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능이 자꾸 늘어-128화 (128/164)

<재능이 자꾸 늘어 128화>

13. 너희들의 앞에서 - 18

자하고등학교 야구부의 등장이었다.

나야 야구에 큰 관심이 없으니 잘 모른다만, 언뜻 듣기로는 올해 청룡기에서 치열한 3파전을 이끌어 낸 강호라고 한다.

우승은 못 했지만 어쨌든 전국구라는 거다. 적어도 중등부와 피 말리는 추격전을 연출하는 대원고 따위와 비빌 클래스는 아니었다.

모르긴 몰라도 연습 경기 섭외하는데 돈 좀 들지 않았을까?

그러나 내 흥미를 끈 건 따로 있었다.

자하고 선수들 사이를 묵묵히 걷는 한 선수. 17 등 번호가 탄탄한 등빨 위에서 꿈틀거렸다.

‘차현수 선수.’

나도 저 사람은 익히 알았다.

지금보다는 미래에 더 유명해지는 사람.

고2 때부터 두각을 드러내며 고교 리그를 씹어 먹고, 그 기세로 청소년 국가대표 팀을 견인하며 세계대회까지 제패하는데 일조한다.

이후로는 바로 미국 진출, 2년 만에 메이저 리그로 콜업 되며 본격적으로 입지전적 신화를 쌓는다.

구체적인 수치까진 관심이 없어 모른다만, 어쨌든 ‘아시아 최초’라는 수식을 가장 많이 쌓은 타자라는 얘기는 주변에서 하도 떠들어 대서 기억하고 있다.

‘아직 푸릇푸릇한 고1이긴 하다만…….’

무르익지 않아도 그 재능 어디 안 간다.

실제로 올해 전국 대회의 호전을 꼽아보면 그 중심에는 늘 저 선수가 있었다.

그럭저럭 괜찮은 팀이라는 자하고의 평가를 단숨에 강력한 우승후보까지 끌어올린 것도 마찬가지로 그다.

이거 잘못하면 오늘의 주역을 뺏길 수도 있겠는데.

‘그러니까 힘내라고, 자식아.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죽 쑤면 3일 동안 매달아 놓을 테다.’

나는 벤치 근처에서 몸을 풀고 있는 양동명의 뒷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물론 내 응원 같은 건 근처에도 도착하지 못했을 것이다. 저곳은 이미 화기 엄금의 주의 구간이 되어 있었다. 작은 스파크만 튀어도 폭발해 버릴 시선으로 그는 마운드를 응시하고 있었다.

벌써부터 전투에 돌입한 것이었다.

* * *

1회초는 자하고 공격, 대원고의 수비로 시작했다.

마운드에 선 장경진은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배터박스를 훑었다. 오늘 내게 승리를 상납해 줄 고마운 증여자가 바로 그대들인가, 하는 눈이었다.

1번 타자 안영우에겐 생소한 경험이었다. 말도 없는데 정확하게 뜻을 전달하는 경이로운 낯짝이었다. 그야말로 도발에 최적화되어 있었다.

‘……건방진 새끼가.’

안영우는 발끈했다.

전국 대회까지 나가 분투를 한 기억이 얼마 전이었다. 그에게 대원고교 야구부란 도련님들이 하하호호 노닥거리며 취미 삼아 공을 가지고 노는 집단이었다. 그런 놈들이 감히?

그러나 장경진이 던진 초구가 미트에 빨려 들어가는 걸 봤을 때, 평가는 180도 바뀌었다.

“스트라이크!”

거드름 피울 자격 정도는 되는 것으로.

‘공이 빠르고 날카롭다. 면도날로 할퀴는 듯한 투구야.’

그의 느낌은 정확했다.

스피드건이 잡아낸 구속은 145. 고교야구를 통틀어 150이 넘는 선수가 드물다는 걸 감안한다면 분명 놀라운 호투였다.

얕볼 마음은 그 한 방에 빠르게 증발했다.

하지만 놀라울 수준은 아니다. 전국대회에서 저 정도 공은 얼마든지 상대해 봤다. 안영우는 바짝 긴장하고 다음 공을 기다렸다.

