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능이 자꾸 늘어-127화 (127/164)

<재능이 자꾸 늘어 127화>

13. 너희들의 앞에서 - 17

* * *

이한승 코치는 로커 룸이 이상하게 더 넓어 보인다고 느꼈다.

말도 안 되는.

로커 룸은 늘 비좁았고 야구부 놈들은 본업이 야구인지 헬스인지 근육을 주렁주렁 매달고 다녔다.

덩어리와 더 큰 덩어리들이 눈앞을 꾸역꾸역 메우는데 뭐가 넓다는 건가. 슬슬 노안인가. 원근감이 박살 났는가. 쟤네가 단체로 근손실이 왔을 리는 없고. 흠-.

“……너네도 알다시피, 자하 고교는 꾸준하게 본선에 진출한 지역의 강자다. 어렵게 섭외한 연습 게임이니까 긴장들 하고. 더하여, 내일은 귀하신 분들도 올 거다.”

이한승은 구석에 시선을 돌린다.

거기엔 한 선수가 기둥에 비스듬히 기대 서 있었다.

날카로운 눈과 부드러운 입매가 한 얼굴 안에 다소 경쟁적으로 공존해 있다. 한 성깔할 거 같은 도련님의 이미지다.

“……기자들은 물론 스카우터들도 꽤 들를 거다. 이사회에서도 사람을 보내온다고 했고. 이런 기회 없으니까 다들 마음 단단히 먹고. 건투한다면 어쩌면 좋은 소식이 올 수도 있겠지. 다 경진이 덕분이니까 다들 고맙다고 한마디씩 하고.”

부원들의 시선이 구석을 향하지만,

그 눈빛들은 결코 달갑지 않다.

혼자 호리호리하여 주변의 덩어리에 포위된 모양새였지만 장경진은 위축된 기색 없이 여유로웠다.

그런 척하는 게 아니다. 그는 진심으로 아랑곳 않았다.

자신은 외따로 방치된 섬이 아니라 하늘에 뜬 태양이었다. 하계의 잡것들이 눈부셔 하고 더위에 짜증도 내겠지만 그걸 어쩌겠는가. 원래 그런 것을.

불평하거나 설득할 일이 아니고 그저 자연의 원리로서 납득해야만 했다.

그렇다. 이 몸이 너희들을 납득해 주마.

그런 눈빛을 되돌려 받은 야구부원들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썩어 갔다.

‘……정말 자신만만하군.’

그럴만하다고 이한승은 생각했다.

기자들과 스카우터들이 대회도 아니고 연습 경기를, 그것도 특기가 예선 탈락인 약체 팀을 보러 올 이유가 뭐겠는가.

장경진의 본가의 눈치를 본 것이다.

CC전자의 입김 아래에 있는 언론사, 선수 몸값 올리기의 달인인 스카우터들이, ‘숙제’를 받고 장경진을 띄워 줄 목적으로 작업 오는 것.

그것이 이 사태의 본질이다. 어쩌면 자하고교 측에도 승부 조작 청탁이 들어갔을지도 모르겠다.

아마 그런 일을 하는데 별 거리낌도 없겠지.

저놈은 스포츠맨이 아니라 자기애에 취한 꼬마에 불과하니까.

놈에겐 이 모든 게 장식이겠지. 장신구는 적절한 곳에 예쁘게 배치되면 그만이므로, 그저 그렇게 했을 뿐이다.

자신을 넘어 오만. 오만을 넘어 셀프 세뇌의 경지다. 자신만만하지 않을 도리가 없지.

“이번 연습 경기가 만족스러우면, 아버님께서 이 좁아터진 방도 틔워 준다고 하시더군. 그러니까 너희들도 분발하도록. 적어도 내 발목을 잡지는 말라는 소리다.”

부원들은 한숨만 쉬었다. 이런 말 정도는 이제 내성이 생겨서 발끈하지도 않았다.

