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능이 자꾸 늘어-96화 (96/164)

<재능이 자꾸 늘어 96화>

12. 새로운 시작 - 3

“예술계 종사자라…….”

난 턱을 긁적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딱히 생각나는 구석은 없었다. 찾으면 있겠으나 핵심은 ‘추천’이 가능할 정도의 예술계의 입지일 것이다.

그런 사람이 찾는다고 뚝딱 찾아지나. 찾아진다고 날 대뜸 추천해 줄 호인일 것인가.

아무래도…….

“노답인데요.”

“하긴 접수 마감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제 와선 힘들겠네.”

“일단은 심사 위원의 양심에 호소해 봐야겠네요.”

“글쎄. 내가 예술계는 잘 모른다만, 내 경험상 ‘협회’ 명함을 달면 사람이 병신이 되거나 꼰대가 되더라고. 가끔 둘 모두를 섭렵하는 기린아가 등장하기도 하고. 그러니까 그냥 포기해라. 맘 편하게.”

“그냥 포기하기엔 노력한 게 아까워서……. 꼰대력이 아직 미성숙한 새내기 꼰대이길 바라야죠.”

한 달 동안 작품 하나에 매달렸다.

난 원래 예술적 소양이 높은 사람이 아니다. 열정도 관심도 크게 높지 않다.

[미학]의 재능은 충만하고, 카르마를 쏟아서 손발의 경험도 깃들었지만, 숱한 붓질 끝에 나이테처럼 내면에 아로새겨졌을 예술가의 고유성은 내게 없었다.

나는 명백한 반쪽짜리다.

따라서 그림을 그릴 때도 장민욱의 ‘흉내’를 낼 수밖에 없다. 출품하기 위해 현재 준비 중인 작품도 마찬가지다.

그건 장민욱이 생전에 마지막으로 구상했던, 그러나 병마의 습격으로 끝내 그려지지 못한 예술적 발상을 구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달리 말해, 남의 아이디어를 잘도 베꼈다.

물론 표절에 대한 죄책감은 없었는데, 왜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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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민욱의 미학적 재능] : 관련 퀘스트 발생!

- 장민욱의 회한이 담긴 마지막 작품을 완성시키자. 걸작의 완성도로.

- 보상 : 자색 카르마, 완성도에 따라 차등지급.

===

카이로스 예술 축제 리플렛을 받은 순간 떠오른 퀘스트였다. 난 시킨 일을 할 뿐인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힘들여 완성시킨, 거장의 숨결이 담긴 걸작이 예술계의 속사정으로 묻히는 건 다소 부조리하지 않을까.

“아무튼 할 수 있는 데까진 해 보려고요.”

“그거야 네 자유다만. 어쨌든 우린 한 팀이니까. 괜한 일로 힘 빼다 나자빠지면 내가 곤란해.”

“별 걱정을 다 하셔.”

우린 그 뒤로 몇몇 계획 사항을 점검하고 헤어졌다.

쓰레기 분리수거에 잠깐 분주했던 골목은 그 후유증을 앓듯 과하게 조용해졌다.

괜히 허전해서 일부러 발자국 소리를 내며 서성이길 5분, 가로등 밑에 익숙한 인영이 비추었다.

“뭐야. 이한열 왜 여기 있어?”“야, 넌 여자애가 뭐 밤늦게까지 싸돌아다니냐? 위험하게.”

“뭐래. 내가 이 길을 몇 년을 지나다녔는데. 눈 감고도 가겠고만.”

“하. 넌 나 아니었으면 납치당해서 내일 아침에 통통배 탔다. 네가 그걸 알아야 하는데.”

“푸학. 통통배래. 언제적 얘기야.”

진짠데.

배윤하가 겔겔 웃을 때마다 포니테일이 좌우로 흔들거렸다.

오늘은 카메라가 없었다. 믿을 만한 정보통(장세미)에 따르면 요새는 있는 날, 없는 날이 반반이라고 한다.

점차 나아지고 있다는 뜻이겠지. 난 손짓을 하며 앞장섰다.

“어쨌든 가자. 늦었다.”

“으흐응. 누나 걱정 돼서 나온 거야? 한열이 기특하네.”

배윤하가 팔을 쭉 뻗어 내 정수리를 토닥였다.

“미칫나.”

“부끄러워할 것 없어. 이게 다 내가 좀 과하게 매력덩어리인 탓이지. 나만 보면 뭐라도 해 주고 싶은 게 정상이란다. 유전자 단계의 반응인 것이지.”

“이젠 입으로 똥을 싸는구나.”

“츤데레.”

“과대망상가.”

우린 언제나처럼 투닥 거리면서 골목을 걸었다.

“학생회는 할 만하냐? 학생회장 신임은 좀 얻었고?”

“그럼 내가 누군데. 순진한 부르주아들 살살 꾀어서 다 뇌살시켰지. 하, 나 큰일이네. 이 주체할 수 없는 인기 어쩔 거야.”

“네가 걱정해야 할 건 인기가 아니라 네 머리통인 거 같다만.”

