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이 자꾸 늘어 104화>
12. 새로운 시작 - 11
‘……갑자기 왜?’
남자 두 명이 구석에서 티비를 보면서 수다를 떨고 있다.
자신은 여전히 의자에 앉아 결박된 채.
이유는 모르겠지만 갑작스럽게 정신이 회복됐다. 아직 몽롱한 기색이 덜 빠졌음에도, 지금이 둘도 없을 기회임을 본능 차원에서 직감한다. 그는 눈가를 게슴츠레 좁히고 상황을 파악해나갔다.
방은 철저히 폐쇄돼 있었다.
창문은 판자로 철저히 가리어 햇빛 한 줌의 출입마저 틀어막았다. 문은 앉은 자리에서 정면에 있으나 위치는 정반대다. 그리고 그 사이에 남자들이 뒤통수를 보인 채 앉아 티비를 보고 있었다.
TV에서는 때마침 뉴스가 방영되고 있었다.
[……이한열 군이 스스로 무혐의를 입증하면서 사태는 완전히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됐죠. 이제 쟁점은 ‘누가, 왜, 무슨 목적으로 무고한 학생을 모함했는가’로 옮아갔는데요. 교수님께선 이 상황을 어떻게 보십니까?]
[글쎄요, 지금으로선 뭘 장담할 근거가 부족하겠지요. 그럼에도 물으신다면, 여러 요인이 복합됐다고 봅니다. 당차게 범죄와의 전쟁을 선언했지만 큰 성과는 거두지 못하고 있죠. 거기에 정권의 레임덕이 겹쳤습니다. 국민의 기대치는 높은데 정부가 발맞추지 못하는 느낌이에요.]
[이 모든 게 국민여론을 무마시킬 목적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벌인 사기극이다, 그런 말씀이십니까?]
[사실 견실한 이성을 중심에 세우고 지난 사태를 돌이켜보면, 사법당국이 작정하고 한 인간을 몰아세웠다고밖에 보이지 않아요. 지나치게 수월했죠. 마치 시나리오가 준비돼 있던 것처럼 모든 게 딱딱 맞아 들어갔다는 겁니다.]
[아, 방금 속보가 들어왔습니다. 검찰 측 발표가 있던 모양인데요, 검찰은 이 사태를 이한열 군을 기소한 대검 중수부 이응식 검사의 개인적 비리행위로 보고, 즉시 직위를 해제하고 사태파악에 나서겠다는…….]
방 안의 정보를 착실하게 기록해나갔다. 탁자. 나무 수저. 텅 빈 유리 맥주병. 음식물이 말라붙은 그릇.
마지막으로 본인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환자복처럼 얇은 소복.
두 손은 앞으로 모인 채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손목을 타고 시선을 옮기니 팔뚝에 박힌 링겔 호스가 허공에 덜렁거리고 있다.
‘……이한열의 인질을 납치하려다 갑자기 눈앞이 캄캄하게 됐고…… 그리고 지금인가. 나는 실패한 거군. 부하들도 다 같이 잡혔나? 알 수 없다. 우라질! 고삐리 따위에게 우리가 이렇게까지 된통…….’
이제 김득칠은 자신의 상황을 확실히 자각할 지경까지 이지를 회복했다. 그러나 회복된 이성에 깃든 것은 단 하나의 충동뿐이었다. 들끓는 공포로 그는 신음했다.
지금 당장 도망쳐야 한다……!
“근데 우리 얘긴 한 마디도 안 나오네요.”
“뭐, 쟤들도 머리가 복잡하겠지. 이게 그냥 보안팀장의 폭주라고 하면 일이 쉽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어느 선까지 관여됐는지 쟤들은 모르잖아. 간도 안 보고 그냥 건드리기엔 LS그룹이란 이름값은 꽤 세지.”
“황 팀장은 대체 무슨 깡으로 이런 짓을 벌인 걸까요?”
“뭐, 이한열이 난 놈만 아니었다면 이런 리스크까지도 없었어. 그냥 된통 걸린 거지. 우리한테는 횡재인 거고.”
