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능이 자꾸 늘어-95화 (95/164)

<재능이 자꾸 늘어 95화>

12. 새로운 시작 - 2

“그래 뭐. 나가서 얘기하자.”

양동명.

그는 선발 투수임에도 내 기억에 흐릿했다.

그건 특이한 일이었다.

타자는 실력을 증명해야만 눈에 띈다. 어떤 스포츠든 실패한 공격수는 기억에 잘 남지 않는 법이니까.

반면 투수는 실패하든 성공하든 주목받는 이례적인 위치에 있다.

그건 수비의 비중을 한 사람에게 몰아주는 야구라는 스포츠의 특수성에 기인한다.

마운드는 투수에게 헌정된 독무대다.

따라서 기억에 희미한 선발 투수라는 건 그 자체로 형용 모순에 가깝다.

비유하자면 존재감 없는 비주얼 담당 아이돌, 혹은 코러스에 묻히는 리드 보컬처럼 불가사의한 존재인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자판기에서 음료를 내려 받아 돌아오는데 벤치에 뻔히 앉아 있던 녀석을 순간 시야에서 놓치고 말았다.

뭐지 이 녀석.

그냥 존재감 없음이 재능인가.

장래희망 잘못 정한 거 아니야? 야구 선수가 아니라 닌자를 지망했으면 대성했을 텐데.

“어, 잘 마실게. 고마워.”

“그러든가. 할 말이란 건?”

“음 그게…….”

산만 한 덩치가 축 처져서 우물쭈물했다.

그는 더위 먹은 북극곰이 지을 법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한열아. 요새 부실에 안 오는 거 혹시 나 때문이야?”

“뭔 개솔.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 듣냐. 여긴 뭐 난청 바이러스가 서식하나.”

“듣기는 했는데……. 그래도. 애들이 자꾸 그러니까……. 괜히 나 때문에 빈말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계속 들더라고. 그래서 꼭 진지하게 얘기해 보고 싶었어.”

과대망상과 빈약한 자존감이 극적인 랑데부를 이루고 있었다.

이런저런 헛소문이 있다는 건 알고 있다.

이한열이 야구 초보라는 건 거짓일 것이다. 경력을 숨기고 있다. 코치의 러브콜을 받은 것만 봐도 확실하다. 그는 야구를 사랑하고 의지도 있지만, 선발을 놓지 않으려는 양동명의 텃세에 떠밀려 매니저에 머물러 있다.

라는 둥의, 정말 기가 막힌 정확도로 진실을 피해 가는 순도 100퍼센트 헛소문이 망령처럼 야구부를 떠돌았다.

난 그냥 귀찮아서 정정하지 않았을 뿐인데, 부원들이 그런 내 태도를 순응과 체념으로 멋대로 해석하고, 암암리의 진실로 굳어져 버린 것이다.

“너 최근 들어 매니저 일도 조금씩 손을 뗐잖아. 이제 미련을 놓고 있는 걸까. 그렇게 야구와 천천히 멀어지려는 걸까……. 그런 이야기들이…….”

“음. 헛소리가 개소리로 진화했네.”

“정말로 아니야?”

“아니라니깐. 니들은 사람 말을 정말 귓등으로도 안 듣는구나. 무슨 아줌마들이냐. 야구 연습들은 안 하고 뭘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뒷담을 만들고 있어?”

“……아.”

그의 탄식에서 나는 작은 위화감을 느꼈다.

동명의 위치상, 내가 선수 활동에 관심이 없어야 이득일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에게서는 아쉬움과 자책감, 자괴감 등이 읽혔다.

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 그런 표정이냐?”

“응?”

“내가 선수 안 한다면 넌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니냐?”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않거든.”

“……?”

“나 야구부 그만둘 거라서.”

난 조금 놀랐다.

“왜? 헛소문 따위에 휩쓸리지 마. 당사자가 아니라는데 말이야.”

“꼭 소문 때문만은 아니야……. 아니, 소문 때문인가? 너 그거 알아? 소문이라는 건 사실 사람들의 속마음과 닮아 있어. 개개인은 솔직하기 힘들잖아. 그러니까 소문 뒤에 숨어서 솔직해지는 거지. 그게 헛소문이든 아니든 상관없어. 걔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건 사실이니까.”

“…….”

