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이 자꾸 늘어 130화>
13. 너희들의 앞에서 - 20
* * *
8회 초, 자하고교의 더그아웃은 세 부류로 나뉘어 있었다.
첫 번째, 타석에 올라 동명의 공을 상대해 보고 돌아온 타자들. 그들은 타석에서 내려오자마자 한데 옹기종기 모여 종알대기 시작했다.
“……이거 장난 아닌데.”
“막 빠른 건 아닌데, 공이 좀…… 그렇지.”
“그치? 그렇지? 거시기하지?”
“어, 맞아. 그래. 엄청 거시기하지.”
분명 내용은 없는데 기이하게 말이 통하고 문장이 완결됐다. 본인들이 홀린 건지 질린 건지를 두고 탁상 토론을 하는 듯했다.
두 번째 부류, 아직 타석에 올라보지 못한 집단.
‘……쟤들 뭐라는 거야?’
‘단체로 귀신을 보고 내려왔나?’
‘공이 아니라 무슨 수상한 전자파 같은 걸 쏘는 거 아니야?’
그들은 어리둥절한 채로 타석에 올랐다가 더 어리둥절해져서 내려온 뒤 조용히 첫 번째 부류에 합류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부류, 현미경처럼 양동명의 공을 분석하는 집단.
“슬라이더는 이미 경지에 올랐군. 투심은 알아도 치기 힘들 정도고. 거기에 각도를 깎아내는 듯한 커브까지? 저 정도면 이미 고교 최상급의 제구…… 아니. 이미 프로급이다.”
자하고의 코치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중얼댔다.
가뜩이나 슬라이더는 잡기 힘든 구종.
그런데 저 녀석의 슬라이더는 구속과 각도가 계속 달라진다. 익숙해졌다 싶으면 완전히 다른 궤적과 타이밍으로 꽂히는 것이다. 거기에 커브까지.
“그야말로 종횡을 좋을 대로 갖다 쓰고 있군.”
“체인지업이나 스플리터는 아직까지 안 보이네요. 그 대신 위협적인 종 슬라이더가 있지만…….”
“그래, 다행이랄 것도 없지. 그리고 못 써서 안 내놓은 건 아닌 거 같은데.”
“예?”
“어디서 봤나 싶더니, 저 녀석 양진수 선수의 아들이다. 중등부에서 한때 소란스러웠지. 그때는 분명 체인지업을 결정구로 썼었어.”
“……스타일이 달라진 걸까요.”
“거기까지 안 써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을지도.”
코치가 툭 뱉은 말에 타자들이 발끈했다.
아무리 사전 정보 없이 맞닥뜨려서 당황했다지만 이쯤 되면 강호라는 이름이 무색해진다.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한 방 먹여 주어야 했다.
코치가 때 마침 삼진을 당하고 돌아온 타자를 불러냈다.
“어떻든?”
“……말씀하신 대로, 볼끝이 겁나 더럽습니다. 얄미울 지경이에요. 게다가 구속도 점점 빨라지는 거 같고…….”
더럽다.
공의 무브먼트가 타자의 예측을 벗어난다는 뜻이다.
콤마 초 단위로 안타냐 뜬공이냐가 결정되는 홈플레이트 안에서, 타자에게 착각을 심고 기만하는 공. 배트를 농락하고 뜻밖의 결과를 만들어 내는 움직임.
공이 더럽다는 건 투수에게 있어 최고의 찬사다.
“그리고?”
“커브가 진짜 미쳤습니다. 볼이라고 생각하면 스트라이크고, 스트라이크라고 생각해서 휘두르면 존 바깥이에요. 제구력도 제구력인데, 그 뭐랄까요…….”
“심리전이 뛰어나다는 거군. 그래. 양동명은 과거에도 수 싸움이 탁월했지.”
“그리고 아, 진짜. 제 생각에도 이건 좀 말이 안 되는 거 같긴 한데요…….”
“뭔데? 그냥 말해 봐.”
