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능이 자꾸 늘어-97화 (97/164)

<재능이 자꾸 늘어 97화>

12. 새로운 시작 - 4

관장은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근데 진짜 생각 없냐? 선수. 왜, 시시해? 복싱이 별로면 MMA는 어때.”

“트레이너도 없잖아요. 공수표 날리지 마세요.”

“거야 데려오면 되지. 내 말 한 마디에 날아올 애들 수두룩하다.”

허세는 아닐 것이다.

올해 67세인 관장 이정철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와 OPBF 챔피언을 손수 키워 낸 복싱계의 거장이다.

현재 MMA에서 활동하는 인기 높은 트레이너 중 다수가 그의 밑에서 입식 타격을 지도받았다.

“그런 분이 왜 이런 누추한 체육관에.”

“내가 잘 키워 두면 어디서 다들 채가더라고.”

“저도 그러면 어쩌시려고.”

“뭐, 예전처럼 돈 때문에 아등바등할 때도 아니고. 나쯤 되면 후학 양성이야 취미로 하는 거지, 뭐. 하다가 다른 데 가도 상관없어.”

“고등학생을 벗겨서 팔아먹은 분이 하실 말은 아닌 듯합니다.”

“후후. 너 아직도 내가 널 돈 때문에 고용했다고 생각하냐? 체육관 부흥을 위해?”

“이제 와서 분위기 잡아 봐야…….”

관장은 고개를 저으며 늠름하게 외쳤다.

“아니다!”

“그럼요?”

“널 고용하면 체육관에 여자들이 많아질 거 같았거든! 남자새끼들 땀 냄새는 이제 질렸어!”

“상상 이상으로 하잘것없는 이유였어……!”

“아무튼 그런 이유로 오래가자. 한열아. 선수를 하든 말든.”

“돌아가신 사모님한테 죄송하지도 않으세요?”

“훗. 우리 마누라는 그렇게 그릇이 작지 않았어. 다름 아닌 내가 선택한 여자니까.”

“쓰레기 같은 내용을 있어 보이게 포장하지 마세요.”

짜게 식은 눈으로 그를 흘겼다.

변태가 능력남일 때의 유감스러운 예시가 눈앞에 있었다.

“아무튼 가르쳐 주세요. 뭐든. 전 지금보다 더 강해져야 한단 말이에요.”

“흐음.”

이정철 관장은 턱을 쓰다듬다가, 기습적인 라이트훅을 내 관자놀이에 날렸다.

반사적으로 몸을 틀면서 숙인다.

매서운 펀치가 어깨를 긁고 지나간다.

피할 걸 예측했는지, 곧바로 내 얼굴이 숙여진 시점과 위치에 정확히 원투 펀치를 꽂았다.

위빙에 더킹이 매끄럽게 이어지며 관장의 주먹을 비껴 냈다.

바로 백스텝. 관장은 따라오지 않았다.

“하, 이 거리에서 ‘보고’ 피해?”

“……가, 갑자기 뭡니까?”

“신기한 녀석. 넌 이미 신체능력이 탈 인간 수준이야. 필드에서 뛰는 세계구급 선수들조차 넘어섰다. 눈치도 탁월해. 반응 속도는 괴물 같고. 특히 동체 시력은 가히 경이적이란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군.”

“…….”

“복싱도 손이 눈보다 빨라. 보고 대응할 수 없어. 그러니까 복싱의 테크닉이란 가위바위보 전략 같은 거지. 예측의 미학이다. 콤비네이션, 수 싸움, 다 마찬가지야. 결국 고만고만한 인간들끼리의 자구책이지.”

“이제 저한텐 무의미하다는 겁니까?”

“무의미까지는 아니고, 아등바등 익혀 봐야 극적인 실력 상승 따윈 없다는 거다.”

관장은 미트를 빼더니 검지와 중지로 두 눈을 찌르듯이 가리킨다.

“어차피 다 보고 피할 수 있다면 전략이 무슨 소용이냐? 테크닉은 무슨 필요고?”

“그럼에도 못 이길 상대가 있으니까 이러죠.”

“…….”

그가 고개를 갸웃하다 미트를 휙 던졌다.

바구니 안에 정확히 안착하는 미트들.

접수원 아가씨가 깜짝 놀라서 “관장님! 그거 막 던지지 말라니까요!”하고 소리 지른다.

