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이 자꾸 늘어 119화>
13. 너희들의 앞에서 - 9
* * *
먹구름이 하늘에 힘겹게 매달려 있었다.
당장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거대한 질량과 부피를 꾸역꾸역 감싸 안은 그 모습에는 출산 전의 긴장감 같은 게 느껴졌다.
그렇다. 폭우의 조짐이었다.
테라스에 비스듬히 서서, 나는 보이지 않는 빗물의 냄새를 맡았다.
“웬일로 똥폼을 잡고 있냐?”
이 과장이 담뱃갑을 흔들어 필터 하나를 빼어 물었다. 그가 날 슬쩍 보더니, 갑을 까닥이며 물었다.
“왜, 너도 필려고?”
“예, 저도 하나 주세요.”
“이런 불량 청소년 같으니.”
조폭 두목을 때려잡은 시점에 불량 어쩌고 비난해 봐야 감흥도 없었다.
위치만 따지자면 이미 비행청소년의 정점이 된 셈인 것을 무얼.
난 피식 웃으며 담배 하나를 받아 들었다.
회귀 후 첫 흡연이었지만, 허파가 전생을 기억한 건지 뭔지 매끄럽게 연기를 받아 내었다.
니코틴의 귀환에 말초 신경부터 내분비계까지 일제히 환호를 질러 댔다.
입맛은 쓴데 몸은 정직했다.
“뭐, 어차피 암 걸릴 걱정도 없고…….”
“응?”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두 분은 어때요?”
“대화 나눈 거야 잠깐이다만…….”
어디까지나 형식상이다만, 형욱-정숙 부부는 한동안 LS보안팀의 인턴 직원으로 활동하도록 얘기가 됐다.
기간 한정의 부하 직원이라도 관리자로서 면담은 필수였으므로 셋만 두고 자리를 피해 준 것이었다.
그런데 면담 전후의 표정이 확연히 바뀌어 있었다. 왜인지 알 것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뭐지? 저 여자 사실 CIA 요원인데 위장 신분 얻어서 주부 하고 있는 거 아니야? LS에 잠입할 목적으로 너한테 접근한 특급 요원인 거지.”
“그게 위장이면 지나치게 허술한 거 아닐까요. 진짜 요원이면 좀 더 모자란 척을 했겠죠.”
“위장의 위장이라든지?”
“무슨 간첩이 종로에서 김일성 찬양하는 소리를. 그런 거면 국정원을 확실하게 방심시킬 수 있긴 하겠어요. 비웃음도 듣겠지만.”
“그건 그래. 아 그럼 저거 뭐지?”
이 과장이 정수리를 벅벅 긁어 댔다.
“장난 아니죠?”
“내가 별거 중인 데다 내연녀가 둘이라는 것까지 알아맞히던데. 무슨 셜록 홈즈가 따로 없더라니까. 대체 저런 사람을 어디서 찾아온 거야?”
중간에 엄청난 얘기가 스리슬쩍 지나간 거 같은데.
“야, 그냥 우리 회사 정직원으로 채용하면 안 될까? 분석력 하나는 그냥 혼자 여포 메타 돌리고 있던데.”
“안 됩니다.”
“매정하기는. 그래도 본인이 변심할 수도 있잖아? 그것까진 뭐라는 거 없기다.”
“왜요, 꼬드겨 보시게요?”
“저런 인재를 보고 욕심도 안 부리면 관리자 자격 없지.”
“여차하면 아들이 되어 버려야겠다.”
“아, 그건 반칙이지.”
우린 서로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가 마지막 한숨의 담배 연기를 뱉어 내고는, 내게 서류 봉투 하나를 툭 던졌다.
“……이건.”
“네가 부탁했던 것들이다. 아직 추천서 못 구했다면서? 대충 인맥 돌려서 받아 왔어. 참가 등록 날짜 얼마 안 남았다. 하려면 제대로 하라고.”
봉투 안에는 예술 대회 참가 추천서가 있었다.
안면도 없는 사람이, 이한열은 뭔가 대단하다며 영양가 제로의 찬사를 늘어놓고 있었다.