남자들의 목소리가 둥실 떠다닌다.
평소라면 흥미롭게 들었겠지만, 생존본능에 세포 한 점까지 총동원된 지금, 불필요한 정보들은 자동으로 분리수거 되어 의식 밖으로 내몰렸다.
일심불란한 초집중 상태에서, 그의 의식이 느리게 흘러간다.
‘……그릇, 수저, 입가에 단맛이 남아 있다. 난 식사 시간이었던 건가? 아, 그렇군. 배고프니까 정신은 없어도 반사적으로 먹었던 거야. 저들도 그걸 아니까 날 방치했다. 내가 정신이 돌아오지 않을 거라 과신하고 있어.’
그의 시선이 손목과 수갑에 다다른다.
‘평소에는 뒤쪽으로 결박했는데 식사시간이니까 고쳐둔 걸까? 그렇다면……. 음. 운이 아주 좋았네.’
방법이 생각났다.
그는 고개를 꺾어 수액줄을 물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머리를 젖혀 바늘을 빼낸다. 이내, 핏물 맺힌 바늘이 그의 손바닥 위에 놓였다.
조직 물 먹으며 어울리지도 않는 자문사 역할이나 해왔지만, 그의 본령은 좀도둑이다.
거기에 열쇠구멍만 있다면 금고든 문이든 그가 못 열 것은 없었다.
링겔 바늘이 스르륵 수갑의 틈새를 파고든 순간.
“아으 졸립다. 야, 나 화장실 좀.”
“또 큰 거냐? 니 대장은 어찌 그렇게 자유분방하냐. 아주 틈만 나면 싸대네.”
“어마어마한 것이 출산될 것 같아. 지금 나 느낌이 되게 쎄해.”
“더러운 새끼. 가서 그냥 오지 마.”
“내 생생한 현장감을 묻혀서 돌아오리다.”
“화장실에서 살라니까 그냥.”
사내 한 명이 소파에서 일어나 김득칠을 쓱 살핀다.
김득칠은 팔을 비스듬히 꺾어 바늘 위치를 가리고 고개를 푹 숙였다.
‘……가라. 그냥 가! 네 항문의 부름을 외면하지 마라! 신호가 왔으면 그 내면의 외침에 집중해야지! 새끼야!’
간절한 기도가 통했던 걸까. 사내는 대충 훑어보기만 하더니 어기적어기적 화장실로 직행했다.
한숨을 푹 내쉰다.
김득칠은 바로 수갑을 풀어 테이블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는다. 다리에도 족쇄가 있었지만 간단하게 해제. 이제 탈출까지 남은 장애물은 하나뿐이다.
‘……지금 내 몸 상태로 제압할 수 있을까?’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따질 때가 아니다. 해야만 한다. 김득칠은 탁자 위의 유리병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고 걸었다.
한 발자국.
“아이고. 말세네 말세야. 쯧쯧.”
또 한 발자국.
발끝으로 소리를 죽이며.
“에이 요새 뉴스는 뭐 이렇게 흉흉한 소식만…….”
뻑-!!
맥주병으로 뚝배기 깨는 소리는 의외로 둔탁하다. 유리라고 해서 ‘쨍그랑!’ 같은 높은 톤의 파형이 생기진 않는다.
현직 조폭에 절찬리 종사중인 김득칠은, 물론 많이 해봤다는 이유에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크리티컬이 터졌을 때의 손맛도 훤하다.
그리고 오늘의 손맛은 제대로였다.
남자의 실루엣이 양옆으로 흔들리다가 속절없이 무너진다.
그 순간 김득칠은 뒤 볼 것도 없이 발을 박찼다. 챙긴 것은 탁자 위의 핸드폰 뿐. 무계획에 대책까지 없는 도주였으나, 이미 그의 이성은 금일 할당량의 용량을 다 써버리고 난 뒤였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는 맨발로 산을 타고 있는 본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미 날은 깊이 저물어, 둥근달이 눈을 쨍하니 뜨고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탈출? 성공, 성공한 건가?!”