“아무튼. 그러는 너야말로 대체 어딜 그렇게 다니는 거야? 요새는 수업도 잘 안 듣는다며.”

“정의의 자경단 활동을 하는 중이시다. 자세한 건 대외비.”

“뭐야 그게.”

길은 어두침침했고 가끔 가로등에 밝아졌다.

달빛도 눈여겨보지 않는 땅이었지만 배윤하는 거침없이 발을 뻗었다.

번듯하지 않은 곳도 번듯하게 걷는 게 그녀다웠다.

세상이 곁을 내주지 않아도 우린 여기에 있었다. 여기 있다고 재잘재잘 떠들었다.

“동명이 얘기는 들었어?”

“……음. 그래.”

“반응이 떨떠름하네. 왜? 대신 공 좀 던져 달라고 너한테 부탁이라도 하디?”

“어.”

“어? 진짜?”

배윤하가 헤 입을 벌렸다.

“뭐야 그 반응은.”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 원래 운동 같은 거 완전 젬병이었는데. 본체는 외계인한테 납치당하고 어디 강화 클론 같은 거 내려 보낸 건가? 갑자기 수학 잘하게 된 것도 그렇고. 수상해…….”

“악! 어딜 꼬집어?”

“실리콘 아닌가 만져 봤어. 와. 외계인 기술력은 대단하구나.”

“……미친. 난 그냥 대기만성 하는 타입인 거거든?”

“뒤늦게 포텐 터진다는 게 진짜로 있긴 있구나. 헤에.”

그녀가 눈을 껌벅이다가 말했다.

“아무튼, 그래서 뭐라고 했어?”

“뭐가.”

“동명이 부탁 말이야. 대체 투수 못 구해도 그만둘 생각인 거 같던데.”

“…….”

난 잠시 기억을 되새겼다. 그 자리에서 난 뭐라고 대답했더라. 아마 이런 식이었던 거 같은데.

“징징대지 말고 연습이나 하라고 했지.”

“너답네.”

“그럴 시간도 없어. 하는 짓도 별로 맘에 안 들고.”

“왜? 꽤 기특하지 않아? 그래도 동생을 생각한 건데.”

“웃기는 소리. 걘 누굴 생각해서 그러는 게 아니야. 그냥 도망간 거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현실에서.”

난 안다.

다른 사람은 다 못 알아 봐도 나만은 알아볼 수 있다.

왜냐면 내가 고스란히 겪어 봤던 과정이니까.

억눌리고, 소외되고, 배척받고, 무시당하고, 그런 과정을 계속 겪다보면 어느 순간 이상한 심리가 생긴다.

없던 인류애가 치솟고, 불우이웃을 막 돕고 싶고, 박봉 쪼개 가며 기부라도 하고 싶어진다.

왜?

윤리적으로 남들보다 우월하다는 느낌을 받고 싶은 거다.

열등한 자신을 잊고 싶은 마음이 그런 식으로 표출되는 사람들이 있다.

요컨대 위선으로 자존감을 채우는 방식.

내가 해 봐서 아는데, 그거 할수록 비참해진다. 진심에서 우러나와서 하는 선행이 아니니까.

“그래서 개소리 말라고 했지. 뭔가 해탈한 척하지만, 그건 그런 게 아니야. 그냥 지친 거지. 지쳐서 다 놓아 버리고 싶은 거야. 그리고 그렇게 도망치고 난 다음에는…… 절대 돌아올 수 없어.”

“흠.”

“그러니까, 안 들어줄 거다.”

배윤하가 뭉근한 눈빛으로 날 보다가, 난데없이 씩 웃었다.

“으구, 우리 한열이 화나쪄?”

“뭐래. 혓바닥 원상 복구 안 시키냐? 그리고 내가 왜…….”

“그래그래. 누나가 다 이해한다. 뭔가 울컥하겠지. 당사자가 아닌 나도 좀 화나는데.”

“아니 진짜로 그런 게…….”

“알았다니까.”

방실방실 웃는 낯이 거슬려서 볼따구를 쭉쭉 잡아당겨 주었다.

“앗. 으앗. 아, 아픈데. 진짜 아픈데. 아앗. 앗.”

“닥쳐. 영원히 호빵맨이나 되어라. 그 건방진 말을 늘어놓는 건 이 조동아리냐? 아앙?”

그리고 1분 뒤, 울기 직전의 배윤하에게 등짝을 얻어맞은 뒤에야 볼따구 성형은 중단됐다.

잠깐 숨 돌리고 나니 진정이 좀 됐다.

순간 버럭 하긴 했다만, 버럭 했다는 사실 자체가 증명했다.

난 실제로 화가 좀 나 있던 것이다. 단지 그 이유를 납득하고 싶지 않았을 뿐.

“한열이 많이 변했네.”

“…….”

“얼마 전의 너였더라면 동명이 보고 잘했다고 물개 박수까지 쳐 줬을 텐데. 아니야?”

“……그랬겠지.”