내 이름을 도라에몽이나 손오공으로 바꿔도 위화감이 없을 정도로 뻔한 내용의 글이었다.
“……고마워요. 꽤 이름 있는 예술가인데 어떻게 추천서를 써 줬네요?”
“내 이름 좀 팔았다. 팀장에 복귀할 거란 소문을 좀 흘렸지. 나한테 알랑방귀 뀌던 놈팽이 중 한 명이니까, 네가 그쪽 양심까지 걱정해 줄 건 없어.”
“걱정 안 했는데요.”
“그럼 왜 그런 표정이냐?”
내가 무슨 표정이지? 잘 모르겠어서 고개를 갸웃했더니 그가 부연하듯 말해 주었다.
“지금 너 되게 찜찜한 표정인데.”
“……그런가요.”
물론 이 추천서에는 아무 유감이 없다.
그냥 감사하다 해야겠지.
다만…… 이제 양 씨 형제들에게 개입할 명분이 사라졌다는 허탈한 자각이 있었다.
형식상의 이유였지만, 어쨌든 그동안 날 설득해 온 논리였다.
그것마저 없으면 내가 무슨 권리가 있어 다른 가족의 사정에 끼어들 것인가…….
“네가 그럴 줄 알고 하나 더 준비해 왔지. 서류 마지막 장을 확인해 봐라.”
그 안에는 양 씨 형제의 사정과 그 모친의 현 상황에 대한 간략한 보고가 들어 있었다.
그간 묘했던 형제들의 행각에 관한 해답지나 다름없었다.
난 그들이 왜 그랬는지 단번에 깨달았다.
“그러니까 네 계획은 처음부터 실효성이 없었어. 백진주 씨는 지금 추천장이고 뭐고 써 줄 상태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니까 그 두 형제한테는 신경 끄는 게 좋아. 너답지 않게 왜 오지랖을 부리는지는 잘 모르겠다만.”
“충고는 감사히 받을게요.”
내가 서류를 봉투에 잘 담아 품에 넣자, 이 과장이 날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대뜸 어깨를 감싸 왔다.
“뭐, 네가 어련히 알아서 하련만은. 그러고 보니 내일이 경매였나? 부자에서 갑부로 진화하는 건가. 이 부러운 새끼. 질투 나는데 한 대만 때리면 안 되냐?”
“가끔은 과장님 초반의 그 진중하던 모습이 그립네요.”
“지금이 내 원래 성격이야 인마. 다시 보고 싶으면 좌천이라도 시켜 보든가.”
“그건 좀 재밌겠네. 심심해지면 해 볼게요.”
그가 푸핫 웃더니, 이제 끄트머리만 남은 꽁초를 비벼 끄고는 테라스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럼 내일 보자.”
“네…… 음? 우리 내일 볼 일이 있던가요?”
“아마도. 그리고 내일부터 나 과장 아니다.”
그의 멋쩍은 미소가 잔상처럼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오늘 자정부턴 칼같이 이 팀장님이라고 부르라고.”
* * *
병원 복도를 지나치는 와중, 별로 반갑지 않은 놈과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그냥 지나갈까 고민하는 1초의 시간.
놈이 선제를 치듯 버럭 고함을 쳐왔다.
“너! 이한열 이 새끼!!”
“……조용히 해. 새꺄. 도덕은 바라지도 않는다만 상식까지 팔아먹으면 안 되지.”
“너잖아! 팔아먹은 건! 네놈이 나, 나를 팔아 먹었잖아아아?!!”
그냥 지나쳤다가는 계속 따라오며 소음공해를 무한 생성할 게 뻔했기에, 할 수 없이 박종철의 입을 틀어막고 비어 있는 병실로 대피했다.
더 자세히 묘사하자면, 한 손으로 농구공을 잡는 모양새로 안면을 덮어 버리고 질질 끌고 온 것이었다.
“우왁! 구왁왁왁!!”
“에이 시끄러운 새끼.”
그리고 침대 위에 확 던져 버렸다.
