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이 자꾸 늘어 121화>
13. 너희들의 앞에서 – 11
* * *
‘뭔가 죄송합니다.’
일본 대표가 영혼까지 빨려 나간 얼굴로 퇴장할 때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까까지 대립했던 상대였긴 했지만, 뭐랄까, 우리가 주고받은 공방이라곤 고양이 펀치 수준의 귀여운 것들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링 위에 타이슨이 난입해서 핵펀치를 쏟아붓고 유유히 사라진 것이었다.
게거품 물고 KO 당한 상대를 보자니, 직전까지 소꿉장난 기분으로 상대해 왔던 나로선 반사적으로 측은함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그와는 별개로 난 부자가 되었다.
지금 당장 동원 가능한 현금량만 따지면 어지간한 재벌 총수를 뛰어넘을 수도 있겠다.
“우후후. 이젠 명실상부 졸부가 되셨네. 어때? 헬리콥터를 일시불에 긁어 버릴 수 있는 남자가 된 감상은?”
“글쎄요. 뭔가 돈이 이렇게 많아 버리고 보니 오히려 실감이 안 되네요. 그냥 숫자 같아요.”
“아무튼 오늘 뒷풀이는 호화찬란하게 해 보자고! 물론 돈은 한열이가 내고.”
“……어쩐지 요새 내 지갑이 공공재가 되어 가는 느낌이.”
후반부 <야마토노카미 야스사다> 경매는 전반부보다 치열했다.
아니, 치열했다면 어폐가 있겠군. 그보단 처참한 농락에 가까웠다.
우리 부회장께선 재미가 들리셨는지 배포가 생기셨는지 좀 더 과감하게 베팅을 하셨고, 더 이상 번호표 들기도 질렸다 싶을 즈음에야 봐주듯이 입찰을 포기했다.
그렇게 칼 한 자루와 갑옷 한 개를 팔아 챙긴 매출은-.
“2,157억이라…….”
물론 세금과 수수료까지 내고 나면 이보단 한참 빠지겠지만, 그럼에도 압도적인 금액이었다.
아까는 경매장 측에서 대표까지 버선발로 나와서 날 축하하고는 돌아갔다.
그 아저씨가 말하길 단일 품목으로서는 사상 최고가였다고. 아마 기네스에 오를 거라는 말도 들었다.
‘뭐, 가장 적기를 노려서 경매를 연 거기도 하지만.’
그동안 나도 놀고만 있던 건 아니다.
그중 가장 공을 들인 일이라면, 일본 언론에 약을 좀 쳐서 여론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는 작업이었다.
국제적 도둑질을 감행하고 그걸 또 멍청하게 들켜버린 망신살, 그럼에도 확보하지 못했다는 무능력, 오키타 소지와 우에스기 겐신의 재조명, 말들이 끝도 없이 범람하며 일본 사회를 흥건히 적셨다.
이런 밑으로부터의 압박에 일본 정부가 숨도 못 쉴 즈음이 되어서야 경매에 내놓은 것이었다.
그러니까 일본으로서는 얼마를 주고서라도 사 와야 했다.
오키타 소지가 아니라 미야모토 무사시의 검이었더라도, 이런 분위기를 타지 않았다면 절대 이 정도까지 입찰액이 치솟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쯤 되니 그냥 저 일본 아저씨가 불쌍하네요. 돌아가면 욕 좀 먹겠어요.”
“그래도 이천억에 정치적 면피를 했으니 나쁘지 않은 장사 아닐까?”
“……그럴까요.”
국가로서도 큰돈이겠지만, 그래도 일본 같은 부국이 긴축 한 번 빡 하면 대수롭잖게 충당할 금액일 것이다…… 라는 말씀이시겠지만.
글쎄.
일본 국민들의 눈에도 그렇게 보일지는 또 다른 문제겠지.
내가 보기엔, 낙찰 액수를 트집 잡는 여론이 반드시 준동한다. 원래 까는 일로는 콩 까기 다음으로 정부 까기가 제일로 재미지니까, 일본 사회는 이 일로 한 번 더 홍역을 치르게 되겠지.
뭐, 거기서부턴 내 알 바 아니니 부디 힘들 내시길.
내가 알아야 할 바라면-.
“근데 장진욱 부회장은 왜 저를 도운 걸까요?”
“……글쎄? 듣기로는 LS그룹과 현 정권 관계가 별로라는 소문이 있긴 하던데. 뭔가 시위 같은 게 아니었을까?”
“말 되네요. LS의 주력 사업은 자동차랑 전자니까, 일본과 경쟁관계라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고…… 근데 그것만으로는.”
“그냥 유감과 감사의 표시다.”
그때 내 뒤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끼어들어왔다.
“어? 이 과장…… 아니, 이 팀장님?”
이제 팀장이 되신 이상용, 돌연 등장.
직책이 올라가서인지 뭔가 하룻밤 만에 한층 태가 버젓해지신 듯했다.
