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이 자꾸 늘어 109화>
12. 새로운 시작 - 16
* * *
‘이 순간이 정말 올지는 몰랐군.’
바라 마지않으면서도 감히 꿈꿀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인류의 평화.
북쪽 돼지의 개과천선.
남성 집단의 영원한 미스터리, ‘그래서 뭘 잘못했는데?’의 해답이 발견되는 순간.
기타 등등, 깊이 염원하면서도 당연히 이루어지지 않을 것임을 알아서 기대도 하지 않게 된 문제들. 그건 아마 사람마다도 다르겠지. 누구나가 제각기의 난제들을 품고 있을 것이다.
내게는 그것이 이길재의 척결이었다.
사실 이길재가 듣는다면 억울하다 하겠지.
전생에서도 그와 나는 큰 접점이 없었으니까. 그는 조직의 정점이었고 나는 가장 밑바닥의 땅개였다. 큰 행사 때나 지나치듯이 조우한 것이 전부.
그러므로 이건 개인적인 원한이라기보다 영혼에 박힌 낙인 같은 것이었다.
그래.
그 시절의 질곡이 날 평생 얽어맸다.
난 지금까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언급을 피해 왔다.
전생에 나와 함께 조직에 ‘팔려 간’ 보육원 아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당연히 떠올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자애들은 초경을 겪자마자 유흥업소에 보내졌다.
놀랍게도 이건 운이 좋은 케이스다. 미색이 뛰어나면 그 이전에도 숱하게 팔려 갔다.
남자애들은 전방에 보내져 칼받이로 살고, 속절없이 죽어 갔다.
남자애든 여자애든, 스물이 넘어가기까지 살아남은 동생들이 셋도 안 됐다.
그 셋도 조직이 와해되면서 소식이 끊겼다.
그러나 그 뒤로도 제대로 된 삶은 살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바로 그랬으니까.
그랬다. 그때의 기억은, 처음부터 끝까지 통째로, 내 패배와 무능의 증거였다.
나도 처음부터 패배감에 굴복한 건 아니었다.
구하려고 애썼다. 가장 맞이인 내가 조직에서 그럴듯한 성과를 거두면 동생들에게도 괜찮은 환경을 마련해 줄 수 있었다.
그것을 위해 더러운 일도 서슴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보란 듯이 실패했다. 난 어느 하나 구하지 못했다.
내 한 목숨이나마 구차하게 부지한 게 내 재능의 한계였다.
내 영혼은 그 시절에 못 박혀 산 채로 썩어 갔다.
난 그 뒤로도 숨 쉬고 밥을 먹었지만 온전히 살아 있지는 못했다. 죽지도 살지도 못한 어중간한 인생이었다.
열정을 불태우면 ‘네가 그래 봐야.’라는 질타가 왕왕댔다.
의지를 촉구하면 ‘넌 무능하니까 어차피 안 돼.’라는 자조가 웅성였다.
살고자, 간절히 살고자 하면, ‘네가 무슨 염치로?’라며 누군가 비난했다.
그 시끄러운 눈빛들.
그 새까만 목소리들.
내 전생을 사로잡은 질타와 자조와 비난의 신호들은 회귀 이후로도 내 뒤에 따라붙어 왔다. 내 옆에서 아직도 아우성치고 있다.
저 자를 심판하라고.
“깨우세요.”
직원 한 명이 정신을 잃은 이길재에게 물을 퍼부었다.
이길재는 소스라치며 일어났다. 정정. 일어나고도 한참은 더 소스라쳤다.
“……뭐, 뭐야. 여기, 여기 어디야. 으, 으우윽. 누, 눈 부셔. 눈, 눈이 부시다고……!”
“그거 참 다행이네.”
탁상에 세워진 스탠드 조명등을 꺾어서 놈의 동공에 직접 쏴 주었다. 이길재는 고통스럽게 몸을 뒤틀었다.
“끄윽, 끄으윽.”
“정신 차려. 벌써부터 정신 놓으면 재미없지.”
“대체, 대체 어떻게 된…….”
“넌 도망가지 못했고, 내 손에 잡혀서 내가 준비해 둔 비밀 가옥까지 끌려왔다. 여기는 지하 3층인 데다 산속이므로 소리를 마음껏 질러도 좋아. 층간 소음에서 완벽히 자유로운 이상적인 주거공간이라 할 수 있지.