요컨대 양동명의 투수로서의 무능을 성토하고픈 대중의 속내가 그런 헛소문으로 표현됐다는 뜻일 것이다.

이 녀석, 존재감 은닉과 더불어 심리 분석 면에서도 재능이 있군. 야구만 아니면 어디서 뭘 하든 먹고는 살겠어.

어쨌든.

“그래서? 애들이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만두게?”

“그리고 네가 의지가 있다면 너한테 선발 자리를 넘기려고 했지. 코치님이야 당연히 수긍할 거고. 나도 후임을 마련해야 부담 없이 떠나니까.”

“왜 이제 와서?”

“응?”

“그렇잖아. 소문이 아니었더라도, 네 역량쯤은 이미 알고 있던 거잖아. 근데 이제 와서 이러는 이유가 뭐냐고.”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와서는 아니야. 늘 생각하고는 있었어. 네가 계기가 되었을 뿐이지.”

“그건가? 동생?”

“……응?”

“네 동생, 양해명 때문이냐고.”

“와, 너 정말 눈치가 빠르구나? 윤하보다 더한데?”

투수로서의 존재감은 제로에 가까운데 내가 양동명을 그나마 기억하고 있는 이유.

야구부실에서 동명, 해명 형제가 멱살 잡고 싸운 걸 목격했었기 때문이다.

그때도 양해명은 양동명이 괜한 욕심을 부리고 있다는 식으로 몰아갔었지.

완전히 헛짚고 있었지만.

아무튼.

“그땐 욱해서 싸웠지만……. 그날 집에 돌아오면서 생각했어. 해명이랑 이렇게 오랫동안 말을 섞은 적이 있던가. 거의 오 년만 아닌가. 괜한 내 자존심 때문에 우리 사이가 회복되지 않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

“아니야.”

“응?”

“양해명 그놈은 너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어. 아니, 피해 의식이라고 해야 맞겠네. 네가 포기한다고 없어질 게 아닌 거 같은데.”

“…….”

그 이유도 대충은 알 것 같았다.

-동명이는 아버지가, 해명이는 어머니가 맡아서 키우기로 했나 봐. 근데 묘하지. 해명이는 아빠한테 버림받았다고 생각해. 반대로 동명이는 엄마한테 외면 받았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서로를 미워하는 거야.

둘이 치고받던 날, 스피드웨건 배윤하가 해 준 배경 설명이었다.

하지만 내 감에 따르면, 둘 중에 동생인 양해명의 감정 쪽이 훨씬 밀도가 높았다.

이건 추측이지만…….

“양해명, 그놈은 자신이 선수로서 무능해서 아버지한테서 버림받았다고 생각하지? 그래서 네 유능함을 깎아내리고 싶은 거야. 아닌가?”

“…….”

“맞나 보네.”

난 혀를 쯧 찼다.

인간이란 어쩜 이렇게 뻔한지. 지나치게 식상해서 두통이 생길 지경이었다.

양동명은 입을 일자로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 하지만 다 맞는 건 아니야.”

“…….”

“아버지는 내 선수로서의 가능성을 내다보고 날 택했어. 하지만 내 재능은 딱 유소년 시절까지였지. 반면에 해명이는 고등학교에 들어오고 나서야 재능이 개화했어. 경기를 보는 혜안, 분석력, 정밀한 디렉션……. 포수로서는 거의 탈고교급이지. 지금의 나로선 해명이의 발만 붙잡을 뿐이야.”

“그래서?”

“해명이의 가치를 제대로 받쳐 줄 투수가 필요해. 그래야 아버지가 해명이를 제대로 봐줄 테니까.”

“그게 나라는 거냐?”

“그래. 해명이가 열등감을 느낀다는 건 맞겠지. 하지만 그건 5년 전에 머물러 있어. 현재 실력과는 관계가 없지. 그러니까 해소되지도 않아.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려면 매듭의 처음으로 돌아가야 해.”

그가 내게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그러니 이렇게 부탁할게. 이번 전국체전 예선까지만이라도. 어떻게…… 안 될까?”

“……왜 그렇게까지 하려는 건데? 그런다고 너한테 돌아가는 게 뭐라고.”

양동명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말이 더뎠고 표정이 모호했다. 아마 여기서부터의 논리는 그 스스로도 정리해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 작업을 그는 짧은 몇 초 동안 해냈다.