얼결에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한다.
열흘. 반년은 갇혀있던 것 같았는데 그날 이후 고작 열흘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키패드를 턱턱 두드렸다. 조직의 비상연락망을 떠올려 전화를 건 것이다.
“……어, 나다. 그래. 형님은? 아니, 그럴 일이 있었다. 뭐야? 시국이 어쩌고 저째? 비상사태인 거 나도 알아! 까불지 말고 지금 당장 형님한테 전화 돌려!”
그러나 조직의 위기임이 말뿐은 아니었는지, 그 뒤로도 삼십 분을 쌩으로 실랑이를 벌인 뒤에야 그는 보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여보쇼.
“형님, 저 득칠입니다.”
전화 저편으로, 이길재가 이를 득득 갈았다.
-너 뭐하는 새끼냐. 이 씨벌놈아. 계집애 하나 납치해오라는 게 그렇게나 중차대한 임무였어?! 지금껏 뭣하다 이제야……!!
“형님. 진정하십쇼. 저 납치됐다가 이제야 도망쳐 나왔습니다.”
-뭐야?
“이한열 이놈이……, 형님 말씀대로 그룹 차원의 비호를 받는 게 분명합니다. 아니, 비호 정도가 아니겠네요. 납치 감금까지 감행할 정도면……. 저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중요인사일지도 모릅니다.”
-그딴 건 이미 다 알고 있어. 아니었어도 중요인사가 이미 됐으니까. 매일 그놈 얘기로 언론이 떠들썩한 거 모르냐?
“죄송합니다. 그럼 자세한 건 만나 뵙고…….”
-만나 봬? 만나긴 누굴 만나.
“예?”
-근데 너 갑자기 어떻게 풀려난 거냐?
다리에 힘이 풀릴 뻔했다.
이길재 밑에서 몇 년이나 구른 자신이다. 그가 어떨 때 저런 화법을 쓰는지 너무도 잘 알았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든 정해진 흐름대로의 결말을 맞이하게 될 것임도.
이길재는 지금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
그리고 일단 의심모드에 들어간 이길재는 무지막지하게 편협해진다.
-재벌 사냥개들이 얼마나 철저한 새끼들인데 네놈 따윌 놓치겠냐. 웃기지 마. 너 지금 놈들하고 같이 있지? 이거 도청되고 있는 거 아니야? 네놈 목숨 하나 챙기자고 이 오야를 팔아먹은 게야? 이 막 되먹은……!!
“아닙니다 형님!! 맹세코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어디까지나 놈들이 해이해진 틈을 타 제 발로…….”
-닥쳐!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역시나 말이 통하질 않는다.
욕지기가 창자 깊숙한 곳에서부터 솟았다가 다시 무겁게 가라앉았다. 발을 돌려서 정말로 배신하고 싶어졌다. 지옥 같았던 지난 열흘이 아니었다면 진짜 그랬을지 모르지.
어쩔 수 없다.
이 빌어먹을 팔자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의심을 받든 구박을 당하든, 이 배린 몸뚱이가 돌아갈 곳은 결국 조직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자신이 조직에 돌아가려면 대가를 바쳐야 한다.
그 순간.
‘우리 과장님 너무 오래 고생하셨어.’
‘황 팀장은 대체 무슨 깡으로 이런 짓을 벌인 걸까요?’
‘이한열이 난 놈만 아니었다면 이런 리스크까지도 없었어.’
가벼이 스쳐 보낸 말의 조각들. 무의식의 바다에 가라앉혀두고 있던 그것들이, 그의 절박함에 화답하듯 떠올라 마침내 쓸모 있는 정보로 재조직됐다.
이건 된다.
이 정보라면 어쩌면…….
김득칠이 다급히 말을 던진다.
“그룹 내부에서 이한열을 쳐내려는 움직임이 있는 듯합니다. 이용하시죠.”
-……뭐야?
