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이 자꾸 늘어 125화>
13. 너희들의 앞에서 - 15
* * *
“……후원 말입니까?”
살다 보면 이때다 싶은 순간이 적어도 세 번은 찾아온다.
양진수는 지금이 그 두 번째라고 생각했다.
첫 번째는 물론, 에이전트로부터 미국행을 권유받은 순간이었다. 최대한 빨리 메이저 리그에 안착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말도 들었다.
그러나 그때의 그는 어중간하게 나이가 들었고, 젊은이의 패기와 베테랑의 신중함 사이에서 가끔 오판을 범하기도 했다.
그는 그 순간 베테랑이 되기로 했다.
한국 시즌을 제패해야만 미국을 넘볼 자격이 주어진다, 지금의 나는 자격미달이다, 기량을 충분히 갈고닦은 뒤 도전하겠다, 대충 그런 이유들이었다.
그때는 훌륭한 자제력을 발휘했다고 생각했다.
그게 그냥 겁쟁이의 변명이었다는 걸 그는 한참 뒤에야 깨달았다. 깨달음의 대가는 퇴물 선수라는 오명이었다.
하지만 이제 아니다.
선수 생활을 끝내고 힘들여 시작한 에이전트 사업이었다.
더 이상의 막다른 길은 없으므로 물러설 수도 없다. 머뭇거리다 놓치는 바보짓은 이제 하지 않을 거라고 양진수는 새삼 다짐했다.
“예, 대표님이 제안한 선수 양성 프로그램을 인상 깊게 보았습니다. 한때 양 선수의 팬이었던 몸으로 기대가 되지 않을 수 없더군요.”
“하하. 그렇습니까.”
“왜 지금까진 안 했나 싶을 정도군요. 아직은 생소한 시스템이라 외면 받는 게 사실입니다만…… 원래 위대한 발견이란 그런 법 아니겠습니까?”
“지당한 말씀입니다. 예, 제 입으로 말하긴 뭐 하지만, 제 방식이 성공한다면 누구도 과거를 돌아보지 않게 되겠죠.”
자본주의 미소로 사람 좋게 웃는다.
그러나 마운드에서 빛을 발한 그의 눈은 사무실에서도 여전히 날카로웠다.
옛 팬이니 선구안이니 말이야 좋다만, 파리와 먼지가 세력 다툼을 하는 이 비주류 사무실을 굳이 찾을 이유는 무언가.
바닥에 바닥을 쳐 오던 그로선, 기꺼운 와중에도 일말의 의혹을 남겨 두어야만 했다.
‘……흠. 사기꾼은 아닌 거 같은데.’
중년의 남자는 소탈했다.
겉모습만 보면 사업가보단 현장 관리자가 떠올랐다. 사기꾼이라면 좀 더 번지르르하게 하고 왔겠지.
얼마 전까지 OEM을 받던 중소기업 대표였다 최근 신기술로 대박을 치고 있는 IT의 떠오르는 신성…… 이라는 뒷배경에 잘 부합하는 분위기.
‘뭐, 조심만 하면 별문제없겠지. 후원을 받는 건 어차피 이쪽이고. 이상한 조건만 걸지 않는다면…….’
그때 남자가 상체를 기울여 왔다.
“단지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만.”
“……역시 그렇습니까.”
“아아, 너무 그렇게 긴장하실 건 없습니다. 그렇게 무리한 걸 요구할 생각은 없습니다.”
“…….”
선수 생활을 해 본 경험상, 긴장하지 말라는 소리 다음에 가장 긴장되는 얘기가 나오는 법이었다.
양진수는 마른 입매를 초조하게 적셨다.
“예예, 말씀하시죠.”
“저희 사업에서 주요 파트너인 기업이 있습니다. CC전자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아, 예. 들어 보긴 했습니다. 패널 쪽에서 점유율이 꽤 있다고…….”
