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이 자꾸 늘어 112화>
13. 너희들의 앞에서 - 2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 되겠네.’
양동명은 내 요구치를 기어코 다 채운 끝에 젖은 걸레로 진화하였다.
짜내면 짠물로 몇 리터는 나올 법한 꼴이었지만 눈빛만은 서슬 퍼렇게 날이 섰다. 의도대로 된 듯하여 꽤 뿌듯했다. 난 저걸 보고 싶었다.
“……이게 다 무슨 짓인지 모르겠어. 넌 날 야구 선수가 아니라 육상 선수로 전과시킬 생각이야?”
“내가 설명 안 했나?”
“설명도 대충대충이었잖아. 아직도 납득은 안 된다고.”
“그럼 그냥 모른 채로 있어. 설명해도 납득은 안 될 테니까.”
“…….”
허공을 뚝 잘라 낼 것 같은 시선이 내 안면에 떨어졌다. 부글부글 끓는 용암 같은 눈빛이었다.
아마 그의 안에서는 슈퍼헬조선K 같은 게 개최되어 사탄과 이한열이 치열한 경합을 벌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속내를 알게 된다면 아무 고민 없이 내게 우승 트로피를 건넬 테지.
그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이 체력단련은 아무 의미가 없다.
체력증진이 필요했다면 좀 더 과학적인 커리큘럼을 고안해서 왔을 것이다.
하지만 내 훈련법은 전혀 과학적이지도 않을뿐더러 의도부터가 불순했다.
난 그저 ‘한 인간에게서 얼마나 즙을 뽑아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골몰하여 훈련 루틴을 짜온 것이었다.
알면 저 반항심이 살심으로 도약할 것이므로 난 부득이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그래도 설명해 줘. 납득 같은 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흠. 그럴까.”
내가 목표로 한 것이라면,
그래.
그냥 저 눈을 보고 싶었다.
실없이 허허 웃고, 잘 안 돼도 괜찮다고 사람 좋은 표정이나 짓고, 고딩 주제에 인생 달관한 태도로 허허실실 구는 꼴이 맘에 안 들었다.
누누이 말하지만 이놈은 몸뚱어리가 아니라 정신머리가 글러먹었다.
어쩔 수 없으니까 포기한다고?
그게 설사 진실이라 하더라도, 난처하게 웃으면서 건넬 말은 아니었다.
굴욕적으로, 분한 마음을 삼키고, 지난 밤 이를 갈고 갈아 버린 끝에 부득이 임플란트 예약까지 하고서 내 앞에 왔어야 했다.
그딴 정신머리로 던진 공이 제대로 된 존에 꽂힐 리 없다.
“어제 훈련 플랜 짜면서 한잔했습니다. 나의 깊은 뜻은 몰라주어도 좋습니다. 훈련이 별로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최선을 다했고 저의 진심이 느껴지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뭐야 그게?”
“개소리.”
반항심에 황당함이 더해진 표정이 날 향했으나, 그러든 말든 난 보던 책을 마저 독파했다.
중의사 샤오진이 남긴 논문은 수는 얼마 안 됐지만, 양적으로 보자면 어지간한 백과사전 뺨칠 만큼 두툼했다.
그 안에 농축된 지식의 정수는 그 이상이었다.
의술의 수준을 한 세기는 앞당길 비전이 담겨 있지만 지나치게 난해해서 이젠 찾는 사람도 없다지.
한때 중흥했던 학파도 완전히 몰락.
박명한 천재의 잔재는 이렇게 글자로만 쓸쓸히 남았을 뿐이다.
[세종대왕의 언어능력]과 그녀가 남긴 [침술]의 편린이 없었다면, 나 또한 이 논문을 정독할 엄두를 내지 못했겠지…….
“……너무해. 나라고 장난치는 기분으로 여기 있는 건 아니라고. 그래도 제대로 된 설명 정도는 들을 자격이…….”
“어리광부리지 말랬지.”
난 책을 탁 덮고 일어섰다.
