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이 자꾸 늘어 99화>
12. 새로운 시작 - 6
“……미친. 무슨 몸뚱어리가…… 사람 발목이 그런 식으로 움직이면 안 될 텐데.”
“미안. 좀 특이체질이라 말이지.”
당연한 말이지만 [유연성]도 증폭된 몸뚱어리인지라.
신체의 탄력이라면 인간이 아니라 고양이과 맹금류와 견주어야 할 것이다.
우린 두 번째 접전에 느닷없이 돌입했다.
이번 선공은 저쪽.
발을 박차 돌진하더니, 준비 동작이 생략된 듯한 왼손 스트레이트를 날려 온다.
빠르다.
아니, 빠르다는 표현보다는 예측이 힘든 펀치다.
긴 리치. 사우스포의 미묘한 거리감. 신체 반편을 가리는 비스듬한 자세. 고유한 풋워킹.
그래서 그의 왼팔은 마치 탄환 같다.
약실에 은폐되어 있다가, 돌연 점화되어 상대의 의식을 단숨에 끊어 내는 스나이퍼의 탄환.
펑-!
그런 스트레이트가 눈앞에 돌연 돋아난 듯 쇄도해 왔다.
그러나 대비하고만 있다면, 이쪽의 [동체시력]이 못 간파할 정도는 아니다. 간신히 고개를 젖혀 피한다.
전광석화로 이어지는 오른손 플리커 잽.
그의 펀치는 뱀처럼 기묘한 각도로 휘면서 예측불허의 궤도를 그려 낸다.
안력을 바짝 돋우며 응수한다.
깊숙한 건 패링으로 쳐 내고, 가벼운 건 피하며 원투로 반격. 파방. 팡! 팡! 순식간에 십 수 번의 펀치가 오가고 둘 사이의 공기층이 터져 나간다.
살짝 따라가기 버겁다.
높은 완숙도의 플리커를 상대하다 보니 보이지 않는 펀치에 둘러싸인 기분마저 들었다.
‘기술 완성도가 미친 수준이다. 괜히 촉망받는 전국구 선수가 아니네.’
이게 바로 이준의 전형적인 공방 패턴이다.
플리커로 농락하고 정확한 카운터로 압살하는 히트맨 스타일, 크랩 가드의 취약함은 무지막지한 센스와 능수능란한 숄더 롤로 보완하는, 그야말로 복서로서 흠잡을 데 없는 완전체였다.
‘……하지만 할 만하다.’
기술적으로 완성된 프로 복서의 쏟아지는 공세를 가까스로, 그러나 펀치 하나 놓치지 않고 일일이 대응해 내고 있었다.
기본기만 한 달 숙련한 나 따위가.
새삼 내 몸뚱어리가 격외의 괴물이 되었다는 게 실감됐다.
그러므로.
‘슬슬 끝내야겠네. 고작 이 정도라면.’
견제 없이 대뜸 스트레이트부터 날릴 때부터 알아봤다.
고개를 꺾어 흘렸지만, 그럼에도 놈의 몸엔 카운터의 충격이 남아 있는 거다.
웅크렸다간 내 괴물 같은 피지컬에 말릴 거라고 판단하고 스퍼트를 높이는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피할 수 없지.
난 놈의 공세에 더 저돌적인 공세로 맞섰다.
“……읏.”
돌진.
몇 개의 잽이 어깨와 복부를 때렸지만 무시.
자잘한 공격 따위 그냥 맷집으로 까뭉개고, 공격 일변도로 태세를 전환한다.
펑.
펑펑!
힘을 실은 연타가 허공을 찢었다.
내가 아는 건 기본뿐이므로 그 기본에 집요하게 매달렸다.
최단거리로 가장 빠른 일격을 꽂는다. 내 온몸이 그 주제에 몰두하여 하나의 펀치를 가공할 무기로 제련했다.
어느 순간부터 녀석은 손을 뻗을 엄두도 못 낸 채 방어에 몰두했다.
놈이 흘린다. 빗겨 낸다. 피한다. 가드로 막는다.
그러나 상관없다.
헤비급을 상회하는 펀치는 흘리고 남은 충격만으로도 뼈대를 울릴 만했다.
결국 놈의 가드가 시뻘겋게 물들었을 즈음, 난 녀석을 로프까지 몰아붙이는데 성공했다.
“……후우.”
“미친……!”
더 도망갈 데는 없으니, 이젠 신나게 때릴 일만 남았다.
숨만 잠깐 고르고,
다시 타격을 놈의 뼛속에 누적시키는 작업에 몰두했다.
그러나 첫 손을 뻗은 순간 기묘한 감각이 팔을 타고 올라왔다.
‘……뭐지?’
그건 세 번째 주먹을 뻗었을 때 분명해졌다.
타격이 온전히 꽂히지 않고 어딘가로 흩어지는 느낌.
상대의 패링이나 숄더 롤에 공격이 제대로 무효화됐을 때의 감각. 그것이 내 모든 펀치마다 피드백으로 전달됐다.
그리고 이준의 웅크린 몸과 가드의 모양을 본 순간 깨달았다.
