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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이 자꾸 늘어-113화 (113/164)

<재능이 자꾸 늘어 113화>

13. 너희들의 앞에서 - 3

“뭐 두고 보라고. 여기서 놈이 견뎌 낸다면, 양해명이 뭘 기르든 간에 확실하게 주전 자리를 지킬 수 있을 테니까.”

“어, 그래.”

“뭐야 반응이 왜 이리 건조해. 직접 도시락까지 공수해 온 사람이.”

배윤하가 사뿐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난 주전을 맡니 어떠니, 그런 건 사실 아무래도 좋단 말이지. 오히려 그런 거에 구애받는 남자애들 좀 이해 안 돼. 어떤 면에선 배불렀단 생각도 들고…….”

“동명이 응원하는 거 아니었냐.”

“그렇기야 하지. 근데 그건 주전 자리를 영구불멸 지켰으면 해서는 아니야. 그러면 좀 불공평하지. 난 야구부 애들 다 좋은 걸. 내가 응원하는 지점은 좀 다른 쪽.”

그녀가 손가락을 까닥이며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발갛고 도톰한 입술두덩이 쾌활하게 씰룩였다.

“네가 그랬잖아. 동명이는 도망치고 있는 거라고. 아마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서 꿈을 꿀 수는 없을 테니까. 난 그 애들만큼은 예쁘게 꿈을 꿔줬으면 했거든. 대리만족이랄까. 동명이를 돕는 건 그런 이유 때문.”

“…….”

무슨 말을 하는지 대충 이해가 갔다.

아마 양동명에 관한 그녀와 내 관점은 사뭇 다르겠지.

나는 그놈에게서 과거의 나를 봤기에 반응했다. 하지만 배윤하는 그녀가 버린 것에 대한 동경으로 야구부 아이들을 아꼈다.

그러나 양동명이 주저앉지 않고 두 발로 뛰기를 바라는 지점에서만큼은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하겠지.

“그러니까 좀 잘 해 봐. 나는 너도 응원하고 있으니까.”

“걱정 말라니까. 내 완벽한 계획이 궤도에 오르면 쟤는 고교 수준은 가볍게 씹어먹을…….”

“아니, 그거 말고. ‘널’ 응원한다고.”

배윤하가 싱긋 웃으며 내게서 도시락 통을 빼앗아들었다.

사뿐하게 걸음이 퉁길 때마다 트윈테일로 갈라진 머리채가 한 박자 늦게 나부꼈다. 그녀가 천천히 멀어지다, 빙글 돌며 나를 보았다.

“요새 뭘 하고 다니는지는 안 물을 게. 왜 뉴스에서나 네 소식을 들어야 하는지도. 혼자 끌어안는 마음이 어떤지는 잘 아니까. 그냥…….”

“…….”

“힘내라고. 예전부터 그렇게 말하고 싶었어.”

난 코를 긁적였다. 솔직하게 말해 줬으니 나도 진실 된 마음으로 보답하였다.

“야 왜 갑자기 분위기 잡고 그러냐. 날 간지럽혀서 살해할 생각이야? 이거 봐. 닭살 올랐잖아. 어떻게 할 거야 이거.”

“……하여간 누가 우리집안 남정네 아니랄까 봐. 좋은 말을 해 줘도.”

“뭐, 말은 고맙네.”

“늦었어!”

배윤하가 발로 흙을 걷어차 내 발치에 뿌렸다.

오늘 갓 세탁한 바지를 철저히 오염시키고서도 불만족스러웠는지, 그녀가 찡그린 표정 그대로 한숨을 푹 내쉰다.

“넌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난 네가 제일 걱정이라고. 있지, 앞으로는 어쩔 거야?”

“응? 뭔 소리여.”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너 근 몇 달간은 막 불타오르는 거 같더니, 요즘엔 또 존재감이 흐릿해졌단 말이지. 뭐랄까, 회광반조?”

“그냥 악담을 해라. 사람한테 할 소리냐 그게.”

