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이 자꾸 늘어 114화>
13. 너희들의 앞에서 - 4
“아버지를 뵈어야겠습니다.”
그런 그를 내려다보는 윤정희의 시선은 복잡했다.
한 단어로 결론내리기 힘든 감정이었다. 그나마 근접한 표현을 찾는다면 배신감쯤이 될 것이나, 그래도 그렇게 정리하자니 아무래도 염치가 없다.
과거 둘의 사이는 어떻게 보아도 고용주 일가의 자제와 그 고용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어떤 특별한 사건이 있지도, 감정적인 교류가 있던 것도 아니다.
다만 윤정희는 꿰뚫어 봤던 것이었다.
이 돼지들만 가득한 축사의 울타리 안에서, 오로지 저 남자만이 인간의 눈빛을 하고 있노라고. 자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삶에 짓눌려 신음하고 절룩일지언정, 결코 비루하게 구걸하지도 속편한 합리화로 도피하지도 않았다. 유일하게 저 남자만이 자신의 죄악을 올곧게 직시했다.
이 지옥으로부터 자신을 끌어올려 주는 구원자가 있다면, 아마도 저 남자일 것이라고.
아직은 사람이었던 그 시절, 소녀의 마음으로 그녀는 꿈꾸었던 것이었다.
-그렇기에 나만 놔두고 도망친 것이 용서가 안 돼.
제멋대로 기대하고 제멋대로 배신당했다. 그러나 그뿐. 이제 그녀는 그때의 소녀가 아니었고 이 남자에 대한 환상도 더 이상 없다.
이 감정 또한 한때의 잔재일 뿐.
마기철이 고개를 숙이고 들어 올리는 그 짧은 순간, 윤정희는 들썩인 감정을 진압하고 방패 같은 미소를 빈틈없이 둘러치는데 성공했다. 그녀는 자리를 권했다.
“우선 앉으세요.”
마기철은 군말 없이 자리에 앉는다.
윤정희가 느릿하게 다기를 세팅하고 차를 또르륵 따랐다.
“말해도 듣지 않으실 테지만 일단은 말씀드리죠. 뵙기도 힘들뿐더러, 뵈어도 원하시는 건 얻지 못할 겁니다. 그러니까 포기하세요.”
“제가 뭘 바라는지 아시는 겁니까.”
“이래 봬도 그분의 핏줄이에요. 알아야 할 것들은 알고 있습니다.”
“배려는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고집은 여전하시군요.”
그때도 그랬다.
십여 년 전.
맡고 있던 보호소를 완전히 독립시키겠다는 뜻을 밝혔을 때도 지금과 같은 눈이었다. 모두가 비웃었지만, 아버님은 의외로 흔쾌히 그의 뜻을 들어 주었다.
-선물이다. 어디 재주껏 살아 보거라. 이 선물이 저주가 되지 않도록.
놔두면 조폭이 되거나, ‘아버님의 아이들’이 될 운명이었던 핏덩이들. 그 아이들에게 마땅히 주어졌어야 할 비극은 현재까지 성공적으로 보류되어 왔다.
보호소는 보육원이 되었고, 아이들은 적어도 사람으로는 살고 있었다.
그러나 이젠 되물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결국 그것은 선물이었는가, 아니면 형태가 다를 뿐인 저주였는가. 당사자가 아닌 윤정희로선 가늠하기 힘든 문제였다. 다만 이것만은 분명했다.
“……그때, 왜 아버님이 당신을 놓아주었는지 아십니까.”
“……글쎄요.”
“사실은 놓아준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윤정희는 텁텁한 입술을 찻물로 적시었다.
마기철은 독립하는 대신, 동부파를 제어할 프론트맨으로서의 역할을 떠맡았다.
말이 좋아 돈세탁이지, 사실 돈줄의 중심을 틀어쥐고 있는 위치다. 기존 동부파 조직원들의 견제와 도전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보람도 명예도 없고 떳떳한 일도 아니거니와 쓸데없이 위험하기만 한 중임.
그러나 마기철이 본래 하던 ‘일’에 비하자면 사무직이나 다름없겠지. 그에게 버거웠던 건 그딴 외부의 위협들 따위가 아니다.
버거운 건 언제나 사람.
사람뿐이었다.
“아버님은 당신이란 인간을 잘 알았어요. 당신은 지킬 것이 생기면, 지킨다는 역할 수행에 구애받는 사람이죠. 결코 없던 듯이 내던지지 못해요. 그렇기에 지킬 것을 주었다…… 절대 경거망동하지 못하도록.”
“…….”
“그렇게 당신을 통제해 온 겁니다. 아버님은. 당신은 형식상으론 독립했지만, 그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분으로부터 벗어나 본 적이 없어요.”
“말씀대로입니다.”