멋지지? 참고로 네 부하인 김득칠도 한동안 여기 신세를 졌다. 모르긴 몰라도 주거 만족도가 꽤 높았던 것으로…….”
“나, 난 도망쳤어. 장이화가…… 빨간마스크가…….”
“장이화는 도주했다. 영리하게도 너와는 반대 방향으로 내빼더군. 우리의 타겟이 너라는 걸 잘 파악하고 있던 거지. 버림받는 기분은 어떠신가. 동부파의 전도유망한 보스, 이길재 씨.”
“우아-! 우아아아아-!!”
이길재가 마구잡이로 비명을 지르며 발작했다. 덜컹덜컹.
모든 것을 빈틈없이 계획하고 그 정해 둔 레일대로 살아온 인간이 레일 밖으로 내던져졌을 때 내보일 광증이 눈앞에 전시돼 있었다.
그 작태를 구경하는 것도 퍽 괜찮은 여흥이 될 테지만, 아쉽게도 이길재의 몸은 이미 여러 사람에게 예약된 상태였다.
내 흥밋거리대로 놀릴 수는 없다.
아쉬운 대로, 난 책상을 걷어차 반대편 모서리로 놈의 명치를 가격했다.
“컥!”비명과 호흡이 동시에 차단된다. 난 놈에게 저벅저벅 걸어가 떨군 고개를 억지로 치켜들었다. 눈이 게게 풀려 있었다.
“정신 차리라고 했잖아.”
짝-! 뺨다구 한 대.
“……뭐, 무슨. 이, 이 개자식이……!”
고통으로 날아갔던 정신이 고통으로 귀환했다.
그러나 정신이 돌아오면서 반골기질까지 같이 동반해 온 듯했다. 눈깔에 힘이 들어간 것이 거슬린다.
난 옳다구나 싶어 반대편 뺨다구를 후려쳤다.
짝-!
“……어어.”
다시 정신이 나갔기에, 한 번 더 짝-! 되돌리기 위해 다시 짝-! 짝-! 짝-!
이 기적의 순환논리에 의거하여, 무한의 따귀 세례가 한동안 계속됐다.
어느 순간부터는 논리고 뭐고 상관없어졌다. 얼굴이 탱탱 불어서 반항기가 남아 있는지 어떤지 나조차 분간하기 힘들었다. 그래도 구타는 관성적으로 이어졌다. 의미도 목적도 없는, 부조리한 폭력이 쏟아졌다.
그러나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난 힘을 키우면서, 동시에 힘을 컨트롤하는 법도 익혔다. 지금의 나라면 힘의 단위를 수백 단계로 쪼개어 섬세하게 운용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죽이지도 기절시키지도 않으면서 적당히 망가뜨리는 수준에 딱 맞춰 줘 팰 수 있다.
“그마…… 그마해애애…….”
“한국말이 서툴군. 세종대왕의 이름으로 따귀 세 대 추가.”
아무튼 이유를 갖다 붙여 가며 놈의 얼굴을 예쁘게 성형시킨다.
장민욱의 [미학]으로 보장한다. 부풀다 못해 동글동글해진 낯짝은 본래의 이길재에 비해 확실히 미적으로 진보해 있었다.
난 방금 완성한 작품을 뿌듯하게 웃으며 내려다보았다.
“이제 좀 야들야들해졌군.”
“…….”
“자, 내가 지금부터 뭘 좀 물어볼 거거든? 대답이 1초 늦을 때마다 한 대씩 더 처맞을 줄 알아. 알았어?”
“…….”
“시간 지나간다. 일 초. 이 초…….”
“아, 알았어!!”
“좋아.”
어쨌든 이 초 늦었으므로 두 대를 더 추가하고, 심문을 이어 갔다.
“황혁수 알지?”
“아, 안다. LS그룹 보안팀장…….”
“놈을 포섭할 때 어떤 식으로든 약점을 잡아 뒀겠지. 거래 현장을 찍었다든지. 적어도 너와의 연결고리 정도는 남겨놨겠지. 그게 네 스타일이잖아? 그거 어디 뒀냐.”
“……내 비밀가옥 중 하나에. 그, 금고에 숨겨 뒀어.”
“어딘지 말해.”
놈이 주소를 읊었고, 그것은 마이크를 타고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 과장에게 전달되었을 것이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이 과장님. 거기에 사람 보내서 확인해 보라고 하시죠.”
-오케이. …… 그리고, 고맙다.