여긴 어쩐 일이냐고 물으려다, 문득 오늘 보자는 그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그게 이런 뜻이었군.
어쨌든 나는 반가워하려는데, 정작 그는 날 휙 지나치고는 내 옆의 오 여사님께 치덕대는 것이었다.
머리를 쓸어 넘기고 입가에 우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품에서 명함을 꺼내 건네는 폼에는 어떤 계산된 우아함이 깃들어 있었다.
흔히 말하는 작업용 모드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한열 군과는 사업적 파트너 관계인 이상용이라 합니다.”
“어머, 어머. 한열아. 이런 신사 분하고 친했으면 나한테 먼저 소개를 해 줬어야지! 엄마야. 나 오늘 머리도 대충 했는데…… 호호. 바, 반가워요. 오인화라고 해요.”
“충분히 아름다우십니다.”
“오호호…… 이 팀장님도 멋지셔요.”
뭐야 이 핑크핑크한 아우라는.
눈앞에 절찬리에 펼쳐지는 불륜의 현장을 견디기엔 과연 나로서도 항마력이 부족했다.
“이 싸람들이. 새파란 고딩 앞에서 이 무슨 비교육적인 작태들이십니까.”
“뭐.”
“왜.”
“…….”
미친.
그냥 놔두면 단도직입적으로 방까지 잡으실 기세들이라 얼른 끼어들었다.
“그래서요? 유감과 감사의 표시라는 게 뭔데요?”
“……말 그대로의 뜻이지. 부회장께서 널 그렇게 보실 이유가 뭐겠냐?”
표정은 귀찮고 대답은 건성건성이었다.
작업에 한창이라 실제로 귀찮은 모양이지만, 가정의 평화를 위해 더 귀찮게 해 드려야겠다 싶었다.
“잘 모르겠습니다만.”
“황혁수.”
“아.”
짧은 한마디였지만, 충분한 정보는 거기 다 들어 있었다.
그러니까 장진욱은 전(前) LS보안팀장 황혁수가 내게 걸어온 수작질을 ‘LS그룹이 개인에게 끼친 민폐 행위’로 규정한 것이었다. 그래서 ‘유감’이겠지.
‘감사’라는 건 조직을 좀먹는 버러지를 솎아낼 수 있게 해 줬다는 뜻일 것이고.
아무래도 보통 재벌의 사고방식은 아니다.
갑질이 패시브 스킬쯤 되는 재벌이라면 ‘서민 따위가 주제도 모르고 그룹의 명예에 손상을 입혔다.’고 생각해도 무리는 아닐 텐데 말이지.
난 장진욱 부회장의 성향이 대강 짐작됐다.
원칙적이고, 어떤 일이든 자로 잰 듯 반듯하게 구분해서 사는 사람이겠지.
자신의 사적 감정 따윈 사소하게 취급할 수 있는 자제력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확신하고 나니 다른 점도 보였다.
“……아마도 개인적인 호의로 한 일은 아니겠네요.”
“그래. 착각하지 않아서 다행이네. 이 일로 부회장님이 네게 우호적이라고 판단했다면 지적해 줄 생각이었는데 말이야.”
“어떤 분입니까? 부회장이란 사람은.”
“글쎄다.”
이 팀장이 턱을 매만지며 날 지그시 쳐다봤다.
뭔가 의미심장한 여운을 남기고 싶었겠지만, 내게는 중년미의 과시라는 의도가 뻔히 보여서 괴로웠다.
이런 걸로 여자들이 넘어간단 말인가.
기가 막히면서도 그게 실제로 먹히고 있으니 뭔가 배신당한 기분마저 들었다.
저런 걸로도 남녀 사이에 멀티플레이가 성사되면 싱글 캠페인 일변도였던 내 전생은 과연 뭐였단 말인가…….
“어쨌든, 과한 기대나 착각만 안 하면 됐다. 네게 해코지를 할 분은 아니라는 정도만 알아 둬. 다만…….”
“다만?”
“아니, 됐다. 아무튼 대충 이해는 됐지? 속내야 어쨌든 부회장님이 보낸 선물은 대가성이 아니니, 그냥 맘 편히 받아 둬.”
“……그런가요?”
“그래. 그것도 모자라다 싶으셨는지 이것도 네게 보내라시더군.”
이 팀장이 손짓하자,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매장 측 직원이 가죽 하드케이스를 들고 다가왔다.
그걸 열자-.
“……헐.”
“뭐, 감사 인사를 하면서 한 푼도 안 들일 수는 없다고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브레게의 한정판 회중시계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세월은 풋내를 갉아내고 대신 풍미를 그 위에 덧입혀 두었다. 멋진 앤틱이었다. 난 그것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아브라함 루이 브레게의 공학적 상상력](Rank C)
지금으로선 뭔가 싶은 재능이지만, C랭크라면 언제든 유용하게 쓰이겠지.
정말 감사한 선물이었다.
“부회장님께는 감사하다고 전해 주세요.”
