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능이 자꾸 늘어-92화 (92/164)

<재능이 자꾸 늘어 92화>

11. 반격 - 11

*   *   *

이 와중에 뜬금없다만, 지금 나는 관장 쌤의 목소리를 떠올리고 있었다.

-네 재능은 평범해. 센스만 따지면 평균 이하겠지. 하지만 복싱 재능과는 별개로 네 몸은 우수하다. 피지컬의 잠재력만큼은 상위 10퍼센트 안에 들겠지. 근데 이상한 점은 말이지…….

그는 뭔가 신기한 생물을 발견한 눈초리로 날 훑었다.

-그 우수함이 계속 확장되고 있어. 처음에는 눈. 그다음에는 어깨의 탄력. 또 어느 날은 완력의 질 자체가 달라져 있단 말이야? 분명 근체량은 그대로인데, 힘을 어떻게 쓰는지를 어느 날 아침 깨달아오는 느낌이랄까?

그의 식견은 놀랍게도 정확했다.

근 한 달 바쁘게 지낸 와중에도, 나는 [율리시즈의 나침반]을 통한 탤런트 수집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전국의 이름 난 체육관이라면 모조리 들쑤시고 다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하여…….

[어느 역도 선수의 전완근](Rank D)

[어느 국가대표 수영선수의 삼각근](Rank D)

[어느 유도 루키의 대흉근](Rank E)

[어느 야구 선수의 회전근](Rank D)

등등의 훌륭한 신체 조건을 갖출 수 있었다.

내가 어디서 탤런트를 얻어 올 때마다 관장은 몸의 미묘한 반응차를 간파하고 “또 어디서 득도해 왔냐?”고 물었지.

어쨌든.

-그러나 네 괴물 같은 잠재력을 보고도 널 선수로 기용하지 않은 이유도 그거다. 피지컬 외에는 아무것도 없거든. 센스도. 기술의 이해도. 상황 판단력도 모두 떨어져. 혹여나 싸움이 붙는다면 절대 복잡한 수 싸움 같은 거 하지 마라. 고수와 맞닥뜨리면 그냥 도망쳐. 아마 도망치는 실력은 네가 그놈보다 위일 테니까.

원래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간단히 납득했다.

그러나 관장은 내 사기를 생각해서인지 거기에 한마디를 덧붙여 주었다.

-다만, 체급이 깡패라는 말도 들어 봤을 거다. 경우는 좀 다르지만 네게도 적용되는 말이야. 격투를 체계적으로 배우고 학습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러니까 고만고만한 깡패 놈들이라면, 그게 몇 명이든 무조건 네가 씹어 먹을 수 있다. 내가 그 정도 수준까진 끌어올려 주지.

이 훈수인지 잔소리인지 모를 말을 언제 들었는지 정확히 기억한다.

왜 기억하느냐면, 그날 관장이 유리장에서 챔피언 트로피를 꺼내 내게 건넸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계약서에 날인한 지 30일 되는 날, 나는 또 하나의 C급 탤런트를 얻은 것이었다.

[금메달리스트 복서 이용찬의 반사 신경](Rank C)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특성을 얻기 전부터, 나는 ‘모든 신체 능력 3배’라는 [역발산기개세]의 특성 효과에 대해 생각해 두었다.

아마 당장 근력이 세 배 상승된다거나, 눈이 2.0에서 6.0으로 비약하는 식의 기계적인 적용은 아닐 것이다.

이 카르마 시스템은 대체로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았다.

다른 적색 탤런트들이 그러하듯, 구동 효율을 3배로 오버클로킹 시키는 수준이 아닐까.

예를 들자면.

그래.

날 향해 쇄도하는 저 사시미를 아주 느긋하게 응시하는 [동체시력]을 참고해 보자.

세상이 3배로 느려지진 않았다. 다만 한순간 받아들이는 정보량이 압도적으로 증가했다.

어깨의 움직임.

무게 중심의 이동.

