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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이 자꾸 늘어-100화 (100/164)

<재능이 자꾸 늘어 100화>

12. 새로운 시작 - 7

우리 체육관은 민가 한복판에 있다.

예스런 돌담들과 알록달록한 대문들이 거리에 촘촘했다.

드문드문한 전봇대는 유기견들의 공중화장실, 혹은 날짜가 한참 지난 전단지들의 공동묘지로 전락해 있었다.

가로등의 처지도 그보다 낫다 말하기 힘들었다.

친근감을 느끼긴 쉽지만 지루해지기는 더 쉬운 이곳에서, 나는 혼자 한 시간 동안이나 죽치고 기다려야 했다.

관장이 축객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현지 씨랑 계약 얘기해야 되니까 부디 꺼져 줄래.’

나도 있겠다고 하니 관장의 표정은 전에 없이 엄중해졌었다.

‘계약은 신성한 것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이건 잡담이 아니라 엄숙한 절차이자 제의란 말이다. 관계자외의 개입은 정중히 사양토록 하지!’

내 경우엔 관도들이 단체로 짜장면을 시켜먹는 틈에 껴서 계약서를 작성했었지.

계약서에 튄 짬뽕 국물이 이제 말랐을까 싶은데 저런 뻔뻔함이라니.

치사해서 그냥 가려다가도, 변태 노친네가 주접떠는 광경이 지나친 해상도로 상상되어서 가지도 못하고 어정어정 주변을 서성였다.

불행히도 여긴 좀 지나치게 민가였다. 어디 들어가 쉴 곳도, 시간 때울 만한 유흥거리도 전멸했다.

상가라곤 한참을 걸어가야 겨우 ‘슈-우퍼마켇트’ 하나뿐. 당연히 휴무일이 주인 기분에 따라 정해지는 그런 곳이며, 직접 가 본 결과 오늘은 기분이 영 별로인 것으로 밝혀졌다.

난 캔커피 한 잔의 사치조차 박탈당한 채 다시 돌아왔, 결국 이 거리 유일의, 그러나 내 나이로는 차마 들어가기 힘든 유흥시설을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놀이터에서 모래성 쌓기를 했다.

마침 꼬맹이들이 상대방 두꺼비집의 퀄리티를 두고 건축의 조예를 다투고 있기에, 나도 말없이 참전해 불국사 다보탑을 쌓아 올렸다. 아아. 이것이 [손재주]라는 것이다, 라는 표정을 짓고 있으니 아이들이 자지러졌다.

질투와 감탄, 그리고 제자로 받아달라는 요청 속에서 우쭐대고 있자니 시간도 금방 갔다.

“뭐 하고 있어?”

현지 쌤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아이들에게 겸손의 미덕을 훈육하고 있었죠.”

“정작 너는 겸손해 보이지 않네.”

“겸손한 장인은 무능한 장인일 뿐. 제게 범인의 잣대를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걸 거장의 품격이라고 하죠.”

“그새 모래성 쌓기 장인 됐어?”

“경력은 1시간 정도 됩니다. 꽤 길죠?”

“그만두면 퇴직금 많이 나오겠네. 커피는 돈 많은 한열이가 쏘렴.”

“예입.”

완성된 다보탑을 툭 건드렸다. 수학적 계산으로 절묘하게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모래탑은 질량을 이기지 못하고 부스스 무너졌다.

탑의 세련미에 감탄하던 아이들도 순식간에 태도를 뒤집어 파괴의 쾌감에 환호했다. 그렇지. 모래성은 무너뜨림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놀이인 것이다. 아이들의 열화와 같은 앵콜 요청을 쿨하게 뒤로한 채 나는 놀이터를 유유히 떠났다.

퇴장까지 완벽하군.

현지 쌤이 이런 날 보며 짤막하게 논평했다.

“애들하고 잘 노네.”

“이골이 났거든요. 동생들이 많아서.”

우린 닫힌 ‘슈-우퍼마케트’를 한참 지나, 대로변의 작은 카페에서 커피를 테이크아웃 해 와 정류장에 나란히 앉았다.

“진짜 계약하셨어요?”

“응? 응. 그럼 가짜로 했겠니.”

난 그녀의 태연한 말투가 살짝 야속했다. 난 걱정돼서 한 시간이나 기다렸는데.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으니 뭔가 울컥한 것이다.

