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이 자꾸 늘어 107화>
12. 새로운 시작 - 14
이길재.
3년 뒤에는 지금의 오야까지 재끼고 동부파의 모든 것을 장악하는 남자.
악마적인 발상, 뛰어난 정치 감각, 짐승 같은 생존본능, 거기에 타고난 강운까지, 그야말로 뒷세계의 주인이 될 운명으로 안배된 듯한 캐릭터다.
소년만화였다면 최종보스로서 주인공에게 쓰러질 포지션이었겠지만,
전생에서 이길재는 저승사자조차 질려서 안 데려간 건지 뭔지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다.
살아남았다 뿐인가.
폭력조직으로서의 동부파는 박살 났지만, 이길재는 신분세탁에 성공하고 사업가로 둔갑해서 버젓하게 살았다.
내가 암에 걸려 죽어 갈 때도 놈은 건재했다.
난 놈을 보면서 세상의 부조리를 통감했다. 유능무죄 무능유죄. 될 놈은 악인이든 뭐든 된다는 걸 놈은 몸소 증명했다. 어쨌든 놈은 내가 본 사람 중 가장 유능했으니까.
그래서 놈을 잡겠다고 결정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실행가능성이나 달성의 어려움과는 별개의 문제다.
과거의 이미지에 사로잡힌 나로선 이길재를 무너뜨린다는 발상을 떠올리는 것조차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필요했다.
내 기억 속에서 그는 최악최흉의 절대자였다. 유능함의 정화였다. 범접불가의 상징이었다. 전생의 나는, 이길재의 그림자에게 끝없이 패배해 온 무력감의 찌꺼기 같은 존재였다. 그때의 이한열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두렵나.”
내가 이 순간을 그 어느 때보다 고대해 왔음을,
이 심장이 내 상상보다 훨씬 더 활기차게 맥동하고 있음을,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이, 버러지 같은 새끼가.”
“널 끌어내기 위해 꽤 번거로운 일을 꾸몄지. 난 널 잘 알거든. 강박적일 만큼 신중하고, 위험한 모험은 절대 하지 않지. 그래서 난 나 자신을 미끼로 걸었다. 네가 긴장을 풀 때는 사냥감이 다 잡혔다고 확신하는 순간, 그때뿐이니까.”
그래.
모든 상황이 완벽히 통제 하에 놓였다고 확신해야만 놈은 모습을 드러낼 것이었다.
그러려면 어지간한 미끼로는 어림도 없다. 내가 잡혀야 한다. 반대로 말해 내가 잡히면 놈은 반드시 모습을 드러낸다.
왜냐면 놈은 사냥꾼이니까.
단순한 겁쟁이라면 영원히 도망 다니겠지만, 놈은 신중함 이면에 승부사의 기질을 갖췄다. 사냥감이 잡히면 풀숲에서 몸을 일으켜 전리품을 확인할 테지. 그것이 이길재다. 그리고 난 놈의 그런 기질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넌 감이 좋지. 김득칠이 꾸며내어 지껄였다면 끝내 믿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김득칠도 속았으리라는 진실에까지 이르진 못했어. 왜냐면 너도 다급했으니까. 이 가느다란 희망을 잡고 싶은 마음에 굴복했다. 그것이 네 패인이다.”
“…….”
-쾅, 콰광!
그 순간 스피커를 통해 강한 폭발음이 전해졌다. 모니터 저편의 상황이 일변했다. 방문이 박살 나고, LS그룹의 경호팀이 일제히 들이닥쳐 톱을 들고 설치는 남자를 제압했다.
박종철은 아래위로 뭔가를 질질 흘리고 있긴 했지만 어쨌든 상처 하나 없이 구조됐다.
저쪽은 아지트 외곽이라 더 빨리 도착한 모양이다.
이건 여담이지만, 박종철한테도 GPS 송신기가 붙어 있다. 경호팀이 작업한 결과였다.