귀에 꽂힌 인이어를 통해, 이상용 과장의 텁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별말씀을. 이 과장님이 빨리 출세하셔야 제가 편해지니까요. 아, 그리고 이길재 이 새끼야, 금고 번호도 말해야지. 그리고 가옥에는 잠금 장치 없냐? 왜 말을 애매하게 끊어 끊기는. 목숨 줄도 같이 끊기고 싶냐?”
“……마, 말하려고 했다.”
“잽싸게 읊어.”
이길재는 짧게 머뭇거렸지만, 영리하게도 1초가 지나기 전에 입을 떼었다. 다만 말 자체는 어눌하고 느렸다.
“……금고 번호는 1753299. 가옥잠금장치는 따로 없다. 아날로그 자물쇠인데 열쇠는 내 부하들이 갖고 있어. 그 대신 경비도 없으니까, 그냥 부수고 들어가면 된다.”
“그래?”
“그, 근데, 금고에는 생체인식 장치가 있어. 내가 직접 가야만 열린다.”
난 눈을 얇게 좁히고 이길재의 찐빵 면상을 지그시 쳐다봤다.
살갗이 성대히 부푼 탓에 눈까지 파묻혀 있었기에 진위를 판별하기 좀 난해했다. 게다가 아드레날린이 극한으로 분비될 때는 나도 감정을 읽기 힘들다.
그러나 이번엔 별다른 심리 기술까지도 필요 없었다.
“홍채냐 지문이냐.”
“……뭐, 뭐?”
“어느 쪽이냐고. 홍채면 눈깔을 팔 거고 지문이면 엄지를 도려낼 거다. 둘 다가 아니길 바라지.”
“읏, 으읏.”
“대답해. 시간 낭비하기 싫으니까, 말 없으면 둘 모두를 시도할 거다.”
말이 없기에 나는 피식 웃어 주었다. 이제야 놈의 속내가 읽혔다.
“알아? 사람들은 깡패 몸에 뭐가 붙어 있든 말든 별 관심 없어. 그 쓸모없는 거 쓸모 있게 써 준다는 점에서 환호할지도 모르지. 나도 마찬가지고.”
“……이야.”
“똑바로 말해.”
“씨발! 거짓말이라고!! 생체 인식 따윈 없어! 그 가옥도 거짓말이고!”
“뭐, 그렇겠지. 거긴 조직이 관리하는 업장 같은 데냐? 부하들이 드글드글할 테니, 네가 얼굴을 비추면 어떻게든 활로가 열릴 수도 있겠네. 그걸 노리고 생체 인식이니 뭐니 개소리를 늘어놓은 거지? 뻔하다면 뻔하네.”
“……그래. 맞아.”
솔직히 말해 줬기에, 이번엔 보디블로우 다섯 대로 봐주었다.
이길재는 위산을 질질 흘리며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된 주소를 읊었다.
“……거긴 부하들 없다. 진짜 없어. 그냥 내 애인 중 한 명의 명의로 사놓은 오피스텔이야. 금고번호는 아까 말한 게 맞다. 출입 키패드 번호도 금고 번호와 동일하고. 무엇보다 거기엔…… 황혁수 파일 외에 다른 것들도…… 있어.”
“아아, 고위층들 자료 말이지? 그건 좀 고맙네. 유용하게 쓰도록…… 으응? 근데 잠깐.”
애인 중 한 명? 애인이 둘 이상이란 말인가?
괘씸했기에 몇 대 더 두들겨 주었다.
어쨌든 이번 정보는 사실인 듯 보였다. 누구도 믿지 않는 이길재의 습성상 부하들이 드나들 수 있는 곳에 중요 자료를 두지 않았을 것이다.
“자, 다음 질문이다. 너네 보스에 관해서 아는 대로 다 말해라.”
여기서부터는 내 관심사다.
전생의 정보가 있는 나도, 지금 시점에서의 동부파의 ‘보스’는 알지 못한다. 본 적조차 없다.
내가 조직에 막 적응한 풋내기 시절에 이길재가 동부파의 정점을 꿰찼으므로 모르는 것도 당연하다 싶지만, 그걸 감안해도 아무 정보도 남지 않은 건 기이했다.
추론컨대, 아마 과거 조직 내부에서도 그의 정체는 극비에 부쳐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미래는 바뀌었고, 이길재가 그를 재낄 가능성은 사라졌다. 그러므로 내겐 이놈을 대신해 동부파의 보스를 치울 의무가 있었다.
놀랍게도, 이길재는 아무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건 내가 바라는 정보는 아니었다.