‘로프 어 도프(Rope-a-Dope)!’
고개를 숙이고 단단히 가드를 굳힌다.
등은 로프에 온전히 기댄 채 반동을 타고 있다.
그러면 로프의 신축성과 탄력을 절묘하게 이용해서, 몸에 가해진 타격을 로프에 흘려버리는 게 가능해진다.
그것이 로프 어 도프. 만화 같은 설정이지만 실제로 가능한 기술이다.
조지 포먼과의 일대 승부에서, 무하마드 알리는 이 수법으로 상대의 진력을 소모시켜 역전극을 이루어 냈다.
그러니까, 이준은 밀린다고 판단한 순간 일부러 로프까지 후진한 것이다.
분하지만 체력 싸움밖에 답이 없다고 판단했겠지.
‘냉철하고 빠른 상황 판단력. 진짜 프로는 다르긴 다르구나.’
그러나 로프 어 도프는 무적의 방어술 같은 게 아니다.
알리도 그걸 전략의 일부로 활용했을 뿐이다.
상대를 도발해 흥분시킨다는 전제가 없었다면 그 세기의 노림수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포인트만 갈취 당했겠지.
그러니까 여기서는 물러서서 놈을 로프에서 끌어내거나, 아니면 체력안배를 하며 깎아 내듯이 타격을 하는 게 복서로서 올바른 판단이다.
하지만 난 복서가 아니지.
확인해 보고 싶다.
내 체력이 어디까지인지.
내 최대 출력은 어느 수준인지.
로프 반동이고 기술이고 씹어 먹을 수 있을지.
정면 승부해서 알아보고 싶은 충동이 끓었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훅을 날린다. 팍.
몸의 축이 회전하고 무게 중심이 이동한다.
반신이 한계까지 당겨진 고무줄처럼 팽팽히 긴장한다. 격발. 장력으로부터 해방된 주먹이 허공을 꿰뚫고 놈의 가드에 꽂혔다. 두 번째 훅.
뻐억-!
다시 몸이 뒤틀린다. 초인적인 유연성과 탄력이 타격의 관성을 고스란히 다음 펀치에 장전시켰다. 다시, 세 번째 훅.
쩌어억-!!
그리고 반복.
시선은 정면에 고정.
오로지 타점과 주먹만을 응시하며 몸을 회전시킨다. 집중해. 지금보다 다음의 펀치가 빨라야 한다.
땀이 튄다. 헐떡이는 호흡. 가슴에 묵직한 것이 얹힌 듯하다.
축을 옮기고 밟기를 반복한 발목이 시큰했다. 등은 뻐근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감각이 없다.
괜찮다. 혹사시켜도 괜찮을 몸이다. 몰아붙여. 거긴 아마 한계가 아니다. 그러니까 더 빠르게. 더 힘을 실어서. 펀치를. 또다시 펀치를…….
그리고.
몇 번째인지 모를 훅이 허공을 갈랐다. 펑!
시야에서 목표가 사라졌다. 갑작스런 타점의 소실로 몸이 휘청거렸다. 뭐지? 잠시 내가 정신을 놓았던가?
그 답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발밑에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만.”
“…….”
“그만해…… 그만, 이 미친놈아…….”
이준이 풀린 눈으로 링에 주저앉아, 말과 신음이 섞인 소음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일목요연했다.
놈은 패배를 시인하고 있었다.
난 그제야 턱 끝까지 쌓아 온 숨을 쏟아 냈다.
“……후우후우우.”
숨을 좀 가다듬은 뒤, 이준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준이 내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힘겹게 팔을 뻗는다.
왠지 내 손을 붙잡고 일어나려는 것 같아 가볍게 쳐 냈다. 설명이 부족했군.
“너 말고 열쇠. 새끼야.”
“악마 새끼…….”
이준은 어처구니없는 표정 그대로 혼절했다.
* * *
두 개의 탤런트를 얻고, 여러 의미로 충격에 휩싸인 체육관을 다 정리하고 나니 어느덧 저녁이었다.
이정철 관장은 체육관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설마 보고 계셨습니까?”
“직접 보진 못했고. 생중계를 전해 들었지.”
실실 웃는 관장에게 띠꺼운 표정을 돌려 드렸다.
“이걸 노리신 겁니까?”
“뭘?”
“이준과의 매칭 말이에요.”
“내 주관 하에 스파링을 시키면 아마 죽기 살기로는 안 할 테니까. 이준 그놈이나. 네놈이나. 그럼 마음속에 일말의 변명이 남거든.”
“…….”
이정철 앞에서는 날 죽일 기세로 덤빌 수 없다.
체급 차이도 있고 무엇보다 난 아마추어니까. 존경하는 숙부에게 스포츠맨으로서 부끄러운 모습을 내비치고 싶지 않겠지.
그러니까 관장은 알아서 움직이도록 환경을 조성해 두고 빠졌다.
간판선수 이준의 자만을 깨우치기 위한 고육지책이란 걸까.
나로선 아무래도 좋은 속사정이다만.
“……그러다 저거 재기 못 하면 어쩌시려고.”