“아 느낌이 그렇다고오. 지금 뭘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거 거의 끝나 가는 거지?”

“…….”

“그리고 왠지 다 끝나면 사라져 버릴 거 같단 말이야. 요즘 괜히 불안하고 그렇다고.”

그녀가 입을 삐죽 내밀고는 날 빤히 쳐다봤다.

정말 근거도 논리도 내용도 없는 추궁이었지만 알맹이만큼은 놀라울 만큼 날카로웠다.

하여간 신기한 녀석이라니까. 한없이 실없이 보이다가도, 가끔 무서우리만치 정확히 맥을 짚을 때가 있었다.

“쓸데없는 말을. 내가 가길 어딜 가냐. 가기는.”

“……흐음. 그럼 숙제. 버킷리스트 1개 써서 제출해. 그거 다 끝내기 전엔 막 뜬금없이 사라지진 않겠지.”

“아주 가지가지 한다. 뭔 숙제야 숙제는. 바빠 죽겠구만.”

“아 진짜로. 약속해. 빨리.”

내가 뜸을 들이자 배윤하는 앙탈을 부린다는 강수를 두었다. 정신공격으로 날 피폐하게 만들 생각인가.

물론 회귀자의 두터운 정신줄로 빈틈없이 버텨 냈으나, 그럼에도 그녀가 남긴 말은 끈질긴 잔향으로 내 귓가에 남았다.

‘……끝나고 나면, 이라.’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이후’에 대해서는.

장래희망. 진로. 미래계획. 가슴 뛰게 훗날을 상상하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을 테지.

그러나 내 전생을 요약하자면, 계획을 세우는 족족 계획에 배반당하는 혼돈의 팔자였다 하겠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난 미래를 내다보지 않았다. 의미가 없으니까.

전생의 난 눈앞에 닥친 일에 그때그때 대응하며 살았으며,

따라서 그것이 내 삶의 태도가 되었다.

그리고 회귀했다.

처음엔 위기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다음엔 위기를 직접 박살 내고 싶었다. 그것만이 나의 전부라고 생각해 왔다.

아직 위기는 남아 있다. 밝혀지지 않은 진실도 여전하다.

그러나 내가 감당하지 못할 시련은 아마도 아닐 것이다. 난 이제 유능해졌다. 나는 더 이상 트과장도 물미잡 대리도 아니다. 마침내 내 비원은 완성의 목전에 다다랐다.

그러나 ‘이제 무얼 할 것인가.’ ‘뭐가 되고 싶은가.’란 질문에 대해서는 답하지 못했다. 난 그런 인간이 된 듯했다.

“그건 그렇고.”

대답할 수 없었기에 난 화제를 돌렸다.

“상진이랑은 어떻게 된 거야. 분위기 좋은 가 봐?”

“……엇.”

이것이야말로 불시의 일격. 그녀가 얼굴을 확 붉히고는 입을 우물우물 사려 물었다.

“아니, 별일 없었는데?”

“오.”

“‘오’는 무슨. 이상한 상상하지 마.”

한때는 엮으려고 진을 빼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아웃오브안중이 된 둘의 관계는 아이러니하게도 내 눈 밖에서 더 극적인 진전을 이루었다.

“뭐, 대충 어울린다고 생각해.”

“대충은 뭐니.”

“그래서? 썰 좀 풀어 봐. 어떻게 된 건데. 너 원래 상진이 별로 안 좋아했잖아. 1퍼센트 타산으로 가까워진 관계 아니었어? 단물만 쏙 빨아먹다 버리는, 뭐, 그런 거.”

“날 어장관리의 장인쯤으로 보지 말아줄래.”

아니, 너 그거 맞잖아.

“아무튼.”

“생각보다 상진이 괜찮은 아이라고. 넌 상진이를 세상모르고 사람만 좋아서 이용해먹기 좋은 부르주아쯤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니, 그런 생각한 적 없는데. 네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거 아니냐.”

