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이 자꾸 늘어 133화>
14. 막을 테면 막아 봐 - 3
우린 카페를 나와 거리를 걸었다.
결국 자몽 허니 블랙티를 손에 넣은 민꼬는 부모의 원수라도 용서해 줄 표정이 되어 있었다. 몇 분 전에 장래지망으로 우주의 먼지를 희망하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
사이드 테일을 붕붕 돌리며 그녀가 말했다.
“아무튼, 너도 알겠지만 오케스트라 협연해서 제대로 시너지를 낸 공연은 손에 꼽아. 시도하기도 힘들지만 성공 사례는 더 희귀하지.”
제법 사례를 찾아볼 수는 있다.
그 유명한 메탈리카의 S&M에서부터, 그 반대의 의미로 유명한 문X준의 브뤩 심포니까지.
높은 난이도에 돈까지 엄청 깨지는 일이라 시도는 드물지만, 그렇기에 모든 밴드 플레이어들의 로망처럼 굳어 있는 오케스트라 협연.
그러나 그녀 말마따나 성공 사례는 드물다.
“로망은 로망일 뿐이야. 락 음악은 본질적으로 오케스트라의 섬세한 선율을 압도하게 되어 있어. 좋게 말해 압도하는 거고, 사실은 그냥 다 뭉개 버리는 거지.”
티를 홀짝 마시며 말을 잇는다.
“락 드럼의 킥 앞에서 팀파니는 연약해. 기타의 디스토션 사운드는 바이올린을 얌전한 아가씨로 만들지. 베이스는 첼로 이하 모든 저음 악기들을 때려 눕히고. 가장 우스운 건 뭔지 알아? 오케스트라가 할 수 있는 대부분을 신디사이저로 대체 가능하다는 거야.”
그래서 락 음악과 오케스트라 협연에는 아주 정묘한 설계가 필요하다.
서로가 서로의 영역을 짓밟지 않으면서, 전체적인 사운드의 질을 승화시키려면 긴밀한 협조하에 수많은 시행착오까지 거쳐야 한다. 물론 정상급의 뮤지션이 진두지휘한다는 가정하에.
그러고도 빈번히 실패하는 게 오케스트라 협연인 것이다.
프로들도 그런 사정인데 감히 학교 밴드 따위가? 말자 씨가 얼마나 작정하고 엿을 먹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렇다고 드럼을 약하게 치고, 베이스의 댐핑감을 억누르고, 재즈 기타처럼 드라이브를 없애면, 그건 더 이상 락 밴드가 아니지. 있으나 마나한 존재가 되는 거고. 여기서 너희 딜레마가 있는 거지?”
“맞아.”
“그래서? 너희가 하고 싶은 건 복수야? 아니면 음악이야?”
가장 손쉬운 방법은 그냥 디스토션 빡 먹이고 오케스트라를 짓밟아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복수조차 아니지.
그 경우에 말자 씨는 공연 실패의 원인을 밴드부에 돌릴 것이고 그걸 누구도 부정할 수 없게 된다.
말하자면 그녀는 양자택일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었다. 공연을 망치고 두드려 맞든가, 아니면 얌전히 패배를 시인하고 BGM이 되든가.
아니, 그런 걸 떠나 우리도 뮤지션이었다. 풋내기라도 자존심이 있다. 음악을 망치는 일을 그 누가 하고 싶겠는가.
“당연히 음악이지.”
“그렇단 말이지? 흐음.”
그녀가 빙글빙글 웃었다.
“너희는 어떤 식으로 접근했는데?”
“지금까지 나온 가장 그럴싸한 아웃풋은 심포니 메탈을 흉내 내 보는 거였지. 물론 하다 보니 프로그레시브 메탈도 아니고 고딕 메탈도 아닌 장충동 짬뽕 같은 음악이 됐지만. 들어 볼래? 녹음해 왔는데.”
“우리 강가로 놀러가자.”
“……이 타이밍에 엄청 뜬금없다고 생각하지 않냐?”
우리 모두가 예상했다시피, 그녀는 내 푸념 따윈 간단히 무시하고 앞으로 뿅 뛰쳐나갔다.
“아 빨리! 빨리이!”
이 자식, 정말 매 순간 최선을 다해 또라이가 되는구나. 놀라운 종족이다.
하지만 이 국면에선 내가 을이다. 난 한숨을 벗 삼아 잠자코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강변 근처에 도착했을 때 나는 다시 한번 놀랐다.
“……이 날씨에 피크닉을 하는 인간들이 있긴 하구나.”