시트 위에서 꾸익꾸익 날뛰는 모양새가 한 마리 원숭이나 다름없다.
여기서 더 심화되면 원숭이한테 미안할 비유가 될 테니 진정을 해 줬으면 했지만 녀석은 동물 권익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지 가일층 꼴사나워졌다.
난 귀를 후벼 파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팔아먹긴 뭘 팔아먹어. 어떤 멍청한 소비자가 너 따위 폐급을 사주냐. 주제를 알아야지.”
“어떻게 날 조폭한테 던져 줄 수가 있냐?! 그러고도 네가 사람이냐?!”
“내가 던졌냐? 걔들이 주워 간 거지. 그리고 결과적으로 아무 일 없었잖냐. 남자답게 의연하게 받아들여.”
“허참! 허참! 어허허헛!”
아우 시끄러워. 누가 보면 납치해서 중성화라도 시킨 줄 알겠네.
“……넌 악마다. 악마라고! 경찰에 다 말해 버릴 거야!”
“조용히 안 하면 이빨로 이빨을 씹게 만들어 줄 거다.”
“으와아아…… 진짜 악마 새끼…….”
확실히 조용해졌군. 역시 이놈한텐 말초적인 협박이 직방이라니까.
“그리고 경찰한테 뭐라고 할 건데? 절친이라고 뻥 쳤다고? 뭐, 허위 사실 유포 및 사기죄로 고소한다면 거기까진 내가 인정해 주마.”
“……넌 날 두 번이나 버렸어.”
“또 시작이네. 불쌍한 척. 언제 철 들 거냐? 네 뒷바라지도 이제 좀 지친다.”
“네가 언제 내 뒷바라지를 해 줬다고!”
당신도 별로 궁금하진 않을 테지만 말이 나온 김에 밝히건대, 박종철은 김송헌이 몰락한 이후 계속 가출 중이었다.
놈이 법정 출석하는데 쫓아가고, 자잘한 심부름 하고, 뭐 그런 용도로 써먹히며 살아온 듯했다.
근데 저놈한테 돈이 나올 구석이 어디 있어서 먹고 자고 했겠는가.
김송헌이 대 줬을까? 설마.
그놈은 그런 최소한의 배려도 모르는 찐탱 개새끼다. 고아 놈 시중 받는 거야 본인의 천부인권쯤으로 생각하고 있을 거다.
근데 저놈이 어떻게 지금까지 사람 꼴이라도 할 수 있었겠는가.
우연히 들어온 알바거리, 때마침 염가에 나온 게스트 하우스, 신기할 정도로 친절한 법원 근처 이웃 같은 게 하늘에서 떨어지기라도 했을까, 설마.
다 내가 뒤에서 손 써 둔 것이다.
당연히 이놈 생각해서가 아니다.
이런 놈이라도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윤하와 원장 선생님을 안심시키고 싶어서였다.
물론 그런 걸 줄줄 말해서 생색 낼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그러지도 않을 테지만, 이놈한테 감사 인사 같은 들으면 두드러기가 날지도 모른다.
“몰라 새끼야. 불평은 다 했냐? 민폐 그만 끼치고 얼른 기어들어가서 쳐자라.”
“……넌 정말 나한테 미안한 마음이 1도 없구나?”
“그러는 너는 나한테 미안한 마음이 있냐? 염치없는 새끼.”
“으익, 이익! 이, 이, 나, 나쁜 놈!”
“너 진짜 어휘력 어쩌냐. 정말 그렇게 생각하면 당장 퇴원이나 하셔. 네 병원비 누가 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
생각도 안 해 본 얼굴이네.
하기야 이놈 대가리에 두 개 이상의 생각이 공존할 리가 없다. 알아도 외면하거나 했겠지.
“……우윽.”
놈은 분한 듯이 말을 잇지 못했다.
몸에 상처 하나 없는데 아직 병원에 붙어 있는 건, 영양 실조 소견을 받아서였다.
아무리 뒤에서 서포트를 해 줬다지만 혼자 하는 가출 생활이 녹록할 리 없지.