“근데 그거 안 하시면 안 돼요?”

“응? 왜?”

막상 물어보니 말문이 막혔다. 왜 하면 안 되지? 잠깐의 궁리 끝에 꺼내 놓은 답변은 다소 궁색했다.

“보건적으로 불건전해요.”

“체육관 깨끗하던데.”

“사람들 눈이 안 깨끗하다니까요. 있다 보면 눈길에 대패질 당하는 느낌이에요.”

“그 정도야?”

“그렇다니까요. 거참 운동하러 온 건지 동물원에 구경 온 건지. 불순해 아주. 그 중에서 우리 관장님이 제일 불순하고.”

“그럼 너는?”

“예?”

“그 불순한 곳을 넌 다녔잖아.”

“……아니 그건.”

또 할 말을 잃었다. 나는 남자고 그녀는 여자니까? 지리멸렬한 논리다.

더해서 솔직하지도 못한 논리였다. 투덜대긴 했지만 사실 난 모델일이 불쾌하지 않았다. 좀 불편했을 뿐이지. 난 안 그런데 당신은 그럴 거라는 주장에 설득력이 있겠는가. 다시 원점.

“근데 선생님 모델 일 같은 거 원래 안 하셨잖아요.”

그리고 난 결국 논점을 회피했다.

“누구든 처음은 있는 법이잖니.”

“굳이 모델 일을 하실 거면 좀 더 괜찮은 일도 많아요. 근데 왜 하필.”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니야?”

“아니 저는 체육관에 볼일이 있기도 하고.”

“나도 있어, 볼일.”

“……그게 무슨.”

그제야 난 위화감을 감지했다.

고개를 들어 그녀와 눈을 마주친 순간, 난 뒤통수를 후려 맞은 듯했다. 새까만 동공은 오래된 잉크처럼 응고돼 있었다. 태연하다고 느낀 그녀의 태도는 실은 차갑고 딱딱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우리의 대화는 공전하고 있었고 그건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의 문제였다.

“……어.”

난 그녀가 내게 화를 내고 있음을 깨달았다.

내 감정에 파묻혀 작동정지 상태였던 [눈치]가 재기동했다. 겸연쩍은 마음에 뒷머리를 긁적이면서도 난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죄송해요.”

그녀는 무적의 질문, ‘뭐가 미안한데?’를 시전하지 않았다.

단지 날 빤히 쳐다보더니, 눈가를 누그러뜨리며 내 정수리를 토닥이는 것이었다.

“알면 됐어.”

“……더 안 혼내세요?”

“한열이니까. 그거면 됐어.”

마음이 울렁였다. 굳은 땅 위에서 멀미가 난 듯했다.

“언제부터 아셨어요?”

“얼마 안 됐어. 너희 반 애가 배탈 나서 왔다가 얘기해 주고 가더라고. 그러니까, 관장님이 날 찾아온 게 아니야. 내가 관장님을 찾아간 거지.”

그랬군. 어쩐지 너무 공교롭다 싶었다.

그러니까 그녀는 내가 조퇴나 결석이 잦은 것을 뒤늦게 깨닫고 스스로 진상파악에 나선 것이었다.

못해도 일주일에 두세 번은 얼굴을 맞대는데 나는 그녀에게 전혀 내색을 내비치지 않았지.

그녀가 서운하게 생각할 만했다.

물론 현지 쌤은 철저히 자본 주의적인 관점으로 교직을 수행하므로, 학생의 본분과 교사의 책무 어쩌고 하는 데는 아무 관심이 없으실 것이다. 그녀가 화를 낸 건 그저 개인적인 친분 때문. 그것이 어쩐지 송구하고 죄송스럽고 감사하고…….

조금은 기뻤다.

“가끔 한열이를 보면 말이지, 물속에서 익사하는 관상어를 보는 것 같아.”

“……의미를 모르겠는데요.”

“그런 거 본 적 없어? 수족관 관리도 잘 됐고, 밥도 제때 주고, 산소도 잘 통하는데, 이상하게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 버리는 고기들이 있잖아.”

“그건 익사가 아니라 병사 아니에요?”

“그렇겠지? 근데 내겐 익사로 보였어. 넓은 바다에서 추방당해서 작은 수족관에 갇히면…… 그야 숨이 막혀서 죽지 않겠어?”

“…….”