근처의 양해명만이 눈을 감고 팔짱을 낀 채로 미동도 없었다.

“그럼 내일은…….”

그때였다.

이한승의 말문을 지연시키며 문이 덜컥 열렸다.

실내로 들어오는 두 얼굴을 보며 그는 오늘 로커 룸이 왜 넓어 보였는지 깨달았다. 필요한 조각이 빠졌으니 빈 느낌이 들 수밖에.

“죄송합니다. 좀 늦었습니다.”

양동명과 이한열이 차례로 들어와 자리에 앉는다. 이한승 코치는 동명과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이제야 온 거냐?”

“예.”

흔들림 없는 대답.

올곧은 눈빛.

뭔가가 달라졌구나.

저놈이 저런 눈을 한 게 얼마 만인가…….

이한승은 아주 오래전을 떠올렸다.

중등부 야구부를 맡았던 시절. 당시 중1이었던 양동명은 ‘전설 양진수의 재림’이라는 찬사를 들으며 화려하게 마운드 데뷔를 했다.

중등부 클래스를 아득히 넘어서는 묵직한 패스트 볼.

‘저격수’라는 부친의 이명에 걸맞은 정밀 제구.

수준 높은 수 싸움과 심리전 구사 능력.

당시 적으로 만났던 양동명은 이미 완성된 선수였다. 아마 나이만 찼으면 유수의 프로 구단들이 제쳐 놓고 모셔가려 했겠지.

그러나 양동명은 데뷔 몇 개월 만에 급격히 기량이 하락하며 유망주 자리에서 탈락했다. 그리고 모두의 기억에서 빠르게 잊혔다.

얼마 전까진 이한승도 잊고 있었다.

대원고교에서 그를 다시 보기 전까지는.

-아버지가 공부나 하라고 하시더라고요.

과거의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기계적으로 해 왔을 말이겠지.

그러나, 변명을 버릇처럼 뱉으면서도 그는 기어코 야구부를 찾아왔다. 어쨌든 공을 던지고 싶어 했다.

그때 자신은 뭐라고 했던가……. 아마, 이렇게 말해 줬던 것 같다.

“그래, 잘 왔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그 정도밖에 없으니까.

이한승은 준비된 선수 명단을 뒤로 치우고는, 준비되지 않은 말을 꺼냈다.

“내일 선발은 장경진이다. 그리고 동명이가 셋업맨을 맡아라.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했겠지?”

왜 굳이 둘을 한 시합, 한 마운드에 세우는가.

내일은 팀의 연습 경기임과 동시에, 두 투수 중 팀의 에이스를 선별하는 테스트가 될 거라고, 이한승 코치는 선언한 것이었다.

반응은 상이했다.

“예.”

“하.”

먼저 반응은 동명, 그다음은 경진의 것이었다.

장경진이 비릿하게 웃었다. 같은 선상에서 비교되는 게 불쾌하다는 태도였다.

“안 그래도 좁은 집구석인데 자리를 두고 싸울 거 있나요. 그냥 둘 다 선발 시켜 주세요. 얘 한때 잘 나갔다면서요? 2선발 정도는 맡겨도 되겠죠.”

“…….”

연속적인 시합을 소화해야 하는 구단에서는 당연히 선발 선수를 다수 둔다. 1선발이 아니라는 게 불명예가 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이곳은 대원 고교 야구부.

예선만 봤다 하면 광탈이므로 2선발이 활약할 역사 자체가 없는 최약체다. 자연히 대원고교의 선발은 대대로 한 명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동명을 2선발로 두자는 장경진의 제안은 정확히 이렇게 들렸다.

-넌 그냥 계속 던지지 마. 겁쟁이.

그러나 이한승은 잘라 내듯 말했다.

“그만. 결정에 번복은 없다. 내일 마운드에는 경진이와 동명이가 번갈아 올라간다. 오늘 전달 사항은 이걸로 끝이다.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푹 쉬도록.”

