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능이 자꾸 늘어-103화 (103/164)

<재능이 자꾸 늘어 103화>

12. 새로운 시작 - 10

탕!

이연희 변호사가 두터운 서류를 탁자 위에 팽개치듯 내려놓았다.

포렌식 보고서보다 세 배는 두꺼울 법한 압도적인 종이뭉치였다.

“이게 뭔데? 아니, 그 전에 당신 누구요? 누가 들여보냈어 이 미친 여자는?!”

“역시 돼지라 달팽이관에도 살이 쪄버린 건가요? 아님 귀지가 이상증식하는 유감스런 이도의 소유자신지요. 처음부터 변호사라고 말했잖습니까. 귓구멍이 쳐막혔으면 겸손하기라도 해야지. 이도저도 아닌 것이 그야말로 축생이군요. 부끄러운 줄 아세요.”

“뭐, 뭐, 뭐 이런 여자가 다 있어?!”

“이런 여자든 저런 여자든 당신이 알 거 없습니다.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은 이 책자에 담긴 내용 뿐.”

분명 우리 편인데 나도 덩달아 쫄릴 만큼 날선 발언들이었다.

격앙된 기색 따윈 일절 없는, 높낮이 하나 없이 평탄한 어조, 굳이 따지자면 시리가 전자책 읽어주는 텐션인데 이상하게 듣고 있자면 우주의 티끌이 되어 짱 박히고 싶게 만드는 말투였다.

감정이 없어서 더 무섭다.

말하자면 인공지능이 아무 사심 없이 ‘삐빅, 당신은 쓰레기로 판명되었음’하고 엄정하게 선고하는 느낌이랄까.

우리 편이라 참 다행이었다. 내가 저 매도의 대상이 되었다간 매일 밤 자살충동에 시달렸을 것이다…….

아무튼.

덕분에 하룻강아지처럼 취조실을 뛰놀던 이응식 검사는 말빨에 쳐맞고 단매에 그로기 상태가 되었다.

“여기 쓰인 말은 다 개소리이지만, 그래도 이게 멍멍인지 왈왈인지는 구분해두어야겠지요. 하나씩 짚어보지요. 은인, 아니, 이한열 학생이 H은행의 계좌를 개설해서 거기로 대가를 지불받았다고? 거짓입니다. 계좌 개설 당일 한열 군은 본인 소유의 작업실에 있었으며, 그 알리바이는 근처 블랙박스와 CCTV로 확인이 가능합니다.”

“……계좌는 지문인감으로 개설됐습니다. 본인이 아니면…….”

“지문도 복사가 가능하죠. 저는 관련 범죄 기술을 적어도 다섯 개는 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건 문서 위조 및 사칭으로 범인을 잡아들여야 할 문제죠. 애꿎은 학생을 붙들고 달달 볶을 일이 아니라. 당신들 대가리에 든 게 우동사리만 아니라면 애저녁에 깨달았어야 했습니다. 지금껏 뭐하셨습니까?”

“거야 당신 생각…….”

“그리고 그거 아십니까? 결정적인 ‘증인’이 있다는 걸.”

“무슨…….”

이연희 변호사는 먹이 앞에서 송곳니를 자랑하는 뱀처럼, 입을 길게 찢어서 웃었다.

뭐야 이 사람 무서워…….

“당시 개설을 담당했던 H은행 직원은 며칠 후 습격을 당하죠. 그 분은 저희 로펌에서 구조하여 보호 중입니다. 그리고 한열 학생을 위해 증언을 해주시기로 약속하셨죠.”

“……!”

아, 이건 적진에 심어놓은 김대섭 대리의 첩보가 없었다면 막지 못했을 수도 있다.

이런 말 뭐하지만, 김 대리는 우수한 간첩이었다.

근데 솔직히 말하자면, 습격을 방지하는 것보다 그녀의 사망을 위조하는 쪽이 몇 배는 어려웠다.

어쨌든 우린 성공했고, 저들은 완벽하게 증거인멸을 했다고 지금껏 오인해왔을 것이었다.

‘정말 죽일 생각이었는지, 아니면 일이 끝날 때까지 감금만 해둘 생각이었는지는 불명이지만.’

어느 쪽이든 용서받지 못할 일이란 건 분명했다.

황혁수는 명백히 선을 넘었다. 난 이 일이 있고부터 놈의 위험등급을 이길재 바로 다음 정도로 격상시켰다. 이름하야 ‘인정사정 보지 않고 철저히 박살요망’ 등급이다.