“LS 보안팀의 황팀장이란 자와 이한열이 충돌한 결과가 지금의 난리입니다. 그 안에서도 균열이 있다는 겁니다.”
-…….
침묵.
그러나 김득칠로선 기꺼운 침묵이었다.
의심모드의 이길재가 버럭하지 않고 일단 말을 듣고 있다. 그건 곧 평소 대비 200퍼센트 마음이 동했다는 걸 뜻한다.
그렇겠지.
목소리에 배인 짜증지수만 봐도 놈이 얼마나 궁지에 몰려있는지 가늠이 됐다.
그 와중에 상황을 타개할 실마리가 그 단초를 드러냈다. 관심을 드러낼밖에.
김득칠은 그대로 기세를 타고, 남은 말을 단숨에 읊어 내려갔다.
“이 흐름만 잘 타면, 지금의 난리를 역이용해서 상황을 호전시킬 수도 있을 겁니다.”
여전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김득칠은 수화기 너머의 분위기가 반전되었음을 직감했다.
유의미한 공백 끝에, 이길재가 입을 연다.
-너 그 얘기 자세히 좀 해봐라.
이 순간 김득칠과 이길재는 소리 없는 환성을 내질렀다. 시궁창 속에서 살짝 두터운 지푸라기를 잡았으니 숨통이 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단적으로 말해, 이 둘은 샴페인을 좀 일찍 터뜨렸다.
당초의 이길재가 옳았다.
김득칠 따위가 LS경호팀의 엄중한 경계를 뚫고 도주하는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그들은 마땅히 의심해야 했다.
‘우연히’ 정신이 들었으며, ‘우연한’ 타이밍에 링겔주사를 맞았고, 요원들은 ‘공교롭게도’ 유용한 정보를 누설했으며, ‘형편 좋게’ 타격무기가 준비돼 있었다는, 그 기막힌 전개에 위화감을 느꼈어야 했다.
그러나 희망은 잔인한 법.
당장의 간곡함은 그들의 경계심을 간단히 무장해제 시켰다.
그랬기에 김득칠이 떠난 감금방에서, 두 요원이 그들의 대화를 엿들으며 무전을 때리고 있다는 사실 또한 추호도 상상하지 못했다.
“쥐새끼가 고양이에게 먹이를 전달했다.”
그곳 바닥엔 아직도 설탕으로 만든 가짜 유리병조각이 흩뿌려져 있었다.
* * *
황혁수 보안팀장은 고막이 얼얼하다고 생각했다.
-고작 이 정도의 사람이었다니 실망이군요. 다음 분기에 인사이동이 있을 겁니다. 회장님께 보고가 올라갔음에도 이쯤에서 마무리되는 걸 다행으로 아세요. 당장은 자중하고 계시고.
부회장실에 들어가자마자 통보받듯 들은 말이었다.
황혁수는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고 판단하자마자 능숙하게 꼬리를 잘랐다. 공식적으로 이 사태는 보안팀 말단 직원이 이한열을 질투하여 벌인 독단으로 기록되었다. 부하직원 관리소홀로 추궁 받겠지만 감당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장진욱 부회장은 내막을 단숨에 꿰뚫어보고, 한 마디 변명도 허락지 않은 채 그를 좌천시켰다.
그나마 형사 고발을 하지 않는 건 그룹의 위신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리라.
“……빌어먹을.”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와장창! 책상 위 서류들이 그의 손에 쓸려 허공을 날았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으을……!! 이게 다 당신이 시켜서 그런 거 아니야!!”
물론 부회장은 어떤 것도 지시하지 않았다.
이 모든 건, 지금 자리에서 밀려나기 싫었던 황혁수가 과잉충성을 한 결과일 뿐이다. 그는 뿌린 것을 정확하게 수확했다.
그는 엉망진창이 된 사무실 가운데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렇게 밀려날 순 없어. 아니, 밀려나도 좋지만 이상용 그 새끼한테 뺏기는 것만큼은 안 돼!”
그에게 신원불명의 전화가 걸려온 건 그 순간이었다.