축의 회전 반경.

‘찌른다’는 한 글자에 담긴 행위의 추이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눈에 박혔다.

단번에 이해됐다. 저 칼끝이 어딜 노리며 어떤 궤적을 그리게 될지.

그럼 이런 묘기도 가능하겠지.

몸을 틀어 사시미를 옆구리로 흘리고, 한 발 다가서 그의 팔꿈치를 팔로 감아쥔다.

그리고 가볍게 쳐올린다.

우드득,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놈의 팔이 역으로 꺾였다.

“끄아아악!!”

걷어차서 옆으로 치우고, 바로 전진.

빠르게 훑어서 스캔한다. 왼쪽에 둘, 오른쪽에 하나.

난 왼쪽 발에 축을 이동시키며, 내 관자놀이를 노리는 왼편의 각목을 피했다.

더 깊숙이 파고들어서 옆구리에 훅. 휘청거리는 놈의 뒷무릎을 사선으로 밟아 부러뜨린다.

자지러지는 비명.

비명을 뚫고 날아드는 정면의 사시미.

백스텝을 밟으며 떨어진 각목을 위로 차올렸다.

각목은 사시미를 내지른 손목을 가격한 뒤에 내 손에 빨려 들어오듯 잡혔다.

팔이 들려 노출된 복부를 각목으로 쑤셔 박는다. [역발산기개세]로 증폭된 근력으로 말미암아, 그건 ‘찌른다’기 보단 공성추로 ‘후려갈긴다’는 느낌에 가깝게 박혀……

야쿠자의 몸뚱이를 그야말로 허공에 ‘날려 버렸다.’

놈은 뒤따라오던 동료 몇 명과 부딪치고 얽히며 우당탕탕 굴렀다.

이 초현실적인 광경에 주변의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멈칫했다.

난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달려들었다. 각목 한 방.

콱!

각목 두 방.

콱!

세 방째에 각목은 가격당한 야쿠자의 뼈대와 마찬가지로 가루처럼 부스러졌다.

그때 누군가가 쇠파이프를 내 정수리에 내리찍었다.

‘음, 이것도 될까?’

집중해서 잘 보고, 손을 휙 휘둘러 쇠파이프를 잡아챘다.

찰나에 꺾어서 당기니, 쇠파이프는 제자리를 찾은 양 내 것이 되어 있었다.

얼빠진 얼굴로 빈손을 바라보는 야쿠자의 콧잔등에 쇠파이프 모서리를 꽂아 주었다.

쩍-!

‘……된다! 몸이 생각하는 그대로 움직여!’

[반사 신경]의 효율도 3배 증대.

과장 좀 보태자면, 손발이 먼저 움직여서 피하거나 때리고, 그 뒤에 의식이 따라붙는 느낌이었다.

달리 말하면 그것이 전부.

현란한 전투 기술이나 무술의 묘리 따윈 배운 적도 없고 펼칠 줄도 모른다.

단지 먼저 보고, 한 박자 빨리 움직여, 상대방이 반응하기 전에 타격해 침묵시킨다.

내 전투는 이 루틴의 반복이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래 봐야 깡패다. 전문적인 훈련을 받지 못한, 싸움 좀 하는 일반인. 한 명씩 차례대로 상대한다면 내가 궁지에 몰릴 요소는 없다. 피지컬에선 내가 압도하니까.’

수십 번의 시뮬레이션 끝에 ‘된다’는 확신을 얻긴 했지만, 그럼에도 [역발산기개세]의 버프 효과는 내 상상 이상이었다.

평생 차고 있던 손발의 족쇄를 이제야 벗어 던진 느낌.

눈에 낀 백태들을 깔끔히 씻어 낸 듯한 상쾌함.

상대의 동작이 수십 개로 쪼개져서 감각되고, 머릿속의 구상이 덜 것도 넘칠 것도 없는 정확한 동작으로 현실에 펼쳐졌다.

