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능이 자꾸 늘어-126화 (126/164)

<재능이 자꾸 늘어 126화>

13. 너희들의 앞에서 - 16

눈을 뜨자마자 보인 건 수직으로 내리지른 일직선이었다.

세상이 세로로 갈라져 있고, 짙은 파란색이 선을 기점으로 여과된 듯 엷은 하늘색이 되었다.

멍한 두뇌가 이 묘한 광경을 해석해 내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양동명은 자신이 모로 누워 있으며, 세로선은 사실 가로선이었고, 저 하늘색은 본래도 하늘의 색이었다는 기막힌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몸을 일으켜 선을 원래 위치로 되돌렸다. 수직선이 수평선이 되었다.

바다였다.

자신은 텅 빈 해변에 방치돼 있었다.

정신을 잃기 전의 마지막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내가 널 납치할 거거든.’ 전후가 너무 엉망진창이라 그때가 꿈인지 지금이 꿈인지, 아니면 둘 다 꿈인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어쨌든 현실감은 없었다.

그는 길 잃은 아이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파도가 끝없이 해변에 치대고, 해변은 새침한 소녀처럼 파도를 밀어냈다. 태초부터 이어져왔을 압도적인 스케일의 밀당이었다. 그 사랑이 언젠가는 이루어지길 응원하려다 중간에 취소했다. 생각해 보니, 사랑이 이루어지면 그대로 쓰나미다. 참으로 죄송하지만 인류의 안녕을 위해 영원히 차여 주시길…….

그런 실없는 생각과, 끝없는 해수면, 하늘에 얼룩처럼 얹힌 뭉게구름, 차갑게 볼을 때리는 바닷바람과 함께, 양동명은 모래를 밟고 또 밟았다. 이건 다 꿈이므로 딱히 목적이 없어도 되리라. 야구도. 가족도. 다 잊고 그저 걸어도 될 것이다.

본인도 몰랐지만, 그러나 사실 그는 몸에 익은 대로 걷고 있었다.

아주 오랜만이라 깨닫지 못할 뿐.

그들은 그곳에 꼭 같은 발자국을 찍곤 했다.

시간이 지나 작은 발이 커지고, 파도의 꾸준한 구애활동 탓에 그 모든 흔적은 뭉개져 바다로 흘러갔으나, 함께 들었던 그 바닷소리만큼은 여상하여 그를 익숙한 장소로 이끌었다.

그리고 ‘그것’은,

물기와 염분의 거친 텃세를 견디며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

철근과 석재로 만들어진, 자연 속에 생뚱맞게 돋은 인공물. 그저 못생긴 돌덩이를 허공에 고정시킨 듯 보이나, 자세히 보면 작고 큰 두 손이 맞잡고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음. 음?”

파란 뭔가가 석상 주변을 나풀나풀 돌아다니고 있다.

거기 파란 것 중에 가장 자그마하여, 마치 하늘의 조각이 떨어져 나와 수평선을 침범하고 해변에 불시착한 듯 보였다.

뭘까, 저 장면은.

동명은 눈을 비비고 눈가를 가늘게 좁혔다.

다시 보니, 사람이다.

다만 하늘에서 뚝 떼어 온 색감으로 원단을 짜서 원피스를 만들어 입은 듯했다.

여인은 바다와 하늘, 해변의 경계를 무마하려는 듯, 촐랑촐랑 뛰어다니며 자신의 색을 곳곳에 묻혔다. 아름답다. 더하여 가까이서 그녀를 확인한 순간, 아, 이건 꿈인 게 확실하다고, 그는 경이로움 속에서 확신했다.

장면만 묘사하자면, 어떤 여인이 카메라를 들고 열심히 석상을 찍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동명에게 그것은 오랜 사진첩 속에서 조우한, 그러나 이제는 분실해 버린 천진함처럼 보였다.

“어? 사람이 있었네?”

여인이 동명을 발견하고 종종 다가왔다.

“얘! 나 이거랑 같이 찍어 주면 안 되니?”

“예, 예?”

“응? 찍어 주라. 나 혼자서는 잘 못 찍는단 말이야.”