“날 믿고 따라온 거 아니냐? 절박해서, 더 이상 길이 없어서, 썩은 지푸라기라도 잡을 생각으로 따라온 거 아니냐고. 근데 불평할 정신이 남았어? 아니다 싶으면 또 포기하려고 그랬어? 지금껏 그렇게 도망쳐왔던 것처럼? 그딴생각이라면 당장 때려 치워. 널 붙잡을 사람 여기 아무도 없어.”
“…….”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몸이나 닦고 엎드려. 오늘도 등짝 좀 보자.”
양동명은 여전히 썩은 표정이었지만, 이를 박박 갈면서도 결국 내가 시키는 일엔 고분고분했다.
또 이런 점은 마음에 든단 말이지.
난 놈의 벗은 등판에 침을 하나씩 심으면서 오늘 익힌 이론들을 시도해 보았다.
신진대사를 극대화하며 초회복을 촉진하는 침 구성. 특히 오늘처럼 빠른 시간 몸을 혹사시킨 경우에 특효였다.
‘실전된 세계 최고의 중의술이 지 등짝에 꽂히고 있다는 걸 이놈은 알란가 몰라.’
호사 중의 호사다. 샤오진 생전에는 재벌 회장들이 한 번에 수십억씩 지불해 가며 받았던 요법이었으니까.
그렇게 30분쯤 지나니 놈은 이제 거동이 가능할 수준까지 회복됐다.
“……정말 신기하단 말이야. 어떻게 침 몇 번 맞았다고 이렇게까지 몸이 좋아지지?”
“내가 다 유능한 탓이지. 괜찮아졌으면 다시 자리 잡아. 오늘부턴 이제 던지는 연습이다.”
“오오! 드디어!!”
언제 꿍했냐는 듯 순식간에 희희낙락하고 자빠졌다.
하기야, 일주일 내내 공은 구경도 못 하고 팔다리만 괴롭혔으니 반갑기도 할 것이다.
물론 난 그의 기대를 순순히 충족시켜 줄 생각이 없었다. 난 그에게 지시 사항을 전했다.
“……정말?”
“빈말이나 주절거릴 만큼 내가 한가해 보이냐?”
“그건 아니지만. 근데 그 농담 진담이야?”
“나 그냥 갈까?”
“……아니. 그건 아니지만.”
난 보호구를 대충 착용하고 포수의 자세를 취했다.
손가락을 놀리며 사인을 보낸다.
양동명은 얼굴은 혼란스러웠지만 어쨌든 몸에 배인 대로 몸을 뒤틀며 투구 자세를 취한다.
마침내 피칭-. 공이 휙 떠올랐다가 글러브에 착 빨려 들어간다.
난 투구를 벗고 양동명을 빤히 쳐다봤다.
“어때?”
“……잘 안 됐어.”
“너도 알겠지?”
“응. 근데, 이번에도 말해 줄 수 없는 거야? 이거…….”
내 지시 사항은 알맹이 자체는 극히 심플하다.
하나 상식상에서 이해가 안 될 것은 물론, 특히 양동명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복잡한 주문이었을 것이다.
“……사인을 어기라니. 지시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라는 뜻이잖아. 그게 무슨 의미야 대체?”
“의미라면 있지.”
“뭔데?”
“포수를 속일 수 있어.”
“더 모르겠어!!”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이라는 얘기 몰라? 오랜 격언이다만.”
양동명이 두 팔을 힘없이 늘어뜨렸다.
“……아니. 어차피 상대측 타자는 포수를 못 보잖아. 우리 편만 속여서 어쩔 건데.”
“음. 우리 편 포수 얄밉지 않아? 그러니까 속이면 기부니가조타. 아주 훌륭한 효과군.”
“…….”
이젠 숫제 미친놈을 보는 얼굴이 되었다. 음, 장난은 이쯤 해 둘까.
“그래. 의미 없어 보인다 그거지? 그래서?”
“…….”
“근데 넌 그 의미 없는 지시조차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잖아.”