이정철 관장은 껄껄 웃다가 말을 이었다.

“그럼 상대는 복싱 선수가 아니었겠네. 길거리 싸움의 지존이라도 만난 게냐?”

“……그 비슷하죠.”

“그럼 방법은 두 가지뿐이지.”

그가 손가락 두 개를 척 들어 올린다.

“하나는 지금 이상으로 신체 능력을 끌어올리는 거. 상식적으로 더 상승할 여지가 있을까 싶지만, 너라면 가능할 것도 같거든?”

가능하다.

일단 탤런트는 더 우월한 탤런트로 교체가 가능하다.

당장 [유연성] 탤런트도 파쿠르 달인(Rank E)의 것이었다가 유명 발레리나(Rank D)의 것으로 격상된 상태다.

더해서 내 신체 능력은 다 발달된 상태가 아니다.

애초에 운동 시작한 지 몇 달이나 됐다고 극한까지 단련이 됐겠는가.

난 더 빠르고 더 강해질 여지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당연히 그런 당연한 말을 듣자고 여기 있는 게 아니다.

“그리고요?”

“그러고는 또 무슨 그리고야. 엄청 싸워 보는 거지. 링 밖에서 뭐가 일어날지 내가 알 게 뭐냐? 싸우면서 상황 대응력을 길러. 너한테는 그거밖에 없다.”

“뭐예요. 그럼 내가 여기 있을 이유가 없잖아.”

“왜 없냐. 계약서는 준엄하다.”

“쳇.”

관장이 껄껄 웃다가 내 어깨를 툭 두드렸다.

“그래, 가끔 그런 부류가 있지. 극한의 기교도, 초인의 몸도 없는데, 본능적으로 승리의 냄새를 맡아 내는 짐승 같은 싸움꾼. 아마 네가 가장 고전할 상대라면 그런 부류겠지.”

“……알고 계시다면 이번엔 도움이 되는 조언을 좀 해 주시죠.”

“이미 했잖냐. 미안하지만 그 외엔 없어. 애당초 그건 싸워서 이기기 위해 태어난 생물들이니까.”

“…….”

“이것도 저것도 다 싫으면 하늘에서 격투 센스가 떡하니 떨어지길 빌던가. 뭐, 지금 몸뚱이도 판타지인데 그런 일도 일어나지 말란 법 없잖냐.”

그런 말을 마지막으로 툭 던지며 그는 링 밖으로 내려갔다.

농담으로 한 말이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현실적인 조언이 됐다.

없던 재능이 막 생겨나는 나에게는.

‘……에이, 근데 그 사이에 빨간 마스크 같은 괴물을 또 만나겠어? ……만나겠지. 반드시 또 마주친다. 동부파와 계속 부딪치다 보면. 그 전에 전력을 극적으로 높일 탤런트를 얻어야 하는데.’

[율리시즈의 나침반]의 인도에 따라 전국의 체육관이란 체육관은 다 돌았다.

몸 쓰는 일에 한하면, 국내에서 얻을 수 있는 탤런트는 거의 다 얻었다고 봐도 될 거다.

남은 건 저 유리장 안에 있는 두 개의 탤런트 뿐.

‘아오. 저걸 그냥 깨 버려? 두 달 어찌 기다리나.’

부글부글 끓는 욕망을 겨우 자제시키면서 나도 링 밑으로 내려왔다.

글러브를 벗어 목에 걸치는데 어딘가 위화감이 느껴졌다.

평소 이 시간만 되면 취미반 회원들의 변명과 질문이 많아진다. 특히 여성들이.

갑자기 길을 잃거나 관장님과 면담이 하고 싶거나 굳이 여기까지 와서 화장실이 어디냐고 묻는다.

왜냐고? 스스로 말하면 손발이 퇴화할 것 같으므로 그들의 말을 인용해 보겠다.

-조, 존안을 뵈었어. 눈이 상쾌해…….

-쳇, 오늘은 안 벗었던데.

-뉴비들이구나. 열사께서 웃통을 까는 패턴이 있단다. 팬클럽 정회원에 가입하면 공지사항에 박혀 있…….

-사, 사인을 요청하면 들어 주실까요?

-안 돼. 우리 팬클럽의 기본 원칙을 잊지 마. 멀리서 지켜보되 범접하지 않는다. 우리가 매일같이 귀찮게 하면 열사께서 체육관을 옮겨 버릴 위험이…….

