탁탁 움직여 문자를 보냈다. 수신인은 이길재.
-첩자는 잡아 뒀습니다. 말씀하신대로 바뀐 거래 장소로 이동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