타자가 거칠게 제 뒤통수를 긁어 댔다.
“커브를 쓸 때…… 디셉션을 조절하는 거 같습니다.”
“뭐?”
디셉션.
기만 동작.
커브는 준비 동작과 특유의 궤적 때문에 비교적 일찍 간파되는 변화구다. 알아도 수 싸움에 밀리면 절대 칠 수 없는 구종이지만, 어쨌든 약점은 약점이다.
그래서 커브를 자주 쓰는 투수들은 자신만의 노하우로 디셉션을 연마해 타자를 속여야 했다. 물론, 정상급의 투수들이나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디셉션을 조절까지 한다?
“……그러니까 네 말은, 쟤가 커브인지 아닌지, 의도적으로 보여 줬다 숨겼다 한다는 거냐?”
“미친 소리 같죠? 근데 그런 거 같아요. 보통은 커브 동작이 보인단 말이죠? 근데 가끔…… 던질 땐 커브가 아니었는데 커브처럼 꽂히는 공들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그건…….”
“하.”
그게 사실이라면, 양동명은 홈플레이트만이 아니라, 마운드에서부터 타자를 농락하고 있는 셈이었다.
저런 공이 하나씩 들어오면 타자들의 머리가 얼마나 혼란스러워지겠는가.
“……정말 미친놈이 하나 등장했군. 저런 놈이 왜 아직까지 이런 데 처박혀 있었지? 현수야.”
“예 코치님.”
코치가 차현수의 어깨를 두드리며 마운드 위의 동명을 가리켰다.
“앞으로는 네 시대가 될 거다. 하나 내 감이 옳다면, 언제 어디서건 저 녀석이 네 앞을 막아설 테지. 그러니 지금 잘 봐 둬라.”
팡!
배트가 허공을 때리고 홈플레이트에 먼지가 일었다. 양동명이 또 한 번의 탈삼진을 따내는 모습을 차현수는 묵직한 시선으로 잡아냈다.
“저 녀석이 네 일생의 대적자다.”
* * *
누군가는 그의 공에 감탄하고, 누군가는 질색하고, 누군가는 전의를 다졌지만, 그러나 양동명은 그 모든 시선들로부터 초연했다.
눈치를 보다.
양동명의 일생을 극단적으로 압축하면 그런 문장이 될 것이다.
섬세한 성격과 타고난 감각. 타인의 동태에 예민한 만큼 동화되기도 쉬운 성향. 그래서 주변에 강렬한 감정이 있다면 그는 쉽게 휩쓸리고는 했다.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는 폭풍이었다.
동명이 실투할 때의 실망. 기준에 도달하지 못할 때의 낙심. 과한 훈련으로 어머니와 마찰을 빚을 때의 실의.
그러나 눈치가 과하게 좋았던 그는 괜찮은 척해야만 했다.
나는 너끈하다고 어머니께 말씀드려야 했다.
아버지의 기대에 닿지 못하면 모두가 괴로워졌다. 힘내야지. 나만 힘내면 되겠지. 그 시절의 양동명은 그저 휩쓸린 채 닻 없는 배처럼 표류했다.
그 위태로운 스프린트는 부모의 이혼에 이르러 결국 한계를 맞이하고, 허물어졌다.
-넌 네 눈을 잘못 사용하고 있어.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해 준, 친구이자 선생님이 있었다.
-보이는 걸 그저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마. 네 쪽에서 꿰뚫어 보고, 네 흐름에 그들을 끌어들이는 거다. 절대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안 돼. 너만의 단단한 중심을 세워라.
이제 그는 무분별하게 시각을 낭비하지 않는다. 집중해야 할 것에 철저히 집중한다. 쓸모 없는 것을 쳐 내고 필요한 것만을 취한다.
그런 작업이 끝나면, 눈앞의 타자는 사람이 아니라 데이터 덩어리가 되었다.
‘내 변화구를 보고 겁에 질렸군. 비슷한 공만 보이면 멈칫할 거다. 더 끌지 않고 그대로 주저앉힌다.’
