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능이 자꾸 늘어-110화 (110/164)

<재능이 자꾸 늘어 110화>

12. 새로운 시작 - 17

*   *   *

법정은 싸늘한 무관심 속에서 진행됐다.

선고를 내리는 판사조차 범인이나 판결문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살해 의지를 결정적 순간까지 확고하게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무고한 학생을 노린 계획 범죄라는 점, 또한 사안과 증거가 명명백백함에도 반성의 기색이 일절 없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죄질이 매우 중하다 하겠다. ……따라서 피고 지은찬에게 무기 징역을 선고한다.”

선고에 뒤따라 법봉이 건조하게 울었다.

그것이 끝이었다.

드라마처럼 결정적인 반전이 등장하지도 않았고, 방청석은 그 흔한 울분도 분노도 없이 고요했다.

이곳의 누구도 인간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펜과 종이와 잉크들이 사람의 모습을 하고 판결문을 읽고 있었다.

대충 만든 인형극을 보는 것 같구나. 모두가 각본을 심드렁하게 읊을 뿐이다.

마기철은 방청석에 앉아 그런 감상을 떠올렸다. 자신도 이 촌극의 일원이라는 점이 더없이 쓰다.

피고인 지은찬조차 판결에 감흥이 없어 보였다.

그것은 납득도 체념도 아니다. 일어날 일이 일어났다는, 단순한 이해다.

비극이 일상이었던 그에게는 무기 징역이라는 중형조차 그럭저럭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불과하겠지.

어쩔 도리가 없는 삶을,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살아온 자만이 품을 수 있는, 극단적인 무심함으로 그는 이 판결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지은찬이 포박된 채 법정 문을 나선다.

마기철은 자리에서 일어나, 지은찬의 뒷모습을 끝까지 바라봐 주었다.

그러나 지은찬은 마지막까지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왔음을 분명히 알았을 텐데도 적극적인 무시로 일관했다.

-당신은 날 걱정할 자격조차 없다.

그 태도에서 읽히는 것은 저런 쓰디쓴 단언이다.

그는 그걸 부정할 수가 없어서 더없이 심장이 아렸다.

판사와 서기까지 퇴정하고 법정이 텅텅 비어도 그는 그 자리에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옆에서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이런 데까지 와서 또 궁상이요? 형님도 여전하시네.”

“…….”

마스크를 쓴 장신의 사내가 방청석에 비뚜름하게 앉아 있었다.

“네가 여길 웬일이냐. 장이화.”

“어쩐지 형님이 여기 있을 거 같아서 말이지. 걱정도 되고, 할 말도 있고.”

“너도 뻔뻔한 건 여전하구나.”

“그냥 잊으시오.”

대뜸 맥락 없는 말을 던지는 것도 장이화 다웠다. 그걸 바로 이해해 버리는 자신 또한 변하지 않았다.

“…….”

“고작 살인 미수에 무기 징역이오. 무슨 뜻인지 아시겠소? 건드릴 걸 건드려야지 하필 도련님을 건드려서 말이지. 이번 일에 아버님의 의사가 확고하시오.”

“죽일 셈이냐.”

“뭔 그런 숭한 말씀을.”

장이화는 마스크를 들썩거려 가며 킥킥 웃었다.

“그러나 혹시 아나. 아버님을 흠모하는 어떤 놈이 과잉 충성을 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지. 이거 봐봐. 그래도 기자 한 명쯤은 올 법한데 이리도 깨끗하잖소. 그게 뭘 의미하겠소?”

“벌써 그런 명령이 내려왔단 말이냐.”

“아직은. 하지만 흐름은 뻔하지 않겠냐 말이오. 아무도 관심 두지 않는 무기수. 어느 순간 독방에서 목을 맨 채로 발견 돼도 하나 이상하지 않지. 그리고 그대로 모두에게 잊히는 거요. 익숙한 시나리오 아니요?”

“……은찬이는 건드리지 마라.”

“아니, 그러니까 내겐 아직 아무것도…….”

“건드리지 마.”

순간 흠칫하여 올려다보니 마기철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장이화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게 내 맘대로 되는 일이겠소만…… 어쨌든 형님 의중은 알겠소.”

“……아버님께도 확실히 말해 두어라. 배후를 캐기 전까지 함부로 죽이는 건 삼가야 한다고.”

“직접 말씀하시지?”

“내 사심이 들어가 있을 거라 생각하실 거다.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나도 못 뵌 지 꽤 됐다. 내 상황 알잖나.”

“아아. 하기야 그렇지만. 그럴 거면 차라리 복귀하시는 게?”

“다 늙어서 무슨. 난 지금이 좋다.”

“그래? 이제 와서 딴 주머니를 차신 건 아니고?”

“…….”

마기철이 장이화를 지그시 쳐다본다.

옛날 같은 독기는 없지만, 대신 세월의 무게가 담겨 있는 시선이라고 장이화는 생각했다.

날카롭진 않아도 묵직하다. 그 오랜 공백에도 나약해졌다는 느낌은 일절 없었다.

