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능이 자꾸 늘어-94화 (94/164)

<재능이 자꾸 늘어 94화>

12. 새로운 시작 - 1

*   *   *

“이게 다 글라 주노프 탓입니다.”

겨우 스물넷의 나이. 2m에 달하는 거대한 체구. 학생 때 이미 차이코프스키에게 인정받은 천재적인 음악가.

자기 인생을 한 손에 쥐고 휘두를 수 있을 것 같은 사내가 그 인생에게 휘둘리는 장면은 어떤 희극의 한 대목 같았다.

“술 냄새가 났어요. 사람들은 믿지 않지만 저는 분명히 맡았다구요. 그는 지휘를 한 게 아니라 주정을 부린 겁니다! 제 음악을 그가 망쳐 버렸어요!!”

“그런가요?”

“그렇고말고요.”

“정말?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요?”

“…….”

라흐마니노프는 몸을 수그렸다.

음악성에 한 해선, 그는 의심할 여지없는 여로를 걸어왔다.

피아니스트로서 타고난 신체 조건, 탁월한 초견력, 어릴 때부터 두각을 드러낸 작곡실력까지, 전도유망한 음악가로서 러시아 음악계의 기대가 높았다.

그리고 기대가 높은 만큼 추락했을 때의 충격도 컸다.

야심차게 내놓은 교향곡 1번은 엉망진창이었던 초연 탓인지 평단의 극단적인 혹평을 받았다.

그저 지휘자에게 모든 원망을 쏟아부을 수 있다면 좋았으련만.

라흐마니노프의 음악가로서의 자존심은 그조차도 허락지 않았다.

“……아니요. 아닙니다.”

“뭐가 아니죠?”

“글라 주노프가 아니었더라도 좋은 평가는 못 얻었을 겁니다. 이제 알겠어요. 아니 원래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신동. 러시아의 프란츠 리스트. 쇼팽의 재림……. 그런 허언들이 제 눈을 속이고 있었습니다. 오만했죠. 쓰기만 하면 찬사가 뒤따라 올 거라 의심 없이 믿어 버렸어요. 그러니까 전 제 자만의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겁니다…….”

라흐마니노프는 부끄러운 민낯을 감추듯 얼굴을 감싸 쥐었다.

달 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예?”

“이제 당신은 자신의 내면을 직시하기 시작하신 겁니다. 모든 변화는 거기서부터 시작하죠.”

“변화……. 제가 다시 변할 수 있을까요.”

시무룩하던 표정에 이젠 체념의 기색까지 더해졌다.

“모르겠습니다. 모르겠어요. 예전의 저를 이루던 세계는 부서져 버렸습니다. 이젠 음표 하나 내려놓는 것조차 버거워요.”

“두려우신가요?”

“……예,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요. 이런 전개가 옳을까. 이러면 욕을 먹지 않을까. 평단의 취향이 어땠지? 끝없는 질문들이 내 속을 파먹는 기분입니다. 그러다 보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는 거죠.”

“흐음.”

니콜라이 달은 덩치는 산만 한 주제에 토끼처럼 웅크리고 있는 사내를 바라봤다.

그대로 끝없이 쪼그라들다 결국 하나의 점이 되어 버릴 기세였다.

‘……정말. 두고 볼 수가 없게 만드네.’

달이 라흐마니노프의 심리 치료를 도맡은 데에는 계산속이 있었다.

추락한 천재, 범속해져 버린 신동, 사람들은 아닌 척하면서 그런 뒷얘기를 쉽게 입에 담고, 가볍게 귀를 기울였다.

천재가 아닌 우리가 천재 기분을 내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천재를 우리 수준까지 끌어내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라흐마니노프의 몰락은, 본인에겐 미안하게도, 인기 좋은 담소 소재였다.

자신은 그 시류를 타고자 했을 뿐이다.

잊힌 천재의 화려한 부활.

극적인 재기.

성공만 한다면, 대중은 언제 깎아내렸냐는 듯이 다시 라흐마니노프를 추앙하고 경배할 것이다.

그가 높이 날아오를수록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심리학자의 이름까지 같이 드높이겠지.

니콜라이 달은 그걸 기대하고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의 심리 치료를 맡은 것이었다.