“그쪽에 제가 신세를 진 일이 있어서 말이죠. 근데 그 집안 장손이 뒤늦게 야구를 시작했다지 뭡니까. 제법 재능이 있다는 모양이군요. 한때의 경험 정도로 허락해 준 모양인데, 이왕 하는 거 잘하는 게 낫지 않겠느냔 말입니다. 이름도 좀 떨치고…… 옛 전설과의 드라마틱한 사승 관계도 밝혀지고…… 어떻습니까?”
긴장이 느물느물 풀렸다.
이런 거였나.
요컨대 청탁이었다. 도련님 하나 어르고 달래서 스펙 만들어 주고, 언론에 동반해서 카메라 마사지도 같이 받고, 흥미로운 얘깃거리로 좀 씹혀 주는 대가로 돈을 주겠다…… 그런 심플한 거래.
그런 일이라면 당연히 땡큐다.
자존심?
그런 건 바닥에 처박혔을 때 가장 먼저 분실해 버렸다.
“흥미롭군요. 물론 선수를 봐야 알겠지만. 좋은 인재라면 제 쪽이 오히려 환영해야 할 일입니다.”
물론 좋은 인재가 아니라도 환영할 테지만.
“혹시 포지션이?”
“투수라고 하더군요. 들어가자마자 루키로 주목받고 있다고…… 아, 안 그래도 다음 연습 경기로 선발 포지션을 굳힌다고 하던데요. 그때 저도 가 볼 생각입니다만, 어때, 시간이 되시겠습니까?”
언젠지도 안 가르쳐 주고 제안하다니. 그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 따라오라는 압박이었다. 물론 양진수는 순순히 굴복해 주었다.
“예, 물론이죠. 선수 만나러 가는데 에이전트 엉덩이가 무거워서 되겠습니까?”
“하하하! 양 선수라면 알아주실 줄 알았습니다. 그럼 이번 주 금요일 시간 되시는 걸로 알고…… 이 군, 계약서.”
“예, 대표님.”
뒤에 대기하던 비서가 브리프 케이스에서 후원 계약서를 꺼내 탁자에 깔았다.
“읽어 보시죠. 약속을 지켜 주시는 동안에는 매달 같은 액수의 후원금이 나갈 겁니다.”
“……헙!”
일회성의 후원이 아니었단 말인가! 그 정도의 금액이 매달 들어온다고?
양진수는 놀라서 들었던 펜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손을 떨지 않고 사인을 하기 위해 그는 선수 시절 가장 격렬했던 이사만루의 기억까지 꺼내 와야만 했다.
서명이 계약서 절반을 넘어섰을 무렵이었다.
“그러고 보니, 양 선수도 자식이 있으셨죠? 이제 고등학생 아닙니까?”
그의 손이 순간 멈춰 섰다. 눈치채기도 힘들 정도로 아주 잠깐이었다.
“예? 아…… 예. 그렇습니다. 근처 대원고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그거 공교롭네요. 제가 부탁드린 장 선수도 대원고교를…… 음. 그럼 아드님과 같은 야구부인 거 아닙니까? 재밌네요.”
“……아뇨. 제 아들은 야구 별로 안 좋아합니다.”
“그렇습니까? 의외네요. 양 선수 아드님이라면 분명 재능이 출중할 것 같습니다만.”
양진수가 사인을 마치고 만년필 뚜껑을 돌려 닫았다.
느리게. 마치 아직 못 쓴 것이 있다는 듯 미련이 남은 손짓으로. 그러나 손은 머뭇거림 없이 꾸준했고 결국 뚜껑을 완전히 밀봉해 버렸다.
그 뒤에 그가 중얼거린 것은, 어쩌면 말이라기보다 잉크가 번진 흔적 같았다.
“글쎄요…… 제 아들들은…….”
그는 어색하게 웃었다.
“일종의 너클볼이죠. 음, 그래요. 너클볼. 도무지 기대대로 되지가 않아…….”
* * *
그런 날들이 있었다.
어릴 적, 쌍둥이는 어떤 일로도 싸웠다.
똑같은 얼굴에 똑같은 목소리, 행동거지까지 같았던 둘은 서로에게서 두 배의 자기애를 발견하진 못했다.
정확히 반대.
어렸을 때부터 무엇이든 똑같이 갈라 써야 했던 둘은 자유 시장 원리에 의거해 이렇게 판단했다.