“스트라이크!”
‘악에 받쳐 있군. 변화구를 노리려고 작정을 했어. 함정을 파두고 먹이를 둔다. 볼카운트를 올리고 한계까지 끌어들인 뒤에 잡아먹자.’
“스트라이크!”
‘신중한 타입. 끝까지 공을 보는군. 좋아, 살살 흥분시켜 보자. 저 신사가 뒤통수를 맞고도 계속 신사일 수 있는지 시험해 보자고…….’
“스트라이크! 삼진아웃!”
야구란 스포츠는 극단적으로 말해 복잡한 가위바위보 같은 것이다. 안쪽인가 바깥쪽인가, 저 공이 기만인가 정곡인가. 상대의 패를 읽고 상극인 답을 내놓으면 이긴다.
그런 의미에서, 그를 평생 괴롭혀 왔던 그 ‘눈’이, 이 순간 최강의 창이 되어 홈플레이트를 초토화시키고 있었다.
치밀한 볼 컨트롤 그 이상으로, 동명은 수 싸움에 있어 천부적인 자질을 타고난 것이다.
‘그렇구나. 이런 거였어.’
그리고, 그렇게 중심을 잡고 나서야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거기 포수가 있었다.
그 전에도 알고는 있었지만, 단지 알고만 있었을 뿐이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동명은 해명의 요구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해 왔다. 아마 그것이 형제에게 보일 최소한의 속죄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얼마나 어리석은 판단이었는가…….
‘우린 그냥 각자의 자리에서 혼잣말만 하고 있었구나.’
그래서 동명은 공을 던졌다.
마치 대화를 건네듯이.
그의 투구는 마운드에서 캐처박스까지 이어지는 가느다란 전신선이었다. 서로의 손끝을 공과 공으로 두드리며 그들만의 모스부호가 새겨진다.
-자, 난 이렇게 생각했는데 네 생각은 어떠냐.
사인이 오갈 때마다, 형제가 눈을 마주치는 시간도 길어진다.
-나쁘지 않은데? 네 판단대로 해.
-이번 공은 어땠냐?
-좀 더 파격적으로 해 봐. 지나치게 소극적인 거 아니냐?
-그럼 이건?
-이번 건 좀 낫네!
몇 년 만에, 19m의 거리를 두고, 그들은 마침내 형제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스트라이크!!”
투구는 투수 혼자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투수는 타자의 눈을 마주 보지만.
포수에게도 타자의 바로 뒤에서, 물리적으로 가깝기에 취득되는 정보들이 있다. 배트를 쥔 모양새. 배터박스에 선 위치. 몰아치는 기세. 긴장된 근육들.
포수는 분석된 정보를 토대로 투수의 판단을 보완해 준다.
그렇기에 투수와 포수를 통틀어, 배터리라는 한 이름으로 묶는 것이었다.
-정확해. 이번 건 좋았어.
-좋아. 네 지시도 나쁘지 않았다고.
시간이 갈수록, 동명의 피칭은 한계치 그 이상까지 치솟았다.
구속이 피치를 올리다 마침내 145를 넘어서고, 구위는 갈수록 정교해지며 상대 타선을 무서운 기세로 격퇴했지만.
그러나 그 모든 건 이들 형제의 대화에 잇따르는 부속물에 불과했다.
동명은 단 하나의 메시지만을 위해 피칭을 이어 가고 있었다.
‘어때?’
그건 바로.
‘즐겁지 않아? 우리 옛날에는, 꽤 즐거웠잖아.’
‘…….’
이 필드 위에 그 시절의 공원을 소환해 오는 것이었다.
해명은 아직 묵묵했다.
그러나 피칭은 계속됐고, 하도 두드리고 고함을 치며 시끄럽게 하니, 과연 안쪽의 집주인도 반응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해명은 미트에 박혀든 공을 빤히 바라보다, 헛웃음을 치며 마운드로 되돌려 보냈다.