그게 전부다.

전부여야 했을 텐데…….

‘……근데 뭐냔 말이지. 이 기분은.’

달은 웅크리고 있는 저 음악가에게서 울고 있는 어린 소년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어떻게 할까요, 선생님. 대체 제가 뭘 어째야 합니까…….”

“음, 글쎄요. 꼭 뭘 해야만 할까요?”

“예?”

“생각해 봤는데…… 당신에겐 이런 치료법이 어떨까 싶군요, 세르게이.”

“……?”

그다음 날, 니콜라이 달은 오래된 비올라 하나를 들고 다시 방문했다.

“그건 뭡니까? 선생님?”

“제가 얘기 안 했던가요? 저도 한때는 음악도를 지망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불행히도 제겐 당신 같은 재능은 없었지만요. 그래서 지금은 아마추어 연주자로 만족하고 있지요.”

“아…….”

“한번 들어 봐 주시겠습니까? 제 연주.”

달은 비올라를 느리게 연주하기 시작했다.

바이올린이라는 불멸의 솔로이스트가 있기에 가려지기 쉽지만 비올라도 단독 솔로잉이 가능한 매혹적인 악기다.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의 멜로디가 방 안을 사뿐하게 내디뎠다.

라흐마니노프는 본능적으로 귀를 날카롭게 세워 들었다.

“어떻습니까? 제 연주.”

“……음, 선생님. 솔직한 감상을 말씀드려도 될까요?”

“예, 물론.”

“아마추어가 어설프게 거장을 따라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물론 아마추어이시니 당연하겠지만…… 뭐랄까요. 어쩐지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한……. 죄송합니다. 말로 하려니 서툴러서요.”

“괜찮습니다. 좀 더 디테일하게 지적해 주실 수 있습니까?”

“…….”

라흐마니노프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열없는 기색을 내비쳤다.

하지만 일단 입을 여니 미리 준비해 왔다는 듯 말이 쏟아져 나왔다.

“……스타카토 표현이 어색합니다. 산뜻하게 튕겨야죠. 너무 뚝뚝 끊기잖아요. 이 스타카토의 본질은 단절이 아닙니다. 한 몸인 멜로디가 불운한 사고로 떨어졌을 뿐인 겁니다. 언제라도 합쳐질 수 있을, 그러나 결국 이어지진 않은, 그 미묘한 긴장감, 그것이 바로…….”

“그럼 이렇게 하면…….”

“그것보단 이런 식으로…….”

지적하고, 질문하고, 다시 연주하고…….

라흐마니노프는 의아함을 느꼈다.

이건 심리치료가 아니었다. 비평회나 레슨이라 불러야 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달 박사는 아주 뻔뻔스럽게 그의 의아함을 무시했다.

“시간이 다 됐군요. 오늘은 이만하죠.”

다음 날에도 달 박사는 비올라를 들고 와 연주를 하고 감평을 요청했다.

그다음 날에도. 다다음 날에도. 며칠이고 그런 날이 반복됐다.

“전 원래 바이올린을 켜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강력한 경쟁자가 너무 많았어요. 저 재능 있는 자들 사이에서 살아남을 자신이 없었죠. 그래서 선택한 게 비올라입니다.”

“……그런 선택은 좀.”

“너무하죠? 근데 비올라 전공자 중 그런 사람 많을 겁니다. 말을 안 할 뿐이지. 하지만 비올라로 ‘도망치고’ 나서야 마침내 알았죠. 어딜 가고 무얼 하든, 음악이란 카테고리 안에 내 자리는 없다는 걸.”

“…….”

“오늘 치료도 시작해 볼까요?”

시간은 알레그로의 템포로 흘러갔다.

천재 음악가의 개인 교습에도 달 박사의 비올라 실력은 여전히 아마추어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심리 치료 역시 딱히 효과가 체감되지 않았다. 모든 게 답보 상태였다.

달 박사를 의심하고 싶진 않았지만 라흐마니노프는 조급했다. 하루라도 빨리 낫고 싶은데 지금 뭐하고 있나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서 하루는 다소 공격적으로 쏘아붙였다.