“어, 예. 예.”

얼떨결에 카메라를 받아드니 그녀가 진하게 웃는다.

“아이 고마워라. 착한 아이네. 나 포즈 잡고 신호 보낼 테니까, 그때 찰칵. 알았지?”

“……예.”

그녀는 자신의 발자국을 그대로 되밟아 석상 옆으로 돌아갔다. 그러더니 팔을 활짝 벌리며 뛰는 것이다. 폴짝.

“지금!”

“……!!”

찰칵!

찍긴 했지만 절묘한 타이밍이라 말하긴 힘들었다.

“아이 참. 늦었잖니. 한 번 더!”

여인도 볼을 부풀리며 추가 주문을 했다. 동명은 반사적으로 긴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찰칵.

찰칵.

지난한 촬영이었다. 필름 카메라라 결과물을 확인할 수도 없었으므로 여인은 몇 번이고 뛰고 뛰었다.

나풀대는 원피스는 푸르게 착색된 바람 같았다.

잘 찍혔을지는 모르겠지만, 필름에는 몰라도 동명의 망막에는 확실히 새겨졌다.

“후아후아. 힘들다아-. 앗, 고마워! 혹시 바빴었니? 내가 귀찮게 한 건 아니었어?”

“……아니요. 괜찮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래? 다행이네. 음, 고마운데 딱히 줄 건 없고, 그럼 이 누나랑 데이트할 기회를 줄까? 자랑스럽게 생각해. 우리 학교에선 천금을 주고도 못 사는 거라고?”

“네, 그럴 거 같네요.”

“……어. 장난이었는데 그렇게 정색하고 말하니까 부끄럽잖니.”

여인은 귀밑머리를 긁적이다, 짓궂은 표정을 하며 동명의 손목을 붙들었다. 지그시 잡아끌며 그녀가 말했다.

“가자. 관광 온 거지? 너 나 잘 만난 거야. 이 근처에 아는 사람만 아는 절경이 있거든. 오늘 내가 특별히 투어 시켜 줄게.”

“……여기 토박이이신가 봐요.”

“그럼. 내가 여기서 20년을 산 거 아니니. 지금은 대학 때문에 잠깐 상경해 있지만, 아직도 이 근방은 눈 감고도 훤해요. 있지있지. 근데 말이야…….”

여인은 말이 참 많았다.

묻지도 않은 걸 줄줄 말하고 틈만 나면 논점을 이탈했다. 동명은 대화의 참여자라기보다 말려든 구경꾼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녀는 구경꾼을 만족시킬 화술과 듣기 좋은 목소리를 가졌다.

물론 그 모든 게 없었더라도 동명은 즐겁게 여인의 말을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왔는데 저런 게 있는 거 있지? 세상에. 깜짝 놀랐지 뭐야. 내가 평소에 고민해 온 주제가, 정확히 내 취향으로, 생각지도 못한 비례감과 조형으로 표현돼 있는 거야.”

“그랬나요?”

“응응. 그랬다니까. 집에 돌아가면 유모한테 물어봐야겠어. 어떤 대단한 예술가가 언제 저런 걸 만들었는지. 근데 이상하네. 이런 사건이 있었다면 내가 몰랐을 리가 없을 텐데. 하여튼 그래서 말이야…….”

그녀는 조잘조잘 말하면서도 발로는 약속했던 명소로 착실히 안내했다.

“여긴 참바위손이라는 이름의 언덕인데, 내가 생각할 땐 손보단 엉덩이처럼 생겼단 말이야. 잘 봐. 둔덕이 양 쪽으로 예쁜 비례를 그리면서…….”

“여긴 용천혈이야. 여기 구멍 뚫린 곳에서 지하수가 송송 나오는 거지. 바닷물처럼 보이지만, 사실 먹어도 괜찮은 물이야. 어디 한번 쭉 들이켜 봐. 어잇, 날 못 믿어? 여기 동네 사람들은 다 마신다니까?”