입매와 눈빛이 비슷할 정도로 단단해졌을 때, 그는 말했다.

“형이니까. 아직 형인 게 부끄러워서. 아무것도 안 하고 형일 수는 없게 됐으니까. 그동안은 내 욕심에 취해서 무시하고 있었지만…… 이제 더는 외면할 수가 없게 됐거든.”

“왜?”

“널 봤으니까.”

녀석의 시선이 생것처럼 펄떡여 날 건드렸다.

“내 재능으론 평생 발치에도 못 쫓아갈 사람이 등장했으니까. 그럼…… 이젠 싫어도 인정해야지. 놓을 때가 되었다는 걸.”

*   *   *

“이년입니까? 씨이뻘. 졸라리 이쁘게 생겼네. 얘는 잡아다 어디 씁니꺼? 혹시 돌려 먹을 시간은 좀 있을까 모르겠네.”

부하 놈들이 사진 속 여고생을 보면서 입맛을 다셨다. 눈에서 성욕이 뚝뚝 흐르는 게 아주 속편해 보였다.

김득칠은 그런 부하들이 한심하면서도 부러웠다.

그는 가끔 생각했다.

신께서 자신을 창조하실 때 공들이다 졸아 버린 게 분명하다고. 딱 애매하게만 부여된 유능함은 그를 늘 번민케 했다.

이놈들처럼 아주 멍청했더라면 속앓이는 안 했을 텐데. 반대로 아주 유능했더라면 지금 이 지경까지 몰리지도 않았을 텐데.

어중간한 새끼.

애매하게 똑똑해서 모호하게 좆된 새끼.

왜 나는 이 모양으로 태어나서 이 꼴이 되었는가에 대한 종교적 고찰은 김득칠에게 어떤 안식도 안겨 주지 못했다.

“……건드릴 생각 마라. 길재 형님께서 말했잖나. 계획에 없는 짓은 하지 말라고.”

“요새는 말만 그리하고 코빼기도 안 비친다 아입니꺼. 또 전화로만 깔짝이다…….”

“입 조심해라.”

“아니이. 으차피 이빨 빠진 호랭이 아입니꺼. 형님도 다…….”

“닥치라고 했다. 잇몸을 뽑아 버리기 전에.”

“아이고마 알았심더. 뭔 말을 못 하것네. 그래서 인마 가지고 놀아도 됩니꺼? 안 됩니꺼? 아따 궁디가 으리으리한 게 아주…….”

결국 놈은 김득칠에게 명치를 까이고서야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부하들이 왜 불만인지는 그도 잘 알았다.

이길재는 잘나갈 때는 괜찮은 상사였다.

돈 계산 철저하고. 상벌 확실하고. 걸쭉한 입은 깡패 그 자체인데 일 처리는 더없이 스마트했다.

그런 지능적인 면모가 못 배운 조직원들에게 모종의 카리스마로 비치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같은 시절엔 그 장점들이 고스란히 단점으로 변했다.

지능적인 행보는 소인배스럽게 보였다. 전략적 후퇴는 겁쟁이의 뒷걸음질로 비쳤다. 배짱 없이 뒤에 숨는 자를 누가 형님으로 받들어 모시겠는가.

‘……어리석다. 이럴 때일수록 전면에 나서서 리더의 자격을 입증해야 하는데. 숨어서 하는 짓이라곤 고작 화풀이라니.’

화풀이.

그렇다.

그 말 외엔 적당한 말을 찾기 힘들었다.

저 여자애를 납치해서 어쩔 것인가.

딴에는 이한열을 유인할 미끼로 쓰겠다는 것 같은데, 전혀 현실적이지 않다.

머저리가 아니고서야 이런 속 보이는 함정에 걸릴까. 십중팔구 경찰에 납치 신고를 하겠지.

그럼 동부파는 민족 반역자라는 이름 위에 납치범이라는 해시태그가 붙을 테고, 경찰은 좋다고 더 빡세게 수사에 임할 것이다.

아무리 봐도 자충수다.

남은 건 결국 ‘날 좆 되게 만들었으므로 네 소중한 걸 망치겠다!’는 참으로 깡패스러운 논리인데, 아니, 깡패짓도 분위기는 봐 가면서 해야 할 거 아닌가.