이어진 2구.

정중앙을 노려오는 투구에 자동적으로 뒷꿈치에 힘이 들어간다. 그러나 배트는 반쯤 휘둘러지다 중간에 멈춰 섰다. 스윙 동작에 돌입한 순간 미트에서 괴성이 터진 것이었다.

펑-!

‘뭐야? 더 빨라졌다고?’

기록된 구속은.

151.

프로에서도 먹힐 강속구가 갑자기 등장한 것이었다. 구속만으로는 자하고교의 선발 투수를 넘어선다.

2구만에 2스트라이크.

안영우는 점점 초조해졌다.

이대로 휘둘러 보지도 못하고 내려가기엔 자존심이 상한다. 어떻게든 볼을 건드려 볼 마음으로 배트를 짧게 쥔다. 그리고 배터박스 뒤의 양해명은 그 낌새를 정확히 간파하고 사인을 보냈다.

‘설마 또 중앙을 노리지는…….’

3구.

이번에도 여지없이 중앙을 노려온다! 초조함이 그의 어깨를 반사적으로 떠밀었다. 휘두른다.

괜찮다. 150에 준하는 구속이라고 이미 입력해 두었다. 타이밍만 잡는다면 빠른 공이라고 해서 치지 못할 것은 없-.

그렇게 배트를 절반쯤 휘둘렀을쯤, 안영우는 갑자기 공이 멈춰 서 버린 듯한 착시를 느꼈다. 그러나 이미 배트는 가속력을 제대로 받은 상태. 공은 스윙 한 박자 뒤에야 미트에 빨려 들어갔다. 펑-!

“스트라이크! 삼진아웃!”

수준 높은 체인지업이 자하의 선두주자를 잡아냈다.

그 뒤로도 장경진은 완벽하게 마운드를 장악했다. 강력한 패스트 볼로 위협하고, 완성도 높은 체인지업으로 교란하며, 여유로운 태도로 카운트를 따냈다.

1회 초, 대원고의 수비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삼자범퇴로 마무리됐다.

자하의 3번 타자가 허탈한 표정으로 내려갔지만, 어디에서도 환호는 터지지 않았다.

장경진은 당연한 일이 당연하게 일어났다는 태도로, 양해명은 이 정도로는 허기도 채워지지 않았다는 얼굴로, 이 상황을 덤덤하게 받아넘겼다.

심지어 벤치의 분위기는 그보다 더 괴악했다. 자하의 벤치가 암울하다면 대원의 벤치는 침침했다.

“아오 재수 없는 새끼. 던지긴 졸라게 잘 던지네.”

“신은 왜 저딴 놈한테 저런 팔을…….”

“저 새끼 낯짝 봐라. 어디서 풀코스 서비스라도 받은 표정이네.”

“그렇겠지. 이 모든 게 저놈한텐 패키지 상품쯤 될 테니까. 이 집 꽤 맛집이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거 아닐까?”

“설마 그러겠어…….”

그러나 벤치로 돌아오는 장경진이 “음, 나쁘지 않군.”이라며 중얼거리는 걸 들은 선수들은 과언은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중론을 모았다.

그리고 1회 말은 지나갔다.

그냥 지나갔다.

어떤 사건도 반전도 없이, 세 주자가 나란히 삼진으로 아웃카운트를 올려 드렸다. 자하의 선발 투수는 갑자기 구위가 상승한 듯한 착각을 느끼며 마운드를 내려왔다.

관람석에서 1회를 직관한 이한열은 이런 감상평을 내놓았다.

“방패랑 방패가 싸우고 있네.”

그리고 재개된 2회.

자하고 측의 공격.

4번 타자 차현수가 배터박스에 섰다.

명실상부한 자하고 최강의 창. 사람들은 뭐가 달라져도 달라지리라는 기대로 상체를 기울였다. 양해명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처럼 쉽진 않을 거다. 이 녀석이 쉽게 카운트를 내줄 리 없어. 최고치의 구속은 드러났으니, 이제부터는 조심스럽게 바깥쪽을 공략한다.’