‘그래, 내가 졌다.’
‘그렇지?’
‘그래, 꽤 즐겁네. 인정하긴 싫지만.’
그러자 동명은 멋들어지게 웃어 보였다.
그날, 햇살의 따스한 급습에 엄마는 벤치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아침부터 부지런하던 새들도 그때만은 목을 가다듬었지. 방종하던 모래바람도 그 순간을 비껴 나갔다.
세상의 모든 것이 가지런하던 그 시절, 우리는 공을 던졌다.
그리고.
마침내 9회초.
‘끝판왕 등장이네.’
차현수가 타석에 섰다.
‘할 수 있겠어?’
‘당연하지. 미안하지만, 오늘의 주인공은 저 녀석이 아니란 말이지.’
‘좋아. 그럼 해 보자고.’
역시나 무적의 코너워크로 접근.
슬라이더와 커브를 섞어 가며 바깥쪽 존을 아슬아슬하게 노린다. 1볼 1스트라이크가 적립될 때까지 차현수는 가만히 지켜보기만 한다.
바로 이어진 피칭, 두 번째 커브가 존의 경계에 꽂히는 순간-.
깡-!
차현수는 기다렸다는 듯이 공을 걷어 낸다.
파울 라인 바깥쪽으로 빠지긴 했지만 다소 아슬아슬했던 순간이었다.
‘쉽게 삼진을 내주지는 않겠다는 건가.’
과연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방금 커브는 존 안쪽을 노리고 던졌다. 기만 동작으로 잘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무섭게 알아채고 배트를 뻗어 온 것이었다.
‘어떻게 할 거냐.’
‘도망가진 않을 거야. 저 눈을 보라고. 저렇게 열렬하게 구애해 오면 상대 정도는 해 줘야지 않겠어?’
‘내 쪽에선 눈 안 보인다.’
‘일단 볼카운트를 올리면서 타이밍을 잡아보자고.’
‘뭐야, 안 도망간다며?’
‘전략적 후퇴란 거다, 형님아.’
하나 차현수는 매혹적인 변화구 앞에서도 단단하게 배트를 간수했다.
결국 3볼 2스트라이크. 각각 절벽과 강물을 뒤에 둔 상황. 강적의 맹렬한 눈빛을 마주하고도 동명은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해명이 그의 뜻을 알아채고 헛웃음을 흘린다.
‘정면 승부라는 게 그 뜻이었냐?’
‘재밌겠지?’
‘넌 진짜 미친 새끼다.’
‘용감한 거라고 해 줘.’
만용과 용기의 차이는 무엇일까.
실패를 상상하지 못하는 것이 만용이라면, 실패를 실감하고도 감히 극기하려는 태도가 바로 용기이지 않을지.
그런 괜스런 생각을 접어두며, 그는 힘차게 투구 자세를 취했다.
마침내, 신생아의 첫울음처럼 필드를 박차고 나온 야구공-.
장담하건대.
그날의 모든 투구를 통틀어 가장 완벽한 피칭이었다.
* * *
“……내게 바라는 게 없다고요?”
“예. 딱히. 그냥 당신에게 보여 주고 싶었을 뿐입니다. 후원금도 예정대로 지급될 겁니다. 재벌 뒷바라지 따위를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럼, 그럼 이 모든 건…….”
“본의 아니게 정체를 숨기긴 했습니다만, 당신의 인재 양성 프로그램에 흥미를 느꼈다는 건 사실이었으니까요.”
본심이었다.
양진수의 제안은 스포츠 에이전트와 선수를 후원하는 비영리 재단을 결합시킨 형태에 가까웠다.
한때 전무후무한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피겨 퀸의 사례로부터 배운 교훈-.
비인기 종목이라도 잘만 키우면 공전의 히트를 노릴 수 있다.
따라서 양진수는 틈새시장을 노리고 파고들기로 했다. 비인기 종목의 유망주들을 후원하는 걸 넘어 적극적으로 개입해 훈련과 사후 케어까지 책임지는 것이다.