“너무 혼자 끌어안지 마. 안 그래도 팍팍하잖아. 스스로 더 좁은 곳에 구겨 넣을 이유가 있을까? 어른을 좀 더 의지하라고.”

그녀의 시선이 멀리 밤중에 놓였다. 비스듬한 달은 여린 하늘에 난 생채기 같았다. 아픈 몸을 도닥이는 손짓처럼 다정하게 그녀는 눈길로 하늘의 상처를 두드렸다. 나도 그녀가 보는 곳을 더듬어 보았다.

말이 없음을 꾸짖으면서도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그것이 그녀다운 상냥함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물론 그녀에게 말할 순 없다. 그녀에게 이 위험한 짐을 나누어 지울 순 없으니까. 아니, 그 누구에게도 그렇다. 이건 반드시 내 손으로 결판지어야 했다. 하지만-.

“……예, 그렇게 할게요. 고마워요. 선생님.”

하지만 말만은 그러겠노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변한 건 없을 것이다.

난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고, 말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그녀의 선의는 갈피를 못 잡고 표류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족했다. 다만 숨이 찰 때 넘쳐 나는 호흡을 놓아둘 쉼터가 있다는 것만으로.

“그래. 못 미더워 보이겠지만 이래 봬도 선생이라고? 돈 버는 거 빼곤, 나 꽤 유능하니까 말이야. 울 삼촌도 마찬가지고.”

“돈 버는 건 빼는군요.”

“나도 양심은 있거든?”

그녀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어, 부끄러워하네.

자기가 돈벌이에 운과 재능이 없다는 걸 알기는 한가 보다. 의외의 모습을 발견해서인지 입가가 절로 씰룩였다. 내친 김에 더 나대볼까.

“그럼 뭐 하나 부탁드려도 될까요.”

“뭘?”

“무릎베게해 주세요.”

“난 도움을 주겠다고 했지 어리광을 받아 주겠다고 한 적은 없는데.”

“제가 밤마다 어둠의 조직과 사투를 벌이느라 고단하거든요. 이게 정신 소모가 꽤 크단 말이죠. 제 멘탈 케어 차원에서 매우 필요한 조치로 보여집니다. 음음.”

잠깐의 침묵.

그녀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표정으로 입을 달싹이다가, 이내 일자로 꾹 다물었다.

그러곤 허벅지를 팡팡 두드리면서 호쾌하게 외치는 것이다.

“좋아. 덤벼!”

“왜 때문에 전투적인 거죠.”

어쨌든 난 사양 따윈 모르는 사나이. 지체 없이 머리를 던져 그녀의 허벅지에 얹었다.

트레이닝 복 너머의 말랑한 감촉이 귓가를 포근하게 파묻었다. 사람을 순식간에 행복하게 만드는 감각이었다.

“쌤. 저요.”

“…….”

“다 끝나면…… 제가 할 일 다 끝내면, 그땐 전부 말씀드릴게요. 지금 말하지 못했던 거. 의지하고 싶지만 감히 하지 못했던 것. 서운하셨을 법한 모든 순간들. 그때까지는…….”

“…….”

“음? 쌤?”

이상할 정도로 조용해서 고개를 올리니, 그녀의 목에서부터 귓가까지 홍조가 반들반들 올라 있었다.

꾹 다문 입가는 파들파들 떨렸다. 잘 보니 두 주먹도 꼭 쥐어진 채 허공에 떠 있었다.

그녀에게서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에 나까지 당황스러워졌다.

“……쌤. 혹시 부끄러우세요?”

“아니이. 그, 그런 건 아닌데. 좀…….”

“좀?”

“내가 몇 번 무릎 빌려 준 적 있잖아? 그때부터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그녀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고개를 깊게 숙여 내 귀에 입술을 바싹 대었다. 더운 숨이 귓구멍을 타고 뇌를 녹여 버릴 것만 같았다. 꿀꺽. 목을 넘어간 침이 누구 것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녀가 내 귀에 작게 속삭였다.

“나 아무래도 허벅지가 성감대인 듯.”

난 3초 동안 의미를 해석했고, 그다음 3초 동안은 뇌가 잠시 중단되어서 반응하지 못했다.

요컨대 6초쯤 뒤에 비명을 동반한 급속 기상이 자동으로 실시됐고, 로맨틱한 분위기는 박치기 위기와 함께 그대로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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