그러나 장경진은 양해명의 사인을 거부했다.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비릿하게 웃는다.

나한테 겁쟁이 같은 피칭을 하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런 자신만만한 의지가 캐처 박스까지 전해져 왔다.

양해명이 난처해하든 말든, 장경진은 몸을 비틀며 투구 자세를 취한다. 초구는 여지없이, 어깨의 힘을 때려 박은 절호조의 포심 패스트 볼. 파앙-! 상쾌한 소리가 미트에서 터진다.

구속은 153.

지금까지 중에 가장 빠르고 위력적인 공. 차현수는 아무 반응 없이 멀뚱하게 서 있기만 했다.

‘반응 못 했다? 아니, 지켜본 거다.’

초구는 눈에 익도록 그저 봐둔 것.

진짜는 2구에서부터 시작되겠지.

하지만 장경진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판단했다.

역시 내 공은 정상급 선수에게도 먹히는 건가. 이 주체할 길이 없는 천재성을 난 과연 어찌해야 하는가. 그저 여흥으로 시작한 스포츠이거늘…….

요딴 생각이 뻔히 보였기에 양해명은 필사적으로 사인을 보냈다. 유인구로 헛스윙을 유도해. 정면 승부는 피해. 제발 내 말 좀 들으라고!

장경진이 2구로 체인지업을 던진 것은, 물론 양해명의 지시를 받아들여서는 아니었다. 직구는 봤으니, 내 변화구도 한 번 먹어 보라는 자뻑 투구에 가까웠다.

차현수는 2구도 지켜봤고, 큰 낙폭으로 떨어진 체인지업은 그대로 볼이 되었다.

1볼 1스트라이크 상황.

‘……뭐지? 느낌이 좀.’

그때 양해명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전략적으로 지켜본 것도, 못 보고 놓친 것도 아니고, 그냥 멀뚱히 보기만 했다는 느낌이 강하게 전해져 왔다.

그리고 그 의혹은 투구가 계속될수록 확신으로 바뀌었다.

차현수는 체인지업에 이은 슬라이더까지 지켜보고, 그다음의 패스트 볼까지 건드릴 생각도 없이 그냥 흘려 보냈다.

결국 2볼 3스트라이크로 아웃.

별로 분한 기색도 없이, 단지 짜증이 난다는 표정으로 벤치로 돌아가는 차현수를 보며 양해명은 뭔가 있음을 확신했다. 확신했지만-.

‘……내 알 바 아니야. 오늘 난 경진이의 피칭을 잘 이끌기만 하면 된다.’

아니나 다를까, 벤치로 돌아온 차현수는 불퉁한 목소리로 코치에게 항의하고 있었다.

“……그냥 치면 안 됩니까? 저 정도는 칠 수 있는데요.”

“뭐, 너치곤 잘 참았다.”

다른 선수들에겐 비밀이었지만, 장경진의 볼을 쳐 낼 기량이 있는 몇몇 타자들에게는 전해 두었다.

오늘의 경기 한 번 봐주는 대가로 떨어지는 후원금이 야구부 1년 예산을 가볍게 넘어선다.

정규 경기도 아니고 연습 경기다.

그저 자존심 한 번 굽히면 선수들에게 더 좋은 장비, 질 좋은 식사는 물론 전문 트레이너까지 초빙해 줄 수 있었다. 학교 차원에서 지원이 짠 자하 고교로서는 마른 가뭄의 단물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기자들이 깔릴 거란 소리는 안 하셨잖습니까.”

“이건 나도 몰랐다만.”

“몰랐다고 끝날 문제가 아닌데요…… 저기 스카우터들이 절 보고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컨디션이 나쁘다고 생각하겠지.”

“똥볼도 못 잡는 병신이라고 낙인 찍히겠죠.”

코치는 차현수를 쓱 올려다보았다.

“좀만 참아. 아직은 안 되니까.”

“그렇게 말씀하셔도…… 어, 음? 아직? 아직이라뇨. 그건 또 무슨 뜻입니까?”