가을과 겨울이 난투를 부리는 듯한 날씨였다.
아직은 박빙이지만 얼마 안 있어 겨울의 우세를 점치게 되겠지. 태양도 저물어 가로등이 단체로 눈을 껌뻑이고 있었다.
그러나 찬바람이 기웃대는 이 순간에도 젊음의 심장은 후끈했다.
벌써부터 여기저기 돗자리를 펴 놓고 서로 간에 척후를 보내 가며 전초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둘이 오셨어요? 저희도 둘인데…….’, ‘네, 너네 둘이 노세요.’, ‘훌쩍.’
하이에나와 독수리의 눈들이 도처에 도사리는 가운데, 민꼬는 홀로 순수하게 폴짝대고 있었다.
“자자, 여기서 치킨 시킬까? 반반 무 많이.”
“넌 그 작은 배에 뭐가 그렇게 다 들어가냐?”
“내 위장 무시하는 거야? 사과해!”
“……태클 거는 지점이 이상하잖아.”
어쨌든 시켜 주었다.
잔디 위에 엉덩이를 뭉개고 나란히 앉아 하던 논의를 진행했다.
우선 가장 최근에 녹음한 것을 들려주었더니, 그녀가 해맑게 웃으며 짧게 피드백을 돌려주었다.
“응! 구려!”
“……가차 없네.”
“존재감을 세운답시고 멜로디를 강조하고, 사운드를 돋보인답시고 톤을 세게 잡고 있잖아. 그러면서 살살 치면 밸런스가 맞춰지나? 그냥 어중간한 거지.”
“뭐, 나도 대충 그렇게 생각한다만.”
이게 참 어렵다.
오케스트라 사운드를 해치지 않으면서 밴드의 존재감을 챙기는 것. 서로 상극임을 생각하면 거의 모순처럼 들리는 말이다.
“너희의 결정적인 결점이 뭔지 알아?”
“뭔데?”
“오케스트라를 지나치게 존중한다는 점이야.”
“응?”
이건 좀 의외의 발언이었다.
우리가 오케스트라를 존중하는 마음이 있었던가? 이겨 먹을 생각으로 이 악물고 달려들지 않았나? 그래서 저렇게 사운드가 융화되지 않고 거친 것이라고 난 생각했었다.
“뭐, 그걸 의식하고 있진 않겠지. 하지만 오케스트라 원곡을 들은 순간 압도됐을 거야. 아, 이건 이 자체로 완벽한 음악이다, 라고. 그렇지 않아?”
“……음,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실제로도 편곡이 잘된 음악이기도 해. 사운드도 넣고 뺄 것 없이 꽉 차 있고. 아마 제대로 된 작곡가가 작정하고 만들었겠지. 너희도 그걸 알고 있어. 그래서 은연중에 곡의 디테일들을 훼손시키지 않으려고 조심하는 거지. 근데 그 와중에 존재감은 발휘해야 되니까 자꾸 자극적인 테이스트들을 첨가하고. 악순환 반복. 그런 거지.”
생각해 보니 그녀 말대로였다.
원곡이 지나치게 완성도가 높은 바람에 발생하는 문제였다. 우리가 뭘 덧붙이든 사족으로만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래선 안 되지. 끌려 다니다가 언제 자기 음악 할 건데?”
“……뭐, 그래서 어쩌라는 건데.”
“뭘 친하다고 존중하고 있니? 아니, 존중도 아니지. 너희가 지금까지 해 온 건, 아무리 좋게 말해 줘도 원곡에 빌붙는 일일 뿐이야.”
“…….”
“더 좋아지게 할 자신이 있다면 그냥 과감하게 뉘앙스를 바꿔 버려. 재조립해. 곡을 원천부터 재해석하는 거지.”
“그런 게…….”
“물론 보통은 못하겠지.”
그때 그녀가 등에 매고 있던 기타를 품에 안았다. 자신만만하게, 자신은 보통이 아니라는 듯이.
“그러니까 자, 이렇게 해 보자고. 부제는…… 그래, Pink Floyd의 재림.”
그러자 마법이 벌어졌다.
* * *
물론 그녀의 기타 실력은 마법이 아니었으므로 잽싸게 빼앗아서 내가 쳤다.
어쨌든, 또 한 번 놀랐다.
탁월한 발상, 음향학적 이해, 화성학적 지식, 그리고 그 모든 걸 버무린 진득한 감성. 잘 짜인 오케스트라가 완전히 분해되어 처음부터 다시 조립되는 과정은 마법 외에는 다른 표현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 자식, 반드시 잡아야 한다.’
