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이 자꾸 늘어 132화>
14. 막을 테면 막아 봐 - 2
“여기 나가고 싶은 생각 없어요? 누명 벗어야죠.”
발바리는 엉덩이만 움찔했을 뿐 일어서지는 않았다. 그가 눈살을 찌푸리더니 어이없다는 투로 헛웃음을 쳤다.
“뭔 소리야? 너 따위가 무슨 재주로?”
“흠. 요새 깡패 놈들 줄줄이 교도소에 입장하지 않던가요? 그것도 알 만한 얼굴들로?”
“……거야 그렇다만. 그게 왜?”
“그거 절반쯤은 내가 처넣은 건데. 그 안에 있어서 잘 모르겠지만 나 꽤 유능해요.”
발바리는 비웃음을 잠시 접어 두고 침중한 표정을 꺼내 들었다. ‘젊은 놈이 어쩌다 이렇게까지…….’라는 의미였다.
“안 믿네.”
“그래. 믿어 줄게. 대신 병원은 꼭 가 보고. 정신병증 진단 한 방이면 나보다 오래 갇혀 있을 수 있겠다. 헛소리는 이제 됐냐? 나 간다.”
“그럼 이런 건 어떨까 싶네.”
나는 이런 일도 있을까 싶어 준비해 둔 통장 하나를 꺼냈다.
그냥 평범한 예금 통장이지만, 그 액수는 평범하지 않지. 발바리는 0을 세다가 논리 회로가 꼬여 버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과연 돈은 그 자체로 강력한 설득력을 갖췄다.
“협조하면 누명도 벗겨 주고, 정착금까지 넉넉히 지원해 드리죠. 어때요?”
“……이거 위조 아니냐? 숫자 쪼가리 따윈 못 믿겠는데.”
“그거야 협조하면 알 수 있겠죠. 내가 고용할 변호사단 수임료가 어마어마할 테니까. 간접적으로 증명이 되지 않겠어요?”
“이게 사실이면…….”
“사실이면?”
“너 이 새끼 돈이 이렇게 많으면서 날 털어 먹었단 말이야?! 양심도 없는 새끼네 이거!!”
에효. 누가 전직 도박꾼 아니랄까 봐 생각하는 것 하고는.
“그런 지나간 얘기는 접어 두고 지금만 봅시다. 어차피 감옥에선 쓰지도 못할 돈인데.”
“네가 할 말이냐?!”
“아, 그래서 받을 거야 말 거야?”
살짝 짜증이 나서 탁상을 탕탕 두드렸다. 녀석은 입을 꾹 다물고 나를 한참 노려보기만 했다.
“……원하는 건 정보냐?”
“일단은. 이 오카리나의 남은 조각을 가진 자의 정보. 혹시 조각 자체를 입수할 수 있으면 더 좋고. 그럼 보너스도 얹어 드리지. 이 정도면 완전 남는 장사 아닌가?”
“……음.”
“잘 생각하고 대답해요. 지금 아니면 기회 없어. 당신 아니어도 나는 쓸 수 있는 카드가 많거든.”
산만한 기색이 어른댔다. 제안이 끌리기는 하지만, 뭔가 크게 걸리는 모양새였다. 그게 무엇일지는 알만했다.
그는 결국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역시 안 돼. 위험해.”
“누명을 풀려는 행위 자체가 위험하다는 겁니까?”
“그래. 여기 갇혀 있을 때는 괜찮아. 내가 이 누명을 순순히 받아들이겠다는 의사 표현이니까. 그래서 난 항소도 안 했다. 그랬다간 놈들이 날 찾아왔을 테니까.”
“흠.”
“젠장, 난 죽고 싶지 않다고. 돈이건 자유건 죽어 나자빠지면 다 무슨 소용이야.”
그가 이 감옥에 갇힌 이유는 귀수의 살인 혐의를 몽땅 뒤집어썼기 때문.
그가 항소하려 든다면 누명을 씌운 쪽에서 반응이 있겠지. 그리고 우리가 아는 바에 따르면 그들은 수단에 구애받지 않는다.
필요하다면 죽여서 입을 막는다는 선택까지 감수하고 감행한다. 그런 놈들인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 말했잖아요? 놈들 지금 다 망해 간다고. 뉴스도 안 봐요? 지금 당신 신경 쓸 정신도 없을 텐데.”
“그딴 건 봐서 알아.”
“그런데?”
