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능이 자꾸 늘어-120화 (120/164)

<재능이 자꾸 늘어 120화>

13. 너희들의 앞에서 – 10

그 순간 일본 측 대표가 번호표를 들고는 내게 비릿한 시선을 보내는 것이었다.

‘……뭐야. 저 느끼한 표정은.’

일본인 특유의 과장된 표현력이 내 안구를 괴롭게 했다.

저건 열도의 종특인가. 본인의 의도를 반드시 전달하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주름 한 겹에서부터 눈빛에까지 꼭꼭 압축되어 있었다. 보고 있자면 싫어도 알 수밖에 없겠다.

쟤들은 날 엿 먹이고 싶은 것이다.

‘아이고 치졸해라. 국가 대표가 되어서 고작 하는 짓이 고딩 괴롭히기냐.’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스케일부터가 뭔가 미묘하잖아.

납치라든가, 암살이라든가, 아님 경제 압박이라든가, 국가 단위의 보복이라면 저 정도는 해야 체면이 사는 거 아닌가.

근데 고작 경매장에 기어 들어와서 내가 물건 사는 거 방해하고 있네. 참나.

난 마트에서 마지막 떨이 상품을 내 앞에서 가로채는 얄미운 주부를 상상하면서 헛웃음을 쳤다.

난 경매 호가를 몇 번 더 붙여 보았지만, 그때마다 일본 대표는 집요하게 쫓아와서 내 입찰을 방해했다.

“3억! 3억 3천입니다! 이 입찰 경쟁이 어디까지 갈지 저도 궁금하네요!”

뭐야 저 사회자. 재미 들렸잖아.

미안하지만 여기서 더 간다면 손익이 날지 어떨지 불분명했다.

유행한다는 것만 알지, 그 가격까지 정확히 기억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가뿐하게 포기.

“예! <12월의 봄>은 8번 손님께 낙찰됐습니다!”

당연하게도 일본 대표는 굳이 내 쪽을 쳐다보며 승리자의 미소를 지었다. 아무튼 엄청 기뻐 보인다.

‘음. 아냐. 그냥 내가 과민 반응하는 걸지도. 우연히 사려는 품목이 겹친 거겠지. 예산도 한정됐을 텐데 저런 경거망동을 할 리 없잖아. 아무렴 한 국가의 대표인데.’

목표한 물건은 아직 등장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땀 빼고 있을 여유가 있을까.

그래. 저 아저씨 표정이 기준보다 한참 과장돼 있어서 내 [눈치]가 오판해 버린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설명이 안 된다.

그러나 나의 두 번째 입찰에도 똑같은 일이 벌어짐으로써, 이 세상이 비이성과 광기로 돌아간다는 처참한 진실이 확인되었다.

“8번! 이번에도 8번 손님이 37번 손님을 격퇴하셨습니다!”

이 시대, 지성은 멸종했다.

아니 근데 저 사회자는 뭐가 저렇게 신난 거야? 여기 재벌 총수들도 오간다는 그 격조 높은 경매장 맞아?

“어머. 쟤들 또 따라온다. 오늘 너 아무것도 못 건져 가겠다. 얘.”

“저따위 상식인이 이길 수 있을 리 없지요…… 완패를 인정합니다.”

“와, 천하의 한열이가 패배를 인정하는 거야?”

“부처님 가라사대, 똥덩이는 피하고 미친놈은 상대하지 않는 법이라 하였습니다.”

그런 이유로 오늘 하루 장사는 텄다. 난 깔끔하게 마음을 비우기로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가능한 호가를 높이 올려서 저놈의 시말서 두께를 늘리는 일 뿐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재밌게 놀아 볼까.’

저놈들도 저렇게 치졸하게 나오는데 나라고 얌전히 당하라는 법 없지.

이제 나는 무차별적으로 경매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일본 대표는 당연하다는 듯 따라왔고, 나는 없는 장작도 끌어모아서 경쟁심을 불태웠다.

팔천, 구천, 일억, 미친 듯이 호가가 널뛰기 시작했다.

여기서 한 가지 반전이 있다면-.

‘바보들. 저거 내년에 위작으로 판명되는데.’

아르누보의 대표 작가라 할 수 있는 알퐁스 무하의 말기 작품.

그런데 내년 즈음에 똑같은 작품이 프랑스의 어느 오래된 가옥에서 발견돼 진본 논쟁이 벌어진다.

결론은.

알퐁스의 성공을 질시한 같은 시대의 무명작가가 표절했다는 것.

시대가 일치해서 감정사들의 눈을 교묘하게 피해 간 것이었다.

어쨌든 나는 내년이면 반의 반값으로 떨어질 작품을 입찰받기 위해 열과 성을 다했고, 애통하게도 패배하고야 말았다.