처음엔 좀 신기한 꼬맹이 정도였는데 볼 때마다 새로웠다.
이젠 뒤통수가 얼얼한 지경이다.
왜 이런 괴물딱지가 전생에선 무명이었는지 처음엔 이해가 안 되었는데, 이젠 좀 알 것 같았다.
‘지나치게 천재고, 또 그 이상으로 순수하다.’
당장 나부터가 이 꼬맹이를 어떻게 꼬드겨서 곡을 뽑아낼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어디 된통 잘못 걸려서 감금당한 채로 음표 찍는 공장이 된 민꼬의 미래가 쉽게 상상됐다. 놔두면 진짜 그렇게 될 것 같다.
난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닭다리를 뜯고 있는 민꼬를 처연하게 바라보았다.
“야.”
“응?”
“너 집이 어디냐? 부모님은 계셔?”
“집? 충남 논산시 산37-24…….”
“아니 그건 지나치게 디테일하잖아. 그리고 너무 멀어!”
열차 타고 2시간 거리다.
그럼 그동안은 대체 어떻게 지낸 거야?
이번에도 암울한 상상이 떠올랐다. ‘이 자몽 사탕 맛있겠지? 아저씨랑 어디 좋은 데 같이 갈래?’ 아무리 그래도 여자애한테 거기까지 물어볼 순 없어서 침음할 수밖에 없었다.
“……야, 전화번호 내놔.”
“오오, 영혼의 교환식인가요!”
“주접떨지 말고 빨리.”
민꼬가 어디 고리짝 시대에서나 출토될 법한 피처폰을 꺼내어 내밀었다. 작동은 되는 걸까. 설상가상으로 그녀가 내 폰에 찍어 준 번호는 016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요즘도 이런 번호가 있나?!”
“그럼 못써. 사람은 전통을 존중해야 하는 법이야.”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닐 텐데. 그래서? 네 이름은 진짜 뭔데?”
“김영희라니까.”
“어, 그래.”
그냥 <민꼬>라고 저장해 두었다. 이게 입만 열면 거짓부렁이네 아주.
이걸로도 안심이 되질 않아서 난 지갑에서 현금을 뭉텅이로 꺼내 건넸다.
“그리고 이거 받아라.”
“으응?!”
“일단 곡 선금이라고 생각하고. 이걸로 꼭 호텔에서 방 잡아서 생활해. 알았지? 이상한 아저씨가 자몽으로 유혹한다고 막 따라가고 그러지 말고.”
“우와아. 한열이 나 걱정해 주는 거야?”
감동했는지 그 큰 눈망울이 축축해진다.
이 자식 순진해서 어쩌냐.
본심은 미래의 충실한 노예…… 아니, 일꾼을 가로채이기 싫어서 선투자를 하는 것이지만, 어쨌든 걱정도 1퍼센트 정도 있긴 했으므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자 민꼬가 눈가를 박박 닦더니 해맑게 웃는 것이었다.
“이제부터 나를 엄마라고 불러도 좋아!”
진심으로 질색해 주었다. 물론 늘 그랬듯 내 반응은 무시됐다.
“후후. 그럼 걱정할 만도 하지. 나도 내가 매력덩어리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거든. 하지만 내 몸은 하나뿐. 모두에게 보답할 수 없어……. 나란 여자, 죄 많은 여자.”
“뭔 소리야. 내가 염려되는 건 극소수의 변태뿐이거든? 네 매력이 범용적이라는 착각에서 얼른 빠져나오렴.”
“흥흥. 한열이 솔직하지 못하네.”
“평생을 통틀어 지금이 가장 솔직한 순간이다. 그리고 봐라. 이렇게 남자가 많은데 너한테 대시하는 인간이 하나도 없잖냐.”
“에잇!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뭘 모르네. 난 너랑 격이 다르거든?”
피식 웃었다.
내게 누구도 다가오지 않은 건 ‘나 따위는 안 될 거야…….’라는 자기검열 때문이었다. 내 [눈치]는 분명 몇 번의 낌새와 머뭇거림을 감지했다.
그리고 그게 증명되기까진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저, 혼자 오셨어요?”
“아니요. 조카랑 왔는데요.”
“아……. 그러셨구나. 그래도 혹시…….”
“조카랑 놀아줘야 해서요. 죄송합니다.”
민꼬를 가리키며 말하자 여자가 멋쩍게 웃으며 물러났다.
그걸로 물꼬가 틔었는지 몇 번의 대시가 더 있었지만 죄다 물리친 뒤, 난 민꼬를 보며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으쓱대었다.