난 방금 타자 앞에서 떨어지는 투심 패스트 볼을 주문했다. 양동명이 잘하는 구위 중 하나다.
내 지시대로라면 그는 포심이든 포크 볼이든 뜻대로 던지면 되었다.
하지만 그가 던진 공은 결국 투심이었다.
아니, 투심으로 던졌지만, 어설픈 무브먼트와 함께 스트라이크 존에 빨려 들어갔다.
지시대로 떨어지지도 않고 정직하게. 대단히 느린 공으로.
“왜 그런 공을 던졌지?”
“……아니, 그게.”
“됐어. 지금 하려는 변명이 뭐든 죄다 진심이 아닐 테니까. 다시 해 보자.”
그 뒤로도 비슷한 시도는 계속됐다.
내가 체인지업을 요구하면 체인지업이 들어왔다.
슬라이더를 요구하면 슬라이더가 꽂혔다. 뭘 주문하든 그 주문 대로의 공이 터무니없이 질 낮은 완성도로 배달됐다.
그렇게 한 시간 넘게 공을 주고받았지만, 그 뒤로도 내 글러브에는 지시를 거역하지 못하는 ‘착한 공’만 주구장창 납입됐다.
그쯤 되자 동명도 혼란스러운 심정이 된 모양이었다.
“……이게, 무슨.”
“일단 와서 쉬어. 더 이상의 훈련은 의미가 없겠다.”
그때 공터 반대편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짱짱하게 울렸다.
“얘들아 나왔어!!”
배윤하가 두 손에 도시락통을 안고 등장한 것이었다.
이때쯤 와 달라고 주문하긴 했지만, 이 기막힌 타이밍에는 과연 나조차 소름이 돋을 수밖에 없었다.
“……넌 여기 어디에 도청기라도 숨겨놨냐?”
“응? 그게 무슨 말이야?”
“됐다. 됐어.”
“흣헴. 내가 너희를 위해 궁중 요리사 뺨칠 수라상을 준비해 왔단다. 어서 이 몸을 맞이하거라. 숭배해도 좋아. 특별히 허가할게.”
“와아-. 도시락이다아-.”
양동명이 ‘힘들여’ 환호했다.
단언컨대 이보다 네모반듯한 교과서 읽기는 세상에 없을 것이다. 이미 AI 음성의 어색함을 아득히 능가해 있다.
그걸 뻔히 들었음에도 배윤하는 싱글싱글 웃으며 도시락을 풀었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삶은 닭 가슴살이었다. 정확히는 그것밖에 없었다.
삼단을 통틀어 새하얀 살덩이만 수북했다. 한 가지 비밀을 말해 주자면, 소금 간도 안 되어 있다.
고기라면 환장하는 세종대왕조차 이 수라상을 받았다간 환장해서 정무를 내팽개치셨을 비주얼이 펼쳐져 있었다.
“아, 물론 이것만 있으면 아쉬우니 후식 음료도 다 준비해 왔어.”
그러나 그건 구원이 되지 못했다.
그건 음료라기보다, 닭가슴살에 뭔가의 야채가 막 섞여 갈린 정체불명의 ‘즙’이었다.
파랗고 빨갛고 걸쭉한 것이 이세계에서 소환된 촉수 괴물의 생체 조직이라 해도 믿을 법하다.
물론 식사는 양동명만 하고 우린 배급만 했다.
그걸 대면하는 그의 각오란 대충 이 한마디로 요약됐다.
“나 잠깐 기절해 있으면 안 될까? 이 모이들은 깔대기로 내 위장에 쑤셔 넣어 줘. 제발.”
물론 그런 일은 허가되지 않았고 그는 스스로의 손으로 위장을 폭행해야만 했다.
“다 먹어. 이것도 훈련이야.”
“……훈련이 아니었다면 이딴 거 먹을까 보냐.”
화기애애한(?) 식사시간, 배윤하가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훈련은 잘되고 있어?”
“꾸에우에엑. 꾸엑-.”
“응, 동명이는 됐으니까 하던 일에 열중하고.”