그 대신 선수가 된 이후엔 양진수의 에이전트에 일정 기간 소속되어야 한다는 계약.
당연히 내 후원은 에이전트가 아니라 재단 쪽에 들어간다.
“의미 있는 일이라고 봤습니다. 비인기 종목에 대한 투자가 많이 부족한 건 사실이니까. 그 동기가 사적인 욕망에서 나왔다 해도 말이죠.”
“…….”
그의 사고의 경로가 눈에 그러졌다.
기존 스포츠판을 꽉 잡고 있는 에이전트들과 바로 경쟁할 순 없다고 판단했겠지. 그래서 틈새시장을 노린다. 그것이 표면의 이유.
그러나 그 이면에는.
한 번 실패해 버린 양육을 처음부터 다시 해 보고 싶다는 심리가 도사리고 있었다.
이런 사람조차도 가족을 그리워하는 것이었다.
저토록이나 비뚤어진 형태로.
“그럼 저를 왜 여기 데려온 겁니까. 대체 내게 뭘 보여 주려고…….”
“그런 거라면 이미 느끼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 필드를 보세요.”
9회. 양동명과 차현수가 팽팽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3볼 2스트라이크. 그들은 긴장에 땀을 흘리면서도 승부사의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마침내.
양동명이 공을 던진다.
그걸 본 순간 난 유쾌하게 웃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저 또라이 자식.’
투수들은 보통 공에 인위적인 회전을 먹여 궤적을 통제한다. 직구조차도 회전으로 ‘곧게 펴낸’ 공인 것이다. 안정된 제구는 반드시 상응하는 회전력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 공은 고요하게 떠 있는 천체 같았다.
어떤 회전도 없이, 그저 둥실둥실 떠다니며 허공을 기웃거린다. 그것은 호기심 많고 산만한 아이가 구불구불 세상을 주유하는 듯했다.
홈플레이트까지 도착한 것조차 대단한 우연의 일치인 듯 보였다.
누군가는 그것을 무책임한 공이라고 부를 것이다. 운에 맡긴 투구가 도박이나 자포자기가 아니면 대체 무엇이냐고.
그러나 나는 다르게 말하고 싶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자유로운 공이라고.
양동명이 던진 너클볼이 유유자적하게 스트라이크 존에 꽂혔다.
“스트라이크!! 삼진아웃!”
훌륭하구나.
이쯤이라면 말해도 되겠지. 나는 양진수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저 아이들에게는 더 이상 당신이 필요 없습니다. 당신의 흔적 같은 건 허물처럼 벗어 버리고 나아가겠죠. 이게 당신에게 드리는 벌입니다. 당신이 이제 저 아이들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 한낱 망령으로 평생 남으리라는 선고죠.”
“……그럼 내가 어째야 했다는 겁니까.”
양진수가 표정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그럼 그대로 처박혀 있어야 했단 겁니까?! 무능력하고 무기력한 패배자로?! 난 아이들에게만큼은 자랑스러운 아비이고 싶었어! 내가 뭘 더 어떻게 했어야……!”
“아무것도.”
“뭐요?”
“아무것도 안 해도 되지 않았을까요. 당신들이 진짜 가족이었다면.”
어떤 면에서는, 이 남자는 자기 자신에게도 일관된 것이다.
무능하여 자격이 없는 자신은 가족이 될 수 없으리라는 공포 속에서 그는 살아왔을지 모른다. 그 공포가 그를 궁지에 몰고, 결국 모든 것을 망쳐 버렸겠지.
나는 당신들 모두를 연민하고자 했다.
나는 말없는 그를 뒤에 두고 더그아웃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들 가족이 어떻게 될지는 이제 모를 일이다. 어쩌면 극적으로 화해할 수도 있겠지. 아니면 지금 이대로 머무를 수도 있겠다.
그게 무엇이든 그들의 선택.
외부인인 내가 관여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하지만 최소한의 보험은 들어 두었다.’