“어떠냐? 내 클라스가.”
“……으으. 그래도 조카가 뭐야. 조카가……. 그리고 나도 수요가 있다니까! 여기 남자들은 다 눈에 공구리가 박힌 거야!”
녀석이 팔을 파닥이며 방방 뛰었지만 물론 패배자의 몸부림으로만 보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때.
저편에서 훤칠한 남성 한 명이 수줍은 표정으로 다가오는 게 아닌가.
그 순간 민꼬는 빠르게 정숙함을 되찾고 다리를 모아 다소곳이 앉았다. 청초하게 귀밑머리도 쓸어 넘긴다.
그녀가 승리감에 찬 미소를 보내온 순간
남자가 민꼬를 지나치고 내게 다가왔다.
“……아, 저기 혹시…….”
“아닙니다.”
“어, 여자들 다 물리치시기에…….”
“아닙니다.”
“……예.”
남자가 돌아간 뒤에도 우리 사이엔 한동안 침묵만 감돌았다.
* * *
“……하, 죽겠다. 이게 몇 번째야 도대체.”
카이로스예술대회는 전국 규모의 등용문이자 권위 높은 문화 축제였다.
이곳에서 수많은 무명예술가들이 발굴되어 명예를 얻고, 무명이 아닌 예술가들은 아예 날개까지 달아서 비상했다.
김창현 교수 본인도 그 수혜를 받은 장본인으로서 이 대회를 늘 찬양하고 다녔다.
심사 위원이 되기 전까지만 그랬다.
권위가 높아도 너무 높아서 개나 소나 다 작품을 던지고 보는 것이었다. 봐도 봐도 끝이 없다. 그 익숙하던 유화 물감의 기름내가 역해질 지경이니 말 다했다.
“……이것도 쓰레기. 저것도 쓰레기. 하하. 이거 예술 대회인지 쓰레기 감별 대회인지 모르겠네.”
“힘내시죠. 자, 추천장 또 들어왔습니다.”
“누가 추천장 양산 공장이라도 세웠나? 뭐 추천장이 없는 게 없어?”
물론 출품에 있어 추천장이 필수는 아니다. 가산점도 없다.
추천장은 전적으로 과로에 시달리는 심사위원들의 편의를 위해 존재했다.
이른바 거장의 추천을 받은 작품은 어느 정도 질이 보장된다.
거장들은 추천을 남발하지 않으니까. 따라서 심사하는데 있어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 단지 그뿐이다. 그 이상의 목적은 없었다.
그러나 사람의 심리란 오묘하여, 이 추천장의 급수에 묘하게 영향 받는 일도 있는 법이었다.
‘그런 분이 추천했으니 뭔가 있겠지?’하는 마음.
그렇기에 ‘추천장 필수’라는 말이 어디도 없는데 너도나도 구해서 보내오는 것이겠지.
그렇기에 역효과가 일어나기도 한다. 지금 일어나는 일이 정확히 그러했다.
“장용구? 이 새끼는 진짜 추천장을 찍어서 파나 보네? 대체 몇 장째야? 뭐 내용도 다 똑같고.”
“……뭐, 유명하다던데요. 이 사람, 아예 학부모한테 접근해서 장사한다는 소문이.”
“에이 더러운 새끼. 협회는 뭐 하나? 이런 새끼 제명 안 하고?”
“뭐, 인맥 하나는 짱짱한지라……. 그냥 넘기시죠.”
“그래도 보긴 봐야겠지. 뭐야, 이름이…… 이한열? 추천장 사 온 새끼가 이름은 졸라 정의롭네.”
이한열 본인이 안다면 ‘이상용 팀장이 내게 똥을 던졌어!’하고 개탄할 광경이었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작품을 심사하는 김창현 교수의 눈에는 편견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작품의 제목은 <아버지>.
캔버스 안에는, 환하게 웃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정면을 향하고 있었다.
“……뭐, 그럭저럭이네.”
“그럭저럭이네요.”
“정교하게 잘 그렸네. 터치는 섬세하고 표현은 리얼하고. 하지만 그뿐이야. 울트라리얼리즘을 자랑할 거였으면 차라리 사진을 찍어 보냈어야지.”
“메시지도 별다를 건 없네요. 자식을 가진 아버지의 환희인가요?”
“감정 표현은 훌륭해. 하지만 내용이 식상하군. 통과시키기엔…… 뭔가 애매하네.”
그리고 그는 애매할 때는 보통 느낌을 따르곤 했다. 그리고 이 작품은 첫인상부터가 구리구리했다.