-열맨.

음.

그렇다.

딱히 논평하고 싶지 않다.

아무튼 이 시간만 입구 근처가 분주한 건 전문반과 취미반이 공간상 떨어져 있어서 발생하는 해프닝 같은 것이다.

참고로 ‘일본 유물 절도 사건’의 유명세로 내게 항일투사 같은 이미지가 생겼는지, 저 ‘열사’란 호칭은 거의 공식으로 굳어지고 있었다.

덕분에 최근 나는 낯짝이 강판에 갈리는 기분을 실시간으로 느끼고 있다. 쥐구멍을 탐색하는 습관도 생겼고.

아무튼.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한적했다.

평소엔 그렇게나 낯 뜨겁던 시선들이 갑자기 없어지니 왠지 허전했다.

정작 난 그러려니 하고 있는데 관장이 더 초조해져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어라, 오늘은 어쩐지 잠잠하네. 뭔 일 있나? 우리 이쁜이들…….”

명백히 실망스럽다는 투였다. 난 음식물쓰레기 보듯 그를 응시했다.

“……관장님 안 가세요? 미팅 있으시다면서요.”

“좀 가만히 있어 봐. 이 순간은 중요하다고. 내 영혼을 리프레시하는 경건한 시간이란 말이야. 오늘의 비타민을 섭취 못하면, 어? 막 손발이 떨리고 가족이 무너지고 사회가 붕괴하고……. 어? 이제 알겠냐? 내 이 비통하고 절박한 심정을?!”

“앞으로도 모를 예정입니다.”

“소시오패스! 외도! 남자의 적! 그렇게 살지 마라!”

“…….”

지도하는 중에는 한없이 널널하더니 지도가 끝나자마자 갑자기 프로의 열정과 엄격함을 장착하는 이정철 관장이었다.

이미 익숙해져서 그러려니 하는 나도 참 거시기 했다.

관장은 그렇게 안절부절 서성이다 결국 미팅 시간이 임박하여 접수원의 손에 질질 끌려가다시피 퇴장했다.

난 운동 좀 더 하다 돌아갈 생각으로 샌드백 앞에 섰다.

가볍게 통통 튀듯이 스텝을 밟으며.

퍽.

빠르고 간결하게 왼손 잽. 축은 그대로, 허리를 틀면서 체중을 실어 오른손을 던진다.

뻑-!

스트레이트. 이것이 원투. 크게 진자운동을 하는 샌드백. 가벼운 풋워크로 피하고, 되돌아오는 옆구리에 갈고리처럼 굽어진 팔이 수평으로 곧게 직격한다.

빡!

이건 롱 훅. 빠르게 스텝인, 근접거리에서 짧게 끊어 치듯 숏 훅을 연사한다.

텅. 텅텅! 터덩텅!

‘……역시 손발의 수발이 예전보다 훨씬 수월하다. 펀치가 정교해진 게 느껴져.’

[반사신경]

난 이게 외부 자극에 즉각 반응하는 재능이라고 생각했다.

지각한 순간 피하거나 막고, 콤마 초를 다투는 찰나의 틈을 뚫고 카운터를 치는 능력.

즉, 리액션에 특화된 탤런트라고.

이름부터가 ‘반사’가 아닌가.

하지만 몸을 쓰다 보니 깨달은 점, 모든 행위는 어떤 반사적 상호작용의 결과다.

손을 뻗는 단순한 동작조차 근섬유와 신경계, 두뇌의 판단 따위가 서로 탁구처럼 신호를 주고받으며 이루어진다.

이 [반사신경]은 그 의사소통 과정을 일원화하고 필요 없는 건 축약하며 어떤 효율화된 생태 시스템을 신체에 구축하는 재능인 것이다.

한데 그것이 [역발산기개세]의 버프로 한층 더 높은 차원으로 비약.

이제는, 과장 좀 보태서 몸의 각 부위마다 보조 두뇌가 이식된 느낌이다.

말인즉.

‘내 몸에 대한 통제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행위에 관한 몸의 이해도. 정밀도. 순발력. 모든 면에서 극적인 진보가 있었다.

물론 겉보기에는 미묘한 차이.

관장조차 몸이 갑자기 빠르고 강해진 것에만 주목했을 뿐 펀치의 완성도까진 알아차리지 못했지.