그렇다고 이제 와서 돌아올 수도 없고. 굴욕을 참고서라도 좀 더 병원에 붙고 싶을 것이었다.
“에효, 정말 이놈을 어쩌냐…….”
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알았으면 있고 싶은 만큼 있다가 조용히 가라. 너 이뻐서 내주는 거 아니니까 착각은 말고. 원장 쌤이 네 걱정에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오신 건 아냐?”
“……그, 원장 쌤은, 잘 계셔?”
녀석의 목소리는 지금까지 중에 가장 조심스러웠다.
그러고 보면 박종철도 원장 쌤한테는 유독 약했지…….
난 그렇다고 말하려다가, 뭔가가 턱밑에 탁 부딪혀 와서 입을 다물었다.
원장 선생님은 지금 어디에 계실까. 정말로 괜찮으신 걸까. 빈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내 안에서 대충 타협된 말을 꺼내었다.
“알고 싶으면 빨리 돌아오든가. 나이 처먹고 가출이 뭐냐? 가출이. 쯧쯧.”
난 그렇게만 툭 던지고 병실을 나와 버렸다.
* * *
오 여사님은 경매가 시작되기도 전부터 불안한 기색이셨다. 지당한 불안감이었다.
“……오늘도 또 바꿔치기 당하고 그러지 않겠지?”
“안 그럴 거예요.”
그때 그런 일이 벌어진 것도 내가 일부러 그걸 유도했기 때문이었다.
턱밑까지 밀어 넣어 주지 않으면 신중한 이길재는 움직이지 않았을 테니까.
조사해 본 바, 오늘 거래를 위탁한 경매장은 아주 깔끔한 곳이었다.
재벌 총수들에 명사들도 자주 드나드는 곳이라 하니 괜한 장난질에선 안전하겠지.
“근데 저거 봐라. 쟤네 너 엄청 째려본다. 킥킥.”
오 여사님이 가리킨 곳에는, 일본 측 대표가 흉신의 얼굴을 하곤 날 쏘아보고 있었다.
내막을 대충이라도 안다면 날 당장 쏴 죽이고 싶겠지. 대뜸 돌격을 안 해 오는 것만으로 존경해 주고 싶을 정도였다.
어쨌든, ‘대표’다.
저번 사태에서 교훈을 얻은 일본 정부는 국내의 여론을 조정하고 재력가들의 총의를 모아 한 명의 대표만을 경매에 내보냈다.
뒷거래 따윈 엄금하고, 오로지 금력을 쏟아부어 되찾아오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것이었다.
‘……뭐. 모쪼록 힘내시길. 당신들이 힘내야 내가 부자가 되니까 말이지.’
저 무시무시한 시선에는 자국의 자긍심을 위해서 원수에게 돈을 퍼 줘야 한다는 딜레마도 담겨 있을 것이었다.
난 그들의 적의를 존경을 담아 무시해 드리고는 행사장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때마침 경매가 시작될 참이었다.
“오늘 첫 경매 물품은…….”
경매는 무미건조하게 진행됐다.
난 미래 정보와 [미학]을 적절히 섞어 가며 오 여사님에게 추천품목들을 뽑아드렸다.
그녀는 어떤 건 사들였지만, 어떤 건 고개를 갸웃하기도 하시었다.
“……음. 저건 잘 모르겠네. 저게 진짜 귀품이라고?”
“뭐, 긴가민가하시면 마세요. 제가 사죠 뭐.”
그렇게 말하며 내 쪽에서 호가를 올렸다.
딱 봐도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그림. 그녀의 눈에 별로였으면 보통의 여론도 그렇다는 것이다.
저 미니멀리즘 화풍이 2년 뒤 선풍적 인기를 끌며 그 필두로 저 작가가 꼽히게 되리라는 건 현재로선 나만이 아는 사실이었다.
“더 없으십니까? 그럼 37번…….”
그런 이유로 내 낙찰이 확실시 되려는 순간.
“8번. 8번 입찰하셨습니다.”
그 순간 일본 측 대표가 번호표를 들고는 내게 비릿한 시선을 보내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