하지만 세월이라면 자신도 못지않은 밀도로 채워 왔다.

장이화는 오랜 선배의 시선을 버거운 기색도 없이 받아 냈다.

“이한열. 그놈은 대체 뭐요?”

“…….”

“안 그래도 동부파가 살집만 너무 커져서 정비는 필요했어. 하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단 말이지. 아버님의 뜻은. 말해 보쇼. 이한열, 그놈 대체 뭐야?”

“난 모르는 일이다.”

“뭐, 그래. 아무렴 그러시겠지.”

“납득이 빠르구나.”

“그놈 하는 짓이 형님 스타일이 아니었어. 그리고 주먹질하는 게…… 어후. 사냥개들이 몇 초도 못 버티던데. 그런 건 처음 봤소. 소싯적의 형님도 그 정도는 아니셨지.”

“…….”

장이화가 마기철의 안색을 슬쩍 살폈다.

“……보니까 형님도 진짜 모르셨군.”

“그놈이 스스로 뭔가를 알아낸 거겠지. 내 쪽에서 얘기를 해 볼 테니 건드리지 마라. 적어도 애들은 놔둬.”

“나야 상관없지만, 아버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 지는 나도 모르지. 그리고 그놈, 애라고 퉁 칠 수준은 절대 아니던데…….”

“부탁이다.”

“……거참. 형님 그렇게 말하실 때마다 마음 약해지는데.”

그가 난처한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어쨌든 조심하쇼. 밖에서 보면 형님 지금 되게 수상해. 나야 아닌 걸 알지만 다른 분들은 어찌 보실지 뻔하겠지. 그걸 모르실 형님이 아니라 생각하오만.”

“알았다.”

“에라이, 겁나게 건조하시구먼-. 그럼 나 가오.”

장이화는 손을 휙휙 흔들며 그를 스쳐 지나갔다.

마기철의 반응은 여전히 벽돌처럼 딱딱해 속을 읽기 힘들었다.

하지만 둘의 인연도 길었다. 저 무뚝뚝해 보이는 사내의 안쪽이 얼마나 무른지 장이화는 익히 알았다.

그 안은 덧나고 곪아서 이미 만신창이일 것이었다.

애당초 이 바닥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옛날의 그를 아는 입장에선 애나 키우는 지금의 모습이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더 멀리서 보면 원래 자리를 찾은 듯 어울려 보였다.

원한다면 그대로 둬도 낫겠다 싶을 만큼.

그러나 그만두고 싶다고 그만둘 수 있는 일이던가.

그가 원하든 그러지 않든 결단을 내려야 할 순간은 올 것이다.

그때는…….

괜한 감상을 떨쳐 내며 장이화는 문을 나섰다.

그때까지도 마기철은 그 공간 채로 굳혀진 듯 미동도 없었다.

*   *   *

“확인됐나?”

이상용 과장이 위성 전화 반대편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의 오랜 부하들도 그 주변에 둘러앉아 귀를 종긋 세우고 있었다.

새까만 정장을 입은 덩치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으니 과연 그 자체로 위압감이 대단했다.

잠깐의 정적 끝에,

스피커폰을 통해 목소리가 울렸다.

-……일단 찾긴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당혹감이 그 끝에 묻어 있었다. 뭔가 잘못됐다는 징후.

공기가 삽시간에 팽팽하게 긴장했다.

말 한마디 없었지만, 이길재를 몇 갈래로 찢을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이미 눈빛으로 진척되고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럴 필요는 없게 됐다.

“끝까지 똑바로 보고하라. 뭐가 어쨌단 건가.”

-……양이 너무 많습니다. 이게 공개되면 여파가 클 것 같습니다만. 그냥 비리 수준이 아닙니다. 범죄입니다. 그룹 차원에서 대응책을 짜야…….

“그 말은…….”

-예. 우리가 이겼습니다, 과장님. 황혁수 그 새낀 이제 끝장이에요.

이예-!! 환호가 공기를 때렸다.

요원들이 고릴라의 전투 고함에 준하는 목청을 떨어 울리며 팡파레를 터뜨렸다.

“축하드립니다, 과장님!! 아니, 이젠 팀장님이네요!”

“으아아아! 승진이다아앗!!”

“민정아! 오빠 퇴사 안 해도 된다! 결혼 자금 굳었어!”

“헹가레! 헹가레!!”

“이 자식들아! 그건 됐어! 저번에도 그러다 나 허리 다 나간 거 모르냐?!”

그러나 요원들은 기어코 이상용 과장을 태우고 허공에 날려 버렸다.

이 과장은 으악 소리를 내지르면서도 얼굴만큼은 환하게 피어 있었다.

줄 한 번 잘못 탄 죄로 그들이 겪어 왔을 수모가 어땠을지 익히 짐작이 되는 광경이었다.

“일등 공신 한열이도 헹가레!!”

“던져! 던져!!”

“아니 전 진짜 괜찮은데요. 으아아앗. 이 사람들 이젠 말이 안 들리는 구마아아악!”