그렇게 1분여의 단기간에, 10명의 야쿠자들이 이 차가운 산속에 몸을 뉘였다.

기세가 꺾였다.

순식간에 반수가 깎여 나가는 것을 지켜봤으니 아무렴 위기감이 대가리에 박혔겠지.

그때였다.

“다 비켜! 이 병신 새끼들. 겨우 한 놈한테 달라붙어서 뭘 하는 거냐?!”

체격이 예사롭지 않은 야쿠자 한 놈이 씩씩거리면서 다가왔다.

주변 반응으로 짐작컨대 부대장쯤으로 보인다. 놈의 묵직한 어깨 위로 아지랑이 같은 열기가 피어올랐다.

“어이. 딱 봐도 실력에 자부심이 있어 보이는데. 한 판 붙어 보자고. 극진공수도 연옥파 3대 전수자로서……. 쿠악!”

잽싸게 짱돌을 던져 입 구멍을 막아 버렸다.

왠지 셀 것 같으므로 정면 상대 따윈 하지 않기로 한다. 실력에 자부심? 장난이겠지. 난 비겁하고 치졸한 싸움을 선호했다.

“끄어어…… 네, 네노오옴……! 비겁……!”

“오. 한 번에 기절하지 않은 건 네가 세 번째다.”

그러나 이격에도 졸도하지 않은 최초가 되기엔 좀 모자랐다.

두 번째 짱돌은 목젖에 처박혀 호흡의 흐름을 일절 차단했다. 대장, 부대장 모두가 허무하게 무너진 순간이었다.

이쯤 되면 충분하겠지.

나는 목청을 높여 말했다.

“이제 곧 한국 경찰들이 들이닥칠 거다.”

“……!”

“너네 다 밀입국 한 거지? 지금 잡히면 한국 감옥에 수감되어서 아-주 오랫동안 썩을 거다. 이 스캔들이 향후 한일 관계를 악화시킬 테니까. 단언컨대 일본 정부의 비호 따윈 받지 못할 거야. 한국 정부가 쌩쇼를 한다는 식으로 일본 내 여론을 모으려면 너희를 부정해야 할 테니까.”

“……그, 그래서 뭐, 뭘 어쩌라고……?!”

“지금이라도 포기해. 흩어져서 산속 깊은 곳에 숨어. 평택 쪽에 중국으로 가는 밀입국 루트가 꽤 많으니까 그쪽을 알아보던가. 어차피 너네는 실패했다. 금의환향의 결말 따윈 없어. 몸 성하게라도 돌아가려면 내 말 들어라.”

“닥쳐라 이놈!!”

또 상황판단 못하는 한 놈이 달려들기에 가볍게 어깨를 빼 주었다.

기절시키는 친절 따윈 베풀지 않고 놈이 악악 비명을 지르도록 놔두었다.

지금은 ‘그런’ 분위기를 연출할 때였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야쿠자들이 주춤주춤 뒷걸음을 치기 시작한다.

“아. 너는 거기 남고.”

“……네? 네네? 저요?”

“그래. 너 정부 관료지? 아까 다 봤으니까 시치미 떼진 말고. 넌 남아서 증언 좀 해 줘야겠다. 쟤 빼곤 다 가도 좋아.”

쟤가 있어야 일본 정부까지 끼어든 초대형 스캔들로 치장하는 게 가능해진다.

물론 영상 자료는 남겨 놨지만 진짜 증인만은 못하겠지.

“이이익!!”

도망가려 하기에 뒤통수에 예쁜 혹 하나를 만들어 주었다.

기절한 관료를 타이어에 뉘이고 나니 선 채로 남아있는 자는 한 명도 없었다.

이제 나도 슬슬 자리를 뜰 준비를 해야겠다.

‘가장 이상적인 시나리오에선 벗어났지만…… 괜찮아. 이 상황도 내 상정하에 있다.’