“…….”

그들의 제안은 장경진을 돋보이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전통의 강호에게 다수의 삼진으로 아웃카운트를 잡는 모습을 연출해 달라, 구체적으로는 그런 요구다.

그러겠다고 했다.

일단은.

‘건방진 놈들. 야구를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돈 뿌리면 우리가 자동으로 넙죽 엎드릴 거로 봤나? 진심으로?’

자하고교의 코치는 그래 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받아들였다.

좋다.

너희 뜻대로 초반 이닝은 달콤한 선물을 안겨다주겠다. 하지만-.

“배려는 5회까지다. 그다음부터는 네 마음대로 해. 너 그런 거 잘하잖냐. 투수 면상 갈아 버리는 거.”

받아먹은 것을 그대로 토하고 싶을 만큼의 굴욕을 안겨 주겠다. 지금의 행복감을 그대로 나락 밑바닥에 처박아 주지.

무얼. 알다시피 변화구는 낙차가 클수록 아름다운 법 아니겠나. 돈? 우린 그딴 거 없어도 지금껏 잘만 해 왔다…….

코치의 뜻을 알아들은 차현수는 그제야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 * *

5회까지 0:0의 교착 상태가 지속됐다.

자하고교에겐 치욕이고 대원고교에겐 믿기지 않는 기적이었다.

이제 장경진의 콧대는 인체의 물리적 한계를 시험하듯 치솟아 있었다.

하, 좀 즐기다 그만두려고 했는데 걱정이군, 내가 없으면 한국 야구계의 큰 손실 아닌가, 공공의 안녕을 위해 이 한 몸을 희생해야 하는가, 그렇군, 이 몸은 그런 무거운 운명을 타고 났는가, 인생, 참으로 가혹하도다…….

따위의 얼굴을 당당히 드러내며 마운드에 오르는 장경진.

그러나 6회는 더 이상 그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음?”

깡-!

안타가 길게 뻗는다. 2루수의 정수리를 넘어 중견수의 앞에 떨어지는 공. 급히 송구하지만 이미 주자는 1루를 안정적으로 밟은 뒤였다.

“음. 가끔 이런 일도 있어야지. 선택된 자에겐 다소의 시련이 부여되는 법이니까. 그래, 마치 헤라클레스가 이겨 낸 12개의 과업처럼…….”

그 순간.

6회에 타자석으로 돌아온 차현수는 이전과 다른 눈빛으로 마운드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취해 있는 장경진에겐 그조차 도전자의 치기로만 보였다. 한 번 무너뜨려 본 상대였다. 한 번 해 봤으니 두 번째는 더 쉽겠지.

그래서 그는 자신만만하게 첫 구부터 스트라이크 존을 노리고, 쏘았다.

오판이다. 이미 한 번 본 공, 그것도 무브먼트도 보잘것없는 이 정직한 공을 차현수 같은 A급 선수가 넘겨볼 리 만무했다.

깡-!

길게,

공이 아주 기-일게 뻗어 나가 펜스를 넘어갔다. 장쾌한 홈런이었다.

자잘한 여담이지만,

어느 정도는 장경진에게 선구안이 있다고 봐야 한다.

그가 헤라클레스에 비견될지는 둘째치고, 아무튼 그날 홈런까지 포함하여 도합 12개의 공을 얻어맞은 건 사실이기 때문이다.

* * *

이 시각, 에이전트 대표로 온 양진수는 골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저딴 놈을 띄우라고?’

실수로라도 밑으로 들이고 싶지 않은 스타일이었다.

물론 구속은 훌륭하다. 피지컬 하나만이라면 당장 프로의 무대에 올려도 손색이 없다.

그러나 그뿐이다. 변화구는 밋밋하고 패스트 볼은 정직했다. 눈썰미가 있는 선수라면 몇 이닝 만에 적응해서 바로 공략에 나설 것이다. 그게 지금 펼쳐지는 광경이었다.

재능만 믿고 덤벼도 될 만큼 야구판은 만만하지 않다.

그가 가장 혐오하는 스타일.