마기철은 어처구니없을 만치 시원스럽게 인정했다.
“그럼에도 짊어져야 할 일이었습니다. 후회 따위는 없습니다. 그때의 결단부터 이 순간 이 자리에 선 것까지 통틀어, 그 전부를.”
“……정말, 당신은 지나치게 여전해서 짜증이…… 나요.”
말은 그랬으나, 윤정희는 여전한 표정으로 차향을 음미했다.
라벤더 향이 폐에 스밀 듯이 가득하다. 아아. 그냥 차가 되고 싶구나. 뜨거운 물로 우려내어 누군가를 적실 달콤함이 되고 싶구나. 그러나 내 영혼에 배인 향은 차가 되기엔 지나치게 독하다.
그러므로 우려낸다면 독물이 되겠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이런 쓸모밖에 없는 몸이라면, 어쩔 도리 없이 그 용도대로 쓰일 수밖에.
“지은찬의 구명과, 한열이에 대한 처우를 탄원하시려는 거겠지요.”
“예.”
“10년 전에는 그분의 뜻과 부합했기에 당신이 살아남은 겁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죠. 그분의 뜻은 확고합니다. 반의를 품고, 심지어 그걸 탄원까지 한 당신이 어찌 될지는…….”
“각오하고 있습니다.”
윤정희는 찻잔을 들고 가볍게 흔들었다.
찻잔 속에 소용돌이가 자그맣게 일었다가 이내 평탄해졌다. 그녀는 그것을 한참 바라보다, 트레이 위에 소리 내어 내려놓았다. 탁-!
“그렇다면…….”
* * *
원장실은 오랜만이었다.
철이 들기 전에는 자주 와서 놀았었지.
원장선생님은 성격은 무뚝뚝한데 의외로 물러터진 면이 있어서 앵기면 앵기는 대로 어울려 주시곤 했었다.
더 의외인 면은 한 번 발동 걸리면 누구보다 열심히 노신다.
분명 시작 시점엔 우리가 들떠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관계가 역전되는 것이다. 이쪽은 이미 흥이 식었는데, 정작 지천명의 사내만은 “마피아가 밝혀지기 전까진 누구도 나가지 못한다.”며 엄숙히 선언하곤 했었지.
그런 사람을 보며 우린 자라왔다.
그래서 이곳의 경치도 살짝 정상은 아니다.
원장실에 흔히 있을 법한 표창장이나 감사패 따윈 창고에 쿨하게 처박아 두고, 그 대신 젠가에 블루마블에 온갖 보드게임으로 가득한 도원향을 여기 차려 두신 것이다.
“추억 돋네.”
난 기억을 더듬어가며 우리네 손때가 묻은 장난감들을 툭툭 두드렸다. 그때마다 앨범을 들추듯이 추억이 회답해 왔다. 웃음이 절로 픽픽 튀었다.
그렇게 원장실을 한 바퀴 돌았을 즈음.
내 안의 뭔가가 툭 하고 뒤틀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음? 갑자기 왜?’
바로 [율리시즈의 나침반]의 감각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구장창 발동하고 돌아다녔으니 착각할 이유는 없었다.
단지, 이 나침반의 감각은 내 의지에 따라 어느 정도 ON/OFF를 조정할 수 있다. 그게 안 됐으면 이 감각에 시도 때도 없이 휘둘려서 일상생활이 불가했을 것이다.
그래서 평소엔 꺼두고, 본격 탐색 모드일 때만 집중하는데, 예외적으로 내 의지와 별개로 발동될 때가 있었다.
바로 카르마가 아주 지근거리에 있을 경우. 체감상 3m 안쪽.
하지만 아무리 둘러보아도 카르마의 아우라는 보이지 않았다.
수납장도 깔끔히 훑고, 하다못해 젠가 나뭇조각 하나까지 까뒤집으며 관찰하였지만, 성과는 일절 없었다.
건물 밖에 있나 싶어 나가보기까지 했지만 감각으로부터 더 멀어질 뿐이었다.
“음, 뭐지?”
탤런트가 당장 급할 일은 없으니 그러려니 해도 되겠지만…….
어차피 당장 할 일도 없고, 수수께끼인 채로 두는 것도 간질간질하여 좀 본격적으로 수수께끼 풀이에 나섰다.
안 그래도 이런 일이 한 번 있었지.
수학여행으로 경산 수련장에 갔을 때, 탤런트의 조각이 지하에 묻혀 있어서 발견하지 못했던 경험이 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이번엔 벽 안쪽인가?”
느낌은 어느 책장 근처에서 가장 강렬했다.
시멘트 안에 매립된 게 아니라면, 이 반대쪽에 뭔가 공간이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 소년의 모험심은 비밀공간 쪽에 한 표를 보태고 있었다. 난 근처를 관찰하며 비밀을 탐구했다.