“꺄하핫! 마시라고 진짜로 마시니?! 너 참 순진하구나? 응응. 걱정 마. 내가 네 시체는 잘 수습해서 고향에 보내 줄게. 에에, 그러니까 당신은 한 식경 내로 손끝이 마비될 것이고…….”

“여긴 진짜 아는 사람만 아는 곳이지. 탁 트인 거 같은데, 해변에서 보면 절벽에 절묘하게 가려져 있거든. 그래서 불끈불끈한 커플들이 급한 대로……. 흠흠. 차회 감상에는 별도 결제가 필요합니다.”

발을 옮길수록, 점점 기억이 시간의 두께를 뚫고 머리를 내었다.

다 와봤던 곳이다.

그리고 여인의 설명 또한 비슷한 버전으로 들어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동명은 내색하지 않고 그녀의 가이드를 만끽했다. 옛 추억에 불시착한 이 소중한 순간을 불필요한 말로 흩뜨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끝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둘이 만나 떠나왔던 해변, 두 손이 맞잡은 조형의 석상 아래로 돌아왔을 때, 그녀는 사진 값은 다 했다는 듯 안녕을 고했다.

“자, 여기까지. 어때? 꽤 재밌었지?”

“……예.”

“어이어이. 그런 얼굴 하지 말라구. 이 누나가 엄청 미인이긴 하지만 말이야, 이미 임자가 있으니까 깔끔히 포기해! 그리고 난 연상취향이거든?”

“으엑. 그런 거 아닌데요.”

“아까도 그렇고, 그렇게까지 정색하면 민망하다니까.”

그녀가 깔깔 웃었다.

뭔가 한마디라도 더 하고 싶은 마음에, 동명은 석상을 올려다보면서 물었다.

“……이 석상은 그럼 무슨 의미가 있는 건가요?”

“응? 원작자가 아니니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내 해석대로라면 부모와 자식의 두 손을 뜻하는 걸 거야. 적어도 그런 메타포를 의도했겠지.”

“…….”

듣고 보니, 두 손은 크기에 각각 차이가 있었다. 큰 손이 작은 손을 감싸 쥐는 형태다.

“나는 어머니가 없고 아버지가 엄한 가정에서 자랐거든. 거의 유모 손에 컸지. 그런데 말이야, 이상하게 아주 어렸을 때 엄마 손 잡고 산책한 추억만큼은 있어. 기억은 흐릿해서 남은 건 온기 정도지만, 그 따듯함만큼은 분명했으니까, 응, 그래서 오랫동안 내게 엄마란 온기 그 자체였어.”

여인이 석상을 가볍게 쓸어 만졌다.

“이 석상도 봐. 다른 형태는 겨우 손이란 걸 알아챌 만큼 불분명하지만, 두 손이 맞닿는 부분은 온도의 등고선을 그린 것처럼 단계적으로 분명해지잖아. 그런 거지. 기억이 아무리 흐려져도 우린 부모의 손을 잊지 못하는 거야. 부모도 마찬가지고.”

“……부모도, 자식을 기억할까요? 기억해 줄까요?”

의도한 질문은 아니었다. 발작처럼 터져 나온 말에 가까웠다. 그러나 동명은 자신에게 놀라지도, 그 질문으로부터 도피하지도 않았다.

그저 곧게 여인을 바라봤다.

여인은 함박웃음으로 먼저 대답해 주었다. 말은 그다음이었다.

“당연하지. 아니, 당연히 그러리라고 난 믿어.”

“……전 모르겠어요. 아니, 모르게 됐어요. 세상이 합심해서 제 눈을 가리고 있는 것 같아요.”

동명이 입술을 깨물었다.

“전 왜 이렇죠? 왜 재능이 없죠? 제가 더 사랑스러웠다면……. 엄마는 날 봐줬을 건가요? 내가 뭘 잘못한 걸까요?”

“…….”

“전…… 아들이 될 자격이 없는 건가요?”

“아니야.”

그러자 여인이 예고 없이 불쑥 거리를 좁혀 왔다.

그리고 팔을 뻗어 동명의 오른손을 감싸 쥐었다.