“흥. 그럼 그놈 그릇이 그 정도란 거겠지. 하지만 너보단 내가 준이 놈을 잘 안다. 두드릴수록 단단해지는 강철 같은 녀석이지. 걱정 따윈 필요 없어.”
“강철? 생각하는 건 완전 애던데요. 어우, 어울려 주는데 유치해서 그냥…….”
“그냥 좀 지나치게 순진한 거야. 순도 높은 쇳덩어리 같은 거지. 알고 보면 괜찮은 놈이라니까.”
“별로 거기까지 알고 싶지 않네요…….”
난 어깨를 으쓱이며 그의 옆을 지나쳤다.
“이제 안 올 거냐? 얻을 건 다 얻었으니?”
우리 계약서에는 기간이 명시되어 있지 않다.
날 붙잡은 건 1달에 한 번 그의 컬렉션을 만지게 해 준다는 계약뿐이었다.
그마저도 내가 포기하면 구속력은 없었다. 하지만 난 고개를 저었다.
“가끔은 올게요. 싸워 보니까 알겠더라고요. 아직 배울 게 많다는 거.”
“그러냐?”
“관장님 그거 빈말이었죠? 저한테 기술 따윈 필요 없다는 거. 완전 아닌 거 같던데.”
결국 이기긴 했지만, 이 몸뚱어리로도 정상급 선수는 만만히 볼 수 없다는 걸 체험한 시간이기도 했다.
거꾸로 말하면, 인간이 수천 년 쌓아 온 기예는 초인과의 맞대결에서도 유효했다.
난 더 많이 배우고 익혀 둘 필요를 느꼈다.
관장은 아마 내가 그걸 실전에서 살갗으로 느껴 보길 바랐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MMA도 배워 보려구요. 트레이너 소개해 주실 수 있어요?”
“선수하게?”
“아뇨. 그건 아니지만.”
“에잉. 이준 놈 너무 쉽게 져 버려서는. 콧대를 콱 눌러둬야 각성해서 선수의 길을 걸었을 텐데.”
“전 졌어도 각성은 안 할 건데요.”
근데 막상 떠나려고 보니 약간의 위화감이 남았다.
관장은 내가 체육관을 나가도 그다지 미련이 없다는 태도였다.
이상하네. 이준 선수의 일과는 별개로, 날 회원 호객에 쓰겠다는 셈 또한 그의 진심이었다.
거기 묻어 나오는 흑심은 더더욱 진심이었고.
“근데 이제 어째요? 저 없으면 관장님의 해피 타임도 없어질 텐데요. 여성 회원들도 쭉 빠질 거고.”
“후후. 난 준비성이 출중한 남자란다. 괜히 복싱계의 도라에몽이라 불린 게 아니에요.”
“……으응? 뭔가 불안한데.”
그때 등 뒤로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왠지 모르겠는데, 듣자마자 순식간에 불안해졌다.
“음, 여기가 이정철 체육관인가요? 어라? 한열이 네가 여기 웬일이야?”
“……으잉? 그러는 쌤은 어째서 여기에.”
이현지 쌤이 딱 달라붙는 트레이닝복을 갖춰 입고 등장한 것이다. 관장이 반색하며 그녀를 맞이했다.
“하핫! 오셨군요! 근데 둘이 아는 사이?”
“우리 학교 보건쌤인데요.”
“우리 학교 학생이에요.”
“오, 재밌구만. 한 학교에 이런 선남선녀가 둘이나…… 어쨌든 한열이 넌 이제 가 보아도 좋다. 이분이 우리 체육관 새로운 간판 모델이시니까!”
현지 쌤을 지그시 바라보니, 그녀가 예의 뚱한 표정으로 부연했다.
“돈 많이 준대서.”
“이 자낳괴 선생이 또…….”
난 이마를 싸맸다.
“아니, 관장님. 이럼 여성 회원들이 더 극적으로 빠지겠는데요. 딱 봐도 위화감 조성하게 생겼잖아요. 운동으로 어쩔 수 있는 미모가 아니라고요 저건.”
“괜찮아. 그만큼 남자 회원들이 들어올 테니까.”
“남정네들 땀 냄새 지겹다고 하시더니.”
“괜찮아! 난 이제 양보단 질에 집중하기로 했다! 현지 씨 한 분이면 무쌍 찍는 거 아니겠느냐?”
“양과 질 말고 당신의 나이와 체면에 집중해 주세요. 어르신.”
어쨌든 난 고뇌했다.
현지 쌤이 고릴라 같은 남정네들의 시선에 노출되고, 그중에도 특히 이 동네 최고 변태의 눈요깃거리가 된다는 미래가 절로 그려져 내 머리를 쥐어뜯게 했다.
내가 내릴 결론은 결국 하나뿐이었다.
“……저도 계속 고용해 주세요. 쌤이랑 같은 시간대에.”
“응? 그럴까? 그래 주면 나야 좋지.”
관장이 기다렸다는 듯이 흔쾌히 허락했다.
어쩐지 여기까지 계산하고 그녀를 데려온 게 아닌가 하는 심증이 치솟았지만, 당연히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