“어쨌든.”

그녀의 입에서 간질간질한 러브스토리가 흘러나왔다.

자세한 건 당신과 나, 그리고 우리 모든 솔로부대들이 원하지 않을 테니 생략하겠다.

간단히만 언급하자면,

상진이의 사람 됨됨이에 새삼 감화됐고, 타산적인 자신이 부끄러워 멀리하려 했지만, 그런 자신에게마저 다가왔다는…… 아오, 설탕물에 뇌가 절여지는 기분이네. 구웨에엑.

“그래서, 사귀냐?”

“아직은. 썸과 사랑의 그 중간 지점이랄까. 반 발자국만 남은 상황이랄까. 타이밍만 재고 있는 느낌?”

“흠. 별다른 방해는 없고?”

“뭐, 상진이가 어지간한 엄친아는 아니니까. 질투의 시선이 유독 심해지긴 했는데…… 그래도 학생회 내부에선 은근 밀어 주는 분위기니까, 견딜 만 해.”

“……그래?”

내가 의아한 건 그런 기타 등등 따위의 견제가 아니다.

그녀의 말만 들어 보면 윤정희라는 거대한 장벽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았다. 전상진 전담 세스코로서 창궐하는 해충을 신속정확하게 박멸해 오던 윤정희가, 저렇게까지 달달해진 분위기를 그냥 두고 보았단 말인가?

‘심지어 학생회에서 밀어 주는 분위기라고?’

이상하네…… 하지만 나쁜 일은 아니므로 더 언급하지는 않았다. 정보원한테 더 알아보라고 시켜둬야겠군.

“앗, 나 빨리 가 봐야겠다. 아무튼 동명이 잘 부탁해! 나 간다!”

“오냐.”

그렇게 그녀와는 헤어지고, 양동명에게 돌아왔 남은 훈련을 마저 소화했다.

그리고 훈련 내내, 양동명은 뭔가 말하고 싶은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물론 난 그가 궁금증에 미쳐 돌아가시기 전까지 방치하다, 다 끝나고 나서야 툭 던지듯 말했다.

“묻고 싶은 게 있으면 물어봐.”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왜, 내 공이 어째서 이렇게…… 넌 이걸 알고 있었어?”

난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말해 주고 싶지만, 말해 줄 수 없어. 너 스스로 알아내야 하거든.”

“……역시 이런 식인가.”

“너무 불평하진 마. 이게 최선이니까. 말은 불완전해. 내 말이 어중간하게 네게 영향을 미친다면 모르느니만 못해. 그러니까 숙제다. 왜 네가 그런 식으로밖에 못 던지는지 스스로 생각해서 답을 찾아왔. 그걸 찾아내는 게 내 훈련의 알파이자 오메가다.”

“…….”

당연히 만족한 표정은 아니지만, 훈련 초기처럼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기색은 없었다.

그만큼 오늘의 결과가 충격적이었던 거겠지. 더하여 내 훈련법에 ‘뭔가 있다’고 직감했던 건지도 모른다.

적어도 내가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괴롭힌다는 식으로 생각하진 않을 테지.

-물론 반쯤은 그냥 괴롭히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어쨌든. 너 나랑 한 약속은 잊지 않았지?”

“응. 물론이지! 해명이놈 눈치 보여서 요새는 연락 못했는데, 난 원래 어머니하고 사이가 좋은 편이었거든. 내가 부탁하면 들어 주실 거야.”

원래는 양해명을 통해 그들 형제의 모친에게 접근할 생각이었지만, 이렇게 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뭐랄까, 왠지 모를 불안감과 관성으로 추진하고 있긴 하지만, 사실 현재 LS회장의 총애는 ‘있으면 좋다’ 수준으로 그 중요도가 격하된 상태였다.

애초부터 동부파를 박살 낼 목적에 필요했던 관계였다.

이길재까지 잡아낸 지금에 와선, 예전처럼 절박하게 구애받을 일도 아닌 것이다.