“내가 두려워하는 게 고작 조폭일 거 같아? 웃기는 소리. 귀수는 감히 건드리지 말아야 될 사람의 돈을 건드렸어. 그래서 죽은 거다. 죽은 놈이야 끝까지 몰랐겠지만 말이야. 난 잠깐이나마 놈들의 손을 잡아 봐서…….”
발바리는 튀어나온 말꼬리를 잇새로 잡아채려는 듯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이를 득득 갈더니, 한숨을 푹 쉬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난 더 할 말 없다. 튀어서 놈들 눈에 뜨일 생각도 없고. 네 사정에 장단 맞추는 것도 짜증 나서 싫고. 그러니까 나 건드리지 말고 그냥 가라. 피차 없는 셈 치고 살자고.”
“…….”
난 돌아선 그의 등에 대고 쏘듯이 말했다.
“그걸로 괜찮은 겁니까, 당신은?”
“…….”
“분하지도 않나요? 어쨌든 당신을 먹이고 키워 준 양부였잖습니까.”
분명 발바리는 귀수를 배반했다.
내 짐작일 뿐이지만, 그렇다고 죽기를 바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돈 뺏고 혼 좀 내준다’는 정도의 생각으로 그의 뒤통수를 쳤겠지. 기껏해야 손모가지 잘리는 정도를 상상했을까.
왜냐면 발바리는 귀수를 더없이 경애했으니까.
진심으로 따랐으니까.
버림받으리란 공포에 충동적으로 배신하긴 했지만 그조차도 옆에 있고픈 심리의 발로였다. 빈털터리가 되거나 신체가 손괴되면 그만큼 발바리 자신에게 의존하리라는 비뚤어진 마음을 품었겠지.
내 추론이 옳다면, 발바리는 필시 어리석었던 과거의 자신을 원망할 것이었다.
“잘 생각하라고. 과거를 바로잡을 마지막 기회니까.”
발바리는 얼마간 우두커니 서 있었다가, 결국 아무 말 없이 면회실을 나가 버렸다.
* * *
‘그나저나 그건 누구지?’
건드려서는 안 될 사람.
넌 대체 누구냐.
처음엔 동부파의 간부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귀수의 죽음에 빨간마스크가 직접 나섰다는 점을 떠올려 본다면 아마도…….
-그분.
정확히 동일인이라 볼 순 없어도 주요 관련인임은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누군지는 떠올릴 수 없었다.
귀수와의 동조율은 50퍼센트에 육박하지만, 달리 말하면 절반밖에 안 되는 것이다. 게다가 도박판은 그의 일터였다. 그 수많던 호구들의 얼굴 따윈 귀수 본인도 기억 못할 테지.
그렇다면…….
음.
에이 모르겠다.
생각해 봐야 답이 없는 문제는 생각하지 않는 게 정답. 난 김 대리에게 좀 더 빨리 조사해 달라 부탁한 뒤 관심을 딱 끊어 버리기로 결심했다.
뭔가 복잡해서 근처의 벤치에 앉아 머리를 식히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저번에 앉아 있던 바로 그 벤치였다.
‘그러고 보니 민꼬 녀석과 만난 게 여기였던가.’
단 한 번 만났을 뿐인데, 어쩐지 그리워졌다.
그날은 참 재밌었지.
그토록 몸에 또라이스러움이 밴 타입은 흔치 않은 것이다. 그냥 옆에 두기만 해도, 뭔가 신대륙의 미확인 희귀 개체를 관람하는 기분을 선사해 준다.
인사도 안 하고 갑자기 사라져서 이 자식 뭔가 싶었지.
헤어짐이 그랬으니 당장이라도 그 사이드 테일을 달랑대며 등장해도 이상할 건 없을 듯하였다. 그래, 저기 달달 떨고 있는 주황색 리본처럼…….
…….
음.
음?
“으앗. 으아앗. 사, 살려 주세요! 이 몸뚱어리는 먹을 게 없어요! 봐! 뼈밖에 없잖아! 비쩍 말랐다고! 뛰지 마! 뛰지 말라고오! 응기이잇!”
주황색 리본과 한 묶음의 머리칼이 담장 위로 드러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실로 격렬한 상하운동이었다.
설마 그런 광경일까 하여 코너를 들여다 보니, 과연 그런 광경이었다.
“으아아아앙. 죄송합니드아아앙…… 태어나서 잘못했어요…… 흐이이잉. 이제 그만 우주의 먼지로 돌아가고 싶어엉…….”
분리수거함 위에 올라오들오들 떠는 인간 밑으로 두 마리의 고양이가 양아치 포스로 어슬렁대고 있었다.