저놈이 내 몫을 빼앗아 가고 있어. 이놈만 제치면 난 조금 더 얻을 수 있을 거야.
요컨대 그 숱한 싸움의 본질은 영역분쟁이었다.
그래서 어떤 싸움이든 그 끝은 같은 주제로 수렴했다.
어느 쪽이 형인가.
그 당시 그들에게 형이란 동생에게 으스댈 권리를 자동으로 선취하는 벼슬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분투했다. 형이 되기 위해서. 푸시 업과 구구단 대결을 넘어 오줌 줄기의 거리까지 견주며 서로를 넘어서고자 경주했다.
그러다 과열되어 주먹과 발차기가 동원되면, 그때는 어김없이 어머니가 등장하여 등짝 스매시로 분쟁을 종결시켰다. 짧은 휴전이었다.
-그래서 누가 형이야?
결국 형제가 한 입이 되어 물으면, 어머니는 늘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시며 이렇게 말하셨다.
-엄마랑 산책 갈까?
그녀는 양손에 형제의 손을 각각 쥐었다.
향기롭게 웃으며 형제의 짧은 보폭에 맞춰 걸었다.
느린 아이를 북돋고 빠른 아이를 달랬다. 그 순간 셋은 분명 하나였다. 그리고 가운데 선 어머니는 서로의 나쁜 것을 걸러내는 필터였다.
-자, 아빠 하는 거 봤지? 우리도 한 번 해 볼까?
산책 도중, 두 형제와 어미는 캐치볼을 하곤 했다.
동명이 엄마한테, 엄마가 해명한테, 해명이 동명에게. 서로 떨어져 있어도 예쁜 삼각형이 셋을 이었다.
어머니는 체력이 약해서 가장 먼저 나가떨어지곤 했다.
그럼 이제 동명과 해명이 나란히 공을 나누는 것이다. 분쟁은 잠시 잊혔다. 고른 땅에 눈높이를 맞춘 둘은 더 이상 누가 형인지를 묻지 않았다. 그저 오가는 공만이 있었다.
그랬다.
어머니는 자신이 없을 때를 대비하여 두 형제에게 야구공을 주었다.
-동명이가 투수를 해라.
그러나 아버지가 그렇게 선고하고 난 뒤에는 둘의 눈높이에 차이가 생겼다.
던지는 자와 받는 자가 정해졌다. 포수는 늘 몸을 낮춰 앉아야만 했다. 캐치볼에 위계가 생겼다. 적어도 아버지는 정확히 그런 의미로 말했다.
-왜 나만 포수를 해야 해?
그 말에 어머니는 슬프게 웃었다.
-그건 나쁜 게 아니야. 해명이가 더 잘 받으니까, 그 일을 더 잘하도록 역할을 맡긴 거지. 해명이, 잘할 수 있지?
-응…….
물론 이제 커서는 안다.
그것이 임시방편의 변명이었다는 걸.
아버지는 그저 자신의 재능에 주목했을 뿐이었다. 심플하게 있는 쪽과 없는 쪽을 구분했다.
하지만 알 만큼 알게 된 지금도 여전히 형제는 구애받고 있다.
그때 아비가 정해 놓은 역할 구분에.
그것이 진저리칠 만큼 싫어서, 뒤에 남겨진 해명이에게 미안해서, 이러고도 아비의 기대조차 충족하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해서, 다 그만두고 싶어졌었다.
도망치려 했다.
너도 할 수 있다고 말해 준 친구가 없었다면 더 일찍 그렇게 했겠지.
이젠 아무래도 좋은 일이지만.
‘……그렇게 도망치고, 결국 도착한 곳이 여긴가.’
부활동도 건너뛰고, 자신은 그 옛날, 셋이서 캐치볼을 하던 그 공원에 나와 있었다.
그랬다.
그런 날들이 여기 있었다.
공을 던지면 모든 게 순순히 괜찮아졌던, 그런 날들이.
이제는 더 이상 아니다. 공을 던지면 던질수록 괴로워질 뿐이었다. 어째서 이 악순환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가. 언제까지.