그리고 나도 다섯 번 정도 던져졌다.

분위기가 진정되기까지 십 분이나 걸렸고, 추가 보고는 그 뒤에나 들을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정치인. 법조인. 재계 인사…… 이름만 대면 알 법한 사람들의 비리들도 여기 다 모여 있습니다. 이건 우리 그룹의 무기가 될 겁니다.

“아니, 그건 아니다.”

-예?

“이 전리품을 취해야 할 건 우리가 아니야. 우린 단순한 협조자다. 계획을 세우고 자기 몸을 던져 가며 실행한 사람이야말로 보물을 취할 자격이 있겠지.”

이상용 과장이 날 응시하며 말했다. 그 부하들도 마땅히 그렇다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사람을 잘 봤구나.

내 경험상, 은인을 은인답게 취급해 주는 사람이 생각보다 잘 없다. 난 기분 좋은 생경함을 느끼며 그들의 호의를 맞받았다.

“전리품 분배는 차차 생각해 보도록 하고. 그 전에 할 일이 있지 않나요?”

“뭐지?”

“한 잔 해야죠. 이런 경사에.”

솔직히 근 몇 주 동안, 내 계획에 따라오느라 퇴근도 못한 사람들이었다.

진짜 보상은 차차 하더라도, 작은 대접이나마 미리 보답하고 싶었다.

그러자 이 과장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폭소를 터뜨리며 내 등짝을 후려치는 게 아닌가.

“크하하핫! 이 돼먹잖은 자식! 그래! 오늘 같은 날에 술이 빠질 수 없지!!”

“백만 년 만의 회식이다!!”

“술! 술 사 와!”

이런 일은 보통 가장 연장자가 멋지게 카드를 긁는 법이건만, 이상하게 여기는 뭔가 거꾸로였다.

“여기서 네가 가장 부자잖아. 네가 쏴.”

“……그럴 생각이긴 했습니다만 지나치게 당당하시니 기분이 묘하네요.”

근처 백화점을 돌아서 발렌타인이니 조니워커니 하는 걸 싹 털어 왔다.

그리고 오늘 정육점 주인들도 행복의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한우++이니 이베리코니, 일단 비싸 보이는 건 다 집어서 카트에 넣었다.

내 별장에는 기본 취사 시설밖에 없었으므로 바비큐 장비까지 싹 사 왔다.

요원들은 높은 수준의 야전 전문가이기도 했으므로 다들 캠핑에는 일가견들이 있었다.

순식간에 먹고 마실 준비가 완비됐다.

고기와 술.

혼잡한 소리들이 유쾌하게 흐드러졌다.

요원들이 내게 술을 가르치겠다며 앞다투어 내게 술을 권했다. 작정하고 날 맥일 생각이었겠지만, [역발산기개세]의 3배 효과는 간의 해독 능력까지 3배였다. 죄다 순삭하고 나니 새벽 3시였다.

“……고맙다. 한열아. 진짜 고마워.”

이 과장이 했던 말을 또 했다.

술자리 이전에만 2번을 들었고, 술자리 이후로는 세는 게 무의미할 정도였다. 취하셨구만. 난 픽 웃었다.

“너무 고마워하지 마세요. 앞으로 많이 부탁할 일이 있을 테니까.”

“네 사정까진 잘 모른다만, 이젠 어지간한 건 다 마무리된 거 아니냐?”

“그런 줄 알았는데…… 이젠 잘 모르겠네요. 어쩐지 불안해요. 제가 모르는 뭔가가 더 있을 것 같은 기분입니다.”

이길재로부터 얻은 새 정보는 생각 이상으로 내 심경을 뒤흔들었다.

처음으로 되돌아온 기분이었다.

“그럼 카이로스 예술 대회 건은 그대로 가는 거냐?”

“예.”

“내가 팀장이 되면 회장님 정도는 만나게 해 드릴 수 있어.”

“그럴 수 있겠죠. 하지만 그러지는 않을 겁니다.”

“어째서?”

“그러면 인맥만 믿고 잘 보이려는 고만고만한 놈팽이로 보일 겁니다. 회장님한테는 그렇게 각인돼서는 안 돼요. 되도록 정공법으로 마음에 들어야죠.”

장건철 회장이 내게 팜플렛을 건넨 데에는 기대도 있었겠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시험의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과연 내가 ‘진짜’인지 확인하고 싶었을 테지.

그러므로 그 시험을 정면 돌파해야만 진정으로 그에게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난 그럴 자신이 있었다.

“이제 우군인 이 과장님이 출세하셨으니, 뭐가 되든 대처할 수는 있겠지만요.”

“너나 나나 새로운 시작이구나.”

“네. 새로운 시작이네요.”

그가 기분 좋은 미소로 날 바라보다, 반쯤 찬 온더락 위스키를 내게 쓱 내밀었다. 난 마주 웃으며 그와 잔을 부딪쳤다.

짠-! 맑은 소리가 산속에 널리널리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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