“복사된 지문과 위조 신분증만으로 계좌를 발급해 주기로 했다더군요. 그녀는 꽤나 큰돈을 불러서 거절하지 못했다고 증언했습니다. 밑으로 먹여 살릴 동생이 다섯이었거든요. 현재 우린 로펌의 정보망을 총동원해서 사주한 범인을 추적 중입니다. 뭐, 얼마 안 되어 찾을 것 같긴 합니다만. 짐작이 가는 쪽이 있어서 말이죠.”

이연희의 눈이 반달로 휘고, 이응식 검사의 몸이 절찬리에 식은땀을 분비하기 시작한다.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어떤 근본적인 공포가 그의 내면에 새겨지는 순간.

그러나 그녀는 봐줄 생각이 없다.

책자를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일말의 의혹까지 모조리 반박해 나간다. 세 치 혀가 마지막 희망까지 분쇄한다. 그리고 기어코 피해온 마지막 결론을 끄집어내 눈앞에 들이 밀었다.

“당신들의 포렌식 감식결과는 이렇듯 온갖 거짓과 조작으로 점철됐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거기에 동조하기까지 했죠. LS그룹의 나팔수로서 검찰 조직에 생채기를 냈어요.”

“아, 아니야! 이건 다 상부의 허가를 득하고…….”

“그 상부를 끈질기게 설득한 사람은 누굽니까! 허술하게 수사해놓고 초반부터 범인을 특정해 밀어붙인 사람은? 이런 일련의 과정의 중심에 선 자가 누굽니까? 당신 아닙니까?”

그렇다.

그다.

누가 봐도 그렇게 보인다-는 것, 이게 사실 가장 중요했다.

이응식은 벌떡 일어나 눈을 부라렸지만 정작 시선을 어디 두어야 할 지는 정해두지 않은 듯했다.

결국 그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 와중에 입을 열고 혀를 놀림은 저항이라기보다 얄팍한 몸부림에 가까웠다.

“……웃기지 마. 난 단지 의혹이 있어서 기소를 했을 뿐이야. 그게 검사의 일이고 난 그걸 수행했다. 그게 전부야. 무슨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듯이 보지 마라.”

“그래. 원칙상으론 문제가 없지. 사주를 받았다고 어디 써놓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걸 안다면…….”

“근데 세상이 어디 원칙으로 굴러가던가 말이야?”

그의 마지막 퇴로를 막은 건 이 변호사가 아니라 나였다.

“……뭐?”

“진짜 문제가 없다 생각한다면 그렇게 덜덜 떨지도 않으시겠지. 당신은 알잖아. 이 조직의 생리가 어떤 건지. 이 콘크리트의 밀림이 어떤 잔혹한 규칙으로 운영되는지 말이야.”

“…….”

“당신은 성급했어. 날 확실히 매장하기 위해서 일을 지나치게 키웠지. 이제 그게 고스란히 네 짐이 될 거다. 대중이 검찰의 무능을 성토하겠지. 검찰은 ‘단지 기소했을 뿐’이라고 면피하지 못한다……. 왜냐면 너네 때문에 한 무고한 학생이 개새끼가 됐거든. 그리고 대중은 속았다는 기분을 제일 싫어하지.”

난 거기까지만 말했지만, 뒤에 이어질 시나리오를 유추하지 못할 사람은 여기 아무도 없었다.

검찰은 이제 방향을 꺾은 대중의 분노와 직면하겠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직은 손쉽고 끝장나게 효율적이며 유구한 역사까지 자랑하는 방책을 동원할 것이다.

괜찮은 희생양을 하나 만들어 던진다.

그리고 그 희생양이 내 앞에서 땀을 삐질 흘리며 말을 더듬거리고 있다.

“……설마, 설마 너, 이 순간까지, 기다린 거냐? 이렇게까지 증거를 준비해 두고, 그동안 계속 묵비권을 행사한 게, 나, 나를, 확실하게 잡아 엮기 위해.”

“그렇다고 자기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진 마시고.”

난 씩 웃었다.

아무렴 별로 원한도 없는 검사 하나 잡자고 여기까지 했을까. 상상력도 풍부하셔라. 이건 다 LS의 황혁수 팀장을 압박하기 위한 포석일 뿐이다.

검찰은 이제 황 팀장을 백업해주지 못한다. 그걸 넘어서 검찰이 LS그룹을 통째로 보이콧해버릴 가능성도 있다. 그렇게 된다면 그 원인이 된 황 팀장의 사내 입지는 쥐포처럼 짜부라질 게 분명하다.

‘물론 이것조차 내겐 포석일 뿐이지만.’

사실 진짜 게임은 지금부터거든.

“어쨌든 고마워, 이응식 검사. 당신은 쓰레기지만 꽤 쓸 만한 쓰레기였어. 그러니까 가는 길에 분리수거 정도는 해줄게.”

당신이 출세에 목을 매지 않았다면, 그래서 날 철저히 밟아버리려 하지 않았다면, 이런 극적인 반전효과는 결코 노릴 수 없었겠지.