“몰라.”
“……뭐야?”
“‘그분’의 정체 따위 난 모른다고. 나야말로 알고 싶다. 아니, 그걸 알기 위해서 계속 몸부림 쳐 온 나다. 제길. 너만 없었다면 마기철을 치우고 그 진실에 닿을 수…….”
“잠깐, 그건 무슨 소리냐. 여기서 그 이름이 왜 나와.”
마기철.
그건 우리 주현보육원 원장 선생님의 함자였다.
“몰랐던 거냐? 난 오히려 의외인데. 따지고 보면 나보단 네가 ‘그분’에 대해 더 잘 알걸. 아니, 아니군. 너도 모르겠네. 그러고 보니 넌 마기철 부하가 아니었지?”
“…….”
“그래. 그래야 말이 맞지. 사실 난 처음엔 너를 마기철의 똘마니쯤으로 생각했거든. 뒷돈을 만드는 창구 정도로. 그래서 더 너한테 집착했던 거다. 하지만 아니었지. 암. 대기업의 비호를 받는 인간이 마기철의 똘마니일 리가 없겠지…….”
“횡설수설하지 말고 똑바로 말해. 우리 원장 선생님이 뭘 어쨌다는 거야?!”
이길재가 퉁퉁 불은 입술로 힘겹게 미소를 그려냈다.
“정말 몰랐나? 본래 마기철은 ‘그분’의 심복이었던 자다. 지금이야 어쩐 일인지 개털이 됐지만. 어쨌든 난 놈을 집어삼키고 진상에 도달하려고 했지. 하핫. 누가 내 위에 있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더없이 불쾌했거든…….”
“보스가…… 누군지도 모른 채 그를 따랐다고? 아니, 동부파가 무슨 구멍가게도 아니고…….”
“동부파의 보스? 사실 그런 건 없어. 애당초 동부파는 몇몇 이사들의 연합체다. 화족과 조선족이 중심인 인천지역의 서부파가 득세하면서, 본토 토종 조폭들이 자력구제하기 위해 뭉친 조직이지. 그래서 ‘동부파’다.”
“그럼 ‘그분’이란 자는 대체 누군데?”
“우리가 위기에 처했을 때 손을 내밀어 준 사람. 말했듯 동부파 설립 당시 우린 핀치에 몰려 있었다. 그때 정치권과 사법기관에 손을 써서 우리를 생존시켰지. 그분이 없었다면 동부파는 존재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분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없어.”
기가 차서 절로 탄성이 나왔다.
“이쯤 되면 그냥 너네 단체로 뇌내 망상하는 거 아니냐.”
“아니다. 실제로 그분이 손을 쓸 때마다 정치권이 들썩였어. 그리고 우리가 유리한 쪽으로 판이 짜였지. 동부파가 여기까지 어떻게 성장했겠나? 뒤를 봐준 분이 있던 거다.”
“……어쨌든 그 사람과 소통하는 창구는 있을 거 아니냐.”
“있지. 창구라기보다 한 사람이지만.”
“사람?”
“너도 대거리를 했으니 알거 아닌가. 장이화. 그리고 해결사들. 그들이 ‘그분’의 손발이다. 우린 그들을 통해서만 그분의 존재와 의중을 확인해 왔지. 그 외에는, 믿지 못하겠지만, 정말 아는 게 없어.”
갑자기 골치가 팍 아파 왔다.
마왕을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으하하, 난 사천왕에 불과하다! 사실 진짜 마왕님은……!’하는 싸구려 멘트를 듣는 기분이었다.
‘……선생님이 보스의 심복이었다고? 그냥 돈세탁 관리인이 아니었단 말인가? 이게 무슨…….’
너무 의외의 정보들이 들이닥쳐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애당초 그가 횡령을 했다는 건 진실인가? 사실은 그냥 그렇게 ‘꾸며진’ 사실은 아닌가? 주현보육원이 와해된 사건에는 내가 모르는 어떤 진상이 숨겨져 있는 건 아닐까?
아무것도 모르겠다.
난 지끈대는 이마를 짚고, 일단은 주제를 환기했다.
“……그건 일단 됐고. 어쨌든 너도 모른다 이거지?”
“그래. 아무것도. 마기철 그놈한테 물어보는 게 빠를 거다.”
“알겠다. 그럼 다음 질문.”
난 애써 혀를 차며 말했다.
“은지은 납치했지? 걔 어디 숨겼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