“……크윽!”

분하다는 표정을 지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일본 대표는 또 한 번의 승리를 거두었지만, 글쎄, 1년 한정의 승리감일 테니 지금을 한껏 누려 두길 기도해 주었다.

그리고 비슷한 일이 몇 번 반복됐다.

난 괜찮은 작품들은 사뿐히 건너뛰고 쓰레기처럼 보이거나 앞으로 쓰레기가 될 것들만 골라서 열심히 참여했다.

그 결과 일본 대표는 성공적으로 쓰레기들을 사 가게 되었다.

과연 방사능의 본고장. 폐기물을 모아들이는 데에 일가견이 있는 듯했다.

아무튼 오늘 경매장 관계자들만 노났다.

“……아브라함 루이 브레게가 직접 제작한 회중시계입니다. 퍼페추얼 캘린더 기능은 당시 기준으로 신기술이었는데요, 해당 모델은 브레게가 기술적 과시를 위해 제작한 한정품…….”

그때 내 눈빛이 반짝였다.

상체가 앞으로 절로 숙여졌다.

“앗. 저건 진짜 사고 싶은데.”

완전히 골동품. 더 이상 기능하지 않으므로 당연히 관상용일 뿐인 시계였다.

그러나 거기 깃든 짙은 푸른빛 카르마는 내 입맛을 돋우기 충분했다.

‘브레게가 직접 제작했다면 그의 재능이 깃들었겠지? 저건 탐나네.’

오늘날 세계 최고의 시계 공방이라면 단연 파텍필립이지만, 그 파텍조차 역사로는 브레게에 비비지 못한다.

특히 브레게는 스위스의 수많은 시계장인 중에서도 독보적인 먼치킨으로 분류된다.

당장 그가 발명한 대표작인 리피터와 뚜르비옹만 봐도, 진입 장벽이 높은 복잡 시계라는 카테고리 안에서도 넘사벽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것들이다.

당연히 그 재능이 범상치 않을 터.

하지만…….

“시작가는 15억입니다.”

내가 요새 돈을 좀 벌었다곤 해도 가볍게 접근할 가격대는 아니었다.

일본의 방해까지 고려하면 어디까지 뛸지 예상도 안 된다.

‘……그래도 오늘 경매로 들어올 돈으로 상쇄할 수 있을 테니, 이번에는 좀 무리를 해 볼까.’

난 오 여사님께 귀엣말을 하였다.

“여사님. 저거 좀 사 주세요. 돈은 제가 나중에 따로 드릴게요.”

“……음? 저건 정말 갖고 싶구나? 하여간 남자애들이란. 시계라면 사족을 못 쓰네. 저런 건 갖고 다니지도 못할 텐데?”

“딱히 시계라서는 아니지만…… 어쨌든 갖고 싶은 건 맞아요.”

“오케이.”

나대신 오 여사님이 입찰에 참여하셨다.

하지만 브레게 생전에 제작된 한정품인 만큼 가격은 무서울 만치 빠르게 치솟기 시작했다.

일본의 방해 어쩌고를 논할 때가 아니었다.

“87억! 87억까지 올라갔습니다! 다음 입찰자 계신가요? 88억! 88억 나왔습니다!”

“……어떻게 할래?”

“포기하죠.”

지금 묶여 있는 돈을 다 깨면 100억 정도는 마련할 수 있지만, 가까운 시일에 쓰일 데가 정해져 있다.

더 이상은 과소비다.

지금 있는 탤런트만으로도 딱히 부족함을 못 느끼기도 하고…….

‘이제 나도 배가 불렀네. 재능을 마다하다니.’

나는 피식 웃었다.

예전의 나였다면 아마 훔칠 생각까지 했을지도.

그게 무슨 재능이든, 이 총체적 무능함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어떤 무리든 감수했을 것이다.

지금은 뭐, 배부르면 좋은 거지. 암.

“98억! 브레게의 한정판 회중시계는 2층의 12번 고객님께 낙찰됐습니다!”

98억이라면 대단해 보이지만, 앤틱 시계는 원래 미술품과 더불어 제한 없이 가격이 뛰는 분야 중 하나다.

파텍 필립의 헨리 그레이브스가 수백억에 팔렸음을 생각하면 그나마 얌전한(?) 입찰이었다고 봐야겠지.

그 순간 무심코 2층으로 시선을 옮겼지만, 의식적인 행위는 아니었다.

누가 저리 통이 커서 시계 하나에 백억을 쾌척하나 싶은, 단순한 호기심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한 중년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응? 나를 아나?’

우연히 시선이 멎은 곳에 내가 있던 게 아니다.

남자는 내 얼굴에 정확히 닻을 내려 둔 채 미동 없는 눈빛을 보내왔다.