“이게 진짜 저한테 도움이 되는 겁니까? 제가 심리 치료에 조예는 없습니다만 이런 방식은…….”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으십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선생님이 대체 어떤 의도로 이러시는지도 모르겠고. 배부른 걸 알라는 뜻인가요? 재능 없는 나도 이렇게 열심히 하니 투정부리지 말라고? 하다보면 다 느는 거라고?”

“…….”

“아님 세상엔 이렇게 못하는 놈도 있으니 기운 차리라 이겁니까? 웃기지 마십쇼! 당신과 나는 다릅니다! 나는 음악에 내 삶을 걸었습니다! 내겐 뒤가 없단 말입니다!”

“그런가요? 정말로?”

“무슨 말장난을…….”

“당신은 어린애입니다.”

뜬금없는 말에 라흐마니노프는 눈살을 찌푸렸다.

“천재들이 보통 그렇죠. 넘어진 적이 없으니 일어서는 법도 모릅니다. 실패를 모르므로 체념도 모릅니다. 위기가 없으니 타협을 학습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극복의 요령을 깨우치지 못한 채 컸습니다. 몸뚱이만 비대해진 어린애죠.”

“……그래서 어쩌라는 겁니까. 이제 배울 기회가 왔으니 배우라는 겁니까? 예! 다른 건 몰라도 체념은 충분히 알 거 같네요!”

“제 말을 잘못 이해하셨군요. 당신은 어린애고, 어린애는 놀아야 합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예?”

“세르게이, 당신은 왜 음악을 합니까? 왜 삶을 걸었죠? 그것이 무엇이기에?”

“그건…….”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아비는 술과 도박으로 가산을 탕진했다. 가세가 기울지 않았다면 누이도 죽지 않았을 것이다.

작은 세르게이에게 세상은 높은 벽이었고 오로지 음표 안에서만 그는 자유로웠다.

그 안에 벽은 없었다.

그래서 음악 안에서 처음으로 만난 벽에 당황했던 것이었다.

“내가 비올라를 켤 때, 당신은 내 얼굴을 본 적이 있습니까?”

“……물론, 아니, 있었? 없었나?”

“없었습니다. 당신은 내 운지와 소리에만 집중했죠.”

멍하니 자신을 보는 라흐마니노프에게 니콜라이 달은 멋진 웃음을 보여 주었다.

“그럼 이번에는 확실히 보세요.”

달 박사가 비올라를 켠다.

몇 번이고 보았던 자세와 운지법.

몇 번이고 들었던 레퍼토리.

그다지 진보하지 않은 기예.

그럭저럭 괜찮지만 완벽주의자의 혹평을 면치 못할 연주.

저토록 즐거워 마지않는 표정으로.

그가 펼쳐 낸 선율은 멀리 가진 않아도 오래 머물렀다. 머물러서 짙게 고였다.

섬세한 손. 뜨거운 가슴. 빛나는 눈.

그는 한마디의 공전과 한 템포의 자전으로 완성된 하나의 우주였으며 그의 비올라는 그 안에서 영원을 노래했다.

두근.

심장이 뛴다.

어릴 적 잃어버린 어떤 부품이, 이제야 제자리를 찾아와 몸속 어딘가에 끼워 맞춰진 기분이 들었다.

라흐마니노프의 안에서 한 번은 완전히 와해되고 무너져 내린 음악이, 다시금 그의 삶에 쌓이기 시작했다.

노래가 끝나고, 활을 내리며 달 박사는 말했다.

“아마 외부 인터뷰 때는 이렇게 말할 겁니다. 자기 암시를 강조했다. 할 수 있다고 되뇌게 했다. 긍정적인 마인드를 심어 주었다……. 사람들은 그런 걸 신뢰하니까요. 세르게이. 당신에게도 그렇게 말하려 했습니다.”

“……그럼 왜.”

“당신에게서 음악을 미워할 뻔한 과거의 나를 봤으니까요. 그러지 않길 바랐습니다.”

범재와 천재.

그건 단지 속도의 차이일 뿐이라고 달 박사는 말하고 있었다.

실패의 경험에 한해서는 자신이 선배라고. 그러니까 날 믿고 한껏 실패해 버려도 좋다고.

그렇게 했다.

세르게이 바실리예비치 라흐마니노프는 27세의 나이에 유년기의 울음을 터뜨렸다.