‘그러니까 조급해하지 말자. 나는 이 순간에도 확실히 강해지고 있…….’

그 순간.

뒤쪽에서 강렬한 인기척이 돌연 쇄도해 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숙였다. 뚜렷한 악의가 내 뒷머리를 스치며 공기를 찢고, 마침내 샌드백을 후려친다.

쾅-!

난 빠르게 물러나며, 흔들리는 샌드백 옆에 선 남자를 응시했다.

“……뭐 하는 짓입니까? 이준 씨.”

이정철 체육관의 간판 선수인 이준이 가소롭다는 투의 헛웃음을 뱉었다.

“왜? 선수가 기구 좀 사용하겠다는데 뭐 잘못됐나?”

“제가 쓰고 있었잖습니까.”

“아, 그래? 난 그냥 장난질 치는 줄 알았지. 그러니까 꺼져, 꼬맹아. 여긴 선수들이 피땀으로 자신을 깎아내는 곳이다. 너 따위가 어중간한 마음으로 밟을 데가 아니야.”

“흠, 그런가.”

“뭐야?”

“관장님 미팅 시간에 맞춘 것도 그렇고. 갑자기 여성 회원들이 없어진 것도 그렇고. 오늘 시비 걸려고 아주 작정을 했네?”

이준이 입가를 뒤틀었다.

“반말하지 마라. 시벌. 어린놈의 새끼가.”

“언제는 선수가 어쩌고 프로가 저쩌고 하더니. 프로는 뭐, 나이순으로 랭킹을 매기나?”

“……너.”

“요샌 복싱 선수도 호봉제야? 이야. 그런 줄 몰랐네. 죄송하게 됐음다. 내 그런 줄도 모르고 아주 큰 실수를 했어!”

“…….”

내가 건들건들 고개를 숙였다.

이준은 태연한 척 입꼬리를 끌어올렸지만 그 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러다 목에 걸고 있던 글러브를 내게 휙 던지는 것이다. 난 고개를 슬쩍 꺾어 피했다.

“계집애처럼 혀만 굴리지 말고 올라와. 너도 복서라면 링 위에서 붙자.”

“삐빅. 성차별적 발언입니다. 그분들이 좌표를 찍을…….”

“아 쫌! 아가리 좀 닥치고 한 판 붙자고!”

“하-.”

이준 선수는 얼마 전 신인왕전을 압살하면서 충격적인 데뷔를 마친 루키였다. ‘과연 이정철’이라는 수식어가 그의 뒤를 따랐다.

반면 난 아마추어 경기 한 번 뛰지 못한 초짜 중의 초짜.

프로가 어쩌니 한 주제에, 결국 연습 경기라는 명목하에 합법적으로 날 패고 싶다는 것이지 않은가. 웃기지도 않는다.

예의상 한 번 튕겨 주었다.

“내가 왜? 싫은데?”

“……너 저 안의 트로피 한 번 만지고 싶다는 별 병신 같은 이유로 여기 있는 거 아니냐?”

“그런데?”

그러자 이준이 주머니에서 열쇠 하나를 쓱 꺼내든다.

“나한테 키가 있다. 오해하지 마. 원래부터 숙부께서 나한테 맡기신 거니까.”

이준의 숙부란 이정철 관장을 뜻한다.

‘……하. 이런 능구렁이 할애비 같으니.’

그 약삭빠른 관장이 상황이 이렇게 될 줄 모르진 않았을 거다.

몇 가지 노림수가 있었겠지.

이준의 오만함을 좀 꺾던가, 아님 날 시험해 보고 싶었던가. 별로 불쾌하지는 않았다.

안 그래도 슬슬 선수급의 상대와 붙어 보고 싶었거든.

“네가 이기면 이걸 내주지. 내가 이기면 계약이고 뭐고 이 체육관을 떠나 줘야겠다.”

“……남자의 질투란 추한 법이거늘.”

“뭐야?”

“아니, 추한 인간이어서 고맙다고. 당신 같은 빌런들이 있어야 정의 구현도 할 수 있는 거 아니겠어? 다 착하면 무슨 재미로 사나?”

난 풀었던 글러브를 다시 끼우며 링 위에 올라갔다. 이준 선수가 씩 웃으며 내 반대편 코너에 섰다.

“박살 내주마, 꼬마.”

“너야말로 아마추어한테 개 털리면 쪽 팔릴 텐데.”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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