그녀의 명예를 위해 첨언컨대, 저것은 귀여움과 숙식을 교환하는 부류의 묘종이 아니었다.
한겨울 삭풍의 매서움을 견디고 경쟁자들의 도전으로부터 영역을 사수하며 이 콘크리트의 정글을 끝내 살아낸 맹수의 위엄이 그 콧날에 응축돼 있었다.
이들의 눈에 민꼬는 직경 150cm 크기의 쥐새끼 정도로 인식된 게 분명했다.
겁 없이 본인의 나와바리에 발을 들인 값을 받아 내겠다는 기세로 컁컁대는 것이었다.
“…….”
“……!”
그 순간 민꼬와 눈이 마주쳤다.
생존본능으로 이미 한계까지 확장된 동공에 왠지 모를 비장함이 감돈다. 그리고 뭔가 통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아냐. 그거 아니야. 비장해지지 마. 혼자 결심하지 말고 내 의견을 물어보라고.
물론 민꼬는 내 마음의 소리를 짓밟으며 풀썩 뛰어올랐다. 그러곤 날다람쥐처럼 활공해 내 상체에 찰싹 달라붙어 오는 것이었다.
“그렇지! 너하고는 마음이 통할 줄 알았어!”
피하면 아스팔트에 면상이 갈릴 분위기라 가만히 있었을 뿐이다.
아무튼 그녀는 도마뱀처럼 꼼지락대며 내 어깨를 타고 마침내 등에 안착하는 묘기를 선보였다. 그러곤 거기 매달려 의기양양하게 외친다. 엄청 없어 뵈는데 목소리 하나는 개선장군이었다.
“으하하핫! 어떠냐! 이 건방진 길고양이들! 어디 덤벼 보시지! 이거 내 탱커거든? 니네보다 대빵 쎄거든?! 헤헹!”
여전히 저렴한 어휘력이었다.
허락도 없이 기고만장한 것이 뭔가 괘씸해서 목덜미를 잡아 등으로부터 때어 냈다. 민꼬가 내 손아귀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로 팔다리를 허우적거렸다.
“으앗! 으아아앗! 이, 이게 무슨 짓이야! 우린 영혼의 소울메이트가 아니었던 거야?!”
“그랬던 기억은 없다만. 그리고 동어반복이잖냐.”
“배, 배신자! 앗! 아앗! 아니야! 배신자 취소! 살려 줘! 살려 주세요! 주인님! 마스터!”
낚싯대 장난감을 다루듯 길고양이들 위에 흔들대었더니 과연 반응이 흡족했다.
내 칭호가 주인님을 넘어 하느님이 될 즈음에야 손을 회수하고 골목을 빠져나왔다. 민꼬의 헤 벌려진 입에서 영혼이 반 정도 빠져나왔을 무렵이었다.
“너무해…… 너무하다고…… 날, 날 노리개처럼 갖고 놀았어…… 나쁜 남자…….”
“누가 들으면 오해할 소리는 삼가 줄래.”
“헹! 싫다 뭐! 심술부리는 한열이 말은 안 들을 거다 뭐!”
“뭐 그러시든가.”
“흥!”
슬쩍 보니 고개를 팩 돌린다.
그럼 그냥 가 버리면 될 텐데 졸졸 따라오고 있는 건 또 뭐람. 진짜 이상한 녀석일세.
‘……그러고 보니 이 녀석 편곡 실력도 엄청났었지. 혹시 우리 편곡도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복어처럼 볼을 빵빵하게 부풀이고 있는 민꼬에게 슬쩍 물었다.
“야.”
“뭐!”
“너 편곡도 잘하지? 저번에 보니까 한 솜씨 하는 거 같던데.”
“응?! 응. 응흐흐흥. 그럼 내가 좀 하지…… 앗, 이게 아닌데. 그, 그래서 뭐?!”
칭찬 한 번에 얼굴이 느물느물 녹았다가, 이내 ‘핫’하고 정신을 차리더니 의식적으로 눈썹을 세우는 그녀였다.
이 자식 엄청 쉽네.
“나 뭐 좀 도와줘라.”
“싫은데?! 완전 싫은데!”
“내가 방금 너 탈출하는 거 도와줬잖아.”
“그랬지! 고마워! 읏, 으이이잇! 그, 그전에 나 막 괴롭혔잖아!”
“그거야 인사도 없이 저번에 가 버린 게 서운해서 그랬고.”
“어. 그, 그래?”