양진수는 모르는 일이겠지만, 그가 사인한 후원 계약서에는 몇 가지 지뢰가 놓여 있었다.
‘신의 성실하게 계 약사항을 준수’하기만 하면 문제가 없을 듯 보이지만, 사실 앞뒤에 숨겨진 여러 말들을 조합하면 그 ‘신의 성실’의 기준은 전적으로 내 판단에 의존하게 되어 있다.
내키기만 하면 준 돈을 몽땅 게워 내고 손해 배상까지 걸 수 있는 권한을 획득해 둔 것이다.
‘별다른 수작만 부리지 않는다면 별일은 없을 테지만…….’
그러나 양동명이 성공한 후, 가족이랍시고 등장해 빌붙는 수준까지 추락한다면 그때는…….
‘뭐 그런 일은 없길 바라야지.’
* * *
경기가 끝났다.
“우아아앗! 대원고 야구부가 짱이닷! 으아아!!”
“양동명! 양동명! 양동명!”
“야! 쟤 헹가래 싫어서 도망간다! 잡아 와!”
“우리에게도 이런 날이 있을 줄이야. 으허어어엉…… 나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
누가 보면 극적인 역전승을 거둔 것처럼 들리겠지만, 사실 스코어는 7:1로 아무 반전 없이 마무리됐다.
그러나 양동명이 믿기지 않는 호투로 자하고의 전 투수를 때려잡고, 9회 말에까지 포기하지 않고 치열하게 도전해서 결국 1점을 따냈다.
남들이 보기엔 보잘것없어도, 그들에겐 피땀 흘려 얻어 낸 값진 순간이었을 것이다.
“보기 좋네.”
“그러게.”
윤하와 나란히 앉아 필드를 뒹굴거리는 야구부를 구경하다, 이제 됐다 싶어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몰래 더그아웃을 떠나는 내게 윤하가 물었다.
“어디가?”
“저런 걸 보면 나라도 어쩔 수 없잖냐.”
“……?”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나는 헹가레 위에서 행복한 비명을 내지르는 동명의 얼굴을 보았다.
소년아.
너는 날갯죽지를 펼치어라.
세상 모두가 네 깃털을 뽑고 뼈를 꺾어 이제 흔적만 남은 거죽일지라도, 이것도 날개라고 감히 웅변해 보아라.
힘차게 발을 박차고 몇 초의 비행이나마 만끽하여라. 그렇다. 그 순간은 너의 것. 온전한 너의 승리다.
* * *
나는 가뿐하게 걸었다.
발을 흩뜨릴 때마다 풀들이 너울대며 춤을 추었다.
둥실, 둥실, 네가 걷는 곳이 바로 길이라고, 그 모든 길을 축하해 주겠다고, 그렇게 가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듯했다.
문을 여니 안쪽의 소란이 우렁차게 밀려나왔다.
“아 그러니까! 기타를 그렇게 치면 오케스트라를 잡아먹잖아! 너 혼자 연주하니?!”
“아 뭐! 걔들도 우리 개무시하는데 우린 그것들 존중해 줘야 되나?”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좋은 무대를 만드는 게 먼저야! 걔네 엿 먹이려고 관객들 고막까지 괴롭힐 생각이야?”
“아니 그러니까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밴드부원들이 나를 발견하고 일제히 시선을 집중해 왔다.
음, 뭐라고 해야 하나. 나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음, 저도 이젠 하고 싶은 대로 살아야겠다 싶어서요. 다시 들어가도 받아 주시나요?”
그 순간 수림 선배가 꽉 죄고 있던 재준 선배의 목덜미를 팽개치고 내게 돌진해 왔다. 그러고는 내 손목을 붙잡고 밝게 웃는 것이다. 귀엽게 돋은 덧니가 환하였다.
“그럼! 당연하지! 어서 들어와! 어서!”
난 그녀의 손에 이끌려 마침내 부실의 문턱을 넘었다.
턱- 하고, 밴드부실의 문이 등 뒤에서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