“탈락. 저쪽으로 치워 둬.”
“옙.”
조교가 캔버스를 포에 싸서 구석에 치워두었다.
그 후로도 심사는 계속됐다.
벌써 해질녘이었다. 하루를 꼬박 썼지만 남은 양을 보면 며칠은 더 눈 빠져라 봐야 할 것이었다.
실로 캄캄했지만, 김창현 교수는 장용구의 추천장 7개를 예외 없이 탈락시켰다는 점을 오늘의 보람으로 삼기로 했다.
“어, 회, 회장님 오셨는데요?”
조교가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아아, 일어나지 마십시오. 그냥 지나가는 길에 들렀으니 부디 이 노구는 괘념치 마시고…….”
LS그룹의 장건철 회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로는 회장의 심복인 이 실장이 언제나처럼 굳건히 자리했다.
예술대회를 거의 혼자 개최하다시피 하는 최고 후원자가 방문한 것이었다. 당연히 괘념해야만 했다.
“이, 이런. 회장님 어쩌다 이런 곳까지.”
“심사 위원님들 고생하실 것 같아서 말이죠. 인사라도 드려야겠다 싶었습니다. 이 위원님과 조 위원님은 방금 뵙고 오는 길입니다. 이 실장. 위원님께 드리게.”
비서진이 큼직한 박스 하나를 조교에게 건넸다.
녹용이니 홍삼이니 값비싼 건강식품들이 가득했다. 잘 먹고 심사 똑바로 하라는 뜻처럼 느껴져서 김 교수는 웃을 수가 없었다.
“이런 것들을 다……. 아무튼 감사합니다, 회장님.”
“무얼요. 제가 늘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장 회장이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머뭇거렸다.
“혹시 이한열이라는 이름의 지원자가 있지 않던가요?”
“예?”
“없었습니까?”
“아뇨, 있기는 했었습니다만…….”
특이한 이름이라 기억하고 있었다. 가차 없이 탈락시켰다는 사실까지도.
‘……뭐야 장 회장 지인이었던 거야? 근데 왜 추천장은 그런 쓰레기를 받아왔어? 으음…….’
장 회장은 김 교수의 난처한 심사를 이해한다는 듯이 푸근하게 웃었다.
“아아, 걱정 마십시오. 심사에 영향을 미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저 지원은 했는지, 했다면 어떤 작품을 냈는지 내심 궁금해서 말이죠. 심사는 오히려 더 엄격히 해 주십시오.”
“예,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기찬아. 작품 좀 꺼내와 줄래?”
“예엡.”
조교가 산처럼 쌓인 캔버스들 가운데서 작품 하나를 꺼내왔다. 포를 벗겨 내니, 장건철 회장의 눈에 이채가 서린다.
“……호오. <아버지>라. 잠깐 감상해도 괜찮겠습니까?”
“예, 물론입니다. 내키는 대로 보시죠.”
“감사합니다.”
장 회장이 곧게 서서 작품을 훑어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감상을 읊었다.
“어쩐지 묘한 그림이네요. 저야 일반인이니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남자가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씁쓸한 것 같기도 하고. 교수님은 어떻게 보십니까?”
“……예, 그게 뭐랄까요.”
대충 좋다고 둘러 대야 하나 고민하는 와중, 뭔가 기묘한 말이 들린 듯하여 고개를 갸웃했다.
“……씁쓸? 씁쓸하다고?”
분명 오전에 봤을 때는 환하게 웃고 있는 그림이었다.
김 교수는 그제야 안경을 추어들며 그림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눈가가 좁혀지고, 찌푸려지다, 급기야는 동그랗게 확장됐다. 결국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린다.
“……김 위원님?”
장 회장조차 인지하지 못할 만큼.
“기찬아.”
“예?”
“오전에 작품 찍어 둔 거 있지? 그거 좀 가져와 봐라.”
조교가 가져온 태블릿을 뺏듯이 받아 들어 디테일을 살핀다. 그리고 눈앞의 그림과 번갈아 가며 비교했다.
이젤 위에는 남자의 얼굴이 있었다.
웃는 듯 서글픈 듯, 행복하지만 조금씩 그 행복이 빠져나가는 듯한 표정으로. 거의 실사였던 그림은 몇 개의 색감을 지우고 회색빛의 정조를 표현했다. 조금은 주름살이 늘은 듯도 하다.
한참 뒤에야 김 교수는 경악스러운 사실을 인정할 수 있었다.
“이런 미친…….”
그림이 변하고 있었다.
실시간으로.