그래서 감사하다.

당신이 쓰레기여서 내가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가시죠, 은인. 기자회견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예. 끝나고 점심은 제가 살게요. 좋아하시는 거 있으세요?”

“설렁탕이요.”

“우왓. 이건 또 참신한…….”

“괴테는 깍두기 국물 섞은 설렁탕을 먹지 않고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 했습니다.”

“그건 또 어느 나라 괴테여.”

“충남 출신 박괴테 씨입니다.”

가도 된다는 허락 따윈 없었지만, 우린 아랑곳 않고 만담을 나누며 취조실을 나섰다. 누구도 우릴 막지 않았다.

멘탈 내구도가 쿠크다스까지 떨어진 한 인간을 뒤에 남겨두고.

*   *   *

불쌍해 보이기 위해 간단한 메이크업으로 초췌 페이스를 만들고 눈에 안약을 콸콸 부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몰골을 목표로 망가뜨렸지만, 오늘도 열일한 [부처핸섬] 덕에 어쩐지 순정만화 속 비련의 조연 같은 게 완성돼 있었다.

이 변호사님이 퇴폐미가 어쩌고 중얼거리기에 고칠까 했지만,

“아뇨, 그게 좋은 겁니다.”

라며 결사반대를 하기에 이 얼굴 그대로 기자회견장에 올랐다.

기자회견은 짧고 임팩트 있게 진행됐다.

이 변호사님이 검찰 측 주장을 반박하고 누명을 씌운 제3자를 성토하는 가운데 나는 열심히 불쌍한 척을 하며 앉아있기만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쓱 읊었다.

“누구에게도 원망의 마음은 없습니다. 여러분도 원망의 마음을 거둬주세요. 저는 그저 슬플 뿐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이슬 한 줄기가 눈가를 또록 굴러 내려갔다.

눈가에 퍼붓고 남아있던 안약이 타이밍 좋게 삐져나온 게 진실이지만 비주얼만큼은 근사했던 것 같다.

여기저기서 ‘헉’하는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여담이다만 이 순간은 다음날 일간지 메인 1면을 장식하면 영구 박제되었고,

그날 밤 두부 사서 기다리던 보육원 가족들이 “슬플 뿐…….”을 성대모사하며 날 두 번 죽임으로써 명실상부한 흑역사가 되었다.

어쨌든 그 외에는 완벽한 기자회견이었다.

내 할 말만 하고 ‘건강상의 이유’로 내뺄 수 있었다는 점이 특히 최고였다.

*   *   *

김득칠은 정신이 죽었다 사는 기분을 매일 느끼고 있었다.

‘……자백제를, 너무 많이 맞았어.’

흰색 방에 결박당한 뒤로 며칠이나 지났을까.

삼일? 일주일? 아니면 한 달일지도 모른다. 시간관념이 뇌수에 녹아서 아무렇게 흘러내리는 듯했다.

감금당한 뒤로는 식사, 그리고 고문과 심문의 반복일 뿐이었다.

고문이라고 해봐야 육체적인 린치는 일체 없다. 그저 재우지 않으면서 정신을 끊임없이 깎아내린다. 불을 항상 켜놓고, 잠이 들려고 때마다 물을 뿌려서 깨운다. 단지 ‘그것뿐’이라고 말한다면, 그건 수면고문을 겪어보지 못한 행복한 사람이리라.

이건 지옥이다.

사고가 제대로 이어지지 못하고 단락 단락 끊어진다. 깰 때마다 두개골이 작아진 것처럼 뇌를 죄는 고통이 엄습한다. 그 고통조차 달콤한 수면욕에 버무려진다. 그러나 그 달콤함에 혀를 대는 순간 그는 억지로 기상하길 반복한다.

이런 상태에서 자백제를 맞으면 그때부턴 아예 정신이 나가버린다.

자신도 모른 사이에 조직의 비밀을 숱하게 불어버렸을 것이다…….

“한열이 멋지던데.”

“노림수가 제대로 먹혔어. 이제 우리 과장님이 돌아갈 날만 남았다고.”

“그래, 그 황혁수 개새끼 치울 날도 얼마 안 남았다.”

그러던 어느 날, 김득칠은 이상할 정도로 상황을 또렷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사람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해도 된다. 머릿속에 늘 끼어있던 안개가 오늘만큼은 맑게 개었다. 감금된 이후로는 처음 있는 일.

‘……갑자기 왜?’

남자 두 명이 구석에서 티비를 보면서 수다를 떨고 있다.

자신은 여전히 의자에 앉아 결박된 채.

이유는 모르겠지만, 정신이 돌아온 지금이 탈출할 유일한 기회다. 그는 눈가를 좁히고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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