여자 치고도 작은 손, 남자 치고도 큰 손, 그래서 두 손으로도 여백이 한참 남았지만, 어쩐지 빈 구석구석마다 그녀의 말이 가닿아, 기어이 스며드는 듯하였다.

“사랑받는데 자격 같은 건 없어.”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믿을 수 없다고. 증거를 달라고. 말로는 너무 많이 배신당했다고. 이젠 지쳐버린 심장을 설득할 근거가 필요하다고. 그는 호소하지 못했다.

단지

손에 닿아 있는 손만이-

“아가씨!!”

목소리가 돌연 사이에 끼어든다.

그러자 여인이 반색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 시선 끝에선 어느 노파가 장치마를 추어들고 깨금발로 뛰어 오고 있었다.

“유모!”

“아이고 아가씨이-! 언제 나가셨어! 위험하게. 내가 속 터지는 꼴을 봐야……!!”

“어머나, 유모! 못 본 사이에 왜 이렇게 늙었어? 5년 만에 팍삭 삭았네! 아빠가 또 못살게 굴었어? 응?”

“5년 만은 무슨…… 아침에 봤으면서. 에고, 오늘은 또 대학시절……. 응? 어머. 해명 도련님 아니세요?”

노파가 동명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뜬다. 동명은 난처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 일이세요? 이번 주는 중요한 경기가 있어서 못 내려오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어쩌다 보니까요.”

“그래요? 연락이라도 하시고 오시지. 그럼 저녁은 드시고 올라가실 거죠? 아이고, 근데 오늘 찬거리가 마땅치 않은데…….”

“아뇨. 괜찮아요. 금방 올라갈 겁니다.”

이젠 여인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둘을 돌아본다.

“응? 둘이 아는 사이야? 이야, 이런 우연이? 근데 학생, 넌 이름이 뭐…….”

“예예, 아는 사이고말고요. 일단 들어가시자고요, 아가씨.”

“아이 참. 유모는 뭐가 그렇게 급해? 진짜 옛날하고 하나도 안 변했다니까…….”

노파가 여인의 등을 떠밀면서 동명에게 눈짓을 해 보였다. 동명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유모와 여인이 모래사장을 밟으며 해변으로부터 멀어졌다.

역시,

끝까지 못 알아보는구나.

한열이 어머니를 소개해 달라 부탁했을 때, 동명은 두려우면서도 더 물러설 데가 없다고 각오를 다졌다. 어쩌면 반겼을지도 모른다. 괜찮은 구실이라고 내심 여겼을지도.

그러나 막상 통화가 연결됐을 때,

들려온 대답은 그의 공포를 직격으로 건드리고도 남음이 있었다.

-응? 근데 너는 누구니? 왜 날 엄마라고 불러?

바로 전화를 끊었다.

심장이 끊어질 듯이 뛰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서 있을 수도 없었다. 다음 날, 해명에게 자초지종을 물었을 때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해 주었다.

-결국 이렇게 됐네. 꽤 된 일이야. 아니, 이혼하자마자 거의 바로였지.

알츠하이머.

그녀처럼 젊은 나이에 발병하는 일은 드물었지만 아예 없는 일도 아니었다. 외가에 치매 병증이 종종 있었음을 생각하면 유전이라고 봐야겠지. 이젠 자신도 알아보지 못한다고 했다.

-유모님 말 들어 보니, 요즘은 자기가 만든 작품 보고 스스로 감탄하고 있단다. 누가 이런 대단한 걸 만들었냐며. 이게 자뻑인지 뭔지…….

-어쨌든 이왕 이렇게 된 거 협조해라. 어머니 병증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어.

해명은 그에게 거래를 제안해 왔다.

-내가 아버지 눈에만 들면, 우리 가족이 다시 합치는 것도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거야. 아버지도 요즘 재기하고 계시다 하니, 옛날 같은 실수는 안 하시겠지. 어머니에게 옛날의 가족을 다시 선물해 드리고 싶어. 아주 늦어 버리기 전에. 그러니 부탁이다, 동명아. 제발 내 앞을 막지 말아줘.

그러자고 했다.

제대로 굴러가지 않은 두뇌가 반사적으로 내놓은 대답이었다.