* * *

“양동명!”

양해명의 목소리가 복도를 쩌렁쩌렁 메웠다.

바닥을 바스러뜨릴 기세로 쿵쿵 다가온다.

놔두면 그대로 드잡이를 할 것 같아서 녀석의 팔을 잡아챘다. 놈이 날 노려보며 안간힘을 썼지만, 뭐, 힘 좀 써 봐야 인간이지.

난 귀를 파면서 먼 하늘에 시선을 두었다. 오늘따라 구름이 프랙탈 구조를 이루고 있구나.

동명은 적절한 거리를 둔 채 해명과 마주 보았다.

“……너, 약속했잖아.”

“그랬지. 미안하게 됐다.”

동명은 단호하게 인정했다.

인정만 했을 뿐이다.

그건 무엇도 번복할 생각이 없다는 뜻의 단호함이었다. 양해명이 이를 부득 갈았다.

“……이제 와서 왜 이러는 건데.”

“해명아. 나 병원 갔다가 이제 오는 길이거든?”

“뭐……? 뭔 소리야. 너 어디 아프냐?”

“그런 건 아니고. 뭣 좀 확인할 게 있어서.”

동명이 멋쩍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몇 초만 지체되었어도 해명은 그 병원이 사실 정신 병원이냐는 질문을 꺼냈을 것이다.

그러나 동명이 한 박자 빨리 입을 열었다. 그의 표정은 평생의 미스터리를 풀어낸 사람처럼 후련했다.

“사실 네가 형이 맞더라. 병원 기록 보니까 네가 몇 초 더 일찍 태어난 게 맞대. 하하. 그게 참 뭐라고 그렇게 알고 싶던지.”

“……뭐, 뭐야. 갑자기 뭐라는 거야?”

“그냥. 확실히 해 두고 싶었거든. 딱히 형 소리 듣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니라는 걸.”

“그래서 뭐!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건데!”

“해명아, 근데 말이야. 왜 우리한테 말해 주지 않았던 걸까? 어머니는 다 알고 계셨을 텐데.”

“……그거야.”

해명의 멍한 시선이 동명을 관통했다. 어떻게든 입을 벌렸지만 그 수많은 말들은 결국 가쁜 숨으로만 남았다. 그는 고장 난 시계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거야.”

“난 이제 널 부러워하는 것도, 네게 미안해하는 것도 그만두기로 했다. 넌 어떠냐.”

“…….”

해명은 결국 완전히 입을 밀봉했다. 동명은 그를 한동안 바라보다, 말없이 몸을 돌려 복도를 빠져나갔다.

내가 그의 팔을 푼 순간 그의 멈춰 버린 사고도 작동을 재개한 모양이었다. 양해명이 이젠 날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네가 동명이를 부추겼구나.”

“그래.”

“왜. 그런다고 네가 얻을 게 뭐라고……? 내가 우리 사이에 끼어들지 말라고 했잖아. 그렇게까지 말했는데…….”

난 양해명의 눈을 바라보았다.

수렁에 깊게 얽혀 허우적대는 사람의 눈이었다. 그렇다. 몸부림치다 보니 어쩌다 세상을 할퀴고 마는 아이들. 악의조차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는 가련한 자들이었다.

“야, 아귀 지옥이 왜 무서운지 아냐.”

“……뭐?”

“먹을 걸 찾아다니다 결국 제 살을 먹게 되거든.”

버려진 아이들은 보통 박탈감과 열등감을 동시에 느낀다. 그러나 우연찮게 둘로 태어난 이 쌍둥이 형제는, 버려질 때도 각각의 감정을 갈라 가져갔다.

양동명이 박탈감에 시달렸다면, 양해명은 열등감에 짓눌려 왔을 것이다.

내 눈에는 보인다.

자식에게 자격을 요구하는 아비가. 채찍과 당근으로 훈육했겠지. 기준점을 통과해야만 아들 대접을 해 줬을 것이다.