“오늘 밤에 연락해 볼게. 우리 어머니 야행성이라 지금은 주무실 시간이거든. 내친 김에 약속까지 잡을까? 안 되는 시간 있어?”

하지만 뻔히 보이는 보너스를 먹지 않으면 그것도 직무유기겠지.

나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되도록 빼둘 테니까 약속이나 확실히 잡아.”

“그래, 알았어.”

* * *

‘뭐가 되고 싶은가, 라.’

순간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 답이 있었지만, 말 그대로 빛의 속도로 뇌 바깥으로 추방되었다.

그 답이 떠나고 난 자리에는, 감히, 나 따위가, 언감생심, 같은 단어들만이 잔상처럼 둥둥 떠다녔다.

난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아직 이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다. 아직은.’

아직 풀어야 할 숙제들이 남아 있었다. 그걸 다 끝낸 다음에 생각해도 좋을 문제였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나 : 뵙고 여쭤보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시간 좀 내주십시오.]

어제 남겨 뒀던 문자는 오늘에서야 답장이 돌아왔다.

[마기철 원장선생님 : 그래. 안 그래도 나도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리고 바로 5초 뒤에 날아온 다음 문자.

[마기철 원장선생님 : 나 지금 너네 학교에 와 있다.]

화들짝 놀라서 전화를 거니 예상외로 순순히 연락이 닿았다. 그는 이미 교사 안에 들어와 있었고, 심지어 가까운 곳에 있었다.

“……학교엔 어쩐 일이세요?”

“볼 일이 있어서 말이다.”

여전히 각도기로 묘사해야 할 것 같은 얼굴로 그는 답했다.

한결같은 무표정이었지만 난 어쩐지 그가 긴장하고 있다고 느꼈다. 난 더 머뭇거리지 않았다. 내적갈등이라면 문자를 보내기 전에 이미 끝내두었다.

“……선생님. 여쭙고 싶은 말씀이.”

“아니, 지금은 아니다.”

“예?”

“마저 매듭지어야 할 일이 있다. 그게 다 끝난 뒤에, 모든 걸 다 말해 주마.”

“……그러면 언제쯤.”

“오늘저녁에 보육원 원장실에서 보도록 하자꾸나. 먼저 가 있거라. 내 쪽에서 연락을 주마.”

“…….”

그는 그렇게만 말하고, 복잡한 시선으로 날 한동안 바라보았다.

나조차 해석하기 힘들 만큼 여러 감정이 엮여 있는 표정이었다. 안타까움. 애틋함. 조급함. 그리고…….

“이만 가마.”

“어디 가세요? 제가 안내해…….”

“아니, 되었다. 여기 길이라면 나도 잘 알고 있으니.”

복잡한 얼굴이 무색케도, 그는 더없이 단호하게 몸을 돌렸다. 어쩐지 전장으로 향하는 노병의 뒷모습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근데 왜 저 방향이지?’

재단이나 교사동이 있는 건물이 아니라, 학생자치구 쪽으로 걸으시는 모습에 조금 의아했다.

거기에 특기할 만한 장소라면 학생회실 밖에 없었다.

* * *

대원고교 학생회장실.

“오랜만입니다, 아가씨.”

마기철은 익숙한 몸놀림으로 고개를 숙였다. 윤정희는 그런 그의 정수리를 말없이 쳐다보다가, 이내 못마땅한 얼굴로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이한열이 보았다면 ‘저건 진짜 표정이다!’라고 감탄했을 모습이었다.

“예, 빌어먹도록 오랜만이네요, 아저씨. 왜 다시 오셨죠? 스스로 떠나셨으면서. 평생 안 볼 각오이셨던 거 아니었나요? 이제 와서…….”

윤정희의 입에서 찾아보기 힘든, 찐한 비아냥이었다.

하지만 그조차 익숙하다는 듯, 마기철은 간단히 말을 끊고 본론으로 직행했다.

“아버지를 뵈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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