또 헤헤 웃으며 머리를 긁적인다. 이 자식 진짜 어쩌지. 사기꾼이 작정하고 입 털면 하루 만에 집문서까지 갖다 바칠 거 같은데.
그러다 또 ‘헛’하고 정신을 차리더니 안면을 찡코 강아지처럼 바싹 오므리는 것이다.
“그, 그래도! 나 엄청 화났으니까 말이야! 용서 따윈 없다! 절대 안 도와줄 거야!”
10분 뒤.
“모든 게 용서되는 맛이야…….”
눈이 아주 가셨다.
가서 거기서 살림을 차렸는지 돌아오질 않았다.
그 와중에도 숟가락과 입은 부지런히 움직이며 디저트를 박살 냈다. 난 진심으로 질린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게 맛있냐?”
“으엉. 채고아.”
“다 먹고 말해.”
“꿀꺽. 최고야.”
그녀가 입에 퍼넣는 것은 자몽 빙수라는 것이었다.
내 기준으로 세상에는 두 부류의 변태가 있었는데, 하나는 자몽 같은 야만의 맛을 즐기는 열대 인간이고, 또 하나는 초겨울에도 빙수를 퍼먹는 시베리아의 인간이다.
이 날씨에 자몽 빙수를 공략하는 제3의 가능성을 목도함으로써 오늘 난 크게 견문을 넓혔다. 세상은 넓고 어딘가엔 변태 중의 상변태가 있는 법이었다.
산더미 같은 빙수를 모조리 뱃속에 쓸어 넣고 자몽에이드까지 한 큐에 쪽 빨아먹은 뒤에야 민꼬는 만족스럽게 배를 두드렸다.
“끼얏. 만복. 만복.”
“엄청 행복해 보이네.”
“으응. 이제 죽어도 좋아.”
“……네 인생 그렇게 저렴해도 괜찮겠니.”
좀 걱정은 되지만, 그와는 별개로 할 말은 해야겠지.
“너 저번에 만든 곡들 있잖냐. 그거 발표 된 거냐? 저작권 등록은 됐고?”
“응? 아니?”
“그거 나한테 팔아라.”
“응, 그래 알았어. 근데 나 빙수 하나 더 시켜도 돼?”
“…….”
하나 더 시켜 주었다.
생각할수록 순진한 호구 꼬드기는 흐름이라 뭔가 기분이 거시기했다.
“……헐값에 팔란 소린 아니고. 저작권은 공동으로 올리되 작곡은 네 이름으로. 선불로 곡비도 지급하고, 발표되면 로열티도 잘 쳐줄게. 대신 나머지 결정권은 내가 행사하는 조건. 그리고…….”
“응, 그래그래. 와! 이제 보니까 자몽 허니 블랙티도 있다! 나 이것도! 응?”
“……계약서는 다음에 준비해 올…… 그래. 먹어. 그냥 다 먹어라. 그러다 아주 위장에서 자몽이 자라나겠네!”
지나치게 순조로워서 역으로 찝찝했다.
이건 뭐랄까…… 순백의 아우라가 내 타락한 영혼에 직격하여 실시간으로 도트 데미지가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아무튼.
“야, 이제 그건 됐고. 이것 좀 봐라.”
그녀가 열심히 섭식하던 중에 작성해 둔 악보를 쓱 내밀었다. 며칠 동안 우리 밴드부를 초토화시킨 오케스트라 버전 아리랑의 악보였다.
“응? 이게 뭐야?”
“거기에 우리 밴드부가 협주해야 되거든? 근데 각이 좀 안 선단 말이지. 네가 편곡한다면 어떻게 할래?”
“흠.”
그녀가 스푼을 문 상태 그대로 악보를 팔랑팔랑 넘겼다.
허당 꼬맹이의 얼굴이 잠시 내려가고 프로의 얼굴이 전면에 드러났다. 집중된 시선이 음표들을 해체하듯 꿰뚫었다.
악보가 끝까지 넘어갔을 때, 이제 프로의 얼굴은 다시 장난꾸러기의 그것이 되어 있었다.
“오케스트라는 놔두고 밴드부만 편곡하는 거야?”
“그래.”
“그거 참 악취미네…… 무슨 이유로 이런 짓궂은 장난을 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수저를 빈 그릇에 툭 던졌다. 디링-.
곤란하다는 기색은 어디에도 없이, 그저 흥미로운 장난감을 발견했다는 듯 눈을 빛낸다.
“헿. 이거 꽤 재밌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