“멀리도 왔다.”
“우아아앗……!”
그때 누군가 자신의 옆에 털썩 앉았다.
깜짝 놀라서 벤치 밑으로 굴러 떨어지니, 잘생긴 얼굴이 한심하다는 듯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 한열이? 어, 어떻게 여기를?”
“찾으려니까 찾아지던데.”
“왜, 왜 온 건대! 해명이 통해서 다 얘기했잖아! 너한테는 미안하지만, 나는 더 이상……!”
“아 시끄러워. 그런 건 이제 아무래도 좋아.”
“……응?”
한열이 손바닥으로 벤치를 툭툭 두드렸다. 옆에 앉으라는 뜻. 동명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바지를 털고 그 옆에 앉았다.
“그, 그럼 왜 왔어? 나 설득하러 온 거 아니야?”
“아닌데. 설득은 무슨. 그런 건 포기했어.”
“어어? 그래? 어, 고마워. 그, 근데 그럼…….”
근데 뭔가 돌아가는 분위기가 묘하다.
한열이 두툼한 가죽 파우치를 꺼내어 촤악 펼치니, 그 안에서 앰플과 두터운 주사기가 등장하는 게 아닌가.
주사기에 약물을 채우고 침을 점검하는 일련의 과정이 거의 숙련의에 필적했다.
“그, 그건 대체…….”
“응. 지금부터 내가 널 납치할 거거든.”
“으으응?!”
이한열이 양동명의 목덜미에 마취제를 문답무용으로 꽂아 넣었다.
정신을 잃기까지 걸린 시간은 5초를 넘지 않았다.
“천국에서 보자고, 친구.”
* * *
수술 이후 점점 기량이 하락하면서 아버지는 점점 거칠어졌다.
술에 취해 오는 날이 늘었다. 하루는 취해서 이웃과 주먹다짐까지 했다. 퇴물이라 조롱당했다고 주장했지만 근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뉴스에 크게 올랐다.
이젠 술병을 들고 다니기 시작했다.
이혼 서류의 도장을 찍던 그날에도 아버지는 여전히 취해 있었다.
-동명아, 이제 너밖에 없다. 너밖에. 너만은 잘되어야 해. 너만은……! 네가 잘되어야……!
잘 던지니까 나를 데려온 건가요.
그럼 잘 못 던지는 나는 필요가 없는 건가요. 그럼 당신에게 나는 양동명인 건가요, 아님 그냥 투수인 건가요.
아버지.
하지만 전 그걸 묻기가 늘 두려웠어요.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 몰랐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공을 잘 던질 수가 없게 됐습니다. 공을 던질 때마다 내 안의 양동명을 한 조각씩 던지는 것 같았으니까요.
그럼에도 저는 계속 던졌습니다.
미련하게도.
던지고 있으면 어쩌면, 그 옛날에 그랬듯이, 모든 게 다 괜찮아질지도 모른다고, 그런 헛된 꿈을 꾸면서, 계속해서, 꾸역꾸역, 던졌습니다.
-미안해, 엄마가 다 미안해. 동명아…… 그래도 나는…….
어머니.
자주 보자고 하셨잖아요.
근데 왜 1년 만에 연락이 끊겼나요.
왜 내가 아니라 해명이었나요. 내가 해명이보다 덜 살갑고, 얘기도 재밌게 못하고, 반찬도 더 잘 가려서 그랬나요.
하지만 전화기 키패드에 손가락을 얹고도 저는 끝내 당신에게 전화를 걸지 못했습니다.
그래요.
무서웠거든요.
네가 덜 사랑스러워서 널 두고 왔다고, 그러니까 더 귀찮게 하지 말라고, 당신의 입으로 듣는 게 저는 두려웠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디로 가야 하나요. 왜 저는 이렇게 생겨 먹은 걸까요. 제가 좀 더 나은 사람이었다면 우리는…….
꿈결 속, 질문들이 되새김되다 못해 결국 진물이 되어 버렸을 즈음-.
-어디 멀리선가, 바닷소리가 아스라이 밀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