따라서 이 아이들에게 가족이란 자격 증명을 해야만 발급받을 수 있는 라이선스가 되었다.

양해명은 그 자격증을 얻기 위해 아귀 지옥에 들어간 어린애일 뿐이었다. 난 그의 어리석음을 경멸하지 못했다.

왜냐면 내가 바로 그랬으니까. 양해명은 배윤하를 끌어내리려고 필사적이던 과거의 나였다.

“……뭐라는 거야. 오늘은 단체로 선문답하기로 짜기라도 했나.”

난 픽 웃으며 그를 뒤로했다.

스스로 빠져나올 수 있을까. 힘들겠지. 나도 끌어올려 준 사람들이 없었다면 영원히 거기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난 양동명에게 거는 것이다.

그의 투구가 저들 형제를 얽매는 모든 것을 박살 낼 수 있으리라 믿으면서.

* * *

다음 날.

경기장은 벌써부터 예열을 시작하고 있었다.

“왜들 그렇게 맥 빠진 표정들이야! 치어리더들이 죽상이면 애들이 경기 뛸 힘이 나겠어?”

배윤하가 발발 뛰면서 치어리더들을 닦달했다.

그러나 반쯤 끌려오다시피 한 치어리더 부원들은 힘없이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저 표정들 봐라. 의욕이 거의 예비군에 필적하겠네.

“……아니, 우리 야구부는 응원할 맛이 안 난다고.”

“지는 게 결정되어 있잖아.”

“3회 만에 콜드게임으로 끝난 적도 있었어.”

“그땐 일찍 가서 난 좋았는데.”

“그러니까 의욕과 성적은 어느 정도 비례하는 거지. 우릴 업 되게 만들려면 야구부가 먼저 각성해야 된다고! 우리 탓 하지 마!”

“맞아맞아! 물러나라 배윤하! 야구부의 앞잡이!”

“우우우!”

배윤하는 팔짱을 턱 끼고 가만히 고민하다, 근처에 있는 날 발견하곤 눈을 빛냈다.

뭐야.

왜 다가오는 건데.

그녀는 날 붙들어 치어리더들 앞까지 끌고 가더니, 약장수 텐션으로 입을 털기 시작했다.

“자자! 오늘 힘내서 응원 마치면, 내가 특별히 한열이랑 소개팅 주선한다! 적극성과 예술성을 기준으로 평가하여 선착순 3명까지! 존잘남의 여친 후보가 될 절호의 기회!”

뭐야 이 자식이 날 팔아 먹어?

바로 항의하려 했지만 치어리더들의 소떼 같은 고함이 내 목소리를 무참히 깔아뭉갰다.

“우오와악!! 존잘 열사님이시다!”

“열사님과의 소개팅……! 어, 얼마면 되는데!”

“다 일어나! 전력으로 간다!”

“난 처음부터 일어나 있었다구! 가산점 없나?!”

미친. 언제부터 내 별명이 저따구였어.

배윤하에게 열렬히 항의의 시선을 보냈으나, 그녀는 이 열광적 분위기에 흡족해 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미쳤어. 여긴 다 미쳤다고.

그러나 이제 와서 취소했다간 저 눈 돌아간 처자들에게 산 채로 뜯어먹힐지도 몰랐다. 어쩐지 [역발산기개세]고 뭐고 그냥 내가 질 거 같다. 무서워.

배윤하가 내 옆구리를 툭 치며 킥킥 웃었다.

“오늘은 한 몸 희생하라고! 형제!”

“……그래. 언제부터 내 몸이 내거였냐. 맘대로 써라 써.”

겨우 연습 게임인데 뭔 난리인가 싶지만, 기자들 카메라까지 깔린 판국에 이쯤은 되어야 싶기도 하고. 난 결국 포기했다. 될 대로 되라지.

그때 야구장 한편으로 선수 한 무리가 입장해 왔다.

자하고등학교 야구부의 등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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