저걸 어떻게 포장해야 그나마 타격이 적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누군가 기척도 없이 다가와 그의 옆에 앉았다.

“고민이 많아 보이시는군요. 양 대표님.”

“……음?”

입이 떡 벌어지는 미남이 삭막한 미소를 보내오고 있었다.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인데 어쩐지 낯설지 않다.

“……누구?”

“한 번 뵌 적이 있습니다만. 며칠 전 대표님 사무실에서요.”

“예? 언제…….”

“UI소프트웍스 사장님 옆에 제가 있었죠.”

“……응?”

UI의 사장이라면 자신을 이곳에 끌고 온 장본인이다.

곰곰이 얼굴을 뜯어 보니 그때 그 비서와 이목구비가 닮아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렇게 잘생겼다고 느끼지 못했는데…….

“화장술의 힘이죠. 간단한 터치만으로 인상이 크게 달라지거든요. 보다시피 생긴 게 이래서 말이죠. 평범하게 하고 나가면 귀찮아져서 필요할 땐 조금씩 고치곤 하거든요.”

못 생겨지려고 화장을 한다는 인간은 난생처음이었다.

그전에, 자신에게 그래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묻지도 않았는데 사내는 속을 읽고 줄줄 설명을 늘어놓는다.

“그날 저는 조연이어야 했으니까요. 제가 실질적인 회사의 대표라고 말해 봐야 믿지도 않으셨을 테고. 그래서 사장님을 내세우고, 저는 비서인 척 뒤에 서 있었습니다. 당신의 반응을 보고 싶었거든요.”

“……어째서 그런? 당신은 누굽니까? 재벌 3세라도 되는 거요?”

“아뇨. 그냥 동명이 학교 친구인데요.”

“뭐요?”

하도 황당해서 딴죽 걸 멘트도 못 찾겠다.

그는 입만 떡 벌리고 이 이해 안 되는 상황을 납득하려 애썼다. 시도는 실패했다. 두뇌가 정지된 가운데, 사내의 요점정리가 친절히 고막을 파고들었다.

“뭐, 그런 겁니다. 당신을 여기로 데려오고 싶었지만 딱히 구실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구실을 만들었습니다. 그뿐인 이야기.”

“그럼 다 거짓말입니까? 후원이니, 저 쓰레기를 띄우라느니, 그 제안들은…….”

그러나 사내가 피식 웃으며 양진수를 돌아본다.

두 눈이 마주쳤지만 서로가 본 것은 달랐다.

양진수는 망막의 겉면만을 살폈을 뿐이지만, 반대로 사내는 가장 안쪽의 두개골까지 침범해 뇌수를 헤집는 듯했다. 등에 소름이 돋았다.

“역시 돈 얘기를 먼저 꺼내는군요. 당신이라면 그럴 것 같긴 했습니다. 제 정체를 먼저 궁금해야 할 대목 아닌가 싶습니다만.”

“……둘이 연결되어 있는 문제 아닙니까?”

“물론 그렇지요. 하지만 질문의 방식에 그 사람의 가치관이나 우선순위가 묻어 나오는 법이니까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대체 뭡니까?! 어째서 이런 짓을 하는 거요?”

그러나 이번엔 쉽게 대답을 내주지 않는다. 사내는 경기장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뜬구름 잡는 말을 꺼낸다.

“당신이 그랬죠. 당신 아들들은 너클볼이라고.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근데 저는 텔레캐스터거든요. 그래요. 텔레캐스터가 너클볼을 돕는 건, 제법 어울리는 일이라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게 대체 무슨.”

이 모든 건 불완전한 악기가 불명확한 공을 위해 노래하는 일이라고, 사내는 설명했다.

“일단은 시합을 구경하도록 하죠. 이제부터 클라이맥스니까.”

시합은 본격적으로 시궁창으로 돌입하여, 1이닝 만에 7점의 숫자를 쌓아 올렸다.

주자도 둘이나 출루한 상황. 아웃카운트는 제로. 이 위태로운 난장판 속에서 드디어 장경진이 강판되고 양동명이 마운드에 올랐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