‘……위험한 건 맨날 나한테만 시키고. 개발새발 형님 새끼.’

김득칠은 한숨을 쉬며 최종 브리핑을 읊었다.

“자, 잡담은 그만. 얘 얼굴 다 기억했지? 배윤하라는 녀석이다. 이한열에게는 경호원들이 붙어 있고, 뭣보다 이놈 자체가 괴물이라서 함부로 담글 수가 없지. 그래서 이한열과 가깝다고 알려진 여자애를 납치해서 미끼로 삼으려는 거다. 여기까지 질문?”

“없슴다.”

“좋아. 저 계집애는 오늘 봉사 활동을 마치고 늦게 귀가할 계획이다. 10시 넘어서 이곳 골목을 지나칠 예정이고. 그때 할매가 등장해서 살살 꾄다. 계집은 아픈 할매를 지나치지 못하고 짐을 들어드리기로 하지. 그렇게 저 밑에 골목까지 도착하면…… 게임 끝. 거기엔 CCTV도 블랙박스도 목격자도 없으니까 쓱 픽업해서 가면 끝이다. 질문 없지? 특히 할매.”

차 한 구석에 있던 작은 체구의 여자가 빽 소리 지른다.

“아, 왜 자꾸 할매라 그래. 다 분장인데. 나 아직 마흔도 안 됐다고!”

“아 됐고. 질문 있어? 네 역할이 가장 중요해. 비싼 돈 주고 섭외했으니 돈값은 하라고.”

“하. 내가 왕년에 충무로 기대주였던 거 몰라? 걱정 붙들어 매셔.”

물론 그녀에게 경력이라곤 에로 영화 5편뿐.

그냥 평행 세계의 충무로에 다녀왔겠거니 하며 김득칠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침묵할 때를 아는 남자였다.

“……계집이 지금 출발했답니다. 10분 뒤 도착예정입니다, 득칠 형님.”

“좋아. 할매는 빨리 나가서 쓰러질 준비하고. 남재는 시동 키고. 다들 포지션 잡아.”

할매가 차를 내렸다.

회색 뽀글 머리 가발에 몸빼 바지, 둥그런 보자기를 머리에 인 그녀는 ‘막 상경한 시골할머니’의 전형이었다.

그녀는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다가 타겟이 접근하면 알맞은 순간에 발목이 삘 예정이었다.

발목 부근에 실리콘을 덧붙여 ‘부어 보이는’ 분장까지 완비됐다. 준비는 끝이다. 이제 십 분만 기다리면…….

그때였다.

골목을 걷는 할매의 옆으로 낯선 차 한 대가 쓱 다가오더니, 문이 덜컥 열렸다.

몇 개의 팔이 그녀를 차 안으로 끌어당겼다.

거기 유일하던 인기척이 사라지고 차는 의뭉스럽게 골목을 빠져나갔다.

그걸 뻔히 바라보던 조폭들의 뇌리에, 꽤 익숙하지만 당하는 것까지 익숙하지는 않던 단어가 떠올랐다.

납치.

“어?! 어어?!”

“뭐, 뭐야?! 쟤 왜 없어졌어!”

“따라가!! 따라가!!”

“시발 뭐야?! 뭐야!! 저 새끼들 뭔데?!”

그들의 밴이 반사적으로 납치범들의 뒤꽁무니를 쫓았다.

김득칠은 얼마 전에도 느낀 바 있던 위화감에 사로잡혔다.

안 돼. 뭔가 잘못됐다. 멈춰야 해.

그러나 그때와 마찬가지로, 그의 직감은 빠르기만 할 뿐 사태를 호전시킬 대안까진 내놓진 못했다.

그래, 자신은 늘 그랬다.

이 유능함은 언제나 어중간하여 결정적인 순간을 눈 뜨고 지나치곤 했다.

지금도 그 순간임을 김득칠은 오랜 경험으로 미루어 짐작했다. 그리고 곧, 정말 그렇게 됐다.

꺾인 골목에서 외딴 차가 하나 불쑥 튀어나와 밴의 옆구리를 들이박았다.

“어억!!”

기우뚱, 기울던 밴이 끝내 넘어갔다.

지면과 수직이던 몸이 수평으로 전환되는 감각 속에서, 김득칠은 실시간으로 생각했다.