“그래. 아무튼 난 이제 팀장으로서 부회장님을 직접 경호하게 됐으니, 앞으로는 지금까지처럼 쉽게 만나기 힘들 거다. 나도 본격적으로 바빠질 거거든. 그 대신…….”
그가 뒤에 서 있던 헌앙한 청년의 어깨를 짚고 잡아끌었다.
“김 대리가 앞으로 널 맡게 될 거다. 어지간한 건 얘를 통해 말하고.”
“오랜만이에요, 김 대리님.”
“네, 오랜만입니다.”
그는 이중간첩으로 활약하여 황혁수를 몰락시키는데 한몫한 김대섭 대리였다.
한 번 변절한 이력이 있지만 그만큼 한 일이 있으니, 공과가 상쇄되어 현재로선 제로 베이스에서 평가받고 있다고 한다.
“뭐, 네 옆에서 널 보필하고 싶으시단다. 내 밑에 놈 중 그나마 제일 유능하니까 두고 쓰기 부족하지 않을 거다. 사실을 말하자면 네 호위 담당, 꽤 경쟁이 있었어.”
“제가 뭐라고 경쟁까지…….”
“네 옆에 있으면 승진이 굴러들어온다는 미신 같은 게 생긴 모양이더라고.”
“전 그런 이유로 자원한 게 아닙니다만.”
“그래그래. 보은과 봉사. 또 들었다간 고막이 헐겠다.
김 대리는 이 팀장의 비아냥에 발끈하다, 다시 얼굴을 온화하게 되돌리고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난 그의 손을 맞잡았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아이고, 저야말로.”
인사는 그렇게 간단하게 끝.
“이제 가 봐야겠다. 부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앞으론 보기 힘들겠다만…… 한열아.”
“예?”
“어디 있든 뭘 하든 너라면 지금까지처럼 굳건하리라 믿는다. 건강하고. 그럼 오 여사께서도 안녕히.”
“…….”
여운을 남기는 짧은 인사말과 함께, 쿨하게 몸을 돌려 걷는 이상용 팀장을 보면서 나와 김 대리는 간단히 평했다.
“폼 엄청 잡고 있네요.”
“간지에 뇌가 지배된 수준…….”
여자 앞이라고 저렇게까지 하는 건가.
그 와중에 오 여사님이 홀린 듯이 그 뒤를 따라가고 있기에 목덜미를 잽싸게 붙들었다.
“여사님은 저랑 뒷풀이 하셔야죠.”
“아. 맞다.”
안 되겠다. 오 여사님이 세 번째 내연녀가 되기 전에 내 쪽에서 정신을 바짝 차려야.
* * *
“……여긴가.”
나는 손 안의 오카리나를 고쳐 쥐었다.
셋으로 분리된 조각은 제자리에 되돌아간 순간부터 어떤 신비로운 힘에 의해 접착되어 단단히 한 몸이 되었다.
마치, 나머지 하나의 조각을 찾아달라고 희구하듯이.
그러나 세상사 희망은 언제나 좌절되는 법이므로 나는 더 이상 나가지 못하고 발을 멈춰야 했다.
날 막아선 것은 두텁고 높은 콘크리트 벽이었다.
혹시나 해서 벽을 따라 빙 돌아봤지만, 통하는 정문을 발견한 순간 좌절은 더 커지기만 했다.
여긴 교도소였다.
나머지 한 조각의 존재감은 저 안으로부터 전해져오고 있었다.
“……흠. 아마도 죄수 중 하나가 가지고 있겠군.”
오카리나 조각을 쥐고 집중해 보면, [율리시즈의 나침반]의 침 끝이 끊임없이 흔들린다는 게 느껴진다.
즉, 저번처럼 한 장소에 묻혀 있는 게 아니라는 거다. 누군가 소지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단 며칠간 관찰해 본 바, 그 폭이 넓지 않고 규칙적인 것으로 보아 출퇴근 하는 간수는 아니다.
교도소라는 한정된 공간에 묶여 있는 사람.
죄수.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난 바로 김 대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교도소에 있는 죄수 리스트 말입니까?
“예. 조사하기 어려운 정보입니까?”
-그 정도는 어려울 것도 없지요. 내일까지 정리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부탁드릴게요.”
참담하지만 이것만이 원장 선생님의 뒤를 쫓을 유일한 단서다.
이렇게라도 선생님의 뒤를 쫓는 게 옳을까. 내게 말을 안 하신 이유가 있지 않을까. 내가 가만히 기다리는 게 선생님의 뜻이라면…….
수많은 고민이 들었지만 결국 난 여기까지 왔다.
하릴 없이 서 있을 수도 없어 근처 벤치에 엉덩이를 뭉개고 앉았다.
머리가 무거운데 왜 그런지도 모른 채. 나는 멍하니 먹구름 가득한 하늘을 올려다봤다.
방금이라도 내릴 것 같은데 물방울은 하나 없이 습기만 질척하다.
“……난 이제 뭘 해야 하지.”
노래 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