“생각보다 빨리 구조됐네. 흠. 근데 잡아 온 건 박종철뿐이냐? 내 ‘절친’ 김송헌은 납치 못 했어? 아, 국회의원 자식이라 건드리지 못한 건가?”
“……그래. 수 싸움에서는 네가 이겼다. 인정할 수밖에 없군.”
이길재의 면상에 악귀나찰의 분노가 떠올랐다. 놈이 이를 아득 깨물었다.
“하지만 네놈이 아직 내 손에 있다는 사실을 잊은 것 같은데.”
“음, 나 건드리면 안 되는 거 아니었어?”
“이제 와선 상관없지. 계획이고 뭐고 어차피 다 글러먹었으니까. 시벌. 네놈 멱따고 화라도 풀어야겠다. 이 새끼 잡아.”
주변의 떡대들이 내 어깨를 우악스럽게 찍어 눌렀다.
이길재가 사시미를 좌우로 건들건들 까닥이며 내게 다가온다. 느리지만, 한 발 한 발 선고를 내리듯 명확히 찍히는 발걸음들.
느긋하게까지 느껴지는 그 몸짓은 감탄마저 자아냈다. 이건 인정할 수밖에 없겠다. 거기엔 시시각각 죽음에 접근하는 지금 순간을 만끽하라는 그의 의도가 담겨 있다. 초를 다투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공포감을 조성하는 연출에 소홀함이 없다.
프로 깡패로서 자세가 되어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의 최후의 노림수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난 어떤 공포감도 느끼지 못했으니까.
“넌 왜 옛날부터 수갑을 그렇게 고집하는지 모르겠어. 경찰이라도 되고 싶었냐?”
“……뭐?”
“흡-!”
이길재는 사람을 결박할 때 언제나 케이블타이나 수갑을 사용하곤 했다.
그래서 궁금해졌지.
[역발산기개세]의 3배 효과.
극한의 웨이트트레이닝으로 기본 근력까지 한계치까지 끌어올린 상태라면, 수갑의 고리 정도는 끊을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여기 오기 전에 시험 삼아 해 봤다.
결과는-
탱!
“……응?”
“불량품은 아니니까 너무 억울해 하진 말고.”
결합부가 반으로 쪼개진 채, 은색 고리만 내 손목 양쪽에 덜렁덜렁 매달려 있었다.
자유로워진 손으로, 내 어깨를 짚은 놈의 손목을 쥐고 틀었다. 남은 한 놈은 멱살을 쥐고 가볍게 던져 버렸다.
“끄아악!!”
“이런 씨부랄 놈이-!! 이 새끼 잡아-!!”
나는 발목의 수갑도 끊어 버린 뒤 가볍게 몸을 털었다.
앞 옆 뒤, 세 방향에서 동시에 사시미가 쇄도해 온다. 찔러 오는 타이밍에 전진, 스텝을 밟으며 칼날의 궤도를 빗겨 낸다. 파고들며 가볍게 잽. 바로 몸을 틀면서 숏훅. 뒷발을 튕겨 내듯 돌진해서 원투.
한 호흡에 네 번의 펀치가 있었고,
턱주가리를 핀 포인트로 가격당한 조폭 셋은 거의 동시에 무너져 내렸다.
3초 만에 상황 정리.
“자, 길재야, 이제 우리끼리 차분한 담소를…….”
그러나 고개를 돌린 순간 나는 아연해지고 말았다.
분명 3초 전까지만 해도 막혀 있던 벽 한쪽에 지하로 떨어지는 계단이 등장하고, 결정적으로 이길재가 사라져 있었다.
내가 5명의 쫄들을 처리하는 그 짧은 순간 도주 각을 재고 망설임 없이 실행한 것이었다.
이쯤 되면 자기보신만큼은 신의 경지에 올랐다 하겠다.
“……비밀통로인가.”
지하통로라면 포위망을 벗어날 가능성이 컸다.
LS보안팀이 제아무리 용을 빼는 재주가 있었던들 땅 밑까지 샅샅이 조사하진 못했을 테니까.