“뭐, 그럭저럭 진척은 되고 있어. 아직 별 성과는 없지만.”
“와아. 동명이 얼굴이 엄청 나네. 그렇게 면전에 말하면 어떻게 하니?”
“넌 먹고 있어. 난 잠깐 윤하 좀 바래다주고 올게.”
그녀를 바래다주면서 물었다.
“야구부 쪽은 어때?”
“뭐 똑같지. 코치님은 여전히 나이브하시고. 해명이는 너한테 까이고 선수 하나 잡아서 키우고 있어. 네가 하는 것처럼.”
“그래? 어디서 그런 놈이 등장했는데?”
우리 야구부는 약체 중의 약체라 불펜 투수층도 빈약하기 그지없다.
양동명이 그 형편없는 실적으로 아직도 선발 투수인 이유는 기타 등등의 실력이 더 열악하기 때문, 딱 그 이유뿐이었다.
“얼마 전에 상진이가 한 명 소개해 줬어. 야구 그만둔 애인데, 공부 하다가 가끔 머리 풀 목적으로 와도 좋다는 조건으로 가입했어.”
“잘해?”
“상진이랑 중학교 때 같은 야구부였다는데…… 음. 뭐랄까. 잘하긴 잘하더라.”
“잘하면 잘하는 거지. 왜? 뭐 걸리는 거라도?”
그러자 배윤하가 입을 삐쭉 내밀고 툴툴댔다.
“아 몰라. 난 걔 맘에 안 들어. 뭔가 거드름 피는 것 같고. 실력 좋은 내가 너희 버러지들을 구원해 주마…… 뭐 그런 태도?”
“엑.”
“물론 그렇게까지 말은 안 하지만…… 하는 짓 보면 대충 각 나오잖아. 상진이는 왜 그런 애랑 어울리나 몰라.”
“뭐…… 끼리끼리 어울리는 거 아닐까.”
“상진이는 그런 애 아니거든?”
그녀가 도끼눈을 뜨고 날 치켜봤다.
어투로 짐작했겠지만, 배윤하와 전상진 사이의 기류가 심상치 않다.
같이 학생회에서 지내다 보니 이러쿵저러쿵 일이 일어났다는 듯하다.
이러다 진짜 사귀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내가 알 바는 아니다만.
아무튼.
“어쨌든, 그런 일이 있어서 내가 동명이 얘길 쓱 흘렸지. 좀 미안해하더라고. 아무튼 상진이가 자기 도와줄 일은 없냐고 하던데?”
“뭐, 학생회 일이나 열심히 하라 그래.”
“진짜 도와줄 거 없어?”
“걔가 나오면 걔밖에 안 보일 테니까.”
양동명의 목적은 부친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이다.
근데 그 판에 갑자기 넘사벽 루키가 등장해서 홈런을 뻥뻥 때려 대면 양동명이 보일 리가 없다.
전상진은 안 보이는 게 도와주는 것이었다.
“그래?”
“그래.”
“그럼 알았어. 근데 동명이 적당히 좀 굴려 대. 애가 눈이 푹 꺼진 것이. 아까도. 그렇게 막말하고 그러면 애 멘탈부터 나가겠다.”
“그러면 그 정도의 그릇이란 거겠지.”
거듭 강조하지만, 내가 하는 건 정석적인 트레이닝이 아니다.
완벽한 외도다.
트레이너의 [안목]이 있지만 그건 그저 재능일 뿐이고, 그 원주인조차 야구 선수를 키우는 방법 따윈 몰랐다.
난 그저 그의 한계치를 가늠할 눈썰미를 탑재했을 뿐이다.
그런 내가 야구 선수를 기술적으로 지도하는 건 완벽히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그렇기에 양동명은 오직 나만이 성장시킬 수 있다.
왜냐면 놈의 문제는 기술의 미진함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뭐 두고 보라고. 여기서 놈이 견뎌 낸다면, 양해명이 뭘 기르든 간에 확실하게 주전 자리를 지킬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