차분히 생각했다면 다르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해명의 계획이 성공 가능성이 있는가. 그 선택의 저변에는 열등감과 박탈감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다시 합친다고 어머니가 과연 반길 것인가.

기타 등등.

그러나 악몽이 현실에 갈마들었을 때의 그 충격은 동명의 멘탈은 물론이고 용기까지 박살 냈다. 해명의 성공가능성 희박한 계획에 의존해 버릴 만큼.

“도련님!”

유모님이 어느덧 돌아와, 멍하니 서 있는 동명의 손에 따듯한 종이봉투 하나를 쥐여 준다.

“떡 좀 구워서 넣었어요. 올라가면서 드세요. 다음에 내려오실 땐 꼭 연락 주시고요. 아셨죠?”

“……예. 알겠어요 유모님. 감사해요.”

“네, 도련님. 그럼 조심해서 올라가세요.”

“…….”

허리를 숙이는 유모에게 동명은 또 불쑥 물었다.

“유모님.”

“예?”

“……그, 제 동생 있잖아요. 동명이.”

“아, 작은 도련님이요? 예. 그분이 왜요?”

“……어머님은 왜 동명이한테…… 병을 알리지 않으셨던 거죠? 중간중간 제 정신으로 돌아오시고는 했었을 텐데.”

“어머, 알고 계시지 않으셨어요? 저는 분명…….”

“혹시 감추는 일이 또 있을까 싶어서요.”

유모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말을 잇는다.

“글쎄요. 저한테는 그냥, 방해하고 싶지 않다고.”

“……방해.”

“예, 동명이는 공을 던졌을 때 가장 즐거워 보인다고. 한창 중요한 시기일 텐데, 어미 생각한답시고 주저앉는 꼴을 볼 수는 없다고……. 어머, 도련님 왜 그러세요?”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오늘 도련님은 좀…… 이상하시네요.”

그때 저 멀리서, 우렁찬 기적소리 같은 외침이 들려왔다.

“얘!!”

언덕 위였다.

어머니가 한 손으로는 모자를 눌러 앉히고, 한 손은 입가에 대어 소리를 받치며, 목청을 높게, 높게 빼어 냈다.

“너 손 참 따듯하더라! 잘 있어!!”

“아이고! 이 아가씨가 위험하게 또 어딜 올라가셨어!”

유모가 소리를 버럭 지르며 쫓자 그녀는 까르륵 웃으며 도망쳤다.

둘이 바람처럼 사라지고도 동명은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었다.

그녀가 남긴 목소리는 바닷바람에 섞여 더 오래 주변을 떠다녔다. 잘 있어. 잘 있어……. 동명은 가능한 넓게 소리의 질감에 몸을 문대고, 가능한 길게 흩어지는 잔향들을 주워 담았다.

물기가 시야를 물들였다.

결국 당신도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뭐가 방해입니까. 뭐가 즐거워 보였다는 겁니까. 당신이 떠나고 내겐 아무것도 남지 않았는데.

그래요.

난 당신의 온기를 기억하고 싶었으니까 공을 계속 던졌던 겁니다. 당신이 건네준 야구공의 따듯함이 거기에도 있을까 싶어서.

양동명은 결국 주저앉았다.

그녀가 쥐어 준 손을 품 안에 감싸 안고. 그 온기가 어딘가로 빠져나갈 새라. 더없이 소중하게.

***

멀리 발자국을 길게 뒤로 남기며 양동명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쩌면 저 발자국들은 그가 거기 두고 온 미련들일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가 내 앞에 섰다.

한없이 곧은 시선을 내게 던지면서.

“이 선생님, 저 야구가 하고 싶습니다.”

난 피식 웃었다.

“그 말은 울면서 해야 되는 거 아니냐? 앞니 하나 정도는 빼고.”

“울기는 아까 한참 울었으니까 퉁 치자. 앞니는…… 꼭 빼야 돼?”

눈가가 벌겋게 부은 주제에 그는 멋들어지게 웃고 있었다. 지금까지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얼굴이었다. 난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올라가자고. 다 박살 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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