분수에 안 맞는 삶.

현실을 외면하는 유아적인 열정.

재능의 벽에 도전하는 헛된 시도.

이전의 내가 혐오했던 것들이다.

따라서 양동명이 한계를 인정하고 자신에게 맞는 자리를 찾겠다면 지지해 줬어야 했다.

돕지는 못해도 응원은 했겠지. 하지만 지금의 나는 화를 내고 있었다.

왜일까.

“인정하긴 싫지만, 아마 난 그 바보 같은 것들이 꽤 맘에 들었던 거 같네.”

하늘 높이 솟는 공.

고함.

풀어헤쳐진 구름에 노을의 불길이 옮겨 붙어 세상이 온통 붉었다.

낙일의 짧은 시간. 그들은 그 열기를 진심으로 즐기고 있었지. 결국 재가 되어도 상관없었으리라.

그때 난 그들을 비웃었지만, 진심으로 깔봤다면 조롱할 생각도 안 들었을 거다.

무시했겠지. 난 그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에 반사적으로 비웃었다. 내게서 거세된 젊음이 부러웠다.

그래서 그 젊음을 저버리고 함부로 하는 모습에서 부아가 치민 것이다.

“그치?”

“그래, 아마도. 그런다고 뭐 달라질 건 없지만.”

“동명이한텐 내가 한 번 더 얘기해 볼게. 내가 말하면 듣긴 할 거야. 그러니까 너도 가끔 들러서 좀 도와줘. 동명이는 은근 널 멘토로 생각하는 거 같으니까.”

“뭐? 내가 뭘 했다고 멘토야? 멘토는.”

“그러게. 남자애들 심리야 나는 모르지.”

“나도 남잔데 모르겠는 걸.”

보육원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왠지 모르게 이 과장의 말이 머리를 스쳤다.

-너네 학교 인맥 빨 세우기 좋다며. 한번 찾아보던가. 예술종사자 중에 끗발 세울 만한 사람으로.

생각해 보니 대원고교 인맥 하면 배윤하가 최고봉 아닌가. 멀리서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야, 우리 학교에 예술가 집안 자제 있냐?”

“응? 그건 왜?”

“그냥 갑자기 궁금해졌다.”

“글쎄. 예술가 집안……. 딱히 떠오르는 건 없는데.”

“그러냐?”

내심 아쉬워하고 있는데, 배윤하가 뭔가 떠올랐다는 듯 핫, 하고 헛숨을 쉬었다.

“아, 동명이랑 해명이네.”

“응?”

“야구 선수 양진수. 그 배우자가 동양 미술계의 거장 백남훈의 딸 백진주였어. 백진주 본인도 꽤 이름 있는 예술인이고. 잘은 모르지만 행위 예술? 그런 쪽으로.”

“이혼했다던 그 사람?”

“응. 그래서 양진수 선수가 동명이를, 백진주 씨는 해명이를 데려가서 각자 키웠지 아마? 내가 알기론 그래.”

음…….

뭔가 공교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상황, 어떻게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형제의 갈등. 가족의 균열. 뭔가 파고들어갈 틈이 있어 보이는데…….

난 보육원에 도착하고 숙소에 누워서까지 계속 생각을 이어 갔다.

그리고 새벽에야 결론을 내렸다.

*   *   *

“원투! 원! 원투! 빠지고! 숙이고!”

관장의 리듬에 맞춰 손발을 움직였다.

미트가 주먹 끝에 짝짝 달라붙고 엇박자로 찔러 오는 손을 숙여서 피한다. 다시 전진하며 원투.

퍼벅-!!

“으앗. 잠깐. 잠깐.”

관장이 휘청이는 몸을 가다듬으며 숨을 뱉었다.

“휘유. 이 새끼 갑자기 어디서 또 득도해 온 거야? 펀치력이 말도 안 되잖아 이거.”

“이제 좀 쓸 만한가요?”

“쓸 만하냐고? 뭐여. 이런 걸 능멸잼이라고 하나? 괴물 시끼.”

“에이, 그 정도는 아니죠.”

난 손사래를 쳤지만 속으로는 납득했다. 초패왕의 버프에 온갖 운동선수들의 신체가 떡칠된 몸이었다.

펀치가 위력적이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아무튼 전 기술이 필요해요, 기술이.”

“너한테 기술이 뭐가 필요하냐. 좀만 더 단련하면 곰탱이가 되겠는데. 그냥 곰발바닥으로 다 후려 치고 다녀. 네 몸이면 그래도 돼.”

“양아치들한테나 먹히겠죠. 진짜 선수들한테는 안 먹힌다는 거 알아요.”

“너 세계 정복이라도 하려고 그러냐? 네가 자꾸 이러면 나 침 넘어가는데.”

“왜요?”

“선수로 꼬시고 싶어지잖아.”

관장이 혀로 입술을 핥았다. 난 담담하게 지적했다.

“그런 거 하지 마세요. 남자가 하면 그냥 더러울 뿐이거든요?”

“어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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