“음악을 하는 이유를 밖이 아니라 안에서 찾으세요. 그럼 슬럼프 따윈 언제가 되든 극복해 낼 겁니다.”

바로 그날 밤.

라흐마니노프는 3년 만에 음표 하나를 찍는 데 성공했다.

훗날 불후의 명곡으로 길이 남을 ‘피아노 협주곡 2번’은 그렇게 만들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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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가 라흐마니노프의 음감](Rank B)을 습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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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한 달 만에, 조퇴 없이 학교를 온전히 마쳤다.

다음 주부터 기말고사란다.

입양 전략을 포기했으므로 이제 내게 성적은 큰 의미가 없지만 그래도 세상일 어찌 될지 모르는 일이므로 최소한의 구색을 갖춰 놓아야지.

여기서 최소한이란 전교 1등 정도를 뜻한다.

뭐, 그 정도야 살짜쿵 노력하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거 아니겠는가.

‘생각해 보니 입양 얘기가 오갈 때가 됐네. 배윤하는 잘하고 있으려나.’

배윤하는 전생과 마찬가지로 학생회 집행부에 들어갔다.

그동안은 그녀도 자리 잡느라 바빴을 거고, 난 나대로 깡패 새끼들 때려잡느라 서로의 근황을 물을 정신이 없었지.

오랜만에 방과 후까지 학교에 남아 있게 됐으니 야구부나 들를까 하여 교실을 나섰다.

물론.

“한열아! 뉴스에 나온 거 너 맞아?!”

“너 화면 빨 지리더라. 야야. 나 사인 좀 해 주라. 내 동생이 너 팬이란다.”

“한열이 너 팬클럽도 생겼어. 들어가 봤니?”

“일본에서 너 잡겠다고 닌자 보낸다던데 아직 온 거 없냐?”

따위의 관심에 반응해 주는 귀찮음을 감수하면서 야구부실에 도착.

때마침 부원들이 왁자지껄 비품을 옮기고 있었다.

“어? 한열이다.”

“우왓. 유명인이네.”

“오-. 오랜만이네. 우리 불량 매니저?”

“너 매니저 그만둔 거 아니었냐?”

“우우. 유령 회원은 가라!”

내 앞에서 투정이라니 가소로운 것들.

“내 덕에 오른 부비랑 교체된 신상 비품들 다 토해 낼래?”

“유령 회원은 가서 벤치에서 푹 쉬라고. 오느라 고생했잖아.”

“일 처리가 너무 완벽해서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지 뭐야. 아유, 완전 야구계의 요순임금이랄까.”

피식 웃었다.

이래봬도 학생회장 측근 비스무리한 위치까지 올라갔던 터라 야구부에 쾌척해 준 혜택이 꽤 됐지.

그리고 지금 그 역할은 배윤하가 맡아서 하고 있다.

그 때문일까. 매니저 두 명이 한꺼번에 공석이 됐지만 야구부는 창립 이래 유례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물론 여전히 실력은 없지만 말이죠-.

“윤하는?”

“요새 잘 못 오는 거 알잖아. 학생회 일로 바쁘대. 그쪽으로 가 보지?”

학생회실이 불편해서 이쪽으로 온 건데.

집행부 거절한 뒤에도 바빠서 몇 번 연락을 씹었던 전력이 있어서 어쩐지 안면몰수하기 힘들었다.

나중에 과일이나 사 가지고 가고 오늘은 이만 돌아가야지-.

싶은 순간 누군가 내 어깨를 잡았다.

“한열아. 그냥 가는 거야?”

“음?”

짧은 머리에 구수한 인상의 사내가 심각한 표정으로 날 붙들고 있었다.

야구부 쌍둥이 중, 선발 투수를 맡고 있는 동명이란 아이였다.

“엉. 가려고 했는데. 왜?”

“……그, 할 말이 있는데.”

“할 말 있으면 해야지. 뭔데?”

“잠깐 자리 옮겨서 둘만 얘기할 수 있을까?

의아했지만 태도가 진지했다.

동부파 쪽 일도 한시름 덜었겠다, 오늘은 좀 느긋하기로 마음먹은 차이니 이 정도 시간은 낼 수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나가서 얘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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