원래 계획은 경찰이 거래 현장을 타이밍 맞게 덮치는 것이다. 난 이들 안에 숨어서 거래 장소와 타이밍을 유출하는 역할을 맡을 셈이었고.

그러나 이길재가 중간에 눈치채는 바람에 시나리오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한국 조폭과 야쿠자, 일본 외무성’이라는 주요 꼭지는 그대로지만, 그 뒤에 ‘거래 중 최종 합의에 이르지 못해 무력 충돌’이라는 내러티브가 첨가될 것이다.

언론에 보낼 소스는 이미 작성해 둔 상태다.

물론 경찰 조사가 끝나면 후자는 사실이 아님이 밝혀지겠지만, 아무렴 어떤가.

어쨌든 국민 정서를 불태우기엔 충분한 땔감이다.

반일감정을 타고 매국노의 프레임이 씌워진 동부파는 전방위적인 압박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훗날 진실이 밝혀질 즈음에 조직은 이미 와해의 기로에 놓여 있을 테고. 그거면 충분…….

순간

무엇이 내 몸을 움직였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눈치]일까. [청각]일까. 아니면 [역발산기개세]로 증폭된 총체적인 감각이 날 떠민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재능 너머의 생존 본능 단계에서 내려진 회피일지도 모른다.

무슨 이유에서든지 난 고개를 숙이며 몸을 굴렸다.

내가 서 있던 땅에 나이프 하나가 쨍- 날아와 자루만 남기고 깊숙이 박혔다.

“……?!”

“어? 피했네? 이야, 감 좋은데?”

귓가를 파고드는 건 살짝 어눌한 한국말.

언어 능력이 미숙한 게 아니라, 구강 구조의 문제로 발음이 새는 소리였다.

난 그 목소리의 기억을 떠올렸고.

반사적으로 몸의 전 기관이 총력적인 전투 태세에 돌입했다.

전례 없는 경각심이 세포를 올올이 일깨웠다. 수십 명의 야쿠자들을 대면할 때도 느껴지지 않던 감정이 심장을 때렸다.

공포심.

난 이를 악물며 몸을 가누었다.

짧은 바가지 머리, 평범해 보이는 체격, 하얀 마스크 위의 실눈이 나를 얇게 응시했다.

“……빨간 마스크 장이화.”

“흐응. 너도 어지간히 뒷세계에 쩔어 있는 놈이구나? 날 단번에 알아볼 만한 사람은 얼마 없는데.”

“당신은 지금 부산에 있던 거 아니었나?”

“헤에, 그런 것도 알아? 너 진짜 누구냐?”

“…….”

“뭐, 두목이 가 보래서 왔지. 그래도 이길재 놈이 영 맘에 안 들어서 개입은 안 하려고 했는데 말이야.”

“그럼 끝까지 가만히 있지그래?”

“너처럼 재밌는 걸 보고 그냥 가긴 뭐 해서.”

그가 히죽, 웃었다.

하관은 마스크에 완전히 가려 있지만, 둥글게 휜 눈매만 봐도 그가 격렬하게 즐거워하고 있음은 알 수 있었다.

‘……젠장. 이럼 이거 나가린데.’

빨간 마스크.

동부파 최강의 칼.

고정된 직책 따윈 없이, 그저 조직이 필요로 하는 곳에 등장해 일을 해치우는 ‘해결사’.

그리고 그가 나서서 해결하지 못한 일은, 내가 알기로 단 한 건도 없었다.

“놀아 보자, 꼬마야.”

그 순간, 배틀 나이프가 갑자기 눈앞에 등장했다.

기겁해서 고개를 뒤트니, 칼날은 볼을 스치고 뒤편으로 사라졌다.

정신을 가다듬기도 전에 이번엔 손날이 안면을 노리고 달려든다. 난 뒷걸음을 치며 원투 잽을 손바닥으로 쳐 냈다.

가볍지만 놀랍도록 날카롭고, 무엇보다 허를 찌르는 엇박의 공세는 마술처럼 느껴질 정도다.