심지어 이건 나도 예상하지 못했다.
바로 추적해야 하나. 아니면 경호인력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까. 저 안에 어떤 함정이 도사리고 있을 줄 누가 알고…….
하지만 고민은 짧았다.
“쫓는다.”
놓칠 가능성은 조금도 남겨 두지 않겠다. 나는 빠르게 몸을 날렸다.
어둠이 눈앞을 메웠다.
축축한 공기가 뺨에 닿았다. 곰팡이와 해묵은 먼지의 냄새가 낯선 이의 방문에 놀라 몸을 부딪혀 왔다.
방에서 주워 온 핸드폰으로 램프를 켜봤지만 어림도 없었다. 빛줄기는 얄팍하여 나아가다가도 저 어딘가에서 시들시들 사라졌다. 난 발밑만 간신히 확인해 가며 다급히 추격했다. 걸어도 걸어도 제자리 같았다.
이 지하통로가 지옥까지 이어져 있다고 해도 믿어 버릴 심리상태가 되었을 즈음.
빛이 느닷없이 등장해 내 안구를 타격했다.
그러나 내 우월한 몸뚱어리는 명순응조차 인간의 범주를 넘어서 있었다. 난 순식간에 회복하고 주변을 살폈다. 외딴 숲 한복판이다. 나무들은 현실남매 사이처럼 데면데면한 간격으로 서 있었다.
그리고 나무들 사이로, 저 밑으로 도주하고 있는 이길재의 뒷모습이 발견됐다.
발밑의 짱돌을 차올려 잡아챈다. 자세를 잡고 조준. 탐스러운 뒤통수를 목표로 냅다 투척했다. 당연히 명중시키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허공을 유린하며 질주하던 짱돌은 무언가에 가로막혀 산산이 부스러졌다.
짱돌의 잔해가 남긴 먼지더미를 뚫고 누군가가 등장한다.
이 시점에서 전혀 반갑지 않은 얼굴이었다.
“오랜만. 동생.”
“누가 당신 동생이야. 누가.”
빨간마스크, 장이화가 가느다란 눈웃음과 함께 등장한 것이었다.
“아니, 동생은 어쩐지 친근하단 말이지. 어디선가 만난 거 같기도 하고. 우리 어렸을 때 헤어진 형제 같은 거 아닐까?”
“대가리는 장식이냐. 나이 차를 생각하시지.”
“그건 그래. 내가 씨뿌리기에 의욕이 있었다면 지금쯤 너 만한 아들이 있었을 텐데. 아, 말 나온 김에, 너 내 아들 안 할래? 보면 볼수록 탐난단 말이야.”
장이화가 혀를 길게 내어 입가를 탐스럽게 핥는다.
물론 마스크에 가려 보이진 않지만, 내 날카로운 감과 놈의 노골적인 태도 덕에 그 밑의 장면이 역겨울 정도로 잘 그려졌다. 뱀 한 마리가 거기 있었다.
“개새끼라 그런가 개소리가 제법 찰지네.”
“하핫. 톡 쏘는 것도 맘에 들어. 음, 마음 같아선 느긋이 회포를 풀고 싶지만, 나도 오늘은 일하러 온 거라 말이지.”
“…….”
장이화는 혼자가 아니었다.
사방의 나무들 뒤에서 그림자가 하나둘 모습을 드러낸다. 그 수는 총 아홉. 새까만 가죽옷과 단단한 무표정을 유니폼처럼 통일한 작자들이 날 응시했다.
난 저들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하수구의 사냥개들.”
“오. 우리가 누군지 아나 본데. 너 진짜 정체가 뭐냐?”
“…….”
해결사 빨간마스크를 필두로, 조직의 가장 더럽고 어려운 일을 치우는 하수구의 청소부들.
저 장이화와 손발을 맞추는 만큼 저들 하나하나가 말도 안 되는 괴물들이다.