그리고 작정한지 3분 만에 정답을 찾아냈다.
책장에 꽂힌 책들 중, 유독 먼지 없이 깔끔한 것들이 몇몇 포착됐다. 먼지는 없는 대신 손때는 자잘히 보인다. 이게 무얼 뜻하겠는가.
그것들만 전부 빼내었더니, 역시나 결착부위가 달칵 풀리는 기계음이 들리며 책장이 미세하게 뒤틀렸다. 힘을 주어 밀어 보니, 과연 여닫이문처럼 부드럽게 밀리는 것이었다.
내 감상은 이러했다.
“……우왓. 이 무슨 중2병 걸린 재벌3세나 시도할 법한 기계장치람.”
어쨌든 열었으니 들어가 본다.
비밀방은 5평 남짓으로 아담했고, 발을 들이자 자동으로 센서등에 불이 들어왔다.
출입방식은 소년의 로망을 잔뜩 자극한 주제에 안쪽은 소소하기 짝이 없었다. 장식 하나 없는 시멘트 벽. 있는 거라곤 탁상과 그 옆의 수납장뿐이다.
그 대신이랄까, 수납장 안의 내용물은 결코 소소하지 못했다.
“……총?”
총기에는 문외한이지만, 글록이라는 권총 브랜드만큼은 알고 있다.
세 자루의 피스톨과 몇 개의 탄창 박스가 수납장 안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순간 숨이 턱 막혀 왔다.
아무래도 보육원 원장실에서 발견되기엔 한참 비교육적인 물건이 아닌가.
그동안 이런 걸 벽 뒤에 두고 블루마블이나 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그 무지한 태평함에 소름이 돋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원장선생님은…….’
아니,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그래도 보육원에 총을 두는 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난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수납장을 계속 뒤져나갔다.
그러나 총 이외에는 의외로 불순한 것들은 없었다.
영락없이 비밀장부라든가 X리스트 같은 게 발견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장갑이나 골동품 시계 같은 잡기들만이 줄줄이 발견됐다.
그리고 카르마의 빛은 그 잡동사니들 밑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건.”
금빛이 감도는 낡은 노트.
[특성]의 카르마는 오랜만이라 가슴이 두근거렸다. 얼른 손을 뻗어 만져 본다. 그러나-.
“……어?”
파직-.
싯누런 스파크가 튀어 오르더니, 지금껏 한 번도 없던 문자열이 눈앞에 팟하고 떠올랐다.
[7번의 만남. 8번째의 기회는 당신에게 달려 있다.]
그리고 언제 있었냐는 듯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노트에 서려 있던 카르마의 빛깔도 스르륵 삭더니, 이내 완전히 자취를 감춘다. 난 거무튀튀한 질감만 남은 노트를 들어서 살폈다. 표지 아래쪽에는 ‘J’라는 이니셜만 적혀 있었다.
“……이건 뭐지. 한 번도 없던 현상인데.”
노트 자체는 별다를 게 없었다.
어떤 음악가의 작곡노트였는지, 음표들이 여기저기 어지럽게 적혀 있었지만, 그마저도 정리된 음악이랄 순 없었다.
악상의 파편들만 되는 대로 늘어놓은 연습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좀 황당했지만 난 빠르게 그러려니 했다.
뭐, 이 능력이 불친절했던 적이 한두 번도 아니고. 살다 보면 언젠가 밝혀질 거라고 마음을 편히 먹었다.
[나침반]의 감각은 여전했으므로, 난 다음 수납장을 열며 탐색을 계속해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걸’ 발견한 순간,
나는 총이 발견됐을 때도, 한 번도 없던 상태창의 이상현상과 맞닥뜨리고도, 변함없는 부동심이 강하게 동요하는 것을 느꼈다.
“……뭐야, 이거.”
난 ‘그것’을 들고 홀린 듯이 원장실을 빠져나왔다.
책장을 다시 원상복구 시킬 최소한의 정신머리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난 빠르게 내 방으로 돌아와, 탤런트 수집품들을 모아둔 함을 꺼내어 열었다. 그리고 그중에 하나를 찾아내 들었다.
경산에서 찾아낸 오카리나 조각.
그리고 원장실에서 발견된 이것은, 이 오카리나의 남은 부분에 빈틈없이 맞아 들어갔다.
오카리나는 이제 3/4정도까지 완성되었고, 그에 비례해 거기 깃든 카르마의 빛도 강렬해졌다.
“이게 왜…… 여기 있어? 대체 이게 뭐기에?”
완전히 의외의 지점에서 발견된 의문.
그러나 오늘 내 의문이 해결될 일은 없었다.
그날 밤, 원장선생님은 보육원으로 돌아오지 않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