[역발산기개세]의 버프를 받아 거의 동물의 수준에 다다른 [동체시력]이 아니었다면 반응조차 못했을 테지.

“호오.”

패턴이 바뀐다.

가볍게 밖에서 두드리던 펀치를 접고, 스텝 인을 과감히 구사하며 내 펀치 안쪽으로 파고 들어온다.

난 황급히 견제 훅을 날렸지만, 놈은 뱀처럼 흐느적거리는 위빙으로 타점을 간단히 회피, 근거리에서 바디 블로우로 응수한다.

난 몸을 웅크려 막아 냈지만.

그 순간 정신이 날아갈 뻔했다.

주춤, 뒷걸음을 치며 가까스로 의식을 부여잡았다.

페이크였다.

바디 블로우의 페이크에 속은 순간 노출된 뒷목에 브라질리언 킥이 꽂힌 것이다.

이걸 바로 판단할 수 있던 건, [반사 신경]으로 어떻게든 반응해서 직격을 흘려 냈기 때문이었다.

“하, 그걸 피해?”

재밌다는 듯 웃어 버리며 놈은 재차 공격에 임했다.

탐색전은 끝이라는 듯, 컴비네이션 타격이 묘기에 가깝게 구사된다.

기이한 움직임이었다.

훅이라고 생각하면 어퍼가 들어오고, 로우킥이라 생각해서 피하면 잽이 코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반면 내 펀치는 예외 없이 허공만 쳤다.

관장님의 조언이 어김없이 맞아들었다.

기예의 격차는 절망적.

나로선 탁월한 피지컬로 정타를 가까스로 흘리는 게 최선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몇 번이고 다운 당했을 것이다.

몇 번의 공방 끝에 빨간 마스크가 거리를 벌렸다. 그가 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흐음. 너 뭔가 이상하네. 기술이나 수 읽는 요령은 별로 없어 보이는데. 눈이 좋고 몸이 잘 따라 주는 건가? 이야. 너 사람이라기보다 거의 짐승이구나?”

“……감탄하지 말고 좀 가라.”

“너 내 밑에서 일해 볼 생각 없냐? 잘 다듬으면 물건이 될 거 같은데.”

“꺼지라니까.”

“크핫. 바로 까였네.”

“…….”

장이화가 눈을 빛내며 몸을 낮춘다.

젠장.

이번엔 ‘진짜’로 올 모양이다. 저놈이라면 날 납치해서라도 데려가겠지.

여기까지 와서 그딴 배드 엔딩을 맞이할쏘냐.

정신 바짝 차리고 어떻게든 버텨야겠다고 각오를 다지는 순간, 허공을 가르는 전화벨 소리가 우리 사이의 긴장을 흐트러뜨렸다.

“아 맞다.”

장이화가 머리를 긁적였다.

“노는 게 재밌어서 깜빡했네. 사실 너 괴롭히러 온 건 아니고. 오늘은 이거 배달하러 온 거거든. 자.”

그가 주머니에서 전화벨을 흥얼대는 폰을 꺼내어 내게 휙 던졌다.

나는 미심쩍은 기분으로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로 다짜고짜 으르렁대는 목소리가 전해졌다.

-……너 이 새끼 뭐 하는 놈이야?!

“이 목소리는 이길재……군.”

-내가 누군지 알면서 이 개짓거리를 다 했다고? 어디 소속이냐. 날 대체 왜 방해하는 거지? 뭐야. 뭐가 목적이야!

“내 목적이라…….”

보육원의 항구적인 평온 따윌 말한다고 그가 공감해 줄 리는 없겠지.

난 그가 공감할 수 있는 수준에서 말했다.

“난 네놈이 철저히 파멸했으면 좋겠다.”

전생에, 마기철 원장을 몰아냈던 주역이 바로 이길재였다.