“미안하지만 길재는 줄 수 없어. 뭐, 좀 얄밉긴 해도 한 지붕 밑에 사는 식구란 말이지. 처벌해도 우리가 처벌해. 외인에게 내줄 수야 없단 말이지.”
“……그런 거 치곤 꽤 괜찮은 타이밍에 등장하셨는데.”
“하하. 역시 날카롭네. 그래 맞아. 네가 길재를 잘근잘근 밟아 주길 어느 정도 기대는 했지. 뭐랄까. 요즘 걔 하는 짓이 살짝 불온해서 말이지. 버릇을 고쳐줄 계기가 있으면 했지. 뭐, 이렇게까지 성대하게 해 버릴지는 몰랐지만.”
“내가 이렇게 나올지 알았다고?”
“너만 우릴 관찰했다고 생각하진 마. 우리도 널 관찰했다. 네가 모르는 눈이 있다는 정도만 말해 두지.”
“……그만. 쓸데없는 말은 집어치우자고. 이길재가 멀어지고 있거든.”
나는 두 다리를 어깨 너머로 벌리고 팔을 들어 파이팅 자세를 취했다.
“……이건 또 예상 못한 전개네. 진짜 한 판 하게? 우릴 잘 안다며? 혼자서 어떻게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너만 얌전히 있어 주면 우리도 이대로 있다 그냥 돌아갈 건데?”
“잔말 말고 덤벼.”
“핫.”
장이화는 이 뜻밖의 전개조차 기꺼운지 눈매를 반달처럼 휘어가며 웃었다.
“역시 너는 걸작이야……! 좋아! 이렇게 만나서 부대끼지도 않고 헤어지면 서운하지. 우리 사이인데 말이야!”
“…….”
“근데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 애들이 좀 사납거든. 저번 수준에서 더 발전하지 못했다면 금방 죽어 버릴 거라고?”
새까만 사냥개들이 저마다 배틀나이프를 꺼내 들고 거리를 좁혀 온다.
후-.
나는 그들과의 거리를 재고, 피차의 위치를 확인하고, 빠르게 모의전투를 굴려 동선을 그려냈다.
‘저번 수준에서, 라고?’
그렇게 생각했다면 꽤 흥미로운 볼거리를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나는 저번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거든.
잠시 딴 소리를 해야겠다.
이정철 관장의 부친인 이종수는 젊을 적 복서들의 고향이라 할 수 있던 미국에서 활동한 적 있었다.
아직 복싱에 현대적인 틀이 채워지지 않았던 1940년대.
그 시절, 혜성처럼 등장해 미국 복싱계를 초토화시킨 초특급 괴물이 한 명 있었다.
좋게 말해 인파이팅, 나쁘게 말하자면 그냥 붙어서 치고 박는 게 복싱의 전부로 여겨지던 시대에, 화려한 풋워크, 공간을 장악하는 영리한 경기운용, 바깥에서부터 깎아내듯 던지는 펀치들까지, 아웃복서의 스타일을 정립하고 완성시킨 천재 중의 천재.
본명, 워커 스미스 주니어.
그러나 경기운영이 현란하고 예술적이라는 의미에서 ‘sweet as sugar‘라는 평을 얻었고, 그에 감명을 받아 개명.
복싱 역사에 길이 남을 그 이름은-
[슈거 레이 로빈슨 : 더 복서The Boxer](Rank B)
통산 200전 173승 19패 6무승부 2무효 108KO.
그 위대한 무하마드 알리조차 p4p 최강이라 추켜세운 진짜배기 강자.
이종수는 미국 본토에서 그의 워킹화를 우연히 구해 한국까지 공수, 이준의 삽질로 말미암아 내게까지 전해진 것이었다.
요컨대 긴 복싱 역사 속에서 손꼽히는 천재의 영혼이 내 안에 깃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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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싱 총론 고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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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한 빠르게 끝낸다.”
주변이 회색으로 탈색되며 손끝에 강렬한 전능감이 깃들기 시작했다.
난 주먹을 강하게 말아 쥐며 발을 박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