아, 여기는 우리가 작업하려 했던 바로 그곳이었구나. CCTV도 블랙박스도 없겠군. 이대로 이렇게 납치당해도 아무도 모를 것이고. 우리가 의도했던 바대로…….

그리고 다음 순간 격렬한 반발감과 함께 그는 정신을 잃었다.

*   *   *

“……잡았군.”

난 정신을 잃은 김득칠을 밴 밖으로 꺼내면서 중얼거렸다.

김득칠은 이길재의 오른팔까진 아니지만, 손가락 다섯 개 정도는 되는 인물이다.

이로써 이길재의 패 하나를 압수한 셈이지.

“내 가족을 노리면서 그렇게 허술해선 안 되지.”

날 직접 칠 수는 없으니 내 주변사람들을 노릴 거라 생각했다.

이길재는 평소엔 엄청 논리적인 척하면서 흥분하면 감정적으로 움직이는 인간이니까.

LS그룹 경호원들이 밴에 깡패들을 하나하나 실어 날랐다.

작업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 이 과장이 다가왔다.

“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네……. 그래서 이제 어쩔 거냐? 경찰에 넘기진 않을 거고.”

“힘들여 잡았는데 그럴 순 없죠. 일단 감금해 두고, 뽑을 수 있는 정보는 다 뽑아먹을 생각입니다. 찬찬히. 써먹을 용도는 그다음에 생각하죠.”

“가끔 이런 생각을 해. 이 판에서 가장 악마는 네가 아닐까 하고.”

“하핫. 세상에 악마가 얼마나 많은데요. 저 따윈 아직 한참 정진해야 됩니다. 그나저나 자백제가 좀 필요하겠는데요. 고문은 귀찮으니까.”

이 과장이 질린 표정을 짓는 와중 김 대리가 작업 완료를 알려왔다.

“다 실었습니다.”

“그럼 길가에 노숙 중인 이 차만 처리하면 되겠군. 좋아. 수고했어.”

다른 경호원들을 다 보내고, 색이 바랜 가로등 밑에서 이 과장과 잠시 말을 나눴다.

“……경찰 측에서 나온 얘긴데 말이야.”

“네.”

“일본은 원래부터 동부파를 배신할 생각이었던 거 같다. 원래 계획은 경매에서 ‘가짜 유물’을 사들이고 입 닦는 거였지? 근데…….”

“약속을 어기고 가짜라고 꼬투리 삼을 예정이었겠죠. 반한 감정을 부추기려고. 진짜는 숨겨 뒀다가 나중에 일본 정부의 업적으로 적당히 치장해서 발표할 예정이었겠고.”

“어, 알고 있었냐?”

“예상은 하고 있었죠. 일본 놈들 머리 좋거든요. 이 정도 계산까진 다 했겠죠.”

이길재도 조금만 덜 조급했더라면 거기까지 생각에 미쳤을 거다.

애당초 조폭과 정부가 대등한 거래가 가능했겠는가.

물론 지금 와선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들이 됐다. 내가 중간에 개입하는 바람에, 이길재든 일본 정부든 공평하게 엿을 처드셨으니까.

“그리고 너, 예술 축제에 출품한다는 건 어떻게 됐냐?”

“이제 마무리 작업 중이에요. 왜요?”

“알아보니까 그쪽도 살벌하드만. 실력만 좋다고 되는 세계가 아니야.”

“뭐, 각오는 했어요.”

“각오만 하면 안 돼. 예선을 통과하려면 후견인 내지 추천인이 필요하다던데. 물론 공식 심사 기준에 그런 건 없다만…….”

“……예, 이해했어요. 어차피 다 인맥이라 이거죠.”

“그들만의 리그라는 느낌이네. 나로서는. 어쨌든 추천인을 구해 보는 게 좋을 거야. 너네 학교 인맥 빨 세우기 좋다며. 한번 찾아보던가. 예술 종사자 중에 끗발 세울 만한 사람으로.”

“흐음.”

이해했다.

이 부분은 덤이란 느낌이라 살짝 안이하게 접근한 것 같네. 안 돼. 긴장감을 조이자.

만만하게 생각했다간 작은 코까지 핀 포인트로 박살 날 수 있었다.

“예술계 종사자라…….”

난 턱을 긁적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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