마 원장을 날려 보낸 후, 놈은 우리 보육원에서 그의 흔적을 깔끔히 태워 없앴다.

돈 세탁, 외피 조직, 그런 자잘한 기능 따윈 없애고, ‘충직하고 값싼 노예 공장’으로 특화시키기로 한 것이다.

즉.

이길재야말로 우릴 지옥으로 처박는 데 가장 열성적으로 나선 작자.

나의 원수였다.

“드럼통을 시멘트로 채울 때, 가끔, 그 안에 눈을 뜨고 죽은 사람들이 있었어. 죽었는데도 어쩐지 눈만은 살아서 나를 꿰뚫어 보는 듯했지. 그 무렵부터 내 죽음의 이미지는 시멘트였다. 그래서 도시의 어딜 가도 나는 시체의 냄새를 맡는 듯했지…….”

-……뭐라는 거야 이 새끼가?

“한 번은 당신 닦달에 채권 추심에 나선 적이 있었어. 때려도 보고. 윽박질러도 보고. 딸이 있다기에, 우린 딸을 어쩌니 하면서 그를 협박했다. 그러니까 며칠 있다 딸하고 동반 자살을 시도하더라고. 아비는 죽고, 딸은 혼수상태로 겨우 살아남았지. 난 그때 당신의 말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달달 떨면서 이제 어쩌냐고 질문하자, 전생의 이길재는 이렇게 답했었지.

“이제 팔아먹을 게 생겼네, 라고.”

-너…… 내 밑에 있던 놈이냐? 그래서 나한테 복수하는 거야? 그딴 알량한 생각으로 내 앞을 막아서는 거라고?! 누구야. 너 대체 누구냔 말이야?!

“……내가 누구냐고?”

심장을 만질 수 있다면, 난 거기서 서리와 눈보라의 감촉을 느끼게 되겠지.

난 쓰게 웃으며 말했다.

“난 네 미래의 그림자이고, 징벌의 천칭에 오를 추다. 네 죄와 악행을 기록할 서기관이며, 끝내 그 모든 업을 추심하여 징벌을 내릴 심판관이다. 기억해 둬. 내 이름은 이한열이다. 죽어서 무덤에 유배될 그 순간까지 날 잊지 마라. 아니, 잊지 못하게 만들어 주마.”

-……허.

작은 헛웃음이

-허허허헛!

찢어질 듯한 광소로 점증되며 고막을 때렸다.

-끄하하하핫!! 크핫. 크히히힛!! 이한열?! 너야? 그 고삐리 새끼라고?! 말이……!! 크하핫! 말도 안 되는……! 미친!! 하핫!!

그리고 갑자기 웃음을 뚝 멈추더니 싸늘하게 말한다.

-죽여 주마. 네놈. 드럼통 따위의 관도 너 따위에겐 사치다. 찢어발겨 주지. 개먹이로 던져서 끝내 똥덩이로 만들어 주마. 그리고 남은 뼈는 잘 갈아서 널 가장 사랑하는 자에게 처먹일 거다. 반드시 그래주지. 반드시 내가……!

“뭐, 그러시든가.”

내쪽에서 통화를 뚝 끊어 버렸다.

그놈하고 더 할 말 따위 없었다. 나는 폰을 장이화에게 다시 던져 주면서 물었다.

“한 판 더 할 텐가?”

“응? 글쎄, 그것도 좋겠지만, 좀 있으면 경찰 온다며. 시끄러워지는 건 질색이거든……. 그리고 너 말이야.”

“……?”

“좀 더 커라. 아직 빈약해. 분발해서 좀 더 갖고 놀기 좋은 장난감이 되어 주었으면 좋겠네. 힘내라 소년!”

“미친 새끼.”

“하핫. 간다. 또 보자고.”

장이화는 친근한 사이마냥 인사를 건네며 멀어져 갔다.

나는 그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응시하다가, 그와는 반대 방향으로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경찰 사이렌 소리가 산 밑에서 아스라이 들려오고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