내려 보이는데도 의외로 불쾌하진 않았다. 상품 평가하듯 핥는 게 아니라, 단단하고 신중한 관찰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남자는, 그게 어떤 의도에서든, 내 겉면이 아니라 더 깊은 곳까지 살피고 있었다.

“……저 사람 누구죠?”

“응? 너 저분 몰라? 아, 언론에는 모습을 잘 안 보이시니 모르기도 하겠네.”

“유명한 사람?”

“유명하다면 유명하지. LS그룹 부회장이니까.”

아.

그녀의 말을 듣고서야 기억 속의 윤곽과 현재의 모습이 겹쳤다.

미래의 기억으론 더 늙고 여윈 모습이었지만, 고쳐 보니 확실히 동일인이다.

‘……저 사람이 훗날 LS회장이 되는 장진욱.’

한반도의 거인 장건철의 장자이자, 예술가 장민욱의 형제 되는 자.

내가 흥미로움을 담아 그를 마주 보았지만, 그 즈음 그는 다시 경매장으로 시선을 돌린 후였다.

그리고 몇 분 뒤, 내 물건이 경매장에 올라왔다.

“다음 경매품은 오늘의 하이라이트죠. 여러분도 뉴스에서 익히 보셨을 일본의 유물 2점입니다. 첫 물건은 우에스기 겐신의 것으로 감정된 오오요로이. 시작가는 50억입니다.”

당연히도 일본 측 대표가 입찰에 가장 먼저 뛰어들었다.

사기 위해 혈안이 된 고객이 있으니, 당연히 경매장 측에서 바람잡이 몇 명을 심어 놨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호가는 더 이상 올라가지 않고 있었다.

“이상하게 조용하네요.”

“오늘은 바람잡이 안 넣기로 정부끼리 합의한 모양이야. 뭐 이권 몇 개가 오갔다는데…….”

“진짜요? 저는 왜 몰랐죠.”

“그냥 찌라시로 돌아다니는 얘기니까 모를 수도 있지. 나도 넘겨들었는데, 오늘 분위기 보니 진짜일 수도 있겠는데…….”

“왜 당사자를 빼놓고 그런 얘길 막 진행시키지? 얼탱이 없네.”

“뭐, 국가의 일이다 이거지. 그리고 너, 이번 정부한테 밉보인 거 알지?”

그건 그래.

최근 내가 벌인 일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곳은 검찰이지만, 정부도 절대 좋은 꼴은 못 봤다.

레임덕 탈출용 스캔들로 날 희생양 삼았다는 의혹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뭐, 아마 사실일 테지만. 날 매장하기 전에 위쪽의 암묵적인 허락을 얻었겠지. 그러니 정부라도 할 말이 없을 테지만…….’

정치판이 언제 그렇게 아름답게 돌아갔다고. 난 그러려니 했다.

“……이거 이럼 나가리네. 오늘 수익은 크게 기대 못 하겠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내 쪽에서 바람잡이 몇 명 고용할 걸 했다.

보는 눈들이 있어서 자제했더니 뒤에서 이런 작당들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난 쓴물을 삼켰다.

사실 돈 같은 건 앞으로 얼마든지 벌 수 있으니 별로 아쉽진 않다만, 그래도 저 일본산 양아치가 희희낙락할 꼴을 생각하니 뭔가 북받쳤다.

그러나 이 판국에는 아무리 나라도 어쩔 도리가 없다.

“더 없으십니까? 그럼 8번 고객님께 65억에…….”

반쯤 포기하고 있을 때였다.

“앗, 12번 고객님 66억. 엇, 8번 고객님 또 67억! 또 12번 고객님이!!”

갑자기 호가가 방만하게 치솟기 시작한 것이었다. 잠깐, 12번이라면…….

‘장진욱 부회장?’

순식간에 100억을 돌파.

입찰 경쟁이 더없이 치열해지자, 경매장 측에서 최소 호가 단위를 10억으로 늘렸다.

그럼에도 장진욱 부회장은 거침없이 번호표를 들며 가격대를 끝도 없이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중간에 일본 측을 쓱 살폈는데, 얼굴이 벌겋고 부들부들 떠는 것이 조만간 실신하겠다 싶었다.

그도 모자라 호가가 50억으로 올라가고-.

“873억! 873억입니다! 더 이상의 입찰은 없으십니까?”

장진욱 부회장은 이쯤이면 됐다는 듯이 입찰을 포기했다.

그러나 일본 측은 안심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면 입찰해야 할 물건이 하나 더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바로 다음 물품, <야마토노카미 야스사다> 경매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사회자는 지금까지 중에 가장 꿀잼이라는 표정으로 힘차게 외쳤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