“……뭐야. 이 번호를 어떻게 알았지. 너 누구냐.”
-그쪽 요원들이 폰을 흘리고 다니더라고. 하여튼 반갑소. 나 이길재란 사람이요.
“흥. 깡패새끼였군.”
-에헤이. 그렇게 말하면 듣는 깡패 섭하지. 내가 당신 구명줄이 되어줄 수도 있는데 말이야.
“웃기는 소리. 내가 어쩌다 여기까지 전락했지만, 그래도 네놈 따위와 말을 섞을 만큼은 아니야. 버러지. 숨었으면 계속 거기 처박혀있을 것이지 어딜 고개를 쳐들고…….
수화기 너머로, 이길재는 뱀 같은 숨소리를 섞으며 웃었다.
-으흐흐. 아따 콧대 높은 양반이네. 좋아. 뭐, 나도 당신네들하고 엮이기 싫으니 온도 차는 대충 맞네. 일 하나만 같이 하고 딱 손 놓읍시다. 어떻소?
“미친. 내가 왜 그따위…….”
-이한열, 그놈 치우고 싶지 않소?
꼿꼿하던 황혁수가 처음으로 입을 다물었다. 깡패 주제에 제법 깊은 곳을 찔러온다……. 그는 그런 감상을 떠올렸다.
그 마음을 헤아렸다는 듯이, 이길재는 즉각 말을 잇는다.
-나도 들은 게 있어서 말이지. 이한열 그놈 때문에 실시간으로 좆 되고 계신 중이시라고? 공교롭게도 우리도 그렇거든. 공감대 형성은 중요하지. 어때, 친구가 된 기념으로 우리가 놈을 치워드리지.
“……그럼 그냥 치우지? 내 허락을 구할 필요가 어디 있나.”
-여기까지 와서 촌스럽게 떠보지 마십시다. 그룹의 경호팀이 놈을 지키고 있다는 걸 내 이미 알고 있소.
“…….”
-당신이라면 그걸 어떻게 할 수 있겠지? 경호 시스템에 작은 허점을 만들던가. 그걸 우리한테 넌지시 가르쳐 준다던가……. 그래주면 우리가 놈을 깔끔히 처리해드리겠소.
“제안 자체는 혹한다만, 따지고 보면 내게 별 이득은 없어. 놈이 실종되더라도 내 처지에 변화는 없다. 아니, 이 시국에 놈이 비극적으로 실종된다면 외려 내가 의심을 받을 수도 있지. 그런 말도 안 되는 제안을 내가 받아들일 거라 생각하나?”
물론 이한열이 진짜 실종된다면, 그건 고스란히 이상용 과장의 실책이므로 일말의 이득을 얻는 건 사실이다.
황혁수는 그런 사실은 쏙 빼고 말했다. 물론 이길재는 능글맞게 대처했다.
-에이, 누가 놈을 ‘실종’시킨다고 했소. 물론 잠깐 사라지긴 하겠지. 하지만 다시 등장할 거요. 그리고 자신의 악덕을 제 입으로 자백하겠지.
“……그게 무슨.”
-난 놈을 잡아들이고 협박할 거요. 혐의를 순순히 인정하고 제 발로 구치소에 걸어 들어가지 않는다면…… 그놈이 아끼고 사랑하는 모든 것을 파괴할 거라고. 당신은 그럴 수 없겠지만 우린 그럴 수 있소. 우린 그 방면의 스페셜리스트니까.
“…….”
-지금까진 그놈을 그룹의 경호팀이 단단히 지키고 있어서 그놈 주변을 건드리기도 버거웠지. 하지만 놈만 없어진다면 나머진 간단해. 남은 건 당신의 결단뿐이오.
역시나 침묵이었다.
그러나 역시나, 공기가 반전되었음을 이길재는 수화기 너머로도 알 수 있었다. 왜냐면, 불과 반나절 전에 자신도 꼭 저러했으니까.
마침내 황혁수가 입을 떼었다.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